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한량들 – 증오 –

한량(閑良)이란 본래 조선 시대 양인 이상의 특수 신분층을 일컫는 용어로 그 뜻을 풀이하자면 ‘관직이 없이 한가롭게 사는 사람’을 의미한다. 현실에서 한량이라 함은 집 구석에서 눈칫밥이나 얻어먹는 찌질한 루저로 각인되지만, 영화에서 무리를 지어 다니며 시간 때우기로 동네를 어슬렁거리는 한량은 어쩐지 쿨해보인다. 이러한 사람의 심리를 간파하기라도 한 듯 “증오(마티유 카소비츠, 1995)”, “트레인스포팅(대니 보일, 1997)”,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가이 리치, 1998)”, “케미컬 제너레이션(폴 맥기건, 1998)” 등 한량을 소재로 한 영화가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에 대거 등장하며 붐을 이뤘다.

이 영화에서 한량들은 주로 우르르 몰려다니며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공원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을 구경하거나, 길거리를 다니는 평범한 행인들에게 시비를 걸거나, 싸구려 술집에서 노가리를 까거나, 그것도 아니면 어디 한구석에 틀어박혀 마약을 하는 게 전부다. 하지만 이러한 한량들의 하루살이 마인드는 자발적이라기보다 타의에 의해 형성된 것에 더 가깝다. 한량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에서 이들은 사회가 싸질러놓은 똥 같은 존재다. 그들은 열악한 경제 상황, 실직과 같은 불안한 사회상에 일차적으로 타격을 받았고, 부패한 공권력, 허술한 복지정책에 가장 연약하게 노출되어 있다.

영화 “증오”는 1986년, 프랑스 우파 정권인 시라크 정부가 파리 교외 방리유 지역을 겨냥해 이민자 차별 법안을 통과시킨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이에 대한 반발로 이민 출신 청소년들의 시위가 이어졌고, 과잉 진압으로 대응한 경찰의 총에 맞은 시리아 청년이 죽음에 이르며 프랑스 사회는 긴장과 불안에 휩싸였다. 이 영화는 당시 프랑스 사회의 이민자 문제와 주류 사회의 이면을 고발하고 낭만과 환상으로 포장된 프랑스라는 국가의 허상을 철저히 깨부순다.

여기에 세 명의 한량, 유대계 프랑스인 빈츠와 아랍계 사이드 그리고 흑인 위베르가 등장한다. 그들은 2프랑이 없어서 핫도그를 사 먹지 못할 정도로 가난하다. 딱히 할 일이 없으니 해가 질 때까지 늘어지게 잠을 자고 외출이라곤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어딘가에 주저앉아 시간을 죽이는 게 전부다. 이 세 명의 주인공 중 그나마 건실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 위베르는 2년간 모은 돈으로 복싱장을 차렸지만, 그마저도 경찰의 습격으로 모두 불에 타버렸다. 그들에게는 생존 그 자체가 투쟁해서 손에 넣어야 하는 도전 과제다.

“증오”는 경찰이라는 강력한 공권력과 세 주인공을 비롯한 빈민가 청년들의 싸움이 영화의 가장 큰 축을 이룬다. 이 영화에서 경찰은 소란이 벌어지는 장소, 난투극이 벌어지는 어디 장소에나 등장한다. 또한 그들은 무리로 떼 지어 다니며 강력한 중재자처럼 끼어들기도 하고, 막강한 힘을 지닌 고문관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폭력적 상황은 경찰로 대변되는 국가의 주도로 일어나고, 폭력은 법이라는 이름 아래 아무런 죄의식 없이 벌어진다. 폭력과 폭언을 서슴지 않는 경찰의 모습은 이민자들을 프랑스 땅에서 완전히 추방해야 한다는 광기 어린 극우주의자를 떠올리게 할 만큼 야만적이다. 이러한 폭력의 피해자가 되는 빈민가의 청년들이 경찰에 대항하는 방법은 기껏해야 화염병으로 차에 불을 지르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주인공의 증오 표출 대상은 공권력을 행사하는 경찰에 국한되지 않고, 일반 중산층 시민, 언론 등을 포함한 프랑스 전체의 주류계층까지 확장된다.

영화에서는 세 명의 주인공이 자신들의 추락하는 삶을 냉소적으로 묘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중 하나가 파리의 밤거리를 방황하다가 멀리 에펠탑이 보이는 건물 옥상에 올라가서 자신들의 암울한 삶을 토로하는 장면이다. 이때 빈츠는 자신이 ‘마치 광활한 우주에서 길을 잃은 개미 같은 기분’이라고 말하는데 이 대사에서 현실을 바라보는 그들의 심경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사회로부터 격리된 소외감과 불안, 파멸에 대한 두려움까지. 목적지 없는 그들의 24시간은 너무도 위태롭다.

냉정한 시선을 유지한 채 품을 본다면 영화 속 세 청년은 한심한 인간들일 뿐이다. 도대체 뭘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다른 영화에서는 한량들끼리 모여서 마약도 하고 그러던데 얘네는 돈이 없어서 그마저도 못 한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돈이 필요해 보이지도 않는다. 이들은 젊고, 건강하고, 대부분의 한량이 그러하듯 시간도 남아돈다. 이들의 건강한 육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세상은 그런 식으로, 그들의 편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세상은 냉정하다지만 이 한량들이 속한 세계는 잔인할 정도로 얄짤없다. 한쪽 뺨을 내주기 전에 먼저 선빵을 날리는 것. 그들의 세계에서 삶의 규칙은 오로지 죽기 아니면 살기의 방식이다. 청춘이라는 낯 뜨거운 단어는 이들에게 버겁다.

이 한량들은 쿨하지도 않고 멋있지도 않다. 찌질하고, 비참하고, 불쌍하다. 많은 미디어가 20대의 젊은이들을 묘사할 때 으레 사용하는 상투적인 단어는 그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의 세 주인공이 다른 한량들처럼 반항기가 넘치는 한 시대를 대표하는 움직임으로 묘사되느냐, 그건 또 아니다. 이들은 “트레인스포팅”의 주인공들이 당시 영국 청년의 비주류 문화와 새로운 인간상을 대표하는 것과 달리 시대의 아이콘이 되는 것에 실패했고, 가이 리치의 수많은 작품처럼 영원한 젊음을 상징하는 인물로 남지 못했다. 그러나 일탈과 약탈이라는 자극적인 제스쳐를 통하지 않고도 가감 없는 시선으로 묘사하는 한량들의 비정상적인 삶, 그 통찰은 여전히 우리의 현재를 돌아보게 한다.

영화가 개봉한 1995년, 이듬해 칸 국제영화제에서 “증오”는 최우수 감독상을 받았고, 감독 마티유 카소비츠는 자신의 영화에 쏟아지는 비난의 화살을 향해 텔레비전과 라디오, 영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매체가 전달하는 윤리 기준을 ‘똥’이라고 일컬으며 사회가 제시하는 한심한 가치에 ‘증오’를 내비쳤다. 영화의 거친 흑백 화면과 투박한 사운드, 곳곳에 배치된 초현실적인 장면과 다양한 영화적 실험은 이 작품이 지닌 역동성과 만나 폭발하는 에너지를 만든다. 부조리한 사회와 그 사회에 잔인하리만치 배제된 비주류에 대한 감독의 치열한 고민. 그리고 한심하고 불쌍한 주인공들까지. 영화 “증오”는 그렇게 20년이 지난 오늘, 불행한 우리 시대의 한량들에게 묻는다. “당신은 어떻게 추락하고 있는가?”.

커버 이미지 ㅣ 박진우

RECOMMENDED P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