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산업의 근원지였던 을지로 골목. 오랜 세월만큼이나 낡은 이곳은 주변을 둘러싸는 고층 빌딩의 화려한 색감과 대조되는 회색빛의 인쇄소, 허물어진 상가가 도심 속 과거의 끝을 붙잡고 있었다. 서울시는 재개발을 통해 이 고적한 공간에 생기를 불어넣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차선책은 을지로를 청년 예술가를 위한 창작공간으로 탈바꿈하는 것. 시에서 후원한 덕분인지 약 2~3년 전부터 을지로에는 값싼 월세와 을지로만의 특수한 환경에 매혹된 영혼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밤이 되면 과거의 유령처럼 을씨년스러운 풍경을 드리우던 이곳이 비로소 현재와 공존하는 듯했다.
다양한 형태의 예술 공간으로 일변해가는 을지로에 자리한 복합 문화공간 신도시(seendosi)를 소개한다. 미술과 사진에 조예 깊은 두 명의 예술가 이병재, 이윤호가 을지로에 정착하게 된 경위와 신도시의 목적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신도시를 주의 깊게 살펴보자.
신도시를 연 계기는?
이병재: 신도시 이전 이태원 부근에서 ‘꽃당’이라는 술집을 운영했다. 그 공간에서 술도 팔고 공연도 하다가 당시 자주 오던 단골, 이윤호를 알게 됐다. 자연스레 친해지고 나서부터 곧잘 어울렸다. 꽃당을 접고 쉬는 기간 동안 이윤호와 함께 새로운 술집을 해보자는 이야기를 나눴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꺼낸 이야기가 점점 구체화됐고,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을 거쳐 신도시를 열었다.
‘꽃당’이 신도시에 끼친 영향이라면.
이병재: 신도시와 꽃당은 기획부터 다르다. 꽃당은 우연한 기회로 한정기간 운영한 술집이었다. 특별한 의도보다는 재미 삼아 운영한 면이 있다. 꽃당을 접을 무렵, 내가 어떤 공간을 만들고 싶은지 어렴풋이 깨달았다. 마침 이윤호와 함께하면 이를 실현할 수 있을 것 같았지.
신도시의 기획 의도를 알고 싶다.
이병재: 사실, 우리가 신도시 기획에 개입하는 부분은 크지 않다. 5층은 술집인 동시에 공연이나 전시를 하는 복합적인 공간이지만, 바로 아래층은 일반적인 사무실의 형태를 띠고 있다. 그곳에서 책과 음악 앨범을 만드는 등 여러 창작 활동을 이어간다. 신도시라는 이름으로 전시와 여러 외부 행사가 이루어진다. 이곳이 단순히 술집으로 존재하는 것 외에도 새롭게 파생할 만한 움직임이 있다고 믿는다. 물론, 재미가 우선이다.
이윤호: 처음에는 술집과 작업실의 공존이 목적이었다. 작업에 필요한 여러 기기를 갖다 놓고 작업 공간 겸 돈을 벌 수 있는 장소로 운영하면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신도시가 자리한 을지로는 젊은 세대가 자주 찾는 동네가 아니다. 장사에 초점을 뒀다면 이 지역을 선뜻 택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이병재: 처음엔 작업실에 큰 비중을 둬서 장사가 잘 안 돼도 괜찮을 것 같았다. 월세가 비싸지 않았으니까. 신도시 오픈 초기만 해도 월세 부담을 줄이려고 낮 시간대에 회원제 작업 공간을 운영했다. 워크스테이션 역할을 겸한 거다. 을지로 주변에 작업을 지원할 수 있는 업체가 상당히 많다. 대한민국에서 인쇄 산업이 가장 활발한 곳 아닌가.
이윤호: 병재가 꽃당 영업을 종료하고 쉬는 동안 급속하게 친해졌는데, 신도시에 관련된 이야기 역시 그때 시작됐다. 위치와 운영방식 등 생각날 때마다 각자의 의견을 꺼냈다. 마침, 둘 다 가장 좋아하는 동네가 종로라서 장소는 그리 어렵지 않게 결정했다.
