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ㅣJ Dilla: The Best That Ever Did It

똑바로 짚고 넘어가자. 제이딜라(J Dilla)가 없었다면 힙합은 결코 지금과 같지 않았을 것이다. 절대 과장이 아니다.

슬럼 빌리지(Slum Village)의 붐뱁(Boom-bap)부터 ‘소울쿼리언스(Soulquarians)’의 일부로서 네오소울(Neo-soul) 무브먼트의 선구자가 되기까지, 딜라의 발자국은 어디에나 남아있다. 혁신의 최전선에 있던 뮤지션으로서 ━ 또한 프로듀서, 래퍼, 작곡가 그리고 가수의 기묘한 하이브리드로서 ━ 그는 매우 심오하면서도 동시에 가히 가늠할 수 없는 다양한 디스코그래피를 남겼다. 제이딜라의 삶과 음악, 영혼은 그가 만들어낸 트라이브 콜드 퀘스트(A Tribe Called Quest), 커먼(Common), 자넷 잭슨(Janet Jackson), 디안젤로(D’Angelo) 그리고 데 라 소울(De La Soul)까지 다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뮤지션의 음반에 지금 이 순간에도 절절하게 살아있다.

제이딜라의 음악적 유산이 남긴 파급력은 지금도 계속해서 커지고 있다. 2006년 2월 10일 세상을 떠난 뒤, 음악사에 남긴 그의 공헌은 서서히 세상에 그 빛을 드러냈다.

2016년 2월 7일은 제이딜라가 희소병을 앓으면서도 LA에 있는 병원 침대에서 만들어낸 걸작, [Donuts]의 발매 10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 앨범을 기리는 무수한 트리뷰트와 비트 테잎, 그리고 재해석의 결과물은 오늘날에도 이 앨범이 여전히 유효하며 현시대의 바이브와 계속해서 공명하고 있다는 걸 증명한다. [Donuts]은 그의 수많은 업적 중에서도 꼭 들어야 할 앨범으로 손꼽힌다. 발매 후 수년 만에, 이 프로젝트는 전설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Donuts]의 발매 10주년, 딜라의 타계 10주기를 맞아 우리는 이 위대한 프로듀서의 가족과 친구, 가까웠던 동료들의 말을 통해 제이딜라라는 한 인간에게 경의를 표하고자 한다. 그의 형제 일라제이(Illa J)에서부터 그의 가장 가까운 음악적 동료인 프랭크 엔 댕크(Frank N Dank)까지, 그들 모두는 전설적인 예술가 제임스 드위트 얀시(James Dewitt Yancey, 통칭 J Dilla)가 자신에게 어떠한 존재였으며 그의 에너지가 오늘날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이야기한다.

코넌트 가든즈에서 세계로 나가기까지(주: 코넌트 가든즈은 딜라가 유년기를 보낸 동네).

일라제이(ILLA J)

제임스는 영원한 저의 빅 브로이지요. 우리는 무척이나 음악적인 환경에서 함께 자랐어요. 그러니 우리의 음악적 연결고리는 내가 형의 비트에 랩을 얹기 훨씬 전부터 이어져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형과 함께한 최초의 전문적인 녹음은 13살 때였지만 사실 형과의 관계는 그저 음악적인 작업 단계 따위의 수준을 너머서까지 그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난 그저 형 제임스가 그리워요.

저는 8살, 혹은 9살 때부터 계속해서 가사를 썼어요. 그러나 그때의 저는 형 앞에서 내가 만든 무언가를 탁 내놓을만한 자신이 없었던 거 같아요. 특히나 형은 작업에서는 너무 프로였으니까요… 비로소 형 앞에서 랩 할 용기가 생겼을 때, 형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오케이, 스튜디오로 데려갈 때가 됐구먼”이라고 했지요. 형은 나를 스튜디오로 데려가기 위해 리무진에다 돈을 부쳐 집으로 보냈어요. 진짜 놀랐죠. 하하하. 그리고 나는 스튜디오에서, 오직 나를 위해 준비된 녹음 세션을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자, 이게 내 일생 첫 번째 녹음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는 나에게 어떻게 랩 하는지도 가르쳐 주었어요. 그렇다고 형이 뭔가를 엄청나게 지적하진 않았어요. 라임을 포함한 그 어떤 것도 바꾸려고 들지 않았지요. 그저 “그즈음에서 한 박자 쉬고 가면 좋을 거 같은데” 정도만 말 해줬고, 보통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을 더욱 잘 표현할 수 있도록 돕는 수준이었습니다.

