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me Playlist: 한강

차갑고 황량했던 한강의 나뭇가지에 꽃망울이 올라왔다. 계절이 바뀌며 한강은 사람들을 맞을 채비를 서두른다. 서울의 대표적인 랜드마크 한강. 이곳은 당신에게 어떤 장소인가. 누군가에게 그곳은 삼삼오오 모여 다정한 시간을 나누는 곳일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실체 없는 고독과 끊임없이 마주하는 곳일 수도 있다. 그도 아니라면 4대강이나 세빛둥둥섬처럼 대자본에 눈먼 공간일 수도 있고. 오랜만에 찾아온 테마 플레이리스트. 6명이 이야기하는 ‘한강’에 귀 기울여보자.

글 ㅣ조예슬

1.POOM – Je suis venu te dire – Gainsbourg 

어느 도시를 향하든 간에 강가는 우리에게 최초의 목적지였다. 수많은 연인이 오고 갔기 때문인지 형체가 닳아버린 새벽의 센 강에는 그림자가 더 선명해 보였고, 죽어가는 도시가 아직 숨 쉰다는 방증을 하듯 로마의 강물은 빠르게 흘러갔다. 하루하루가 새로웠기 때문일까. 낯설지 않은 세상으로 되돌아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얼마 후 나는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고, 시간이 빠르게 흘러갈 것이라고 믿으려고 애썼다. 한국에 도착한 후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다름 아닌 한강이었다. 이상하게 그날은 축축하지 않았고 되레 목이 간지러웠고, 아무도 없을 법한 곳을 찾아다녔다. 큼직한 바위에 앉아 태엽을 천천히 감으면서 꿈을 꾼 듯한 추억들을 차근차근 떠올렸다. 눈앞의 한강은 낯설게 느껴졌고, 더욱 낯설게 느껴져야 할 그 공간들을 떠올리며 익숙함을 갈구했다. 시차만큼이나 컸던 공간의 틈 사이에서, 아직 함께하고 있다는 착각을 가능하게 했던 곳이 한강이다.Je suis venu te dire que je m’en vais’, 떠난다는 말을 전했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는 말은 아니다.

이준용/ 컨트리뷰트 라이터

2. Nina Simone – Cherish

유일한 취미가 ‘걷기’다 보니 사람들이 한강하면 흔히 떠올리는 맥주나 피크닉 등의 휴식은 나에게 크게 다가오지 않는다. 내가 한강을 찾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걷기 위해서다.

나는 10년 전부터 지금까지 아이리버 MP3 플레이어를 사용하고 있다. 4기가 바이트라는 작은 용량에 듣고 싶은 음악을 가득 채우고 마땅히 들을만한 곳이 없으면 한강을 따라 무작정 걷는다. 애오개역 근처의 작업실에서 시작해 공덕을 거쳐 마포대교를 건너 여의나루까지 걷는다. 정신없이 걷다 보면 어느새 마포대교에 다다른다. 걸음을 멈추고 잠시 숨을 돌리며 쉬고 싶은 순간이 바로 이때라고 할 수 있다. 그럴 때면 나는 MP3에 담겨있는 음악 중 가장 조용하다고 생각하는 음악을 재생하고 볼륨을 조금씩 키운다.

니나 시몬(Nina Simone)의 [Silk&Soul] 앨범에 수록된 곡 “Cherish”를 듣고 있으면 내 발밑으로 흐르는 한강과 맞은편 여의도의 불빛들이 춤을 추고 있는듯하다. 그럴 때면 서울의 뻔한 풍경 중 하나인 한강이 니나 시몬 특유의 고요하면서도 에너지 있는 보이스와 어우러져 조금은 특별한 감상을 만들어낸다. 한강의 어딘가에서 휴식처를 찾는다면 한 번쯤 들어보기를 권한다.

