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dy Sherman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본 나르시시즘

이 글을 읽는 순간에도 수많은 아티스트가 자신의 작품을 각종 소셜 미디어에 올리고 있다. 누구나 스마트폰을 쥐고 새로운 소식을 알 수 있는 시대, 인스타그램(Instagram)은 그야말로 범 지구적 갤러리가 되었다. 굳이 예술가의 행보를 일일이 좇지 않더라도 부지런한 아트 큐레이팅 계정 몇 개만 팔로우하면 매일 새로운 작가의 작업물을 접할 수 있다. 기발한 아이디어와 이미지가 뉴스레터처럼 부지런히 공유된다. 새로운 표현, 발상을 손쉽게 자기 것으로 흡수하는 일은 젊은 작가의 몫이라고도 느낄 수 있다. SNS 또한 젊은 작가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원로 작가들이 뒤늦게 소셜 미디어를 시작하며 자신의 이전 작품을 선보이는 경우는 있지만, 이는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기 급급한 모습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늘 소개할 관록의 사진작가, 신디 셔먼(Cindy Sherman)의 인스타그램은 정말 새롭다. 너무나도 새롭고 영리해서 놀랄 지경이다. 한번 살펴보자.

신디 셔먼은 분장한 자신의 모습을 찍는 셀프 포트레이트로 작가와 피사체를 동시에 연기했던 아티스트다. 똑같은 모습은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평생 사진에 담았던 것이 자신의 일부임은 부정할 수 없을 거다. 셀프 포트레이트로 평생을 보낸 신디 셔먼이 셀피로 가득한 인스타그램으로 이어진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이치.

그러나 신디 셔먼이 분장을 하고 철저하게 구성했던 셀프 포트레이트와 인스타그램의 셀피(Selfie)는 다르다. 셀피는 자신을 직접 보면서 찍을 수 있기 때문이다. 카메라와 자신의 간극이 극도로 좁혀진 셀피는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투영하는 거울과 같다. 물에 비친 자신을 사랑했던 나르키소스처럼 자신의 아름다움을 저장하고 공유하는 인스타그램이 신디 셔먼에겐 어떻게 보였을까? 답은 아래와 같다.

인스타그램 나르시시즘을 비꼬기라도 하듯 신디 셔먼의 셀피는 괴상망측하다. 한 마리 앵무새를 제외하고는 곁에 아무도 없다. 픽셀과 얼굴이 마구 뭉개지고 가짜 속눈썹이 붙은 사진은 스마트폰의 뷰티 앱으로 보정한 것으로 보인다. 결과물은 명백히 다르지만, 이는 자신의 ‘원판’을 더 나은 이미지로 바꾸는 데 집착하는 인스타그래머의 작업 과정과도 같다.

아름다움을 향한 집착. 타인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상대적인 미(美). 이것이 현재의 인스타그램을 숨 쉬게 한다. 카메라, 전면 카메라, 셀피, SNS, 해시태그, 인간의 나르시시즘이 만들어낸 발명품인 이 앱에 우리는 오늘도 고개 숙인다. 신디 셔먼의 셀피를 보며 나 자신의 셀피를 반추해보았다. 나는 왜 나를 기록하려 했을까? 인정하기 싫지만 나 역시 누군가에게 좋게 보이고 싶은 피사체이자 작가인 것이다. 신디 셔먼이 번거롭게 타이머를 누르던 1970년대와 달리 지금은 기술이 발달하여 누구나 신디 셔먼처럼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 세상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전보다 더 아름답길 원하고, 신디 셔먼은 여전히 그런 사람들을 꿰뚫어 보고 있다.

54년생의 사진작가 신디 셔먼은 그 누구보다 소셜 미디어를 잘 이용하고 있다. 예순을 넘긴 작가가 인스타그램을 꾸준히 하는 일도 놀라운데, 그 이미지 또한 새롭다. 합리적인 데다가 가볍고 경쾌하니, 과거와 현재를 매끄럽게 이어가는 신디 셔먼의 행보를 보며 갤러리는 그저 경탄할 뿐.

Cindy Sherman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 

이찬우
사진과 글쓰기를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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