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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ths ago
INTERVIEW

김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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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현듯 한국 재즈 신(Scene)에 등장한 뮤지션 김오키. 당신이 그간 더할 나위 없는 핑크빛 세상에서 살았다면, 그의 음악을 난해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사상 초유의 국가적 사태를 겪은 뒤, 뼈아픈 변화의 시기를 보내는 중이다. 그건 김오키가 지금까지 발표한 세 장의 정규 앨범에서 이야기한 것들과 맥락을 같이 한다. 그는 자신의 색소폰으로 시대에 저항하고, 부조리를 비판하며, 소외된 계층에 사랑을 전파한다. 그가 영감을 얻은 격동의 근현대사와 2017년의 대한민국은 아직도 같은 선상에 놓여있다. 일단 재즈라는 말도, 아방가르드라는 말도 제쳐놓자. 지금 이 시간, 인터뷰를 읽고 난 뒤 다시 꺼낸 김오키의 음악은 분명, 이전까지와는 조금 다르게 들릴 테니까.

 

간단한 소개를 부탁한다.

색소폰을 연주하는 ‘김오키’다. 재즈(Jazz) 하는 사람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재즈 장르에만 갇혀있는 건 또 별로 좋아하지 않는 그런 연주가다.

 

처음에는 비보이로 활동하다가 스물다섯 무렵부터 색소폰을 배웠다고 들었다. 어떤 계기로 색소폰을 들었나?

마일즈 데이비스(Miles Davis)의 “Autumn Leaves” 인트로 부분을 듣고 나서 그 길로 색소폰을 배우러 학원에 갔다. 그러니까 트럼펫을 색소폰 소리라고 착각했던 거지. 지금 생각하면 웃기지만, 그땐 몰랐으니까. 학원 선생님은 사실, 재즈가 아니라 훵크(Funk)를 하는 분이었다. 그때 그 선생님이 스탠다드를 하려면, 먼저 훵크를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상한 논리긴 하지만, 어쨌든 그렇게 시작했다.

 

주로 독학했다고 들었다. 색소폰을 다루는 일도 부담이었을 텐데, 재즈를 이해하고 나아가 어떤 스타일을 확립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망망대해를 혼자 건너는 느낌 아니었을까. 어리지 않은 나이에 재즈를 기초부터 습득해나가는 경험은 어땠나?

독학이란 말은 정규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는 거다. 난 학교에서 전공한 적은 없지만, 학원에서 처음 익혔으니 완전히 독학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두 달 정도 배우고 난 뒤부터는 돈이 없어서 혼자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거지. 답답한 마음에 인터넷을 뒤지다가 직장인 밴드를 알았고, 거기에서 같이 어울리며 연주했던 게 큰 도움이 됐다.

 

지금 김오키의 음악을 들으면 스탠다드 재즈라는 말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진다. 어느 시점에서부터 음악적인 변화가 일어났나?

박재천 선생님을 만나면서부터 달라졌다. 선생님 앞에서 솔로로 연주할 기회가 생겼다. 그때만 해도 부드럽게 연주하려고 노력하던 때니까 최대한 예쁘게 불렀지. 대뜸 “요즘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남자가 그렇게 연주하냐?”라고 말씀하시더라. 좀 미친놈처럼 불 수 없냐고 해서 그때 모든 걸 놓고 냅다 불었다. 쾌감이 일었다. 그때부터 변했다.

 

재즈 기타리스트 김찬준(CJ Kim)이 많이 도와줬다고 하던데. 그는 당신에게 어떤 조언을 건네주었나?

초기에는 정석으로 연주했다. 한창 스탠다드 재즈에 꽂혀있을 때니까. 그때 찬준이 형이 내가 재즈를 더 폭넓게 이해할 수 있게 많이 도왔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나 뮤지션을 대면, 어떤 구간을 연주해보면 좋을 것 같다고 집어주거나 특정 스타일을 제시해줬다. 혼자 할 수 없는 일들을 명쾌하게 해결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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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를 배우는 과정이 가장 힘들었을 것 같은데.

처음 색소폰을 잡았을 때도 춤출 때와 비슷했다. 잘하고 싶으니 냅다 했지. 당시 경기도 화성에서 살았는데, 주변이 워낙 조용한 곳이라 아침에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온종일 연습했다. 잘 때도 색소폰을 안고 잘 정도였으니까.