이승규/레코드 콜렉터

 

3. 사뮈 – 우리의 시간이 같은 시간인지 아닌지를 따지는것

서울로 올라온 지 3주째. 얹혀사는 친구 집으로 돌아가는 2호선 열차 안. 늦은 밤이다. 길쭉한 전철이 덜컹거리면서, 길쭉한 한강 위를 가로지를 때면 마침내 서울에 산다는 것이 실감 난다. 창밖으로는 거대한 도시의 불빛들. 내가 작은 존재로 느껴지는 순간. 모두 내 마음먹기에 달린 거라고, 일어나지 않은 일을 고민하는 건 무의미하다는 말. 하지만 어렵다.

전동차 안의 수많은 사람, 수많은 얼굴, 수 없을 고민을 피해 창문에 이마를 붙이고 넋을 내어보다 혹시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으로 슬며시 비집고 들어오는 순간을 인지한다.

어디로 가는 걸까. 지금 내 머릿속 수많은 고민들은 ‘우리의 시간이 같은 시간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처럼 무의미한 것임을 안다. 하지만 이 고민 속에서 잠시 무겁게 취해있고 싶을 때가 있지 않은가? 모순투성이 어지러운 도시 속 울부짖듯 노래하는 사뮈의 노래는 이 어둡고 길쭉한 밤 속을 달리는 나와 함께 흔들려준다.

크리틱/뮤지션

4. Marvin Gaye – Inner City Blues(Make Me Wanna Holler)

내게 한강은 곳곳에 음흉함이 도사린 연애의 장이다. 서울에서 갈 데 없고, 돈 없을 때 찾곤 했던 초라한 데이트 코스. 해가 져도 춥지 않은 계절이면 한강 둔치 으슥한 곳에서 입술 한 번 훔쳐보려고 애쓰던 곳. 운치 있는 선상 레스토랑, 그 안에서 먹는 밥이 무슨 몇만 원씩이나 하냐고, 저렇게 겉만 그럴싸한 식당은 와달라고 사정해도 안가겠다며 그저 바라만 보던. 내게 한강은 번잡한 유원지에 불과하다. 돗자리와 치맥이 난무하는 한강에서 힐링은커녕, 마음만 복잡해져서 돌아왔다. 서울, 한강에는 아직 한 번도 내 마음 둔 적 없다.

많은 이들이 서울이라는 도시,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몰인정함을 이야기한다. 서울에 가면 코 베인다는 말에 동감하는 촌놈으로 살아오면서 아직도 한강이 불편한 건, 도시 중심으로 빠르게 걸으라는 사람들과 그러지 못하는 나 자신에서 오는 괴리감이 어떤 불협화음을 내기 때문이다. 사회로 나온 뒤로 서울은 몇 년째 내 발걸음을 재촉했다. 오랜 세월을 한적한 동네에서 부족함 없이 보낸 내가 목표로 하는 삶은 어기적거리는 걸음으로 조금은 게으르게, 하루하루를 만끽하는 것이다. 그런 내게 한강은 음침하고, 낯설다.

많은 것에서 눈 돌린 채 지나온 몇 년, 그 사이 치열한 서울과 조용한 우리 동네의 불협화음은 점차 커져만 갔다. 현실과 처음 맞닥뜨리던 그 생경함을 기억하는가. 맨살로 바람을 맞으면 꽤 시리다는 사실을 나는 늦은 나이에 알았다. 짐짓 피하고만 싶던 현실이 내 뒷덜미를 움켜쥐었을 때, 그 언젠가 한강을 발 아래 두고 한남대교를 건너면서 느꼈던 울적한 기분. 내 한강의 테마는 마빈 게이(Marvin Gaye)의 “Inner City Blues(Make Me Wanna Holler)”로 하겠다.

권혁인/VISLA 매거진 편집장

 

5. Franz Liszt – Liebestraum

한강은 나를 초라하게 만드는 장소였다. 마음이 심란해 밤거리를 걸을 때면 길어지는 생각만큼 걷는 길도 길어져서 어느새 서강대교까지 다다르곤 했다. 멀리서 바라보는 한강의 밤은 낭만적이지만, 혼자 걷는 한강 다리는 여름밤에도 춥다.

