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영감 ㅣ 2017년 9월호 ㅣ 김유정 기고

한국만큼 날씨가 변덕스러운 나라가 또 있을까. 언제 그렇게 더웠냐는듯, 다시 청명한 가을이 찾아왔다. 제법 풍성한 연휴도 기다리겠다,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9월의 마지막 날, VISLA 매거진의 영감을 소개한다. 이번에는 헨즈 클럽(The Henz Club) 스태프이자 프리랜서 모델로 활동하는 김유정이 글을 보탰다.

스컹크 │ 족제비과 모피 동물 

본디 후각이 예민한 편은 아니다. 쉰내 나는 것도 맡지 못해서 탈이 난 적 있을 만큼 무딘 사람이니. 그러나 최근 미국에 살면서 날 예민하게 만든 녀석이 있다. 그 이름하여 스컹크. 집 뒷마당에는 너구리, 포섬(주머니쥐), 청설모 등 유원지를 방불케 하는데, 한국에서는 한 번도 보기 힘든 동물이 이곳은 밤마다 출몰한다. 골프채로 허공을 저으면 알아서 겁먹고 도망가는 놈들이 있는 반면에 스컹크는 방귀 뀐 놈이 성낸다는 오만한 생각인 건지, 날 피하지도 않고 빤히 쳐다보는데 피하는 건 대개 내 쪽이다.

스컹크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수그러들면 뭘 하나. 저 스스로 다른 야생동물에게 위협을 느낀다 싶으면 심한 악취를 풍겨서 그때마다 스멀스멀 창문을 타고 냄새가 스며든다. 흡사 도시가스가 샜을 때와 비슷해 기분까지 나빠진다. 스컹크의 악취는 인간의 시력을 잃게 할 만큼 치명적인데, 아무리 틈새를 막아도 어쩔 도리가 없어 냄새가 빠질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시간에 거실에 나가서 책을 읽거나 가계부를 쓰기도 하고 빨래를 널기도 한다.

잊고 있던 할 일이 퍼뜩 생각나서 뭐든 하게 된다는 게 장점이라면 장점이다. 어쨌든 ─ 내 의사와 상관없이 ─ 미뤘던 일을 해결토록 도와주기에 이달의 영감으로 스컹크를 선정했다. 아니, 저렇게 귀여운 얼굴을 하고서 그런 악취를 풍기다니, 오묘한 배신감마저 들었지만 그 순간 다시 한번 깨달은 사실이 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않는 것.

VISLA 컨트리뷰트 라이터 이서정

넷플릭스 │ 온라인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

지금 시대는 가히 콘텐츠의 대향연이라고 할 수 있다. VISLA와 같이 텍스트와 이미지 콘텐츠를 계속 만들어내는 집단도 있지만, 인터넷 속도의 무자비한 발전에 힘입어 지식이나 끼 있는 개인이 차린 1인 미디어, 1인 방송국, 개인 퍼블리싱 플랫폼 역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크고 작은 방송 채널에서 끊임없이 다양한 프로그램이 제작되고 있으며, 수많은 제작사, 기획사, 광고회사, 대행사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는 콘텐츠 제작에 힘을 쏟고 있다. 주변의 다양한 브랜드가 제품을 제작, 판매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화보, 영상, 오프라인 행사를 끊임없이 선보이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소비자에게 콘텐츠를 소비할 명분을 제시함으로써 그들이 노린 광고효과를 누리는 것이다.

10년 사이 스마트폰이라는 존재가 우리의 삶에 깊숙이 파고 들어오면서, 콘텐츠에 시간을 쏟는 일이 투자인지, 소비인지, 낭비인지 아리송해지기도 한다. 가끔 스마트폰으로 빅데이터인지 뭔지로 나의 취향을 저격한답시고 이런저런 영상이 흘러가는 걸 보고 있자면, 아기들에게 뽀로로 같은 만화를 틀어주면 얌전히 있는 이유를 대략로 알 수 있다.

이토록 혼란스러운 콘텐츠의 홍수 속에서최고급 요트와도 같은 녀석을 만났다. 지난 몇 달간 지인이 공유해준 넷플릭스(Netflix) 계정을 통해축복이란 이런 것인가하고 느낀 것. 한 달간 넷플릭스를 통해 격파한 드라마의 리스트는루머의 루머의 루머로 시작하여비밀의 숲”, “OJ심슨 파일”, “스트레인저 씽즈그리고 뒤늦게브레이킹 배드를 모두 끝냈다. 이 모든 드라마를 보며 엄청나게 감동했다.