그의 작업 대부분은 프로듀싱이었지만, 그는 동시에 좋은 작사가였어요. 또한 노래하기에도 좋은 목소리를 가졌죠. 소위 말하는 ‘종합 패키지’가 바로 제이딜라입니다. 프로듀싱, 노래, 랩, 작곡 그리고 공연까지 그 모든 것이 가능한 사람이었어요. 그러나 자신의 솔로 작업에서 그런 모든 매력을 보여줄 기회가 그에겐 없었습니다.

딜라의 작품 중 최고를 고르라는 건 언제나 가장 어려운 질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항상 “Runnin‘”이라고 대답해요. 그 노래가 나왔을 때를 돌이켜보면 그건 정말 경이로운 순간이었죠. 딜라에게서 쩌는 것들이 튀어나오던 시기였고, 누구라도 ‘와, 제임스는 정말로 좆되는 레벨에 있구나’라고 깨닫게 되었지요. 특히 이 노래를 들으면 수많은 추억이 떠오릅니다. 왜냐면 이 곡이 드라마 “New York Undercover”의 주제가가 되었기 때문이지요. 당시 인기가 엄청나게 많은 드라마였죠. 진짜 대단한 사건이었어요! 다들 “어이, 제임스의 노래가 뉴욕 언더커버에 나온대. 좆됐어!” 라고 했어요.

“Drop”의 뮤직비디오도 그맘때에 나왔고, 우리는 박스(The Box)에서 그 비디오를 주문했습니다. 95년에 나는 대략 9살 쯤이었는데, 사실 대충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나 알았지, 실제 깊이를 전부 가늠하진 못 했습니다. 딜라의 음악이 세상에 미치는 영향을 충분히 깨닫지 못했죠.

 

제임스를 회고하는 일은 마치 누군가의 영업 비밀을 들여다보는 기분이 들게 합니다. 그를 아는 이는 그가 참여한 슬럼 빌리지(Slum Village)의 노래들은 잘 알아도 그가 그 이후 작업한 대부분의 프로덕션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나중에서야 그의 작업을 되짚어 보고, 그가 만든 모든 음악을 다시금 체크하였지요. 가령 “워, 나는 그가 ATCQ와 작업한 줄은 몰랐네, 난 그가 이걸 만든 줄은 몰랐어. 와 씨발 이것도 딜라가 했다고!??!” 같이 말이지요.

딜라가 세상을 떠나자 비로소 조명받는 이 현상을 누군가는 부정적으로 보기도 합니다. 좀 지랄 맞긴 해도 이렇게 된 것이 오히려 잘된 일입니다. 딜라가 얼마나 내성적인 사람이었나요. 만약 그에게 엄청난 명성이 주어졌을 때, 나는 그가 그 인기와 명성을 잘 다룰 수 있었을지 감히 장담할 수가 없어요.

닥터 드레(Dr. Dre)는 랩을 한 프로듀서 중 최초로 알려져 있죠. 또 카니예 웨스트(Kanye West)가 [The College Dropout]을 발매했을 때 역시 프로듀서의 랩이라는 걸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된 또 다른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이 움직임의 시초는 저의 형입니다.

 

바하마디아(BAHAMADIA)

제이딜라는 그때도 그랬고, 앞으로도 영원히 우리 문화 최고의 사운드 디자이너일 것입니다. 전자음악 프로듀싱의 영역에서, 튠 메이킹이나 카덴스, 음색, 톤의 조화, 구조를 쌓아가는 기술까지 역사상 그 어떤 누구도 딜라의 수준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가 자기 장비들의 마스터가 되어서 성취해낸 것이란 감히 ‘탁월하다’ 따위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위대한 것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나는 그를 MC로도 굉장히 좋아합니다. 아아, 세인트앤드루스(Saint Andrews) 라이브 ─ 소울쿼리언스 이전에 그를 처음 만났던 곳입니다 ─ 를 완전히 작살내던 그를 떠올리게 돼요. 원래 슬럼 빌리지가 무대를 조지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그들이 마이크를 둘러싸더니 원을 형성했어요. 그리고 트랙이 흐르자 딜라가 나왔지요. 벌스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하여튼, 그는 흑백의 작문 노트를 꺼내어 들더니 마치 계획된 것처럼 무대 위로 등장했어요! T3와 바틴(Baatin)은 마치 안무라도 연습한 것처럼, 그의 뒤를 따라갔고요.