 

뮤지션이 되고 싶었던 건가?

당시에는 막연했다. 그저 덱스터 고든(Dexter Gordon)처럼 연주하고 싶었다. 그때 나는 재즈 신에 관해 뭐 하나 아는 게 없었고, 실력이 뛰어난 연주자도 아니니 그저 35살 즈음엔 재즈 클럽에서 연주하고 싶다는 소박한 목표가 있었다. 앨범을 만들거나 재즈 뮤지션으로 살아간다는 꿈은 너무 먼 미래였다.

 

아티스트, 예술이라는 말이 난무하는 요즘, 당신은 ‘예술가’라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춤을 출 때부터 예술가란 무엇인가에 관해 생각해봤다. 그런데 아직도 정의하지 못했다. 나를 예술가라 부를 수 있을까? 어려운 질문이다. 집에 돈도 좀 있어야 마음껏 예술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예술가 아닌가? 앞으로도 계속 고민해볼 문제지만, 지금은 이런 이야기에 회의적이다.

 

좋아하는 아티스트가 있다면.

음악 하기 전부터 소설이나 그림을 좋아했다. 소설가는 도스토옙스키. 요즘엔 통 책을 안 읽지만, 그전에는 전집을 사서 읽고 그랬다. 그림은 잭슨 폴락 그리고 프리다 칼로의 작품을 좋아한다.

 

일본에서 꽤 오래 지냈다고 들었다. 오키나와를 너무 사랑해서 예명을 김오키로 지었다던데.

오키나와에서 카혼을 연주하는 친구와 친해지면서부터 더 자주 갔던 것 같다. 그 친구와 잼(Jam)도 하고, 재즈 클럽에서 공연도 하게 되면서 점차 오키나와 친구들이 늘어 갔다. 가장 마음에 든 부분은 음악으로 경쟁하지 않는다는 것. 너무 편해서 이민까지 생각한 적 있다.

김오키동양청년 – 나는 불현듯 겨드랑이가 가렵다 + 칼날 @채널1969

이래저래 ‘재즈’의 이름을 내건 페스티벌이 많이 늘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스탠다드 재즈만을 찾고 있지 않나? 재즈의 저변이 확대된 걸 느끼는가.

난 오타쿠 생활을 오래 해서 웬만한 음반은 전부 들어봤다고 자부할 수 있다. 공연도 줄기차게 다녔다. 그런데 한국은 확실히 특이한 정서가 있다. 한국이 재즈와 친한 나라가 아니라고는 하지만, 아직도 스탠다드 재즈만 소비된다는 게 너무 참담한 현실이다. 다만 요즘 어린 연주자 중에서 잘하는 친구들이 조금씩 눈에 띈다. 그 친구들 하는 말이 자기도 갇혀있지 않고, 자유롭게 연주하고 싶다고 하더라. 이런 게 그래도 한국 재즈에서 기대되는 부분이지.

 

서울 한남동 카페 ‘테이크아웃드로잉’에서 녹음한 컴필레이션 앨범 [테이크아웃드로잉]에 참여했다. 그 카페는 한때 사회적으로 이슈가 된 곳이지 않나?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연예인 싸이(Psy)와 임차인 간의 법정 공방이 오간 곳이다. 그 카페 2층에서 원 테이크로 “Black Farmers”라는 곡을 녹음했다던데, 당시 참여하게 된 계기 그리고 그 배경을 듣고 싶다. 항간에는 싸이가 억울한 건물주라는 이야기도 있다.

싸이(PSY)를 잘 알지도 못할뿐더러 원래부터 관심이 없던 터라 사실, 악감정은 없다. 싸이 입장에서도 억울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도 옳은 행동만 한 건 아니니 직접 이야기해보지 않는 이상 쉽게 말할 수 있는 주제는 아닌 것 같다. 단지 테이크아웃드로잉은 내가 종종 오가며 연주도 하고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순수한 곳이어서 의미가 남달랐지.

 

컴필레이션 앨범이 향뮤직에서 발매되었다. 묘하게 그 시기와 맞물려 향뮤직이 폐업을 공지하지 않았나. 당시 VISLA에서 향뮤직을 직접 취재했기에 그간 얼마나 고군분투했는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심정이 어땠나?

