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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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우는 최근 ‘조폭 사진’이라는 자극적인 타이틀로 한국에서 한 차례 조명받은 사진작가다. 그는 1996년, 일본으로 건너가 사진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찬란하지만, 어딘지 공허한 청춘에 갑작스레 다가온 사진은 양승우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는다. 자신을 닮아서였을까. 그는 카메라를 쥐고, 노숙자나 조직폭력배와 같이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삶을 끈질기게 쫓아다녔다. 타지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양승우에게 사진은 자신의 삶 그 자체와 다름없다. 지난 7월,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에서 열린 사진전, ‘청춘길일’은 2003년부터 2006년까지 그가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찍은 사진들로 구성되었다. ‘청춘길일’의 기저에는 조직 세계의 틈바구니에서 젊은 생을 안타깝게 마감한 친구가 잠들어있다. 한국에서 처음 자신의 사진을 선보인 양승우와 대화를 나눠보았다.

 

혹시 VISLA 매거진을 알고 있나? 우리는 예전에 한번 당신의 사진을 소개한 적이 있다.

몰랐다. 하하. 만나서 반갑다. 나는 사진 찍는 양승우다. 편하게 찍새라고 불러도 좋다.

 

‘청춘길일’은 어느 시기에 찍은 사진들인가?

2000년도 초, 중반에 한국과 일본을 오고 가면서 찍은 사진들이다. 여기에는 나도 있고, 내 친구들도 있다.

 

이렇게 가까이서 ‘조폭’의 삶을 기록한 사진작가가 한국에 있었나 싶을 정도로 사진이 적나라하다. ‘청춘길일’을 찍게 된 계기가 있다면?

어릴 때부터 같이 놀던 친구 놈이 하나 있었는데, 고등학교 때 사람을 죽였다. 어린 나이에 교도소에서 8년을 살았지. 나이도 어린데 죄목이 살인이니 그 안에서 꽤 인정받았던 것 같다. 조직에서 간부급 되는 사람들도 다 자기 밑이었으니까. 문제는 형기를 다 채우고 사회에 나와 보니 상황은 완전히 달랐던 거다. 복역할 때는 말 한마디에 껌벅 죽던 사람들인데, 막상 조직에서 보니 자기보다 훨씬 높은 자리에 있던 거지. 위치가 뒤바뀌어있으니까 자존심이 상한 것 같더라고. 자기 수발이나 들던 후배들이 갑자기 형 노릇 하는 게 아니꼬웠을 거다. 친구 성격에 못 참고 대들었더니 이쪽 세계가 다 그렇지 않나. 어린 애들 시켜서 집단 린치를 가하니까 결국, 쪽팔려서 목매달고 자살했다. 그때가 마침 내가 일본에서 막 사진을 시작한 시기다. 대학교에서 공부할 때 가끔 한국에 놀러가곤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야기를 듣고 나서 급하게 고향에 돌아갔더니 이미 다 잊고 살더라. 고작 두 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하하. 내가 죽어도 금방 잊힐까 하는 생각에 기분이 묘했다. 친구 얼굴이 너무 보고 싶었는데 같이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었다. 친구의 죽음이 결정적인 계기가 돼서 그 뒤로는 한국을 오고 가며 친구들을 찍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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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은 아직 그쪽 세계에 몸담고 있는지?

현역으로 활동하는 친구도 있지만, 대부분 다 청산했다. 지금은 정육점, 슈퍼마켓을 운영하거나 개인 사업을 하면서 산다.

 

‘청춘길일’ 전시에도 왔나?

세 명 왔다. 생활하는 친구 하나, 그렇지 않은 친구 둘.

 

당연한 얘기지만, 본인 역시 거친 삶을 살았을 것 같다.

그렇다. 고등학교도 계속 잘리면서 세 군데 정도 다녔다. 그래서 그런지 친구가 많다. 하하.

 

조직폭력배로 살아가는 친구들을 찍으면서 어떤 기분이 들었는지 궁금하다.

사람들은 조폭이다 뭐다 하지만, 나는 그냥 친구들을 한 장 한 장 기록하고 싶었다. 나 혼자 만드는 영화라고 생각하면서.