말할 필요도 없지만, 딜라는 나의 훼이보릿 올 타임 탑 파이브(favorit all-time Top 5) 아티스트 중 하나입니다. 몇 년 뒤, 나는 나의 [BB QUEEN] 앨범 프로젝트의 리믹스 부분에서 그와 함께 작업할 수 있는 영광을 누렸고, 또 곧 발매 예정이었던 나의 LP를 위해 그와 공동작업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때의 비트를 가지고 재지 제프(DJ Jazzy Jeff)의 스튜디오에서 그와 함께 벌스와 훅을 녹음할 기회를 잡았는데, 딜라는 그 지하 스튜디오에서 정말 뭐 배낭 메고 어디 놀러 가는 순수한 아이처럼 굴었습니다.

이처럼 그는 한 번도 자신이 우월하다는 느낌을 준 적이 없습니다. 그는 그저 디트로이트 로컬 비보이 느낌이었어요. 그와의 모든 순간은, 그가 얼마나 평범한 사람인지를 알아가는 여행과도 같았습니다. 그는 언제나 그러한 것에서 제일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놀라운 능력의 겸손한 천재. 제이딜라.

 

에릭 라우(ERIC LAU)

딜라에 관해 털라고 하면, 이 자리에서 바로 책이라도 한 권 뚝딱 써 내려갈 수 있어요. 그렇지만 좀 줄여서 말해야겠죠. 딜라는 마스터이자, 이 시대의 음악가에게 가장 위대한 교사입니다. 그는 오늘날 뮤지션들이 연주하는 방법과 음악을 만드는 방법까지도 전부 다 바꾸어 버렸습니다. 나는 그의 음악이 어떻게 나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또 그것이 나의 삶에서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를 감히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어요.

그저 내가 말 할 수 있는 전부는, 딜라의 음악을 들을 때 난 언제나 어떤 뛰어남의 경지를 넘어 정신이 소생하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여태껏 듣지 못했던 딜라의 비트를 듣는 일은 언제나 최고의 경험이었고요. 나는 항상 맨 처음 그의 음악을 접했던 그 마음으로 딜라의 비트를 듣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 땅에서 지낸 짧은 생애에 그는 우리에게 너무나 훌륭한 음악을 남겨주었지요. 딜라의 작품은 음악에 대한 그의 헌신과 또 믿기 어려울 정도로 위대한 뮤지션으로서의 작업의식을 보여주는 하나의 성서와 같습니다. 나는 그저 그가 단 하루에 해낸 것의 1/1000000이라도 할 수 있기를 기도할 뿐이에요.

딜라의 모든 가족, 또 계속해서 그의 음악을 온 세계에 전하기 힘쓰는 모든 이들에게 깊은 사랑을 전합니다.

 

B+

아주 개인적인 이유 때문이지만, 내가 찍은 딜라의 사진 중 제일 좋아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바닥에 앉아 있는 딜라와 매들립(Madlib)을 함께 찍은 이 사진이에요. 생각해보면, 우리가 일정을 조율해 딜라를 브라질로 데려갔던 일은 실로 엄청난 사건이었죠. 우리는 그때 그가 얼마나 아픈지 알지 못했으니까요. 그러나 나는 그 여행이 그에게 매우 중요했다는 것을 압니다. 마 듀크스(Ma Dukes)는 나와 에릭 콜맨(Eric Coleman)에게 그것이 딜라에게 얼마나 의미 있는 순간이었는지를 말해줬어요. 며칠 있지도 못했지만 그저 브라질에 갔다는 것만으로도 말이지요.

실제로 그는 긴급 항공편으로 집에 돌아가야만 했어요. 그런데도 이 사진은 내가 찍은 최고의 컷 중 하나입니다.

그맘때, 나는 한 뮤직 페스티벌에서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는데 페스티벌 측에서 나에게 행사 마무리를 위한 공연을 같이 준비해보자고 제안하더군요. 그들은 특히 매들립이 무대에 오르길 바랐습니다. 2002년 11월, 매들립은 영화 “Brasilintime”을 촬영하기 위해 브라질에 있었습니다. 그는 예전부터 브라질 문화에 꽤 심취한 사람이었기에 브라질 가서 음반을 디깅(Sigging)하자고 그를 설득하는 데는 그리 큰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Brasilintime“을 촬영 당시, 가장 먼저 브라질 음악을 샘플링한 사람은 바로 딜라입니다. “Saudade Vem Correndo”의 기타 프레이즈를 잘 만져서 파사이드(The Pharcyde)의 “Runnin'”을 만들었죠.