서강대교의 중간쯤에 이르면 매섭게 속도를 올리는 자동차와 한강의 칼바람 때문에 이어폰에서 나오는 음악은 들리지도 않는다. 나는 그제야 다리를 건넌 것을 후회한다. 더는 걸을 수도 없고 되돌아갈 수도 없을 때 앞을 바라보면 새카만 강 건너에서 웅장한 국회의사당이 보인다. 시선을 바꿔 고개를 돌리면 고층 아파트에서 환하게 불을 켜고 있다. 그 밑의 공원에는 행복한 듯 웃어 보이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다.

나는 세상의 중심에서, 어두컴컴하고, 작고, 불쌍하게 서 있다.

유난히 한강 다리 위에서는 서울이 크게 느껴진다. 나는 이 도시에 압도당했고, 그때마다 이곳에서 살아남는 법을 가슴으로 삼키며 절대 달콤하지 않은 상상을 한다. 서울에서 지낸 나의 짧은 삶도 기나긴 고통의 시간과 찰나의 꿈같은 시간의 반복이었다. 도시의 화려함에 머물던 시선을 거두고 다시 걸어야 한다. 다리를 끝까지 건너야 집에 갈 수 있지만, 후회와 쓰라림 속에서 달콤함은 5분 동안의 ‘사랑의 꿈’으로 충분했다.

민희정/무용인

 

6. Bon Iver – Wash

https://www.youtube.com/watch?v=lIZdKQZV_iU

처음 서울에 발을 디뎠던 18살의 나는 이제 성인이 되어 한강에서 친구들과 함께 술을 나눠 마신다. 또 가끔은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손을 잡고 걸으며 먼 미래와 내일을 약속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한강의 똥물이 산천어가 사는 1급수의 맑은 물로 보였고, 그 강물에 비치는 형형색색의 야경이 성냥팔이 소녀의 마지막 성냥 한 개비처럼 따뜻하게 느껴졌다. 한강 공원 잠원지구에서 보이는 맞은 편의 약수동 풍경, 그리고 지금 사는 뚝섬 한강 공원에서 보이는 청담동의 모습까지. 황량하고 인정이라곤 없어 보이는 서울의 모습도 나란히 옆에 앉아 체온을 나누는 사람과 함께라면 뉴욕의 허드슨 강도, 파리의 센 강도 비교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한강에서 보이는 것들은 ‘사랑과 희망’ 같은 입시 철 대학교 홍보물의 슬로건이 아니라 그곳을 바라보며 했던 지키지 못한 약속이나, 시간과 함께 단단해질 거라 믿었던 관계의 연약함, 나의 오만함, 불가능한 타인과의 의사소통 따위의 대부분 알고 싶지 않은 것들이다. 그렇다. 이제 한강은 더는 나에게 손에 잡히지 않는 환상을 꿈꾸게 하는 낭만적 공간이 아니다.

나는 오늘 한강을 산책하며 어디에 내 이야기를 팔아먹을지 고민하고 대기업 영화사가 으레 만드는 각종 신파와 국뽕으로 넘쳐나는 영화를 구상하며 실현될 리 없는 인생역전을 꿈꾼다. 그렇지만 내일의 나는 지조 있는 아티스트가 되어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마음가짐에 대해 명상할지도 모르고 어디선가 주워들은 가치 있는 삶에 대한 명언을 되새기며 젠체할지도 모른다. 이처럼 나의 속물근성과 예술가 기질이 뒤섞여 사고의 한구석에서 불쑥 튀어나오듯, 이곳에서 살아가며 마주하는 한강은 매일 변모하며 나의 삶에 복잡함을 더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애증의 도시에 관해서 매일같이 생각하고 글을 쓰게 만드는 걸 보면 서울은, 또 한강은 나에게 여전히 화두임이 틀림없다.

한강에 관한 나의 플레이리스트는 시즌마다 바뀐다. 이번에는 영화 “러스트 앤 본(자크 오디아르, 2012)”의 수록곡인 본 이베어(Bon Iver)의 “Wash”를 가져왔다. 결국,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이 영화처럼 이 도시는 여전히 나를 살게 한다. 그것도 아주 잘, 살아가고 싶게 만든다.

조예슬/컨트리뷰트 라이터

커버 이미지ㅣ박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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