 

-청춘길일

당신이 나온 사진도 여러 장 있더라. 관찰자라기보다는 ‘청춘길일’의 일부로 느껴진다.

술 취해서 놀다 보면, 아무나 카메라 잡고 찍지 않나. 이 시리즈에서 내가 찍고 안 찍고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지금은 친구들 모두 각기 다른 삶을 살지만, 사진을 볼 때면 우리 모두 예전 그때로, 다시 청춘으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눈빛 출판사를 통해 동명의 사진집 ‘청춘길일’을 냈다. 일본에서 출판한 ‘The Best Days’와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출판사 형식에 맞추다 보니 분량이 줄었다. 사실, 이 사진들이 정말 한국에서 공개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는데, 다행히 다 실었다. 특별히 달라진 점은 없다.

 

‘청춘길일’은 의도적으로 흑백 필름으로 촬영한 건가?

맞다. 당시 디지털카메라는 성능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게다가 ‘청춘길일’을 만들 때는 한창 필름을 공부할 때여서 계속 흑백 필름으로 찍었다. 지금은 컬러나 흑백 혹은 디지털이나 필름을 가리지 않고 찍는다.

 

언제부터 사진을 찍었나.

일본으로 건너가서부터다. 한국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며 참 많이도 놀았다.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노는 건 재미있는데, 언젠가부터 뭔가 허전하더라. 많은 걸 경험하기에 한국은 너무 좁으니까. 고속도로 타고 밟으면 부산까지 서너 시간이면 가는데, 왠지 답답한 거야. 그래서 무작정 일본으로 떠났다.

 

일본에서는 어떤 계기로 사진을 접했나?

딱히 뭔가를 해볼 생각으로 간 건 아니다. 그런데 일본이라는 나라가 참 재밌더라. 처음에는 어학연수 과정으로 갔는데, 이렇게는 2년 이상 체류할 수 없었다. 일본에 더 있으려면 학교에 들어가거나 일자리를 구해야 한다고 해서 일단 전문학교에 들어갔다. 그때 사진을 처음 접했다. 살아가면서 단 한 번도 공부해본 적이 없는데 사진은 계속해서 나를 끌어당겼다. 제대로 반한 거지. 전문학교에서 4년제 공예대학교로, 그 이후로는 포토저널리즘 대학원 연구실에서 공부했다.

 

다시 한국에서 살 생각은 없나.

일본에서는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지 않아도 아르바이트로만 먹고 살 수가 있다. 사진을 찍으려면 한국보다 일본이 낫지. 막노동하면서 사진 찍기에는 한국 환경이 그리 좋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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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노동과 자신만의 예술을 동시에 해나간다는 게 굉장히 고되게 느껴진다. 가장 힘든 시기는 언제였는지 궁금하다.

슬럼프에 빠져서 술을 엄청 많이 마시던 때가 있었다. 괴로운 나날이 반복되던 어느 날, 또 술에 취해서 혼자 요상한 실험을 하나 했다. 내가 정말 사진을 찍을 팔자인가 싶어서 객기 부린 거지. 지금 집으로 이사하기 전에 살던 곳이 이케부쿠로인데, 가부키초에서 걸어가면 한 시간이 넘게 걸린다. 술이 떡 돼서 차 신호 다 무시해가며 정신없이 걷는 동안 계속 사진을 찍었다. 절대 멈추지 않았다. 초점이 나가건 말건 죽어라 찍으면서 걸었고, 다행히 죽지 않고 집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그러고는 바로 곯아떨어졌다. 다음날, 사진에 찍힌 신호등이 전부 파란불인 걸 보고 느꼈지. “아, 아직은 사진을 더 찍으라는 계시구나”라고.

 

타지 생활이 힘들면 고향 생각이 간절하다던데.