한글 자막이 아무렇지도 않게 뜬다는 것에 감동. 아이디를 공유받아서 이 양질의 슈퍼 콘텐츠를 무료로 즐길 수 있다는 것에 감동. 모든 드라마가 재미있으면서도 매력은 확연히 달랐다는 것에 감동. 미국 기준으로 머나먼 땅, 문화 불모지, TV를 켜면 먹거나, 싸우거나, 사랑만 하는 이곳 한국에서, 전 세계 국가 평균 엄청나게 과속 중인 인터넷 속도 덕분에 지구에서 최상위 등급에 속하는 드라마 콘텐츠를 이동 간에 스마트폰으로, 실내에선 컴퓨터로 자연스럽게 즐길 수 있다는 것에 감동. 감동 포인트는 셀 수 없이 많다. 곧 다가올 추석 연휴. 다양한 방송사에서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한다고는 하지만, 넷플릭스만 있다면 1년 내내 연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언제나 그 이상은 있다는 걸 가르쳐준 넷플릭스가 최근의 영감이다.

VISLA 그래픽 디자이너 박진우

“Planet Rock: The Story of Hip Hop and the Crack Generation” 다큐멘터리

최근 일본의 한 매거진을 통해 여러 편의 힙합 다큐멘터리를 한꺼번에 소개하는 기사를 접했다. 제목은무료 힙합 다큐멘터리 10으로, 힙합의 탄생을 조명하는 영상부터 최근 유행하는 영국 그라임(Grime) 신까지, 다양한 주제를 포괄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내 구미를 당긴 건 “Planet Rock: The Story of Hip Hop and The Crack Generation (2011)”. 제목부터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 영상은 코카인으로 미국 전역이 황폐했던 1980년대, 힙합의 탄생과 마약의 성행 간 예기치 않은 상관관계를 분석했다.

값비싼 연유로 백인만의 특권으로 여겨져 온백인 마약(White Drug)’, 코카인은 몇몇 마약 카르텔(Cartel)의 주도로 저렴한 가격에 광범위하게 유통됐고, 그때부터 이 마약은 흑인과 라틴계를 포함해 생활고를 겪는 대중에게 하나의 탈출구로 작용했다. 그들은 10달러짜리 코카인 몇 그램을 얻기 위해 어린 자식까지 내팽개쳤다. 뉴욕과 엘에이 등 대도시에서 발발한 이 유행병은 순식간에 미국 전역으로 퍼졌다. 코카인은 당시 미국 전역에 걸쳐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거대한 변화를 일으키는 핵심 문제로 대두됐다.

다큐멘터리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등장인물이었다. 실제 마약 거래에 몸담았다가 래퍼로 전향한 이들이 인터뷰 및 내레이션을 통해 1980년대 삶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스눕독(Snoop Dogg)부터 사이프러스 힐(Cypress Hill)의 비리얼(B-Real), 그리고 우탱 클랜(Wu-Tang Clan)의 르자(RZA)와 래퀀(Raekwon)까지 입을 모아 이 파괴적인 마약이 인간에게 가져온 죽음과 고통, 비애를 증언했다.

코카인은 가난하고 젊은 흑인 청년에게 입에 풀칠할 수 있는 유일한 루트였던 동시에 한순간에 인생을 몰락시키는 강력한 파괴 장치였다. 사태를 관철한 의식 있는 뮤지션들은 이를 음악을 승화시켰고, 만연했던 마약의 문제점을 가사로 꼬집었다. 가까운 가족, 친구, 이웃, 그리고 개인이 속한 사회가 겪는 문제를 비판하고 나아가 바로잡으려고 하는 의식적인 행위는 현대인이 잊고 사는 하나의 과제일지도 모른다. 비록 금으로 치장하고, 고가의 스포츠카에 걸터앉아 지폐를 뿌려대는 요즘 래퍼들에게 이를 바라기엔 무리일지라도.

VISLA 에디터 이준용

KTX  고속열차

나는 원래 경상북도 구미라는 중소도시에서 나고 자란, 소위 도시 사람들이 말하는촌년이다. 서울로 전입신고를 한 지는 올해로 3년 정도 된 것 같다. 평소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고향 이야기가 나오면 그냥 대구라고 하는데, 이건 구미가 쪽팔려서가 아니라 사람들 10명 중 9명은 구미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구미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기는 솔직히 귀찮다. 설명을 해줘도, 라고 하며 얼빠진 얼굴을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니까.

교통편도 좀 많이 구리다. 구미역이 버젓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KTX를 타려면 1시간이나 더 걸리는 김천구미역까지 가야 한다. 김천도 아니고 구미도 아닌 어쭙잖은 곳에 생긴 역이다. 심지어 그곳까지 가는 시스템도 구리다. KTX역까지 가려면 시간표를 확인하고 거기에 맞춰 정류장에서 기다렸다가 타야 하는데, 한 번 놓치면 다음 차가 오기까지도 한세월이고 심지어 요금도 비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구미를 갈 때마다 우거지상을 하며 꼭 KTX를 탄다. 엄청나게 빠르니까. 게다가 와이파이 빵빵, 콘센트 빵빵, 심지어 난동부리는 애새끼들도 없다. 무궁화호를 타면 세 시간 반이 걸리는데, KTX를 타면 한 시간 반 정도로 무려 반절이나 일찍 도착한다.

