Mike Gi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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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 자이언트(Mike Giant)는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베이스로 일러스트레이터, 타투이스트, 그래피티 라이터 등 다양한 활동을 해오고 있는 아티스트다. 그가 받았던 다양한 영향과 사상, 스케이트보드와 타투, 그래피티 그리고 최근 그래픽 디자이너로 활동중인 레벨 에잇(REBEL 8)에 관해 대화를 나누어 보았다.

 

마이크 자이언트라는 이름은 어떻게 탄생했나.

Giant라는 이름을 쓰기 1~2개월 전부터 멋진 이름을 찾고 있었다. 하하. 1989년, 친구들과 스케이트보드를 타다가 심하게 넘어진 적이 있었다. 친구들이 그때의 내 모습이 마치 ‘Giant’ 같았다고 말했지. 그 말에 꽂혀 Giant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G,I,A,N,T 글자의 조합 또한 매력적이었고.

 

당신에게 영향을 끼친 그래픽 아티스트를 알려달라.

코믹북 아티스트인 찰스 번(Charles burn).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 그만의 그림 기법과 스타일은 매우 독특했고 그 스타일을 스스로 변화시켜 받아들였다. 80년대 파웰 퍼랄타 스케이트보드(Powell-Peralta Skateboards) 그래픽을 담당하였던 Vernon Courtlandt Johnson과 산타 크루즈(Santa Cruaz)의 그래픽디자이너 짐 필(Jim Phil)에게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당신의 작품을 보면 종교적 영향이 느껴진다. 

나는 종교가 없다. 하지만 종교에 항상 관심을 두고 있다. 어릴 적 로만 가톨릭의 환경 아래 자라왔으며 대학을 다니기 시작할 때부터 불교의 수행에 매력을 느껴 지금까지 불교의 수행을 해오고 있다. 수행을 해오며 많은 깨달음을 얻었고 현재는 불교의 여러 이론을 이해하며 살고 있다. 나는 단지 더 행복해지고 더 건강해지고 싶을 뿐이다. 불교에서 나온 여러 발상이 내게 적합하다고 생각했지. 내가 그 생각을 삶에 접목했을 때 라이프스타일에 좋은 효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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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영향을 끼친 또다른 문화가 있다면?

유년시절 로우 라이딩과 핫로드 컬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아마 내 아버지가 모터사이클 라이더였던 영향이 크겠지. 내가 8~9살 때 아버지는 나를 여러 모터쇼에 데려갔고 나 또한 그런 문화가 매우 멋있어 보였다. 동시에 스타워즈와 음악도 내게 아주 큰 영향을 줬다. 가장 처음 샀던 앨범은 키스(KISS)의 ‘Love Gun’ 앨범이었는데 이 역시 커다란 영감을 줬다. 좀 더 나이가 들어서는 브레이크 댄스에 관심이 많았다. 브레이크 댄스 영상을 보면 거대한 붐박스를 들고 다니지만, 막상 춤은 못 추는 아이가 있지 않나. 그게 바로 나였다. 하하.

 

메탈, 펑크, 힙합까지 음악을 듣는 스펙트럼이 상당하다.

어릴 때부터 항상 음악을 들었다. 같은 음악을 반복해서 듣다 보니 음악에서 받은 영향이 엄청났지. 퍼블릭 에너미(Public Enemy), 데드 케네디스(Dead Kennedys), 컨솔리데이티드(Consolidated) 등의 음악은 특히 내 정치성향에 엄청난 영향을 줬다. 나라에 내는 세금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인데, 이는 내 주변의 사람과는 많이 다르더라. 하하.

 

색맹 때문에 타투이스트가 되었나? 색맹이 당신에게 어떤 장단점을 가져다주었는지.

단점이라면 색상을 다양하게 보지 못한다는 것. 일반사람은 내가 느낄 수 없는 몇백 개의 색깔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대략 32가지의 색상 정도밖에 볼 수가 없다. 이러한 점은 신체적으로 다른 사람과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게 해주는 장점이 되기도 한다. 사물을 볼 때 느낄 수 있는 색상에 한계가 있으니 그래픽에 더욱 집중할 수 있지. 색맹이기 때문에 피부에 색을 입히는 작업은 나에게 불가능하다. 그래서 두꺼운 윤곽과 강력한 색상, 대비를 사용한 스케이트보드 그래픽과 타투에 깊게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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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에 많은 타투이스트가 있다고 들었다. 샌프란시스코의 타투 신(Scene)은 어떤가?

정말 많은 타투이스트가 있다. 다른 어느 도시도 샌프란시스코만큼 타투 산업이 집중된 도시는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퀄리티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어느 도시보다 경쟁이 심한 곳이다. 훌륭한 여러 숍 중에 개인적으로 관심 있게 보고 있는 타투 숍으로는 ’Everlasting’, ‘Blackheart’, ‘Seventh Son’, ‘Skull & Sword’ 등을 꼽을 수 있다. 지금은 타투 작업을 하지 않지만, 여전히 타투는 매우 사랑하는 문화다. 이 문화가 발전한 샌프란시스코를 정말 사랑한다.

