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101: Helmut Lang

현대 사회에서 현명한 소비자로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홍수처럼 넘쳐나는 사방의 광고와 유명인이 입고 있는 옷들, 그리고 금세 바뀌어버리는 트렌드에 현혹되기 쉽다. 물론 그대로 받아들이면 더 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패스트 패션이나 트렌드에 의존해서 소비한다면, 옷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있다고 보기도 어려울뿐더러, 얼마 지나지 않아 질려버리기에 십상이다. 상품을 만든 디자이너의 생각과 브랜드의 철학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특정한 제품을 구매한다면 당신의 옷장은 좀 더 자신만의 확고한 스타일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이는 바로 이 수업의 목표이기도 하다. ‘101’이란 숫자는 새내기 대학생이 완전히 처음 접하는 과목을 시작할 때 과목 옆에 붙는 숫자다. 말 그대로 생초보를 위한 수업을 의미한다. ‘히스토리 101(History 101)’은 역사가 깊은 브랜드는 물론 특정한 제품, 인물이 기초를 알려주는 수업으로 더는 인스타그래머 속 ‘OOTD’ 태그를 10분마다 확인하지 않아도 자신이 원하는 제품을 찾을 수 있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시대를 바꿔놓은 그의 패션

명백한 사실은 헬무트 랭(Helmut Lang)이 패션계를 바꿔놨다는 것이다. 1990년대를 풍미한 ‘헬무트 랭’의 핵심은 그가 해석한 미니멀리즘에 있다. 그의 컬렉션을 살펴보면, 전체적인 느낌은 단순해 보여도, 피스 하나하나에서 디테일한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80년대 주류를 이룬 화려하고 예술적인 옷을 지향하는 다른 디자이너와는 달리 실용적이고 심플한 자신만의 컬렉션을 구축한 그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1990년대에 이르러서다. 당시 경기침체 영향으로, 패션계에도 화려함보다는 절제된 미니멀리즘 바람이 불어왔고, 이 흐름에 헬무트 랭의 옷이 딱 맞아떨어졌다.

현대 남성 모더니즘 브랜드 속 천재 디자이너인 에디 슬리먼(Hedi Slimane)과 라프 시몬스(Raf Simons)도 헬무트 랭의 절대적 영향 아래에 있다. 실제로 그가 디자인한 당시의 옷은 이전에 없었고 지금도 유행하는, 그야말로 시대를 앞서간 의복이었다. 더 나아가 전통이나 역사 단편을 재해석하는 능력 또한 일품이었다. 이번 히스토리 101에서는 현재 패션계를 떠나 예술가의 삶을 영위하며 패션 디자이너로의 복귀 역시 불투명한 지금, 전설로 회자할 만한 커다란 업적을 남긴 헬무트 랭을 다시 살펴보기로 했다.

 

자신이 입고 싶은 옷에서 사람들이 입고 싶은 옷을 만들기까지

헬무트 랭은 1956년 비엔나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이혼한 부모 곁을 떠나 외조부모에게 보내진 그는 오스트리아 알프스 산악 지대의 한적하고 가난한 마을에서 성장한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알프스 지역에서 성장하며 자연이 주는 아름다운 풍경을 흡수하며 훗날 그가 선보일 미니멀한 디자인의 자양분을 쌓았다. 어려웠던 학창시절에 즐겨 입은 스포츠웨어와 베스트, 아노락 등의 아이템을 실제로 컬렉션에서 자주 활용하기도. 10살 무렵, 아버지가 거주하는 오스트리아 빈으로 돌아와 웨이터 일을 하면서 비즈니스 스쿨에 다니기 위해 학비를 벌었고, 당시 본인의 힘든 처지에 취향에 맞는 옷을 찾기 힘들어 원하는 디자인의 옷을 직접 제작 의뢰해서 입는다. 그렇게 제작한 옷이 친구들과 주변 사람에게 입소문이 났고, 이는 패션업계에 뛰어드는 계기가 된다. 전문적인 교육을 단 한 번도 받지 않았지만, 직관과 재능으로 패션 디자이너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그가 처음 디자이너 생활을 시작할 당시만 해도 장 폴 고티에(Jean Paul Gaultier), 칼 라거펠트(Karl Lagerfeld)와 같은 화려한 패션이 주를 이루던 시기였다. 반면에 헬무트 랭은 실제 컬렉션의 옷을 직접 입고 다닐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일상에서 무난하게 착용할 수 있는 깔끔한 옷을 선보이며 기존의 화려한 패션 풍조에 경종을 울린다. 헬무트 랭의 캐주얼한 미국 옷을 향한 집착은 계모가 그녀 아버지의 옷을 입기를 강요한 불행했던 유년 시절에서 기인한다.

