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음악사, 3人3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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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2일, 신촌 향음악사가 문을 닫다

음반이라는 말보다는 음원이라는 용어가 더 익숙한 시대다. 한때 입에 달고 살다시피 한 ‘MP3 플레이어’조차 이제는 주변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이제는 스마트 폰에서 애플리케이션 하나만 실행하면 입맛대로 음악을 찾아 들을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동네마다 터줏대감처럼 자리 잡은 음반가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오랜 역사를 자랑한 미화당 레코드, 퍼플 레코드가 차례로 문을 닫았다. 그리고 지난 12일, 향음악사가 뒤를 이었다.

향음악사가 문을 닫았다. 안타까운 이 소식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직접 레코드를 구매한 적 없는 세대에게도 널리 퍼졌다. 폐점에 앞서 추억을 더듬어 찾아오는 음악 애호가나 호기심을 가지고 온 어린 고객이 줄을 이었다. 향음악사 폐점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한다. 폐점 공지 이후 방문한 사람들이 평소에도 찾아왔다면 문을 닫지 않았을 거라고. 어떤 이는 LP 시장이 다시 활력을 찾은 것처럼 언젠가 다시 CD 열풍이 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기도 한다. 그러나 음반 매출이 뚝 떨어진 요즘에도 CD를 사는 사람들은 계속 구매하고 있다. 레코드숍이 음반 수익으로 유지될 수 있을 만큼 그 수가 많지 않을 뿐. 또한, LP는 이제 단순히 음반으로서의 성격이 아니라 조금은 다른 성격의 상품으로 소비되고 있다. 어찌 됐건 레코드가 서서히 자취를 감추는 시대의 흐름은 막기 어렵다. 향음악사가 문을 닫는 건 예견된 일이었다.

이제 데스크톱을 살 때 CD-ROM의 유무는 중요하지 않다. 90년대에 태어난 이들에게 플로피디스크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 초등학생은 CD를 사용해본 적이 없다. CD라는 매체가 점점 실생활과 멀어지고 있다는 의미다. 이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결국, CD는 음악을 듣는 매체로서 더는 이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CD 플레이어는 이제 군인도 사용하지 않아서 흔히 말하는 긱(Geek)의 전유물이 되었다.

향음악사 대표 김건힐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향음악사가 지금껏 버틸 수 있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상징성이라고 말했다. 향음악사는 레코드숍인 동시에 인디 음악 신(Scene)을 서포트 하는 또 하나의 시장이기도 했다. 한국에서 멜론이 음원 시장을 대표한다면, 향음악사는 CD 시장을 대표한다 해도 무방하다. 그런 곳이기에 향음악사 폐점은 단순히 하나의 레코드숍이 사라진 것보다 더욱 큰 의미로 다가온다. 동네 음반가게가 사라지면서 음악을 향유하는 분위기 역시 사라졌다고 하면 과장일까. 향음악사 폐점은 이제 음반 산업이 완전히 스트리밍으로 넘어갔음을 공표하는 선언 같았다. 시대의 빠른 흐름은 공든 탑을 그리 어렵지 않게 무너뜨린 듯하다. 새로운 방향을 모색한 향음악사의 앞날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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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음악사, 33言 

25년의 역사를 뒤로하고, 이제는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날 신촌 향음악사. 번화가마다 음반가게가 즐비하던 그 시절, 신촌 향음악사의 모습은 어땠을까? 그때 그 자리에 머물렀던 3人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김건힐 향음악사 대표

향음반사를 열 무렵, 신촌은 서민적인 냄새가 풍기는 동네였다. 인스턴트 식품 같은 지금 길거리와는 달랐다. 이미 다 사라졌지만, 그땐 커피숍과 양장점이 즐비한 멋진 거리였으니까. 향음악사를 차린 지 몇 년이 지나서, 그러니까 1998년도쯤 음반 시장은 황금기를 맞이했다. 그 시절에는 음반을 꽂아 놓을 새도 없이 불티나게 팔렸다. 하이텔, 나우누리 기반의 소모임이 많아서 음악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던 분들이 음반을 많이 사 갔다. 음감회와 같은 행사 역시 자랑하듯 열던 시기였으니 그때는 로컬 기반의 레코드숍 모두가 잘되는 추세였다. 이른바 향음악사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시기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가 열리면서 열기는 빠르게 식어갔다. 결국, 미화당 레코드, 상아 레코드, 그리고 퍼플 레코드가 사라지는 걸 손 놓고 지켜보는 지경까지 오게 되었다. 마음이 아팠다. ‘나도 멀지 않았구나’라고 직감했다. 매장을 닫기까지 1년을 고민했다. 주변의 만류도 많았지만, 적자가 너무 컸다. 좋은 시절에 벌어둔 돈이 마이너스로 돌아서자 어떻게든 결단을 내려야 했다. 매장이 잘 안 되는데도 오프라인 숍을 끌고 간 것에는 상징적인 의미가 컸다. 하지만 돈이 없으니 버티기 힘들었다. 매출이 4년 전보다 약 80% 정도 떨어졌으니까.