향뮤직은 1997년, 춤추던 시절부터 자주 가던 곳이다. 옆에 타워레코드가 있긴 했지만, 거기 없는 음반이 향뮤직에 있었다. 그때부터 곧잘 가던 레코드 가게였는데, 그런 곳에서 내 앨범을 반겨주고, 팔아주니 좋을 수밖에. 내 앨범은 파는 가게도 몇 없고, 좋아해 주는 곳도 딱히 없으니까. 향뮤직이 없어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정말 기분이 안 좋았다. 얼마 전, 이태원 바이닐앤플라스틱에 갔는데, 마땅히 살 음반이 없더라. 그곳에서 나오며 문득 향뮤직을 떠올렸다. 그곳이 이렇게 커졌다면 어땠을까 하면서. 아쉬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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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을 주제로 한 컴필레이션 앨범에도 참여했다. 서울에 사는 이들이라면 모두가 체감하는 현상이다. 이를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는가?

한국인들의 습성 아닌가 싶다. 돈이 되면 몰려서 물어뜯고, 뼈만 남으면 딴 데로 가고, 없애버리고…… 태권도 도장 같은 거다. 깨어있는 사람들이 늘어나길 바랄 뿐이지. 이 컴필레이션에 참여한 건 한경아 씨의 제안 덕분이었다. ‘자립심페스티벌’, 뭐 이런 종류의 기획을 많이 하시는 분인데, 마침 그 자립심페스티벌에 참여한 박지하 씨와도 인연이 생긴 터라 둘이 함께해보면 어떻겠냐며 제안하더라.

 

솔로 프로젝트 외에도 꽤 여러 그룹으로 활동하더라. ‘The South Korean Rhythm Kings’와 아방 트리오, 전기사기꾼처럼 퍽 재미있는 이름의 프로젝트들이다. 다양한 실험을 여러 멤버들과 함께 시도하는 것 같은데, 어떤 이유에서인가?

‘The South Korean Rhythm Kings’는 프리 재즈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모인 거다. 리더 ‘김책’, 전기사기꾼도 함께하는 ‘송남현’, 재즈 보컬 ‘표진호’로 구성됐다. 좀 더 리듬에 충실한 느낌이다. 서브컬처에 충실한 음악을 해보자고 해서 시작한 프로젝트다. 아방트리오는 일본에서 사는 친한 누나 남편이 ‘삐에르’라는 이름의 프랑스 사람인데, 그가 프로듀서로 나서면서 시작된 거다. 뮤지션 나윤선의 매니저를 한 적도 있다고 들었다. 집에 판도 많고, 뭐 아무튼 음악에 조예가 깊더라. 재즈 연주하는 사람들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다른 장르의 음악에 비해서 팀의 개념이 약하다는 점이다. 재즈 뮤지션들은 대체로 독자적으로 움직인다. 그래서 다방면으로 활동하는데, 거기에 다 자기 이름이 속한 거지.

 

특히 서경수, 송남현과 함께한 ‘전기사기꾼’이 궁금하다. 2집 [댄싱파업]과 3집 [말레이 어드벤처], 이 두 작품만 놓고 봐도 스타일이 다르다는 게 느껴진다. [말레이 어드벤처]는 심지어 곡명도 다 영어로 적었던데. 현지 분위기를 느끼게 하기 위해서인가.

전기사기꾼은 진짜 사기 한번 치자, 하고 만든 거다. 기분 내키는 대로 하는 프로젝트라 재미있게 하고 있다. 사실, 1집도 있다. 다만 정식으로 발매하지 않아서 들어본 사람도 몇 없을 거다. 그건 드럼 치는 친구와 둘이서 했다. 우리가 비싼 돈 들여서 만들어도 수익은 몇십 원밖에 나지 않는데 차라리 단가에 맞춰서 해보자고 한 거다. 비좁은 작업실에서 둘이 아이폰 꺼내서 녹음하고, 앨범 커버도 내 1집 사진 그냥 갖다 쓰고 그랬다.

2집은 베이스를 치는 송남현도 함께했다. 이 앨범은 연극 공연 리허설하고 세팅할 때 짬 내서 녹음했다. 잘 들어보면 조명을 설치하는 소리도 날 거다. 세팅하는 아저씨들이 작업하러 오면 한쪽으로 비켜서 계속 연주했다. 3집은 더 대충했다. 장르는 일렉트로닉이다. 말레이시아를 다녀와서 작업한 거라 그냥 제목도 영어로 썼다. 말레이지아 페스티벌에 참가하기 위해서 간 건데 일이 꼬여서 연주도 못 하고 그냥 돌아왔다. 돈만 쓰고, 헛물 켠 거지. 그래서 그런 내용을 곡으로 만들었다. 성질나니까 이거라도 한 거다. 하하.