이병재: 따지고 보면, 지금 신도시가 있는 거리는 종로가 아닌 중구다. 우리 딴에는 종로에서 어디가 좋을까 많이 고민했다. 여기서 또 우리의 공통분모가 있는데, 둘 다 신도시를 열기 전부터 낙원상가에 있던 서울 아트 시네마를 자주 방문했다는 점이다. 그런 연유로 서울 아트 시네마 근처를 물색했다. 처음에는 낙원상가 주변을 많이 알아봤는데, 신도시를 준비하는 도중에 서울 아트 시네마가 서울극장으로 이사했다. 서울극장 주변을 둘러보다 여기까지 온 거다.
이윤호: 서울 아트 시네마를 찾는 사람이 신도시까지 찾아 왔으면 했다.
낮에는 프리랜서, 독립작가가 일할 수 있는 공간을 대여해주기도 했다.
이윤호: 한 달 정도 운영하고 그만뒀다. 신청 받을 때만 해도 반응이 좋았는데, 다들 일이 바빠서 쉽게 나오지 못하더라.
이병재: 아래층에 작업실을 만들고 난 뒤부터는 작가나 그래픽 디자이너, 뮤지션과 함께 작업실을 완전히 공유하는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다.
각자 미술가, 사진작가로 활동 중이다. 신도시 운영과 개인 작업, 이 두 가지를 함께 진행하면서 발생하는 애로사항은?
이병재: 미술 작업을 할 때는 꽤 긴 시간, 팀의 형태로 활동했다. 지금은 잠정적으로 그만둔 상태다. 개인 전시를 안 한 지도 오래 됐다. 대신, 주로 음악 제작과 디자인을 하는데, 신도시와 관련된 일만 해도 그 양이 꽤 많아서 작업의 욕구로 생기는 괴리감 같은 건 없다.
구도심에 위치한 술집 이름이 신도시라는 점이 재미있다. 가게 이름의 배경이 궁금하다.
이병재: 순전히 간판 때문에 지은 이름이다. 우리가 이름을 정해놓고 간판을 만든 게 아니라 마음에 드는 간판을 발견한 거지. 하하. 그걸 떼어왔기 때문에 신도시라는 이름으로 결정하게 된 거다. 다른 간판을 택했다면, 지금 다른 이름으로 장사하고 있겠지. 낙원상가 맞은편에 유진 식당이라는 냉면집이 있는데, 거기 2층에 붙어있던 간판이 신도시다. 가게가 망한 뒤에도 오랫동안 간판이 남아있어서 양해를 구하고 가져왔다. 알고 보니 그 ‘신도시’는 유명한 게이 바였다.
인테리어가 특이한데, 간단하게 소개 부탁한다.
이병재: 특별한 콘셉트는 없다. 그냥 우리의 취향이나 관심사가 묻어 나오는 것들을 놔두었다. 공간과 상황에 맞춰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내고 싶다.
이윤호: 중고나라 무료 나눔이나 길바닥에서 주운 것을 가져다 놓은 게 전부다. 그렇게 실내를 채웠다.
이병재: 고물상에서 한 짐 실어오거나 완성품으로 갖고 온 물건도 있지만, 대부분 분해하고 조립해서 새롭게 만들었다. 저 긴 테이블만 해도 교회에서 의자를 얻어와 해체한 뒤 학교 걸상에 얹은 거다.
종로에서 일을 마친 중년의 회사원들도 종종 찾는다. 예상하던 반응인가?
이병재: 소위 힙하다고 하는 무리가 신도시의 초반을 채웠다. 지금도 공연이나 이벤트가 있을 때면 그런 분위기가 느껴지는 젊은이들로 붐빈다. 직장인들에게는 신도시가 ‘이색적인 술집’으로 어필하는 것 같다. 신도시 앞 ‘원조 녹두’라는 술집이 직장인을 이곳까지 이끄는 건 아닐까.
독특한 술과 음식을 판매하는데, 혹시 취향을 반영한 건가? 음식에도 조예가 있는지 궁금하다.
이병재: 장사를 시작하기 전에는 집에서 담금주를 만들어서 마시곤 했다. 종로 부근의 오랜 점포에 가면 따로 파는 메뉴는 아닌데, 주인분이 한 잔씩 서비스로 줄 때가 있다. 맛도 맛이지만 사실, 그 행위 자체가 되게 멋져 보였다. 신도시 운영 초반에는 적극적으로 담금주를 만들었지만, 지금은 못하고 있다.