음반 시장이란 말 대신 이제는 음원 시장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음악을 즐겨 듣는 일반인이나 음악이 필요한 곳, 이를테면 커피숍과 같은 업소는 이제 음악을 찾기보다는 음원 차트에 의존한다. 이런 흐름은 기획사로 하여금 ‘한 곡만 띄우면 성공한다’는 인식을 자리 잡게 했다. 음원 차트가 오히려 음악을 망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차트에 들지 않는, 이른바 실험적인 음악을 추구하는 뮤지션들은 도태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니 그들의 음악은 대체 어디서 들어야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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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차트를 좋아한다. 일등에 목말라 있다. 우리도 온/오프라인 일주일 치 판매 수량을 그대로 정리한 순수 향음악사 차트를 만들었다. 우리는 향음악사 차트를 통해 인디 뮤지션들이 앨범을 팔 수 있도록 도왔다. 대형 음반사는 하기 힘든 일이다.

신촌 향음악사. 많이 친구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 해피로봇(Happy Robot) 이종현 대표, 옐로우 나인의 김형일, 파스텔 뮤직 이응민, 비트볼 레코드 이범수, 언니네 이발관, 델리 스파이스, 종종 와서 몇 장 남았는지 물어보곤 했던 데프콘(Defconn), 음반이 얼마나 팔렸나 슬쩍 보고 간 버벌진트(Verbal Jint), 장기하, 브로콜리 너마저, 검정치마 그리고 수많은 인디 뮤지션들. 그들과의 교류가 가장 재미있었다. ‘인디 뮤지션’이라는 게 가진 거 아무것도 없이 시작한 이들 아닌가. 무명이고, 힘들고, 집에서 이불 덮고 녹음하는 사람이 대다수다. 그런 뮤지션들이 음반을 가져와서 팔기 시작했고, 일부는 명성을 얻는 일련의 과정에 향음악사가 있었다. 인디 뮤지션들에게 항상 나를 밟고 올라가라고 얘기하곤 했다. 덧붙여서 공연, 음악 모두 제대로 하라고 당부했다. 나는 음반 판매 수익을 최대한 아티스트에게 주려고 했다. 그래야 그들도 음악을 계속할 수 있으니까.

향음반사는 완전히 사라지는 게 아니다. 바로 옆 더 작은 매장으로 이전한다. 그곳에서는 손님과 커피 한 잔이라도 하면서 음악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 싶다.

 

조휴일 검정치마

2008년 끝자락, 바코드도 찍혀있지 않던 검정치마의 데뷔 앨범을 향음악사를 통해 발매했다. 그때만 해도 인디음악을 유통해주는 음반사가 많지 않아서 오직 향음악사에서 판매했다. 가끔 지인에게 검정치마 CD를 선물해야 할 때도 향음악사를 애용했다.

요즘은 생수도 인터넷을 통해서 구매한다고 하지만, 음반가게에서 직접 하나하나 CD를 넘기며 원하는 음반을 찾던 기억이 있는 세대로서 향음악사의 폐점 소식은 안타깝다. 수북이 쌓인 중고 CD 더미 속에서 보물을 발견하는 경험은 이제 추억으로만 남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다른 곳에서라도 우리가 기억하는 음반가게의 모습을 향음악사가 계속해서 이어나가 줬으면 좋겠다.

 

하박국 – YOUNG GIFTED&WACK 대표

향음악사에서 음반을 처음 산 건 1990년대 중반, 내가 중학교 때 일이다. 외로운 음반 수집가였던 나는 주 중에 식비를 빼돌려 주말이면 음반을 사러 성남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하루에 5,000원을 받아 점심에 1,000원짜리 라면을 사 먹고, 저녁을 거르면 4,000원을 남길 수 있었다. 가장 자주 가던 지역은 명동이었다. 최저가로 음반을 팔던 파워스테이션에서 시작해 해외 잡지를 팔던 타워 레코드, 수입 음반을 취급하는 부루의 뜨락까지가 내게는 뉴욕의 5th 애비뉴와 같은 명품 쇼핑 거리였다.