우리는 딜라가 직접 브라질에 가서 음악을 디깅하고, 또 브라질 음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내용이 필름에 담기면 얼마나 멋질까 했죠. 그리고 섭외 이야기를 할 겸 우리는 매들립과 같이 점심을 먹었습니다. 밥들 자시고 나서 매들립을 그의 동네로 다시 데려다주는 길에, 우리는 그에게 “DJ도 몇 명 데려가도 돼. 한두 명 더 머물만한 여유가 있거든.”이라고 했어요. 나, 에릭, 그리고 매들립 중 누가 먼저 말을 꺼냈는지는 기억이 안 나네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죠. 결국, 모두가 브라질에 데려가고 싶었던 인물은 딜라였습니다. 매들립이 곧바로 딜라에게 전화를 했어요. 그리고 차 안에서 우리는 모두 딜라의 흥분한 목소리를 수화기 너머 들었지요.

몇 달 후 우리는 모두 브라질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딜라는 정말 많이 아팠어요. 그러나 그는 그 쓋에 대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혼수상태에 빠진 그를 보기 위해 병원에 방문했을 때도 멀쩡한 척을 했죠. 공항 가는 길에 딜라를 픽업하던 때를 저는 기억합니다. 그리고 또 그가 밴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보며 우리가 “쟤 진짜 좆됐네” 라고 말했던 것도 기억해요. 브라질에 도착했을 때부터 그는 눈으로 보기에도 뭔가 현저히 달라졌어요. 확실히 몸이 안 좋아 보였죠. 솔직히 말하면 그곳까지의 비행이 그를 거의 죽여놨습니다. 우리는 그런 딜라를 일단 호텔 밖으로 데리고 나갔고, 그냥 호텔에서 제일 가까운 레코드숍으로 가서 디깅을 시작했어요.

 

나는 거기에서 딜라와 매들립의 사진 몇 장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호텔로 돌아온 딜라가 나와 오티스(Otis, 매들립의 본명), 그리고 에릭에게 그날 디깅한 판들을 들려주었던 순간을 기억해요. 다음날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야 했던 일은 끔찍한 비극입니다. 그런데도 같이 음악을 들은 그 짧은 순간은 정말 마법과도 같은 시간이었죠.

이 위대한 뮤지션이 친근함을 느끼는 장소에 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우리에게도 정말이지 매우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제이딜라는 몇 년 뒤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리는 2005년 4월까지 브라질에 머물렀는데 딜라는 이듬해 2월 유명을 달리했죠. 장례식장에서 마 듀크스가 말 해줬어요. “너네가 딜라를 브라질에서 돌봐주었지. 자네들은 그것이 딜라에게 얼마나 의미 있는 순간이었는지 모를 거야”. 여행이 끝난 후, 그는 브라질에 관해 말할 때마다 그게 얼마나 대단한 순간이었는지를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조금 속상한 순간이기도 해서, “딜라, 너의 생명을 그렇게 위태롭게까지 하진 마. 네가 아프면, 이 좆같은 여행 따위 안 가도 돼. 정말 하나님이 이 여행을 막을 거야”라는 심정이기도 했거든요.

그러나 딜라는 그런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에 매우 고마워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진은… 아… 그냥 존나 위대해요. 그곳에서의 며칠은 정말이지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진이에요.

나의 경우, 이러한 위대한 뮤지션들에게는 어떠한 저 너머의 무언가와 연결되고 또 그것들을 음악으로 표현해내는 특출한 능력이 있다고 추측합니다. 매들립이 이런 걸 학교에서 배웠겠습니까. 어떻게 딜라가 그런 리듬을 만들어 낼 수 있었을까요? 이건 정말 신비롭죠. 이 천재들의 특징 중 하나는, 존나 빡세게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아프리카계 미국인 뮤지션들은 진짜 열심히 들었어요. 감히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그들이야말로 그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팻 캣(PHAT KAT)

딜라와의 기억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순간 중 하나는 바로 [Dedication To The Suckers EP]를 녹음하던 때에요. 우리는 거의 90분 내내 통짜로 녹음하고, 곧바로 스트립 클럽에 갔습니다. 하하하.