술을 잔뜩 마시고 인도에 오줌을 싸면 이게 차도까지 흘러들어 간다. 독한 술을 잘 못 마셔서 주로 맥주를 마시는데, 그래서 그런지 이놈의 오줌이 콸콸 잘도 뻗는다. 제일 선두에 앞장선 물줄기를 보며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로 간다. 어릴 때, 꽃밭에 오줌을 싸다가 벌에 고추를 쏘인 적이 있다. 고추를 붙잡고 엄마한테 달려갔더니 호박잎에 된장 한 웅큼 발라줬다. 꼭 술에 취하면 그때 생각이 나면서 묘한 행복감에 사로잡힌다. 슬럼프에 빠졌을 때, 술에 취한 채 우스꽝스러운 짓들을 참 많이 했다. 그래도 꾹 참고 극복했지. 이때 찍은 사진을 좋아해 주는 사람을 만나면 괜스레 더 부끄럽고 기쁘다.

 

상업적인 제의는 없었나.

잡지에서 몇 번 연락 온 적이 있다. 길거리 부랑자 사진이라든지, 은밀한 여자 사진 같은 것들을 원했는데, 내키지 않아서 거절했다. 작품과 관련 없는 사진은 정말 하기 싫은 일이 아니면 수락하는 편이다. 유치원 운동회 사진을 부탁받은 적이 있었는데,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찍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찍을 수만 있다면 모델 촬영도 좋다. 막노동도 보람 있지만, 역시 사진으로 돈 버는 게 최고지.

 

사진을 일본에서 배워서 그런지 일본 작가들의 색채가 느껴지는 것 같다.

처음에는 상당히 많은 사진작가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모리야마 다이도, 호소에 에이코, 아라키 노부요시, 구와바라시 시세이, 뭐 대단한 분들 많지. 그런데 지금은 내가 제일 좋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계속하기 힘들다. 내 사진을 가장 사랑해야 돼.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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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君はあっちがわ 僕はこっちがわ 

노숙자 ‘곤타’를 면밀히 관찰한 시리즈, ‘君はあっちがわ 僕はこっちがわ’가 인상적이다. 어떻게 그를 알았나.

금요일 해질녘쯤, 가부키초에 들어가면 어둠이 스윽 깔리면서 새로운 밤이 시작된다. 저녁놀과 가부키초 야경이 섞이는 그 장면을 바라보는 기분은 정말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그곳에 들어가면 보통 일요일 아침까지 있다가 돌아오는데, 그때 내 옆에서 종이박스 깔고 같이 자던 사람이 곤타다. 처음에는 별 신경 안 썼다. 같이 담보루-골판지 상자로 만든 집-에서 생활하며 안면을 텄지. 한번은 파친코 건물 앞에서 자다가 쫓겨난 적이 있다. 같이 자리를 옮기는 도중에 갑자기 곤타가 종이에 뭐라고 쓰더니 넘겨주더라. 대수롭지 않게 열어 봤는데, 내용이 기가 막혀서 일단 보관했다. 그 뒤로 곤타는 나를 만날 때마다 시를 써서 줬다. 그의 글을 하나둘씩 모으다가 왠지 내 사진과 이 섞으면 괜찮을 것 같아 하나로 엮었다. 이 포트폴리오를 콘테스트에 냈고, 대상을 받았다. 고맙게도 주최 측에서 사진집까지 만들어줬다.

 

아무래도 일반인들이 홈리스를 보는 시선은 그리 곱지는 않다. 동정 혹은 멸시에 가까운 감정이라고 해야 할까.

곤타는 홈리스지만,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일본은 보호시설이 썩 괜찮은 편이어서 이곳에 들어가면 한 달에 160만 원 정도 지원해준다. 특히 겨울에는 춥고 배고프니 보호 대상자로 신청만 하면 배부르고 따뜻하게 보낼 수 있다. 한국으로 치면 ‘생활보장대상자’ 같은 건데 내용 면에서 일본이 훨씬 낫다. 그런데 곤타는 이 모든 편의를 거부한다. 보호시설의 규율을 따르기 싫으니까. 그는 그저 자신의 삶을 즐기는 사람이다.

 

당신이 느낀 곤타는 어떤 사람인가.

내가 만난 곤타는 자유인이다.

 

당신은 그저 주변 인물을 찍는다고 말하지만, 관객에게는 조직폭력배의 세계나 노숙자를 비롯한 사회의 어두운 면, 흔히 말하는 밑바닥 인생을 생생하게 드러낸 다큐멘터리로 비칠 수 있다. 혹시 사진을 찍을 때 특별한 사명감이 드는지?