“학교에서 다른 애들은 히피처럼 입었는데, 나는 청바지를 입지 못했다. 나만의 스타일을 찾는 것이 중요한 청소년 시기에 그 기회를 놓친 셈이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 이것이 내가 패션 디자이너가 된 이유일 거다. 자신의 정체성을 거부당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초 빈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스타일을 탐구하던 헬무트 랭은 1986년 오스트리아 정부 주도로 진행된 파리 퐁피두센터 전시회를 계기로 세계 패션의 중심지 파리에서 자신의 컬렉션을 선보인다. 그는 ‘Helmut Lang’ 상표를 정식 런칭하며 세계 패션의 흐름에 동참했고, 1987년 남성복 컬렉션, 1988년 뉴욕 쇼, 1990년 남성 슈즈 컬렉션 런칭을 이어가며 영역을 넓혀갔다.

 

20만 원짜리 청바지와 200만 원짜리 캐시미어 카디건

20만 원에서 200만 원을 넘나드는 다양한 범주의 가격대는 헬무트 랭의 특징. 지금도 여전히 많은 패션 하우스에 남아있는 고가 판매 관행을 따르지 않고, 모든 사람을 위한 옷을 제작했다. 이를테면, 청바지를 20만 원에 팔고, 캐시미어 카디건을 200만 원에 파는 식이었다. 당시 다른 하이엔드 브랜드의 청바지 가격을 생각한다면 혁신적인 접근이었다. 헬무트 랭의 청바지는 핵심 철학의 연장선상에 놓인 것이었다. 헬무트 랭은 누구나 리바이스(Levi’s) 501 진을 가져야 한다고 믿었고, 이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탄생시켰다.

 

새롭게 찾아간 둥지, 뉴욕

─ 10일 안에 남자 친구에게 차이는 법(How To Lose A Guy In 10 Days, 2003)의 한 장면 ─

헬무트 랭은 1997년 비엔나를 떠나 뉴욕으로 이주한다. 그는 뉴욕에서 고향과 같은 편안함을 느낀다고 말했고, 자신의 사업 기반 또한 뉴욕으로 옮기며 미국 패션계에 새로이 둥지를 튼다.

1998년 4월 예정된 그의 컬렉션은 패션계의 큰 관심을 받았고 대대적인 광고와 선전이 이어졌다. 패션 하우스 처음으로 뉴욕을 대표하는 요소인 노란 택시(Yellow Taxi)를 활용하는데, 이때 그는 ‘Helmut Lang’ 로고를 거의 모든 택시 위 광고판에 기재했다. 그 당시 영화나 드라마에도 자연스럽게 등장한 걸로 짐작해보면 얼마나 많은 택시가 헬무트 랭의 로고를 달고 다녔는지 상상이 간다.

 

당시 헬무트 랭은 뉴욕에서 컬렉션 쇼를 선보이기 3일 전에 취소하고, 최초로 인터넷을 통해 공개하는 모험을 감행했고, 이는 세계 패션 마켓 판도를 바꿀 정도로 강력한 파급효과를 낳았다. 기존 런웨이 패션쇼의 800석 게스트를 단 150명으로 줄이고 더 나아가 인터넷 기반의 쇼를 단행하며 게스트를 아예 없앴다. 일부는 스크린으로 헬무트 랭 특유의 미니멀함 속 복잡한 디테일을 확인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비판했지만, 그다음 해 다른 디자이너도 그의 방식을 따라 할 정도로 패션 시장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보여줬다.

“난 인터넷이 상상보다 훨씬 더 큰 무언가로 성장할 거라 믿었다. 그래서 바로 그 인터넷이야말로 규범에 도전하고 컬렉션을 온라인에 소개하기에 적절한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새롭게 만든 규칙

헬무트 랭은 뉴욕에서 지금까지 그의 최고의 컬렉션 리스트로 뽑히는 첫 컬렉션을 마친다. 다소 다른 도시보다 늦은 뉴욕 패션위크 기간을 문제 삼으며, 자신의 쇼를 유럽보다 한발 앞선 9월에 인터넷 생중계와 더불어 선보일 예정이라고 선언했다. 캘빈 클라인(Calvin Klein)을 비롯한 뉴욕을 대표하던 디자이너도 그의 결정을 따르기로 하면서 패션계의 오랜 전통이 깨지고 뉴욕을 시작으로 4대 컬렉션의 순서가 바뀌게 되었다.

90년대는 헬무트 랭, 그 자체였다. 그는 자신의 철학과 맞지 않는 기존 패션 규칙을 깨는 것은 물론, 지금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당시에는 파격을 선보였다. 백스테이지 사진, 각기 다른 아티스트와의 협업은 물론 이탈리아에서 수집한 일본 데님, 페인트 스플래터(Paint Splatter), 테크니컬 패브릭, 본디지 스트랩 등 헬무트 랭하면 빠질 수 없는 특이한 원단과 패턴 메이킹. 이 모든 것이 헬무트가 한 시대를 시작하고 이뤄낸 것들이다.

“나는 상표를 과시하는 옷들을 만들고 싶지는 않다. 단지 올바른 색상과 형식으로 이루어진 정확한 옷을 창조하고 싶을 뿐이다”.