 

데이브 쿨리(DAVE COOLEY, ELYSIAN MASTERS)

딜라는 내가 지금까지 본 뮤지션 중에서 가장 요다(Yoda)와 같은 프로듀서였습니다. 그와 진행한 작업 중에서 가장 거칠다, 과감하다고 느낀 점은 그가 절대 같은 걸 두 번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어요. 그는 워낙에 스킬이 출중했기에 그 어떤 것도 구현할 수 있었죠. 그러한 좆되는 스킬뿐 아니라, 녹음하고 믹스할 때도 뭐 ‘이렇게 한 번 해볼까?’라는 가정의 선택지가 전혀 없었어요. 마치 매 순간 마음의 눈으로 길이 완벽하게 그려진 지도를 보고 있었다고 할까요. 그래서 그는 항상 최소한의 스텝만으로도 ‘지도의 X 표시’까지 도달할 수 있었죠.

한 번은 같이 믹스를 하는 동안 뮤트와 드롭아웃(Mute / Dropout)을 시도한 적이 있어요. 딜라는 그저 각각의 신호들을 불러오고서, 하나하나 눈대중으로 재더니만, 드럼 소스를 조금 다듬고 곧바로 존나 정교한 스킬로다가 몇몇 트랙들을 뮤팅하기 시작했어요.

그는 질서정연하게 그것들을 다루어냈어요. 마치 신병훈련소 장애물 코스 같다고 할까요. 소스 하나를 다룰 때도, 어떤 시도를 고민하는 흔적이 전혀 없어요. 5분 동안 그는 그렇게 20개 정도를 던지더니만, 이후 아주 작은 변주를 통해 30트랙을 전부 완성했습니다. 그는 앁 백(Sit Back) 해서는 씩 웃으면서 “아 됐네…” 하는데, 뭐 씨발 1칼로리도 안 쓴 거 같았어요. 하하하. 그에겐 너무나 쉬운 일인 것이지요.

그가 너무나 그립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그의 과거 비트 위에서 작업할 때마다, 딜라는 여전히 이곳에 존재하며 우리의 음악을 함께 듣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카림 리긴스(KARRIEM RIGGINS)

딜라의 음악은 나에게 너무나 큰 영감을 주었지요. 그와 함께 작업할 기회를 얻었을 때, 아, 이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와 함께한다는 것만으로도 제겐 진짜 무한한 영광이었습니다. 그는 놀라운 사운드를 만들고 음악의 수준을 극도로 높여준 사람이에요. [Fantastic Vol. 2]의 “2u4u”의 드럼을 녹음하던 때가 생각납니다. 녹음을 땄는데, 내 느낌에는 되게 구린 테이크였어요. 미심쩍은 마음으로 컨트롤 룸에 들어가보니까, 딜라는 이미 드럼 믹스를 끝내놓았더군요. 그리고 들어봤는데, 아 씨발… 뻑킹 지니어스!!!!!!!!!

 

오노(OH NO)

딜라를 처음 만난 건 제이립(Jaylib) 비디오 촬영 때였어요. 프랭크 앤 댕크랑 와일드차일드(Wildchild)도 함께였죠. 이른 아침에 떨 한 대 때리고 나니까 되게 배가 고팠어요. 그래서 푸드 트럭에 뭐가 있나 띵이나 좀 보러 갔는데 와, 딜라가 거기서 도넛을 자시고 있는 거예요. 하하하. 거기서 우린 서로한테 깜짝 놀라서, “와 씨발, 딜라다!!!”라고 했는데 그 역시 “워 씨발, 오노잖아!!!”라고 대답했죠.

그는 이미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고, 나의 레코드 중 몇 개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를 내 차 안으로 불러서 같이 떨을 태웠어요. 적당히 몽롱해졌죠, 우리는 대뜸 차에서 샘플 챠핑(Chopping)을 시작했어요. “자자, 뭐라도 해보자”라고 딜라는 말했고, 나도 “워, 이 비트 테잎은 뭔가!?” 뭐 그렇게 말했던 거 같아요. 그렇게 그 자리에서 역사가 쓰였습니다. 하하하.