물론, 사진을 찍다 보니 마음 한쪽에서 커지는 부분이지만, 아직 그렇게까지 거창한 목표의식은 없다. 나와 같은 냄새가 난다고 해야 하나. 비슷한 냄새가 나는 사람들을 보면 난 사진을 찍고 싶어진다.

 

촬영하기 쉽지 않은 사람들이다. 소통에 앞서 꺼려지는 부분은 없었나?

특히 야쿠자 같은 사람들은 말 붙이기 힘들다. 무섭기도 하고 일단 타지에 있다 보니 아무래도 꺼려지는 부분이 있다. 그래도 계속 고민하다가 아무것도 못 찍고 돌아오느니 차라리 한 대 맞더라도 찍는 게 낫다. 계속 찝찝하거든. 어떤 확신이 생긴 뒤부터는 무슨 방법을 쓰더라도 동의를 구하고 찍는다. 언젠가 가부키초 한 가게 앞에서 야쿠자를 찍으려고 고민하다가 그냥 발걸음을 돌린 적이 있다. 그게 너무 마음에 남아서 다음날 다시 찾아가 한 장만 찍게 해달라고 부탁했더니 쿨하게 허락하더라. 인화한 사진을 가져다주니까 마음에 들었다고 하면서 나를 사무실에 데려갔다. 그 뒤로는 같이 술도 마시고 놀면서 자연스레 찍었다.

 

언제나 상대방의 동의를 구하고 찍는가? 예민한 문제긴 하지만, 스냅 사진의 맛이라는 것도 있지 않나.

지나가면서 툭툭 찍을 때도 있다. 그러나 동의 없이 찍은 사진은 잘 나와도 괜히 도둑질한 느낌이 든다. 찝찝한 기분이 싫어서 일단 상대방과 교감하는 걸 우선으로 한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적도 있나?

아직은 없다. 그들도 사람인지라 함께 술 마시고 친해지다 보면 촬영도 흔쾌히 허락한다. 한번은 요코하마 쪽 인력시장에서 두 달 동안 노동자들과 술만 마신 적이 있다. 한참 친해질 때쯤 어떤 분이 그러더라. 젊은 놈이 왜 허구한 날 여기 와서 술만 퍼먹고 있냐고. 처음부터 카메라를 들이대면 실례일까 봐 친해지려고 했다고 솔직하게 말하니까 지금까지 안 찍고 뭐 했냐던데. 그 말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그다음부터는 그분들이 여기저기 많이 데려갔다. 사진 많이 찍으라면서. 하하

 

그들과 친해지기 위해 엄청난 노력이 뒤따랐을 것 같은데, 그 원동력이 어디에서 나오는 건지 궁금하다.

안 찍으면 불안하다. 솔직히 막노동해서 하루 벌어 먹고사는 인생인데, 이렇게 한국에 한 달 정도 나와 있으면 집세도 걱정되고, 갖가지 고민이 생긴다. 그중에서도 사진을 못 찍는 게 가장 힘들다. 가슴이 막 미칠 것 같아. 나 지금 사진 찍어야 하는데 대체 뭐 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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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매체에서 당신을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로 소개하지만, 현실을 보도한다기보다는 개인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데 더 집중하는 것 같다.

사적인 다큐멘터리다. 사회문제를 조명하고 그런 거창한 내용 하나도 없다. 그냥 내가 느낀 대로 찍을 뿐이지.

 

그저 수집하는 행위에 가깝다는 말인가. 그러나 사진가에 의해 특정 화각에 담긴 이미지에는 메시지가 필연적으로 담기기 마련이다. 당신은 타인의 삶에서 어떤 목소리를 들려주려고 하는가?

나는 사진으로 특별한 메시지를 전달할 생각도 없고, 보는 사람도 눈에 힘주고 억지로 느끼려고 애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그냥 내 영화를 찍을 뿐이다. 보고 재밌으면 다음에도 또 오십쇼. 아니면 마십쇼. 영화 안에서 느껴지는 게 있다면 각자 꼴리는 대로 느끼십쇼. 하하. 무슨 말인지 알겠나.