각종 전시, 음악 이벤트를 진행하면서 다양한 문화의 집단과 교류하고 있는데 아티스트를 모으거나 기획하는 저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이병재: 신도시 이벤트의 반 이상이 외부 기획으로 구성된다. 이벤트 성격이 신도시와 들어맞으면 함께 진행한다. 신도시의 방향성이나 색깔이 일치할 때 그 기획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다행히 주변에 재미있고 재능이 넘치는 친구가 많아서 수월하게 운영하고 있다.
신도시가 꺼리는 유형의 집단 혹은 장르라면?
이병재: 장르보다는 아티스트의 태도가 더욱 깊게 다가온다. 그림이든 음악이든 태도가 멋진 아티스트를 좋아한다.
‘도쿄 아트북 페어’에 참여하고 일본 아티스트와 교류하면서 일본과의 접점도 만들어진 것 같은데, 어떤 영향을 주고받는지 말해줄 수 있을까.
이윤호: 주변 친구의 권유로 참여했다.
이병재: 앨범과 책을 국내에 유통하는 일은 분명 한계가 있다. 그래서 아시아 쪽도 건드려봤다. 일을 핑계로 놀러 다니기도 하고. 하하. 오는 10월, 대만에서 아트북 페어가 열린다. 여기에도 참여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아시아라고 해도 몇 사람만 거치면 다 아는 사람이더라. 대만에 방문해서 우리가 제작한 책과 앨범을 들여놓은 적이 있는데, 이걸 계기로 대만 아트북 페어에도 참가하게 됐다. 이러한 신도시의 행보에 박다함의 조언이 큰 도움이 된다.
다양한 아티스트 그룹과 함께 진행한 행사 플라이어
박다함이 신도시의 여러 기획에 참여하지 않나? 그는 음악뿐 아니라 다양한 문화에 조예가 깊다고 알고 있다. 박다함과 신도시의 화학작용은 어떤가.
이병재: 박다함과는 옛날부터 알고 지낸 사이다. 꽃당에서부터 여러 이벤트를 함께해왔는데, 우리와 죽이 잘 맞는다. 서로 얻어 가는 게 많다. 이처럼 신도시는 나와 이윤호 둘뿐만 아니라 스태프,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과 만들어간다.
신도시가 주목하는 서울의 문화가 궁금하다. 여러 가지 흐름, 그중에서도 한 지점을 꼽자면?
이병재: 별 관심 없다. 소셜 미디어에 있는 걸 자주 보지도 않고, 애써 찾지도 않아서 그런지 딱히 주목하는 것도 없다. 이미지는 이미지일 뿐이다. 그보다는 신도시가 잘할 수 있는 걸 찾아서 멋지게 하는 게 중요하다.
서울의 다양한 장면을 꾸준히 촬영하고 있다. 최근 가장 인상 깊은 장소라면.
이윤호: 신도시를 운영한 뒤로 통 사진을 못 찍었다. 예전에는 일어나면 오늘은 어느 동네를 가볼까 고민한 뒤, 버스를 타고 생경한 동네에 가는 걸 즐겼다. 요즘엔 도무지 시간이 나지 않는다.
복합 공간을 운영하면서 겪는 어려움이라면.
이병재: 기획 일과 주점을 병행하는 것이 쉽지 않다. 하나에 신경을 쓰게 되는 순간 그 나머지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최대한 술집 운영보다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활동에 더 집중하려 한다. 매출을 올리기보다는 새로운 걸 기획하고 제작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하루 중 가장 멋진 신도시의 시간대는 언제인가.
이병재: 오픈 직전.
이윤호: 신도시에서 자고 난 뒤? 창밖의 부산한 아침과 늘어져 있는 내 상황이 대조될 때 기분 좋다.
이번 지산 록 페스티벌에 ‘0시의 디제잉’이라는 타이틀로 참여했다. 신도시를 벗어난 신도시의 기획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궁금하다.
이병재: 작년 지산 록 페스티벌의 아트 디렉팅 전부를 ‘모임 별BYUL.ORG’에서 진행했는데, 그들이 우리를 추천해줬다. 올해는 CJ 측에서 제안이 왔다. 다만 내년부터는 하지 않을 예정이다. 규모가 큰 페스티벌에서 신도시를 제대로 보여주기에는 제약이 많더라. 신도시는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게 더 맞는 것 같다.
