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영감 │ 2017년 8월호 │ 박성훈 기고

움직이지 않는다면, 어떤 것도 볼 수 없다. 보고도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봤다고 할 수 없다. 사소할 만한 지나침이 주는 진귀한 생각의 실마리. 8월 영감에는 회사원 박성훈이 함께했다.

 

남자 어른 │ 아저씨

만원에 네 캔, 할인 맥주로 무장한 귀갓길. 머릿속엔 빨리 씻고 소파에 누워 캔을 따고 싶은 생각뿐. 이날도 시작은 그러했다. 그런데 내 신경을 심히 거스르는 존재를 마주했다. 이름하여 ‘아저씨’. 아저씨는 붐박스를 들고 뉴욕거리를 누비는 런디엠씨 같은 걸음걸이로 스마트폰을 한 손에 들고 안양의 한 주택가를 거닐고 있었다. 백지영의 “Dash”와 함께. 불과 30초가 될까 말까 한 시간. 한 아저씨와의 공존이 너무나도 불편했던 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의문들이 삽시간에 머릿속에 쏟아졌기 때문이다.

아저씨는 왜 스마트폰 볼륨을 키우고 마치 최신형 포터블 스피커를 자랑하듯 음악을 튼 채로 걸어가고 있을까? 마침내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 이용법을 터득한 기쁨의 세레머니일까? 끝내주는 선곡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어필하고 싶었나? 이쯤에서 나는 이미 아저씨의 핸드폰이 갤럭시 보급형 모델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아저씨는 왜 2017년에 “총 맞은 것처럼”도 “잊지 말아요”도 아닌 “Dash”를 듣고 있을까. 최신곡도 아닌 데다 주민들이 잠들기 시작하는 밤 시간대 주택가에서 틀기에는 너무나도 소란스러운 노래가 아닌가. 더군다나 나는 쥐어짜는 스타일의 창법을 매우 불호한다. 술을 마셨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당당하기는 또 왜 이리 당당한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따금 한 마디 섞을 때마다 턱턱 막히는, 도저히 통하는 게 없는 사람을 마주할 때가 있다. 이런 상대를 만나면 그동안 살면서 익혀온 처세술과 화법은 아예 무용지물이 된다. 그러나 그간 내가 상대해온 적들은 새 발의 피였다. 어쩜 이렇게 말이 안 통할까 하는 생각이 상대를 만날 때마다 그 아저씨를 생각하며 이겨낼 것이다.

VISLA 컨트리뷰트 라이터 석정환 

 

일본 만화 │ 군계

선과 악이 대립하는 불멸의 주제는 만화책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것 같다. 그러니까 착한 놈이 나쁜 놈 두들겨 패고 그런 것. 권선징악으로 전개되는 만화가 정말 재미있었고, 어린 마음에 ‘사람은 역시 착하게 살아야…….’같은 생각도 했는데, 나이가 드니 그렇게 악마 같던 프리더나 셀, 울트라맨의 외계 악당도 마냥 나쁘게 보이지는 않더라. 흰색이냐 검은색이냐고 한다면 뭐 조금 진한 회색 같은 친구들이지. 이런 생각이 들 때쯤 굉장한 충격으로 내 뒤통수를 때린 만화책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타나카 아키오(Akio Tanaka)가 그린 ‘군계’다. 군계의 주인공 나루시마 료는 진짜배기 악당이다. 친족살해라는 죄목으로 소년원에 수감되는 첫 등장부터 출소 이후 폭행과 강간을 일삼는 점점 무시무시한 괴물이 되어간다. 그 근간에는 소년원에서 살아남기 위해 배운 ‘가라테’가 있지만, 출소 후에는 방패가 아닌 창으로써 적을 물리친다.