 

“The Move” 이후, 나는 줄곧 LA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매일 새롭고 멋진 것들을 찾아다녔어요. 좆되는 걸 발견할 때마다 우린 항상 딜라네 집에 들러서 그를 불러냈어요. 그러면 그는 우리에게 완전 맛탱이 가는 비트 테잎과 떼기들을 주었는데, 한 번은 나도 그에게 “나도 존나 재밌는 게임기를 구했어. 컨트롤러도 직접 만들었어”라고 했어요. 딜라는 그것들을 직접 봐야겠다고 하더니만, 말 그대로 이틀 뒤에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우리는 진짜로 마메(MAME)를 같이 했고, 나는 그에게 내가 가진 모든 아케이드 게임들을 보여줬어요. 우리는 펀치아웃(Punch-Out) 같은 아케이드 게임들을 무작위로 했어요. 그는 ‘GTA: San Andreas’ 같은 걸 하는 존나 진짜배기 게이머였어요. 나랑 게임 취향도 딱 맞았던 거예요. 그는 플레이스테이션(Play Station) 게임기를 가지고 있었고, 내 친구한테서 컴퓨터도 샀는데 그 안에는 아케이드 게임이 존나 많았어요. 아아, 나는 그가 그 컴퓨터를 가지고도 수많은 음악을 챠핑했으리라 확신합니다.

 

케이트라나다(KAYTRANADA)

나에게 딜라는 역사상 최고의 5인 중 한 명이에요. 나는 트라이브 콜드 퀘스트의 “Find A Way”를 들으면서 딜라를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이 곡을 들으면 저는 거의 최면에 걸렸고, 실제로도 이 곡은 취향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어 준 음악입니다. 나중에 누가 나한테 비트테잎 “MPC3000”“64 Beats”를 소개해줬는데, 내 생각에는 여기에 그의 베스트가 전부 담겨 있는 것 같아요. 고등학교 내내 정말 매일 이 테이프들을 반복해서 들었어요. 그건 정말이지 그전까지 세상에서 감히 들어본 적도 없는 좆되는 것이었습니다. 뭐 인터넷에는 수많은 카피캣들이 있지만, 그 누구도 근접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딜라의 음악은 너무나 위대해서, 난 시험공부도 할 수가 없었어요. (주: 핑계 좋다…) 공부 따위 전혀 안 해도 충분했어요. 난 대신 딜라를 공부했습니다. 하하하.

 

레프토(LEFTO)

2005년 12월 8일, 나는 딜라와 레트마틱(DJ Rhettmatic), 프랭크 앤 댕크와 팻 캣을 벨기에의 겐트(Ghent)로 초대했어요. 이것이 딜라의 마지막 투어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가 휠체어에 앉아서도 여전히 마이크만 쥐어주면 전부 다 죽여버렸던 것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하하하. 그는 미국으로 떠나기 전 이틀 정도 더 머물렀는데, 하루는 그의 투어 매니저가 나에게 전화해서 호텔 방에 내 MPC를 딜라에게 좀 가져다줄 수 없는지를 물었어요. 나는 검은색 MPC 3000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은 바로 딜라의 훼이보릿 드럼 머신이었지요.

딜라는 정말 아팠고, 장갑을 낀 채로 침대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MPC를 보는 순간, 마치 그는 다시금 힘을 얻은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일어나더니 방에 있는 책상으로 몸을 옮겼어요. 그는 단출한 아이팟(iPod) 사운드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는데, 곧바로 MPC에 케이블을 연결했어요. 그러더니… 씨발, 비트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사진 속에서 딜라가 목에 두르고 있는 티셔츠가 보이지요. 티셔츠에는 ‘Get Well Soon Dilla(어서 쾌차해 딜라)’라고 쓰여 있고, 그날 밤 그의 방에 있던 모두가 거기에 사인했어요. 나는 이것을 무대에서 그에게 건네주었습니다.

 

킹 브릿(KING BRITT)

대략 1999년이나 2000년이었던 것 같아요. 당시의 나는 필라델피아에 있는 래리 골드(Larry Gold)의 스튜디오에서 “Sylk130 Re-Member’s Only”를 작업하고 있었어요. 커먼과 아미르(Ahmir)는 모두 제임스 포이저(James Poyser)의 스튜디오에 있었지요. 제임스는 피아노와 보코더로 내 앨범에 참여했고, 커먼은 그의 보코더를 듣고 “와~” 하며 감탄했어요. 제임스는 히트하기 전까지 항상 KORG VC10을 어디선가 빌려왔었어요.