이윤호: 올해 가보니 신도시와 비슷한 느낌을 내는 곳이 여러 군데 생겼더라. 역시 대기업…
새롭게 기획 중인 신도시 프로젝트라면.
이병재: 최근 장난삼아 나온 이야기가 좀 있는데, 구체적이지 않다. 엉뚱한 장소에서 벌이는 공연이랄까. 막연하게 ‘신도시라는 곳이 없어진다면?’이라는 물음에서 출발했다. 하하. 월세가 오르거나 부득이하게 이 공간을 떠나야 할 때 신도시라는 이름으로 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생각 중이다. 책, 앨범 제작도 사실 돈이 되는 일은 아니다. 신도시라는 술집으로 돈을 벌어서 기획, 제작비를 충당하는 실정이니까. 만약에 을지로 신도시가 없어지면 큰 트럭을 한 대 사서 음악 장비와 사람을 싣고 숲속이나 강가에서 공연해볼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다음 단계를 계속 고민하는 시점이다. 어떤 흐름이나 신(Scene)의 변화, 수입보다는 구미가 당기는 일을 꾸준히 하고 싶다.
신도시는 페미니즘이나 성 소수자와 연계된 행사를 종종 진행해왔다. 앞으로도 이와 관련한 정치적인 퍼포먼스나 예술 활동을 선보일 계획인가?
이윤호: 어떤 태도를 견지하기보다는 우리의 흥미를 끄는 일을 진행한다.
이병재: 우리는 아직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인 적이 없다. 주변 친구들의 퍼포먼스가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비폭력을 위한 폭력 영화제 기획은 상당히 신선했다.
이병재: 밤섬해적단의 드러머로 활동하는 권용만 씨가 기획한 영화제다. 하하. 우리 둘 다 권용만 씨의 엄청난 팬이다. 그분이 영화를 되게 좋아해서 주변 사람들과 ‘시네마 지옥’이라는 비정규적인 영화제를 열더라. 이런 기획이 신도시와 잘 맞는다.
김윤기 x 신도시 뮤직비디오 “방 안에서”
신도시가 주목하는 예술가라면?
이윤호: 윤키.
이병재: 신도시라는 이름으로 책을 만들고 신도시에서 공연하는 아티스트.
신도시라는 공통의 목적을 두고 둘이서 어떤 방식으로 일을 조율하는가?
이윤호: 그냥 믿고 가는 거지. 하하.
이병재: 난 눈치를 엄청 보는 편이다. 둘 중 한 명이 욕심을 부리면 다른 사람이 힘들지 않나. 재미로 시작했다고는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일이 되어버리니 그 과정에서 내가 놓친 부분이 많았다. 우리는 즐겁게 하고 싶지만, 협업으로 이루어지는 일에서 예민한 상황이 생기기도 한다.
2017년, 본인에게 가장 큰 영감을 준 것은?
이윤호: 최근 본 영화, 신 고질라(Shin Godzilla).
이병재: 어릴 때는 일상에서 갑작스레 영감을 얻곤 했는데, 최근 들어 나에게 큰 영향을 준 건 딱히 없다. 굳이 꼽자면, 최근 지산 록 페스티벌에서 고릴라즈(Gorillaz)를 본 일. 아! 대만에서 굉장히 재미있는 공간을 방문했다. ‘선행열차’라는 이름의 공간인데, 레코드숍이면서 동네 사랑방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대만 1세대 디제이 할아버지와 동네 중학생 메탈 마니아가 공존하는 이상한 장소다. 1층에서는 할아버지와 손님이 아이스크림과 맥주를 나눠 먹고, 지하에서는 메탈 키드가 록 밴드 티셔츠 입고 노래를 엄청 크게 듣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별의별 사람이 모여서 어울리는 공간이지.
선행열차는 낡은 곳을 세련되게 꾸민 공간이었다. 대만의 생활양식이 느껴졌지. 여러 사람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어 나가는 느낌이었다. 주인의 마인드부터 대단했다. 한국이나 일본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스타일에 감탄했다.
진행 / 글 │ 오욱석 이준용
사진 │ 백윤범
*해당 기사는 지난 10월에 발행한 VISLA Paper 2호에 실린 인터뷰입니다. VISLA Paper는 지정 배포처에서 무료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