1998년 첫 연재를 시작, 잡지가 휴간을 선언하면서 작가는 타 만화잡지로 이적해 연재를 진행했고, 그 와중 또 원작자와의 불화 때문에 무려 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연재를 중단한 것을 보면 줄거리만큼이나 꽤 탈이 많은 만화임은 분명하다. 아무튼, 군계는 내가 그동안 가지고 있던 선과 악의 패러다임을 완벽하게 바꾸어 놓았다. 악인에 대한 동정 따위의 장치 없이도 어느샌가 나루시마 료를 응원하게 된단 말이지. 격투/무도 만화의 주인공 대부분은 ‘순수한 강함’을 향한 집착이 지독한 수련의 동기부여가 되지만, 이 새끼가 보여주는 격투의 형태는 욕망 그 자체로 움직인다. 누구나 조금씩은 가지고 있을 인간의 추악한 면을 들추면서 슬쩍슬쩍 ‘야, 너도 똑같은 인간이잖아, 내숭 떨지 마. 새꺄’라고 수없이 되묻는다니까.

이렇게 사람의 본성을 쿡쿡 쑤시던 만화가 드디어 완결이 났다. 1998년부터 2017년까지, 한 남자의 그칠 줄 모르는 악행을 20년 가까이 보여준 만화가 비로소 끝났다. 도대체 이 만화에서 누가 착한 놈이라고 묻는다면, 글쎄……. 선한 인물은 딱히 없다. 그 와중에 주인공은 점차 밝은색이 되어간다. 하는 짓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똑같은데, 그걸 괜히 덮어주려고 하는 거다. 이렇게 지독한 새끼도 어딘가 좋은 점이 있을 거라고 믿고 싶은 게 만화책에 몰입하고픈 독자의 심정이지 않을까. 그러니까 사람을 죽인 녀석에게까지 장점을 찾으려 하는 거지. 뭐, 우리가 자주 하는 ‘아, 걔 알고 보면 착해’ 따위의 말 있지 않나. 이정도로 날 괴롭힌 만화책이 또 있나 싶다. 덕분에 오랜 시간 꽤 즐거운 만화 생활을 했다. 갑자기 뭔가 나쁜 일을 저지르고 싶다는 충동이 들면, 당장 책방으로 달려가 군계를 보길 권한다. 세상 나쁜 짓은 다 하는 놈인데, 이럴 때 도움 되거든.

VISLA 에디터 오욱석

 

펍 │ Channel 1969 

내가 느낀 찰나의 감정을 타인에게 전달하기란 쉽지 않다. 표현을 차단하는 게 상책이라고 여기지만, 때로는 속에 담긴 것들을 뱉어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미사여구로 치장한 표현을 남발하는 내 언어를 누군가 나서서 자르지 않으면 결국, 허무맹랑한 궤변만이 남게 되는 것도 익히 알고 있다. 그래도 주변의 공감을 바란 것은 아니니까. 지금 소개하는 내 영감, ‘채널 1969(Channel 1969)’에 관한 이야기 역시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없다. 클럽이라고 부르기엔 소박한 이곳, ‘힙’이 터지는 여타 클럽과 비교해보았을 때, 피 같은 주말 밤을 맡기기에는 한 두 가지 정도 부족하다고 느꼈다. 멋에 해탈한 히피 흉내를 내면서도 늘 질척거리곤 했으니까. 멋진 여자가 얼마나 많은지 여부가 클럽의 척도가 되곤 했으니까.

아이러니하게도 그동안 오간 클럽에서는 정작 기대한 절경을 만나본 적 없다. 언젠가부터 알면서도 속는 나 자신이 한심할 뿐. 그 허무함을 인지하고 나서는 편하게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채널 1969를 찾게 되었다. 집에서 가깝고, 입장료도 없다. 아는 사람도 없어서 딱히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도 없다. 어느새 채널 1969는 혼란한 감정과 금이 간 자존감을 잠시 식히는 공간이 됐다. 뒷자리 의자에 누운 듯한 자세로 앉아 음악을 듣고 있으면 천국의 그윽한 풍경이 잠시 보이기도 한다. 별거 아니지만 나는 이런 순간들이 좋았다. 똑같은 장소, 늘 똑같은 자리지만 갈 때마다 늘 새롭게 느껴졌다. 어느 날, 여기서 그녀를 극적으로 만났으니 더욱 특별한 장소로 다가올 수밖에. 어쨌든 이곳에서 보낸 시간을 묘사하기는 쉽지 않다. 그저 이 분위기에 계속 휩쓸리고 싶다. 또 나의 공간과 그녀의 공간이 서서히 하나로 겹쳐지길 기대한다.