이 완벽한 KTX에서 조금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면 열차카페가 없는 게 아닐까. 내가 스무 살 때 열차카페라는 게 처음 생겼다. 4호 차 옆 칸이 열차카페였는데, 좀 짜치는 여자 캐릭터가 기차에 붙여져 있었다. 그러나 그 안으로 들어가면 설국열차 머리 칸마냥 바닥은 카펫이 깔려져 있고, 노래방 기계며, 오락기며, 안마 의자가 있는 방도 있었고, 심지어 커피부터 맥주까지 팔았다. 더욱이 그곳엔 바(Bar) 형식의 좌석이 길게 늘어져 있어 낮엔 입석러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자리를 차지했고, 늦은 밤엔 퇴근하고 집으로 귀가하는 중년 남성이 자리를 차지하곤 했다. 무궁화호는 약간 그런 쌈마이 같은 매력이 있었는데 요즘엔 운영하지 않는 걸로 알고 있다. 거기다 ITX라는 새로운 기차가 등장한 탓에 무궁화호를 타는 사람들의 수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내가 왜 지금 이 이야기를 하고 있냐면 지금 내가 KTX를 타고 구미에 가고 있기 때문이다. 또 거지 같은 김천구미역에 내려서 리무진만 목이 빠져라 기다렸다가 한 시간을 달려서 구미로 가야 하지만 그래도 존나 빠르니까. 이제 곧 나는 내린다. 서울로 돌아갈 때도 KTX를 탈 거냐고? 무슨 소리, 버스 탈 거다. 하하.

Henz 스태프 김유정

노인과 사진 │취미

버스를 기다리며 정류장에 막연히 서 있던 초점 없는 눈동자의 노인을 기억한다. 나는 그때 노인의 옆모습과 닮은 옥외 광고까지 함께 사진에 담았다. 좋아하는 음악을 찾아 듣는 일 외에는 딱히 취미라고 할 게 없던 내가 근 몇 년 전부터 관심을 보인 장르가 있다면 아무래도 사진일 것이다. 직접 사진을 찍게 된 계기는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서였지만, 지속해서 셔터를 누르고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보게 한 동력은 집 밖의 세상이 궁금한 철없는 아이의 호기심 같은 것이었다. 카메라 하나 들고 여유롭게 돌아다니는 일이 그저 좋기도 했다. 정처 없는 발걸음에 어느 정도 의무감을 지우고 싶을 때 나는 사진을 찍었다.

당신의 젊은 시절과 함께 장롱 속에 포개어진 아버지의 펜탁스 필름 카메라는 나와 함께 다시 부지런히 걸었다. 사진은 보는 방법을 가르쳐준다고 했던가. 나는 세월을 머금은 오래된 필름 카메라보다 더 오래된 것들을 찾아다녔다. 주로 노인을 관찰하는 일에 시간을 보내곤 했다. 휙 바람 한번 불면 금세 꺼질 듯한 삶.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선 내가 감당하기에는 버거웠던 노인의 익숙한 고독. 그들을 찍을 때마다 나는 양가적인 감정을 느꼈다. 사진은 짓궂은 장난이기도 했다가 삶의 죽음과 영원 그 어디쯤 걸쳐 있는 색깔을 던져주었다.

도시의 위용, 푸른 자연의 풍광, 희로애락이 묻어나는 사람 사는 이야기를 한 꺼풀 걷어내고 나면 어느샌가 현실의 뒤편에서 밀려오는 압도적인 공기를 마주할 때가 있다. 햇살 좋은 어느 주말의 낮, 한 공원에 비둘기떼처럼 몰려있는 노인들에게서 유독 거북함을 느꼈다. 렌즈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그들의 눈은 웅얼거리며 무언가 말하고 있었다. 더는 여기로 넘어오지 말라고. 자신의 삶을 안다는 듯이 쳐다보지 말라고. 그곳에서 나는 불청객이었다. 황급히 자리를 떠난 그 뒤로는 다시 그 공원에 가본 적 없다.

오랜만에 식탁에서 엄마와 밥을 먹었다. 밥을 먹다가 고개를 들어 보니 웬 낯선 노인이 앉아있었다. 수척한 목. 바짝 마른 땅처럼 갈라진 흉측한 손. 염색한 검은 머리칼로는 숨길 수 없는 세월의 고단함. 나는 한동안 찾아다니던 노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때 엄마의 사진을 찍지 않은 걸 후회하지 않는다. 이미 머릿속에 선명하게 찍힌, 나만이 간직한 그 사진도 언젠가는 자연스레 잊히길 바라니까.

시간을 붙들어두려는 인간의 노력이 때때로 잔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사진은 즐거운 기억을 불러오는 소라껍데기 같은 것이었다가도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어느새 상실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과거의 영원이자, 영원한 죽음. 사진은 가끔 나를 아프게 한다

VISLA 편집장 권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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