 

당신의 사진을 윤리적 잣대로 비판하는 관객도 있을 법하다. 이를테면 ‘청춘길일’에서 느껴지는 애잔한 감정이 그들의 범죄나 도덕적 결함을 바라게 한다든지.

그런 것까지는 책임 못 진다. 깡패, 조직폭력배보다 더 질 나쁜 사람들이 주위에 널려 있지 않나? 정치인들부터 뭐 많지. 의리도 없고, 우리 같은 부류보다 더 못된 짓만 골라서 하는 나쁜 놈들이 지천으로 널렸는데 건달이나 부랑자를 찍는다고 왜 문제가 되는 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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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타’ 시리즈처럼 텍스트와 사진이 혼합된 방식의 사진집을 내는 건 어떤가? 못다 한 이야기를 글로 표현한다면 어느 정도 갈증을 해소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내가 글을 정말 못쓴다. 감정을 짧게 표현할 수는 있어도 길게 쓰면 엉망이 된다. 어렸을 때 책을 출판하고 싶어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다 쓰고 보니 무슨 초등학생이 쓴 것 같더라. 하하. 지금은 오히려 일본말을 더 잘하는 것 같다. 일본어는 중학교 2학년 수준은 되려나?

 

갤러리 벽에 붙은, 당신이 쓴 글을 봤다. 친구의 죽음을 회고하는 그 글은 짧고 명료해서 ‘청춘길일’의 색채를 더 진하게 하는 듯했다.

원래는 그 글 하나만 갤러리 벽에 붙이려고 했다. 전시 소개글도 원하지 않았지만, 내용이 좋아서 딱히 거절하지 않았던 거다. 요새 어떤 예술이건 간에 갤러리 입구에 쓰인 글을 보면 당최 뭔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겠고, 그 글 때문에 머리가 아파서 작품까지 보기 싫어질 때가 있다. 글 잘 쓰면 글을 쓰지, 뭐하러 사진을 찍겠나.

 

새롭게 구상하는 프로젝트가 있다면 소개해달라.

마쓰리-신령에 제사를 지내는 일종의 종교적 의식에서 비롯된 일본 축제-라고 알려나. 그걸 주제로 찍고 있다. 포장마차가 들어선 축제인데, 마쓰리 역시 야쿠자가 관리한다. 아무튼 이 축제만의 독특한 분위기와 사람들을 찍으려고 이번에도 늘 하던 것처럼 이 안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계절노동도 꾸준히 할 생각이다. 어디나 마찬가지겠지만, 일본 농촌 역시 젊은 친구들이 남아 있질 않아서 언제나 일손이 부족하다. 겨울이 되면 연어 알 빼는 일도 한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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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桜(Sakura) 

평생에 걸친 목표가 있다면.

‘桜(Sakura)’ 시리즈는 평생에 걸친 프로젝트다. 지금 와이프랑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서로 찍어온 게 벌써 책으로 3권까지 냈다. 아마 이혼하거나 둘 중 한 명이 죽기 전까지는 계속 찍지 않을까. 와이프도 사진을 전공해서 죽이 잘 맞는다.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목표는 돈 걱정 안 하면서 사진 찍는 거다. 나처럼 작품 위주로 활동하는 사람들은 고생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누군들 가난하게 살고 싶겠나.

 

한국이 좁아 일본으로 건너갔던 것처럼 당신은 언젠가 또 다른 나라로 훌쩍 떠날 것만 같다.

언제 또 병이 도질지 모른다. 퐁피두센터(Centre Pompidou) 근처에서 갤러리를 운영하는 친구가 있는데, 이 친구가 내 사진을 마음에 들어 해서 같이 사진전도 몇 번 열었다. 한번은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묻길래 그냥 막노동한다고 했더니 자기가 하는 사업 좀 도와달라고 하더라. 콩고나 말레이시아 같은 곳에서 현지인을 인력으로 쓰는 일이더라고. 막노동이야 자신 있으니 냉큼 갔다. 간 김에 틈틈이 사진도 찍어서 결국, 책으로 냈지. 여력이 있다면 계속해서 세계를 돌아다니며 찍고 싶다.

 

진행 ㅣ 권혁인 최장민

글 / 사진 ㅣ 권혁인

양승우 공식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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