향음악사를 처음 방문한 건 월드 팝스라는, 이름과는 다르게 브리티시 록부터 시부야케이까지 서브장르를 잔뜩 소개하던 잡지를 통해서였다. 지금은 마스터플랜 뮤직 그룹 대표로 있는 이종현 평론가가 월드 팝스에 소개한 수입 음반이 그곳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곳을 찾아갔다. 비록 소문의 음반은 구입하지 못했으나, 만족할 만한 다른 음반을 구입했다. 수입 음반이 진열된 코너를 보며 평소 탐내던 음반이 제법 있는 걸 확인하고는 자주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1997년, 신촌에 마스터플랜이 생겼다. 목요일에는 신인 팀, 금요일에는 일렉트로닉, 토요일에는 힙합, 일요일에는 인지도 있는 팀의 공연이 이어졌다. 주로 내가 가입되어 있던 21세기 그루브, 블렉스, 모던록 소모임 등 PC 통신 음악 동호회 출신 음악가들이 출연했다. 1998년에는 음악잡지 서브가 창간됐다. 그 안에는 홍대 클럽에 무료로 입장할 수 있는 쿠폰 북이 포함돼 있었다. 인근의 콘이나 백스테이지2 같은 영상 음악감상실을 알게 됐다. PC 통신 음악 동호회가 주최하는 음감회도 이 부근에서 열렸다. ‘홍대에서 신촌까지 깔아 놓은 ㅇㅇ 리듬’을 타는 일이 잦아졌고, 그사이에는 향음악사도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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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에는 IMF도 함께 왔다. 원-달러 환율이 치솟아 15,000원이면 살 수 있던 수입 음반 가격이 30,000원까지 올랐다. 이 말은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4일 치 식비를 빼돌리면 살 수 있던 음반을 이제는 월요일부터 다음 주 수요일까지 굶어야 가질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이미 클럽과 영상 음악감상실을 드나들며 전보다 지출이 늘어난 상태였다. 어느 날, 모은 돈을 가지고 DJ Shadow의 [Endtroducing]을 사러 갔다. 그 음반 옆에는 정말 갖고 싶었던 Pizzicato Five의 [Happy End of the World]가 함께 놓여 있었다. 수입 음반은 수입된 시기에 사지 않으면 다음 입고일을 기약 없이 기다리거나 다시는 보지 못한다. 하나를 살 돈 밖에 없었는데 둘 중 하나를 고르지 못했던 나는 음반을 들고 날랐고, 곧 덜미가 잡혀 음반값을 무는 대신 향음악사에서 일을 하게 됐다, 면 여기에 소개하기 좋을 에피소드가 됐을 텐데 그러지 않고 그냥 함께 간 친구에게 돈을 빌려 둘 다 샀다. 내가 가진 음반 중에서 해외 중고 음반 거래 사이트인 Secondspin에서 구입한 걸 제외하고는 가장 부클릿이 낡은 음반들이다.

10대는 섭취해야 할 영양소를 시디로 교환한 시기였지만, 20대는 좀 달랐다. 술을 마시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섭취해야 할 영양소를 알코올로 교환했다. 질량보존의 법칙에 따라 음반 구매가 줄었으면 좋았을 텐데 오히려 음반 욕심이 더 많아졌다. 김대중 정부 때 IMF를 극복하기 위한 경기부양책으로 카드 발급을 권장했다. 그냥 길거리 좌판에서 사인하고 카드를 발급받을 수 있던 시기다. 그때만 해도 그게 국가에 위기가 될 만큼 신용불량자를 양산할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나 역시 카드가 내 개인 경제에 위기를 가져오게 할 줄은 몰랐다. 신용불량 직전에 이르렀다.

마신 술을 다시 토해 팔 수는 없으니 음반을 팔았다. 마침 2000년 중반 향음악사에선 옥션 메뉴를 추가했다. 가진 음반 중 가격대가 높게 형성된 음반이 몇 장 있었다. 그중 가장 비싸게 판 건 마스터플랜에서 1,000장 한정으로 발매된 스위트피의 [달에서의 9년]과 500장 한정으로 발매된 스웨터의 [Zero Album Coming Out…]이었다. 둘 다 원래 가격이 비싸기도 했지만, 나는 음반과 함께 증정한 엽서와 스티커를 갖고 있어서 다른 이보다 좀 더 비싼 15만 원 정도의 가격에 팔았다. 30만 원으로 빚을 좀 갚고 남은 돈으로는 또 술을 마셨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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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에는 음반을 사러 가는 대신 팔기 위해 향음악사를 찾았다. 음반을 파는 사람이지만, 어느덧 나도 음반을 잘 사지 않게 됐다. 번 돈으로는 레이블을 운영하며 음반을 제작하고 건강보조제를 사 먹었다. 술은 전보다 줄었지만, 술값을 내는 경우가 많아져서 지출은 되려 늘었다. 음반을 살 이유 역시 줄었다. 그 이유는 모두가 알고 있을 거다. 레이블을 3년 넘게 운영하며 내가 신경 쓰는 곳도 레코드숍에서 멜론으로 옮겨갔다. 가끔 사는 음반은 인터넷으로 주문했다. 내가 향음악사에 직접 들러서 가져가는 건 위탁 인수증이 유일했다.

입고한 지 얼마 안 된 Room306의 [at Doors]가 떨어졌다길래 재입고하러 간 날, 마침 그날은 향음악사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 좁은 매장에 사람들이 가득했다. 입장하면 바로 눈앞에 보이는 하얀색 진열장이 있다. MD가 선정한 음반이 진열되는 곳이다. 지금껏 우리가 발매한 음반도 이 자리에 몇 번 놓인 적 있다. 이제는 텅텅 빈 진열장에 [at Doors]를 다시 올려놨다. ‘다시는 이곳에 우리 음반을 올려놓을 일이 없겠지’라고 잠시 생각한 뒤, 위탁 인수증을 받아 나왔다.

 

진행 / 글 ㅣ 심은보 이철빈

사진 ㅣ 백윤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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