그때 나는 처음 딜라를 보았습니다. 그는 소파에 앉아 있었고 나는 그에게 자신을 소개했어요. 그는 존나 쿨했어요. 제 곡 “When The Funk Hits The Fan”을 아주 좋아한다고 말했어요. 당시 그는 제임스 및 그의 크루와 함께 [Electric Circus]를 작업하고 있었습니다. 딜라와의 만남은 뭐랄까요. 굉장히 겸손해지게 되는… 그런 성스러운(?) 경험이었습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딜라의 트랙은 “Purple (J Dilla/Ummuh Remix)” 입니다. 뭐 듣는 순간 좆됐다고 봐야죠.

 

프랭크(FRANK N DANK)

1986년에 딜라를 처음 만났어요. 나는 6학년이고 그는 7학년이었어요. 그맘때 나는 딜라의 이웃집으로 이사했는데 그와 댕크 그리고 다른 호미들은 이미 초등학교 때부터 서로 알던 사이였어요. 중학교 당시 딜라는 아직 비트를 만들지 않았죠. 그래도 우리의 우정은 그때부터 그렇게 흔히 베스트 프렌드가 되었습니다.

그가 처음 비트를 만들었던 순간은, 나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입니다. 당시 나와 그는 비트를 만들기 전부터 파티에서 디제잉을 하곤 했어요. 그는 나에게 디제잉을 가르쳤고, 그리고서 우리는 여러 파티를 전전했지요. 뭐, 이것이 우리가 고등학교 때 돈을 벌던 방법입니다.

하여튼, 그즈음부터 그는 서서히 비트를 만지작거렸어요. 아무 장비도 없었는데 말이지요. 진짜로 그저 듀얼 카세트 하나 가지고서 비트를 만들어댔어요. 하하하. 거기에서부터 점차적인 진전이 있었습니다. 또 우리는 모두 댄서였고 당연히 파티에서 춤을 많이 췄어요. 저와 딜라는 종종 친구들의 파티에서 DJ도 맡았고요. 거기에서 또 다른 진척이 있었죠. 슬럼 빌리지는 어느 순간 오래 디제이만 하던 나를 믿고 마이크를 주었습니다.

 

딜라의 프로덕션 중 뭐가 최고인지 꼽을 수가 없어요. 그러나 “Breathe And Stop”을 진짜 존나 많이 들었어요. 이건 진짜 놀라운 프로덕션입니다. 정작 발매된 큐 팁(Q-Tip)의 노래는 큐 팁의 믹스가 들어가서 딜라의 원본과 약간 다릅니다. 딜라의 오리지널 쓋은 좀 더 지저분합니다. “Breathe and Stop”은 진짜 절 미치게 만들어요.

딜라의 수많은 위대한 순간들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는 것은 굉장한 행운이었습니다. 우리는 1999년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함께 뉴욕 맨해튼에 있었어요. 딜라는 커먼과 함께 [Like Water for Chocolate] 믹싱을 하고 있었어요. 그러던 중 그는 큐 팁으로부터 전화를 받습니다. “요, 어딨어 친구? 나 소니 스튜디오야. 여기로 올래? 너한테 보여줄 게 있어”. 나와 딜라는 택시를 타고 스튜디오로 갔지요. 그때 당시 큐 팁은 [Amplified]를 녹음하고 있었고, 트라이브 콜드 퀘스트는 [The Love Movement]를 작업하고 있었습니다.

스튜디오로 넘어간 나는 거기서 딜라가 나한테 음악을 들려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우어어아어어어 큐 팁의 신곡을 듣는다니! 기대감에 차 있던 나를 더욱 놀라게 할 일이 벌어졌죠.

스튜디오에 들어가는 순간, 큐 팁은 “자 깜짝 놀랄만한 게 있어. 너에게 보여주고 싶다”라고 했어요. 그를 따라 스튜디오 안으로 가 보니까, 와… 자넷 잭슨(Janet Jackson)이 소파에 앉아 있더라고요. 그때 딜라와 자넷은 한 번도 녹음을 같이 해 본 적이 없었어요. 그녀는 어마어마한 두께의 야한 책을 가지고 있었고, 그녀와 그녀의 친구들은 거기 앉아서 그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완전히 맛탱이 가는 순간이었어요. 난 그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지요. TV에서 보던 그녀의 목소리와 웃음, 그리고 냄새까지… 그 모든 게 바로 내 눈앞에 있었어요. 난 그녀를 응시하는 것을 멈추기 위해서라도 억지로 보드를 봐야 했어요. 하하.