 

타투의 매력이란?

나는 그림을 매우 좋아한다. 어릴 때부터 그림과 사진들을 매우 좋아했으니까. 그 그림을 내 몸에 새겨 영영 사라지지 않게 할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몸에 타투가 있으면 언제든지 그림을 볼 수 있지 않나? 타투를 보며 그 당시를 회상하는 일도 즐겁다.

 

타투이스트를 은퇴하기 전까지 수많은 고객들을 상대했을 텐데 기억에 남는 고객이 있었다면?

너무 어려운 질문이다. 뉴멕시코의 앨버커키(Albuquerque)라는 동네에 있을 때 카를로스라는 남자가 있었다. 당시 그의 양쪽 소매와 가슴에 많은 타투 작업을 했는데 그 작업물 색상이 지금껏 해온 것 중에 가장 잘 나왔다. 그의 가족이 코인 세탁소를 소유해 손님이 동전을 바꾸기 위해 투입했던 5달러짜리로 항상 계산했다. 몇백 달러의 돈을 내기 위해 엄청난 양의 5달러 뭉치를 가져왔던 기억이 있다.

 

타투를 그만둔 이유가 있다면?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신체적 문제였다. 타투 시술을 할 때마다 손, 등, 엉덩이, 목 등 몸 상태가 매우 악화되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다른 사람이 원하는 그림을 그리는 것과 타투 숍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회의를 느꼈다. 지쳤던 거지. 지금은 책상에서 종이와 펜으로 레벨 에잇의 작업을 하는 것에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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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 에잇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사장은 조쉬 디(Joshy D)라는 친구다. 나는 레벨 에잇 직원으로 일하고 있다. 최초이자 유일한 직원이지. 하하. 현재는 약 7명 정도의 직원이 더 있다. 매일 대부분 시간을 레벨 에잇 관련 그래픽을 창작하는 데 쓰고 있다.

 

당신같이 유명한 사람이 상업적 회사와 함께 일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들이 있다.

이건 내가 계속해오던 일의 연장선일 뿐이다. 유년시절 스케이트보드 브랜드 티셔츠를 샀었고, 대학생 때부터 내가 입는 티셔츠를 제작했다. 내 삶은 슈트를 입는 것과는 다르다. 티셔츠와 야구모자는 내 기본이 되는 것들이다. 지금껏 돈을 쫓아가 본 적은 없다. 돈을 원했다면 프리랜서나 순수미술 쪽에서 일했겠지. 나는 귀중품도 없고 자동차도 없다. 미국에서 가장 비싼 도시 중 하나인 샌프란시스코에서 편안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 정도의 돈을 받는 것에 대해 만족하고 있다. 일반사람은 아티스트들의 최종목표를 순수미술에서의 유명세, 미술관에 작품이 걸리는 것으로 생각한다. 참 어리석은 생각이지. 그라피티 아티스트라면 저런 목표보다는 많은 이에게 그들의 태깅이 적힌 작품을 보이게 하는 거다. 솔직히 말하자면 티셔츠에 돈을 쓰는 것이 미술관에 돈을 쓰는 것보다 더욱 멋지다. 가슴에 그려진 그림으로 그 사람의 생각을 대변해주는 티셔츠의 힘은 실로 강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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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작품에서 많은 타투를 가지고 있는 여자들을 볼 수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그렇다. 나도 온몸에 타투가 있으며 나처럼 온몸에 타투가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여자라면 특히 더 그렇지. 하하.

 

작품 속 여자의 외모가 상당히 비슷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사람들이 내 작품을 보고 여체에 있는 각각의 타투에서 차이점을 확연히 느끼길 원했다. 이러한 타투걸 그림 스타일은 여태껏 내가 해온 작품 중 가장 많이 카피한 스타일이다. 작업 방식은 내가 직접 찍은 사진을 인쇄해 위에 투사지를 올려놓은 뒤 윤곽을 잡고 여자의 몸에 내가 원하는 타투를 그리기 시작한다.

 

그만두었던 타투 작업을 그림을 통해 하는 것인가.

정확하다. 나는 여전히 타투에 관심이 많고 그 방식만 일러스트레이션으로 바뀐 것이라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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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피티를 하던 도중 경찰에 체포당한 적이 있나?

단 한 번 있다. 1992년 뉴멕시코에서 낮에 다리 아래서 그라피티를 하고 있었다. 당시 다른 그라피티 아티스트와 경쟁을 하고 있었고 동료가 페인트를 가지러 잠시 자리를 뜬 사이 혼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주변에서 어린아이들과 주변 사람이 구경을 하고 있었지. 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거대한 헤드폰을 낀 채로 그라피티에 집중했다. 어느 순간 아이들이 한 방향을 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방향을 보니 경찰관이 총을 꺼내 나를 겨누며 소리를 지르고 있더라. 헤드폰을 벗고 무슨 일이냐고 하니 당장 바닥에 엎드리라고 했다. 수갑을 찬 뒤 경찰서로 끌려갔고 약 4시간 동안 구금됐다.