 

4집 앨범을 귀띔해달라.

앨범 이름은 [전기사기꾼 짱]이다.

당신을 아이돌처럼 여기는 프로듀서 그레이(GRAYE)와 함께 곡 작업을 했다. 여러 면에서 신선한 조합 같은데, “Empty Space”는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었나? 그레이라는 비교적 어린 프로듀서와 어떤 교감을 주고받았는지도 궁금하다.

편하고 재미있게 했다. 나도 그레이가 하는 비트 뮤직을 좋아했으니 크게 이질감이 들지는 않았다. 그레이의 음악은 전자음악 기반이지만, 묘한 느낌이 실려 있다. 이 친구가 어느 날, 트랙을 들려주면서 마음대로 연주해달라고 하더라. 뭐, 그래서 마음대로 불었고 그게 잘 나왔지. “EMPTY SPACE”의 느낌이 워낙 좋으니까. 그레이의 트랙에 내재한 감정에 충실하게 했다.

 

1978년 발표된 조세희의 연작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받은 영감으로부터 확장된 솔로 1집 앨범 [Cherubim’s Wrath]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자. 1960년대부터 시작된 산업화는 심각한 빈부 격차, 경제 불균형을 낳았다. 그 여파는 지금까지도 한국 땅에 사는 서민들을 괴롭히고 있다.

도스토옙스키에 빠져있을 때라 앨범 수록곡 제목을 모두 도스토옙스키가 지은 소설로 지었다. 이게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으로 바뀌게 된 건 언젠가 우연히 들은 라디오 때문이다. EBS 라디오문학관에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소개한 적 있는데 내용이 재미있어서 경청했다. 곧바로 책을 사서 읽었다.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소설 배경이 70년대인데, 지금 주변 상황과 다른 게 없었다. 내가 한국 사람인데 지금 도스토옙스키를 들먹일 때가 아니구나 싶더라. 그래서 곡을 전부 갈았다. 혼자 화내고 씩씩거리면 안 될 것 같아서, 작은 부분이지만 함께 저항하길 바라며 만들었다.

 

김오키의 앨범 작업은 하나의 주제, 생각에서 출발한 일련의 것들을 온전히 담아내기까지의 과정인 것 같다.

살면서 어떤 사건이 생기면 그걸 마음에 담아두려고 한다. 겪은 일을 적기도 하고, 일련의 사건을 하나의 제목으로 만들어둔다. 주로 독립 연극을 보면서 영감을 얻는 편이다. 주로 무거운 주제를 바탕으로 한 연극인데, 배우들의 연기를 보면 그 감정이 온전히 느껴진다.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에서 많이 영향받는다.

김오키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김오키는 민중의 음악가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재즈 역시 초창기 흑인들의 애환이 담긴 민중의 장르로 그 모습을 갖추지 않았나. 한국 특유의 구슬픈 가락, 마치 할머니가 어렸을 때 불러주시던 민요 같은 정서가 김오키의 재즈에서 느껴진다. 이러한 색깔은 자연스럽게 나오는 건가?

나도 잘 모르겠다. 사실, 재즈를 좋아한 이유 역시 곡도 곡이지만, 곡에 함축된 배경이 흥미롭게 다가와서다. 그 지점을 알기 위해 공부도 많이 했다. 보통 재즈에는 곡 제목에 사연이 숨겨져 있다. 흑인 인권 같은 것. 나는 재즈 특유의 표현 방식이 좋았다. 어릴 적 힙합을 좋아하던 이유와 같은 맥락이었지. 뉴 잭 스윙에서 힙합의 시대로 넘어올 때 라킴(Rakim), NWA와 같은 래퍼들의 메시지에서 쾌감을 느끼곤 했다.

 

전작 [격동의 시간 여행]까지 함께한 밴드 ‘동양청년’은 해체했다고 들었다.