 

헬무트 랭의 컬렉션은 미니멀하다. 하지만 그가 남겨놓은 옷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미니멀함 속에 디테일이 돋보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현재 컬렉터의 아이템으로 소문난 S/S 2004 시즌 마미 진(MUMMY JEANS)이 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바지에 감긴 붕대를 때고 입었다고 한다.

특히 80년대의 ‘레이버’를 위해 선보인 헬무트 랭의 1992 S/S 컬렉션은 안티 패션 무리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계기가 된다. 헬무트 랭의 슈트는 시대를 앞서가는 미래적인 느낌을 제시함과 동시에 젊음과 지적인 느낌을 함께 표현했다.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동시대 젊은이의 영혼을 대표하는 새로운 유니폼으로 인정받는다. 90년대에 이르러서 펑크와 레이버들이 새로운 창조적 계급으로 떠올랐고, 헬무트 랭이 그들의 패션으로 거듭난다.

 

과거 미니멀리즘의 새로운 변주를 선보이던 헬무트 랭이 패션계를 주도하던 1996년, 그는 질 샌더(Jil Sander), 캘빈 클라인, 프라다(Prada) 등과 더불어 1990년대 미니멀리즘의 부상에 주요한 영향을 끼친 디자이너로 평가받았다. 이들의 미니멀리즘 미학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컬렉션은 1997년 A/W, 바로 모델 케이트 모스(Kate Moss)가 등장한 컬렉션이다.

 

97-98 A/W 뉴욕 컬렉션이다. 방탄조끼(Bullet Proof Vest)를 모티브로 제작된 베스트는 벨크로를 통해 착용하는 형태로 선보였다. 1990년대 후반 헬무트 랭의 컬렉션은 단순한 형과 색채에 기초해 미니멀리즘과 순수주의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끝은 새로운 시작

1990년대 말 패션계에는 거대 럭셔리 그룹의 주도로 여러 패션 브랜드의 공격적인 인수 합병이 유행했다. 이는 당시 투자 기업과 브랜드 모두에게 이익을 가져올 장밋빛 전략으로 보였고, 헬무트 랭 또한 1999년 프라다 그룹에 자기 지분의 51%를 매각하여 브랜드 성장의 동력을 얻기를 희망했다. 프라다와의 파트너십 아래 최고급 럭셔리 브랜드로서 헬무트 랭의 변화를 추진했고, 2003년 S/S 시즌부터 헬무트 랭 컬렉션은 파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프라다와 헬무트 랭의 파트너십은 성공적인 결과로 이어지지 못했다. 헬무트 랭은 2004년 나머지 지분을 프라다에 모두 매각하고 2005년을 마지막으로 패션계를 벗어나 아티스트로 새로운 길을 걷는다.

 

헬무트 랭 이후의 헬무트 랭

패션계를 벗어난 이후 헬무트 랭의 삶은 전적으로 예술 창작에 몰두한다.

“나는 다양한 형태의 조각품을 만들기 위해 이미 발견된 물건과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가지고 작업한다. 본질적으로 추상적이지만, 인간의 몸과 상태를 일깨워주는 물리적 형태를 탐구하려 한다”.

그는 패션 디자이너이기보다는 실제 아티스트에 가까웠다. 헬무트 랭이 패션 브랜드 최초로 내셔널 지오그래피에 광고를 기재한 행보가 이를 바로 보여준다. 90년대 부흥했던 헬무트 랭을 다시 볼 수는 없겠지만, 과거의 영광을 복구하려는 브랜드 핼무트 랭의 새로운 시도는 과연 주목할 만하다. 물론 현재의 헬무트 랭은 헬무트 랭 시기의 컬렉션과는 상당히 다르다. 이들은 새로운 캠페인을 연이어 발표하며, 90년대를 살아보지 않았던 밀레니엄 세대에게 과거의 판타지를 새로 주입해 브랜드 이미지를 확장하는 중이니 말이다.

 

무의식중에 입는 옷에서 묻어나는 그의 영향력

헬무트 랭을 몰라도 사람들은 무의식중에 그의 영향이 녹아든 옷을 입는다. 헬무트 랭이 그의 레이블을 떠난 지 10년도 더 지났지만, 여전히 그의 영향력은 곳곳에서 여전하다. 그의 남다름은 옷뿐만 아니라 옷을 보여주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옷의 본질에 의문을 제기하는 그는 왜 패션인지, 왜 패션이 그렇게 정의되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패션을 어떻게 바꿀 수 있었는지 질문했고, 옷으로 보여줬다.

헬무트 랭은 자신의 컬렉션에서 기본적인 컬러 톤을 기조로, 모던하고 실용적인 의상을 발표해왔다. 현실주의자였던 헬무트 랭에게 패션의 최고 가치는 과시적인 화려함이 아니라 완벽한 재단과 소재, 일상적인 편안함과 편리함을 의미했다. 인간에게 적합하고 편한 옷을 만드는 방식이 그에게는 가장 중요한 철학이었던 것. 한 시대를 풍미했다는 표현이 부족한 그의 아카이브는 여전히 거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글 │ 김나영
제작 │ VISLA, MUSIN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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