 

아티스트로 살아오며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였나.

돈이 없었을 때다. 예전에는 돈이 없어 집세를 낼 수도 없었다. 그래서 다른 직업을 찾아야만 했지. 띵크 스케이트보드(Think Skateboards)를 관둔 후 영국에서 살다가 샌프란시스코에 돌아왔다. 다시 왔을 때 스케이트보드 쪽에서 일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 극심한 생활고를 겪으며 다른 일을 병행했다. 성인 책방에서 새벽 1시부터 아침 8시까지 6개월간 일했었는데 그곳이 내 인생 최악의 일자리였다.

 

영국은 무슨 일로 갔었는지.

지루했다. 띵크 스케이트보드에서 일할 때는 불평할 게 없을 정도로 많은 돈을 받았고 좋은 오피스에서 좋은 사람들과 함께 일했다. 그 반복적인 일이 지루해졌던 거다. 나는 여전히 스케이트보드를 사랑한다. 다만 그 당시에 그쪽 신의 일이 지루해졌다. 일을 관둔 뒤 영국으로 가 내가 좋아하는 밴드의 앨범 커버를 만들기 위해 음반회사와 일했다. 많은 뮤지션이 소규모 자본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을 하는 것을 보며 많은 것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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띵크 스케이트보드에서 처음 아티스트로써 활동하기 시작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 그곳에서 처음 풀타임 아티스트로의 커리어를 시작했다. 1993년 10월부터 1997년 12월까지, 그래픽 아티스트로서 거의 모든 그래픽작업을 했다. 여기에 아드레날린 스케이트보드(Adrenaline skateboards)의 데크 그래픽 작업도 병행하고 벤처(Venture) 등의 트럭 회사의 작업을 맡기도 했다.

 

스케이트보드와 자전거에 대해 말해달라.

바퀴 달린 것을 타는 게 너무 좋다. 스케이트보드는 13살부터 쭉 타오고 있다. 식물이 매일 햇빛을 보며 사는 것처럼 사람도 반복적인 생활 방식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생활 방식은 자전거를 타고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오랜 시간 스케이트보드를 타지는 않지만, 매일 그림을 그리고 명상을 하고 있다.

 

스케이트보드 그래픽이 가진 특징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스케이트보드에는 그래픽을 넣을 평면이 존재한다. 간단한 로고만 들어갔던 70년대부터 붐을 이뤘던 80년대 그래픽, 그리고 90년대를 거쳐 지금까지 스케이트보드 그래픽의 변화를 보아왔다. 그라피티도 간단한 태깅에서 시작한 것과 같이 스케이트보드 그래픽 또한 간단한 로고에서 시작해 지금은 전 세계에서 다양한 스타일의 그래픽으로 발전해왔다. 그라피티도 서로의 경쟁을 통해 발전한 것처럼 스케이트보드 그래픽도 서로 영향을 받으며 발전해 온 것 같다. 개인적으로 검은색의 두꺼운 윤곽과 밝은 단색을 이용하는 작업을 선호한다. 이런 스타일은 80년대부터 사용한 스크린 프린팅 방식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내 세대가 스케이트보드 그래픽을 손으로 직접 찍고 만들어 낸 마지막 세대지. 보드의 모양은 그다지 큰 상관이 없다.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을 때도 있을 것 같은데.

물론 있다. 그럴 땐 일에 더욱 집중해 극복하는 편이다. 창의력이 소모되었다고 느낄 때면 창의적인 일을 제외한 단순 그리기 작업에 열중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아이디어가 번뜩이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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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아티스트에게 하고 싶은 조언이 있는지.

책상 앞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라.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다 보면 자연스레 자신의 스타일을 확립할 수 있다. 예전에는 그림에 집중하는 것이 퍽 어려웠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부터 그림을 지속해서 그려오다 보니 내 손 스스로가 무엇을 그리는지 인식하는 순간이 오더라. 그 순간 내가 하나의 스타일을 통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에 있는 많은 소스를 얻고 다양한 영감, 영향을 받을 수는 있다. 하지만, 반대로 그곳에 존재하는 구린 것에게 영향을 받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도 있다. 그럴 바에는 다른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는 생각하지 말고 책상 앞에 앉아 네가 그리는 것에 집중해라. 너만의 본질을 찾지 못한다면 이 신에서 살아남기란 불가능하다.

 

향후 목표는 무엇인가.

신체적인 고통을 받지 않고 건강을 유지하는 것. 이외에는 현재 내 삶은 완벽하다. 한 가지 더 추가하자면, 최근 사람에 너무 치여 살았다. 곧 다른 도시로의 이전을 꿈꾸고 있다.

Mike Giant의 공식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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