VISLA 에디터 이철빈

 

팟캐스트 라디오 │ 벙커 원(Bunker 1)

‘잘해보자’, ‘잘 될 거야’ 따위의 말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걸 깨달았다. 이제는 뭐가 문제인지 칼같이 파헤쳐서 ‘어디서 스트레스를 받는지’ 원인을 찾는다. 그렇게 찾다 보면 퀘스트를 달성했다는 묘한 쾌감까지 든다. 실밥을 뽑기 위해 고군분투한 것이다. 대개 문제는 내게 있었다. 그렇다면 나 자신을 잘 알아야만 고민이 줄어들 거라 생각한다. 자신을 알기 위한 노력으로 어려운 방법과 쉬운 방법이 있는데 날로 먹으면서 재밌게 자아 성찰로 빠져드는 팟캐스트, ‘벙커 원(Bunker 1)’을 비슷한 고민을 하는 이들에게 추천한다.

벙커 원은 문화, 사회, 철학 등 카테고리를 정하기 어려울 만큼 주제가 광범위하고 자유롭다. 듣다 보면, 고민해본 적도 없는 주제로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고 상상하거나 과거를 돌이켜본다.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고 나서 미래를 도출한다든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에 브레인스토밍하기도 제격이다.

벙커 원에서 나온 주제를 친구들에게 던지기도 한다. 사람들과 소통하는 걸 좋아하는 편인데 자동차가 잘 굴러가는 게 소통이라 한다면, 벙커 원은 자동차에 기름을 넣는 역할을 한다. 경제, 헌법과 같이 다소 어려운 주제도 있지만, 쇼미더머니(Show Me The Money) 혹은 프로듀스 101(Produce 101)처럼 친숙한 주제를 철학자의 눈으로 바라볼 때 신선하게 다가오는데 정말이지, 현대인에게 ‘새로운 느낌’을 주는 건 축복이다.

VISLA 컨트리뷰트 라이터 이서정

 

미술ㅣ유화 

나는 평범한 회사원이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서 지옥 같은 9호선을 뚫고 하루를 시작한다. 근로계약서에는 분명 오후 6시 30분 퇴근이라고 명시되어 있지만, 꿈같은 이야기다. 대략, 8시쯤 일이 끝나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집으로 간다. 어릴 땐 친구들 만나는 걸 좋아해서 부르면 어디든지 뛰어가곤 했는데, 지금은 일찍 귀가해 에어컨 밑에서 자갈치나 먹는 게 인생의 낙이 되었다. 이렇게 매일 똑같은 오늘만 찍어내는 세상에 살다 보니, 삶이 건조해지는 건 둘째치고 생각과 감정마저 단순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나는 유화를 그린다.

어릴 때, 붓을 잡았던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미술 시간의 숙제는 항상 누나들의 몫이었고 그림이라곤 모눈종이에 드래곤볼을 따라 그린 기억밖에 없다. 모닝글로리 미술용 지우개는 ‘지우개 따먹기’ 놀이에서 최고의 장군 같은 존재였을 뿐 끝까지 사용해 본 적도 없다. 행여, 붓을 잡고 무엇을 표현했다면 그림이라기보단 낙서라고 부르는 게 맞을 것이다.

이제 그림 그리기는 일과에서 유일하게 나 자신과 대화를 주고받는 시간이 됐다. 몇 일간 느꼈던 걸 자문하고 느낀 그대로를 그림으로 표현하는데, 이 과정에서 한참이나 잊고 살았던 자아를 발견하기도 한다. 그림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그림이 있다고 해야 할까.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과 수백 번의 대화를 주고받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정작 자신과의 대화에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다. 그러나 조금만 노력을 투자한다면 그 시간은 내면을 살피는 영감이 되어 돌아오지 않을까 한다.

회사원 박성훈

글 │ VISLA, 박성훈
커버 이미지 │ 박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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