그뿐 아니라, 큐 팁은 딜라가 참여한 그의 새 앨범을 플레이했어요. 그리고 이 놀라운 순간에, 딜라는 그저 칠링하고 있었죠. 그는 평소의 모습 그대로 자넷 잭슨과 노가리를 까고 있었어요. 나는 그저 “헤이 니거, 너 지금 그 자넷 잭슨이랑 다이 다이로 노가리를 까는 거야? 씨발 말이 돼!?” 하고 있었는데 말이지요.

 

큐 팁과 알리(Ali Shaheed Muhammad)는 “Got Til It’s Gone”의 오리지널 곡을 작업했어요. 그러나 그 곡의 저작권자가 되진 못 했는데, 당시의 뮤직 비즈니스라는 게 얼마나 구렸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하여튼, 딜라가 그 곡의 리믹스를 했어요. 그가 뭔가를 리믹스 한다는 건 아주 희귀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그의 리믹스를 두 장의 싱글에 실었습니다. 이것이 이 전설의 리믹스가 탄생한 스토리에요.

 

댕크(FRANK N DANK)

딜라는 1주일에 7일씩 스트립 클럽에 가는 걸 좋아했어요. 하하하. 그건 단순한 유흥거리가 아니었어요. 스트립 클럽은 마치 에너지원 같다고 해야 할까요. 우리는 초콜릿 시티(Chocolate City)라는 스트립 클럽에서 [Welcome 2 Detroit]를 작업했어요. 우리는 곧잘 좋은 시간(?)을 보내고 바로 스튜디오로 향하곤 했죠. 스튜디오에 도착하자 딜라는 곧장 헤드폰을 끼고서는 “어이 프랭크, 댕크, 뭐 좆되는 것 좀 나오겠어?” 하고 물었지요. 그리고서 그는 헤드폰을 벗고서, 서브(Sub) 버튼을 눌러 음악을 틀어주면, 우린 “갓 댐…” 하고 존나 뻑이 간 채로 아침을 맞이하는 겁니다. 하하.

그렇게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서, 딜라에게 떨을 한 대 말아줍니다. 음악을 틀고, 믹스하고, 또 밖으로 나가지요. 우리는 한 밤에 두 곡씩 녹음하고, 술 좀 까고, 다음 날 아침까지 믹싱하고 마스터링을 했어요. 그리고 나갑니다. 우리는 몇 년간 이런 식으로 지하실로 기어들어서 작업하다가, 다시 나왔다가를 반복했습니다. 피와 땀, 그리고 눈물이 서려 있지요.

당시 딜라의 스튜디오는 그의 크립(Crib, 집을 의미하는 은어)에 있었어요. 아무 모뻐커들이나 데려올 수 없었습니다. 오직 초대된 사람만 들어갈 수 있었어요. 우리가 딜라의 크립에 스튜디오를 만든 이후로는, 스튜디오에 동네 뜨내기 니거들이 감히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진짜로 특권을 받은 사람들만 출입했죠.

 

또 다른 이야기는, 딜라와 함께한 첫 뉴욕 여행에 관련된 이야기에요. 커먼이 [Chocolate for Water]를 만들고 있을 때였는데, 스튜디오 세션에 갔더니만 세상에. 거기에 누가 있었는지 짐작이나 가십니까?

일단 시작은 전설의 엔지니어 밥 파워스(Bob Powers)입니다. 거기에 나의 MCA 레코드에서 A&R을 맡아준 웬디 골드스타인(Wendy Goldstein)도 있었고요. 블랙 소트(Black Thought), 퀘스트러브(?uestlove), 재규어 라이트(Jagure Wright), 하이택(Hi-Tek), 탈립 콸리(Talib Kweli), 커먼 그리고 딜라가 있었죠. 하하. 여기서 끝이 아니에요. 문을 열면서 들어오는 사람은 누구였는지 아세요? 씨발 데이브 샤펠(Dave Chappelle)이었어요!!!!!!!!! 딜라는 그저 씩 하고 미소 짓거나 소리 내 웃고 있고. 잠깐 밖에 나가보았죠. 맙소사, 거기에서는 버스타 라임즈(Busta Rhymes)랑 캐이스(Case)가 그냥 막 칠링하고 있는 거에요. 난 존나 완전 뻑이 갔어요. 말 그대로 맛탱이가 가 버렸는데, 그래도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애썼죠.

딜라는 그냥 웃으면서 말했어요. “I told you nigga”.

원문 J Dilla: The Best That Ever Did It – BOILER ROOM 보러가기


번역 │ 김선중

*해당 번역 기사는 영국 보일러룸 측에 정식 허가를 받고 진행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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