드러머가 그만두면서 사실상 해체됐다. 멤버가 한 명이라도 바뀌면 그만두려고 했다. 그 친구가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그간 많이 힘들었을 거다. 그 친구도 음악을 전공한 게 아니다 보니 이 길이 쉽지 않다고 판단한 거지. 다른 직업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이해한다. 늘 뒤에서 받쳐주는 역할이 드럼이니까. 그런데 얼마 전부터 다시 활동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은 배신자라고 놀린다. 3집은 또 다른 밴드와 하고 있으니 이대로 갈 것 같다. 아마 전기사기꾼에서는 그 배신자도 함께하지 않을까.

 

1번 트랙부터 14번 트랙까지 하나의 스토리로 연결된 [격동의 시간 여행]은 역사적 사건 그리고 쉽게 잊혀져가는 것들을 노래했다. 심지어 원테이크(One-Take)로 녹음했다고 들었다. “나는 불현듯 가랑이가 가렵다”를 비롯해 인상적인 곡들이 많지만 “하고 싶은 말”은 메시지 자체로 충격적이다. 마치 연극을 보는 것 같았다.

힙합 앨범처럼 사이사이에 스킷(Skit)을 넣고 싶었다. “5월의 형제”는 5.18 민주화운동을 주제로 한 곡이다. 깊은 메시지를 담기 위해 진중하게 가고 싶어서 이전 스킷의 역할을 하는 “하고 싶은 말”에 위트를 주고 싶었다. 그때 연극을 하는 동생들을 찾아갔다. 상황 설명만 대충 해주고 바로 아이폰으로 녹음했다. 형 역할을 한 친구가 워낙 센스 있어서 마지막 멘트까지 기막히게 쳤다. “안내방송”이나 “정신세계”는 예전 웨딩홀 연주를 나갔을 때, 그때 친해진 동생들이 도와줬다. 특히 “정신세계”는 나를 욕해보라는 설정이었는데, 너무 리얼하게 해서 좀 놀랐다. 하하.

김오키 – 5월의 형제

결혼식 아르바이트도 했나?

돈을 벌어야 하니까. 한 3~4년 했다. 그만둔 것도 비교적 최근이다. 제11회 한국대중음악상 재즈 크로스오버 최우수 연주상, 그거 받은 다음 날도 바로 웨딩홀에서 연주했다. 상 타면 돈도 많이 벌 줄 알았는데 달라진 게 없더라. 오히려 주변 인식 때문에 더 힘들었다. 상도 받고 하니 나를 무슨 완전 예술가로 보는 거지. 나는 만원만 나오는 일이어도 하자는 신조다. 뽕짝이나 오부리, 찬송가 모두 가리지 않고 했다. 그런데도 주변에서는 괜히 몸값이 비쌀 거라고 생각했나봐.

 

이 앨범에서 느껴지는 록(Rock)적인 요소도 김오키가 표현하는 또 다른 저항정신인 듯하다. 예전부터 록 음악에서 영향받았나?

[격동의 시간 여행]을 록 앨범처럼 만들고 싶었다. 1집을 내고 활동할 때, 인디 클럽에서 연주했다. 그때 록이나 사이키델릭을 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 친구들이 음악 하는 거 보고 여러 번 충격 받았다. 속이 다 시원하던데. 난해한 멜로디에서 드럼을 치니까 엄청 신나더라고. 그때 완전히 꽂혔지. ‘헬리비전’이라는 팀을 보고 나서 나도 록 앨범을 만들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해온 가락이 있으니 록을 만들지는 못하겠더라.

 

‘격동의 시간 여행’을 마치면서 새삼스럽게 느낀 것들, 아니면 단단히 다진 결의 같은 게 있다면?

막상 앨범을 만들고 나면 정신적으로 지쳐서 최대한 잊어버리려고 한다. 오히려 만들 때 몰입한다. 새로운 걸 생각하기 위해 거의 놓고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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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뿌리] 앨범 커버 아트

앨범 [거대한 뿌리]의 수록곡 “도적“, “거대한 뿌리”, “사랑”, “묘정의 노래”, “달나라의 장난” 등 트랙 대부분이 김수영 시인이 쓴 시와 제목이 같다. 심지어 1974년 간행된 시집 ‘거대한 뿌리’가 앨범 타이틀 아닌가. 사랑 같은 경우는 아예 시 전체를 가져와 노랫말로 만들었다. 어디선가 김수영 시인에게서 영감을 받았다고 본 적 있는데 이번엔 그걸 전체적인 테마로 드러낸 건가?

김수영 시인의 작품을 주제로 연극을 연출하는 친구가 그 시인의 시를 읽으면 내가 떠오른다고 하더라. 사실, 그전까지 김수영 시인을 전혀 몰랐다. 한번은 그 친구가 김수영 시집 한 권을 건네줬다. 제목이 ‘시여, 침을 뱉어라’였다. 표지도 시뻘건 책이라 인상 깊었지. ‘김일성 만세’라는 시 제목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 친구한테 나는 좌파가 아니라고 말했더니 그런 게 아니라며 김수영 시인의 작품을 설명해줬다. 그의 시는 종국에는 인간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노라고. 소외된 사람들, 아픈 사람들의 심정을 시에 담았더라. 내가 그간 음악으로 표현하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음악적으로 신경 쓴 부분이 있다면?

지난 1, 2집에 비하면 편하게 만들었다. 나는 곡뿐만 아니라 앨범 제목, 배열, 커버 아트, 뭐 작은 거 하나하나 세심하게 챙기는 편이다. 어떤 메시지를 담고, 어떤 비주얼을 만들지 직접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인데, 매번 이렇게 작업하니 힘이 부치더라고. 그래서 이번에는 좀 여유롭게 만들고 싶었다.

 

김오키라는 솔로 프로젝트로는 [거대한 뿌리]까지 모두 세 개의 정규 앨범을 냈다. 만족하는가?

늘 아쉽다. 모든 앨범이 다 그렇다. 작업을 끝내고 보면 다시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한 곡당 두 테이크(Take)를 안 넘기려고 해서 그럴 수도 있다. 연주하다가 틀리면 틀린 대로 간다. 그것도 어쨌든 내 음악이니까.

 

새로운 세션과의 합은 어땠나.

이번 앨범에 참여한 세션은 스탠다드 재즈 쪽에 계신 분들이다. 2집 이후, 스탠다드 재즈에 기반을 둔 세션과 한번 합을 맞춰보고 싶었다. 내가 워낙 연주를 자유롭게 하는 편이라 사실, 세션들이 맞춰주는 게 쉽지 않은데, 워낙 실력이 출중한 분들이라 그런지 나는 정말 편하게 했다. 집에서 아빠, 엄마, 형이 탄탄하게 받쳐주면 막내가 마음 놓고 노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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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성격상 현재 시국에 관련한 음악 역시 나올 것 같기도 한데. 지금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어떤 심정인가.

요즘 참 좆같은 일이 많다. 너무 화가 나서 소셜 미디어를 켜지도 못하겠다.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그보다 훨씬 더 큰 게 오니까 충격을 받았지. 국가 그리고 사회를 향한 분노를 표출하려고 한다. 공연에 오라. 우리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알 수 있을 거다.

 

VISLA는 유머가 가진 힘을 믿는다. 그건 사회비판, 나아가 세상을 바꿔보려는 사람들의 의지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김오키의 음악에서 유머는 어떤 방식으로 구현되는가?

유머 혹은 위트는 되게 중요하다. 그건 어떻게 보면 내 음악의 중심이라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블랙 코미디 같은 것. 너무 힘을 주기보다는 살짝 비꼬는 거지. 대중이 겁내지 않게. 앨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도 음악이 심란하다 보니, 커버를 좀 밝게 했다. 2집 커버도 마찬가지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명박도 있고, 여러 위인과 사건이 나열되어 있다. 5.18, 세월호 사건 등등….. 앨범 트랙을 살펴봐도 심각한 곡 사이사이에 “안내방송”이나 “정신세계” 같은 트랙을 껴 넣었다. 어떤 B급 감성이라든지, 블랙 코미디 같은 요소들이다.

 

김오키의 음악을 지금 이 시대를 관통하는 투쟁, 자유, 사랑의 음악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 세 가지 낱말 중 가장 끌리는 건 무엇인가?

내 음악의 모토는 사랑이다. 사랑이 없으면 투쟁도, 자유도 의미 없다고 생각한다. 남녀간의 사랑도 사랑이지만, 내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건 소외된 계층을 사랑하는 것. 좀 더 포괄적인 의미에서 사랑을 말하고 싶다.

김오키 개인 블로그 

진행 / 글 ㅣ 이철빈 권혁인

사진 ㅣ 홍성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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