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NIOR CHEF

한국 힙합 크레딧에 한자리를 꿰찬 프로듀서 주니어 셰프(Junior Chef)는 다소 독특한 이력을 지녔다. 그는 도끼, 박재범 등 내로라하는 국내 힙합 뮤지션의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또한, 자체적으로 기획한 파티 브랜드 구찌버거(Gucciburger)를 비롯해 세계적인 음악 축제, 사우스 바이 사우스웨스트 페스티벌(South by Southwest Festival, 이하 SXSW)뿐만 아니라, 보일러룸(Boiler Room) 등 국내외 굴지의 음악 프로그램에 이름을 올리며, 입지를 공고히 했다. 가장 특기할 만한 점은 국내외 리스너에게 이름을 알리게 한 트랙, “It G Ma”가 본인을 가장 괴롭혔다는 사실이다.

시간이 지나고 다양한 국내 래퍼들과의 작업으로 한층 더 성숙해진 그가 마스터 셰프로 향하는 길은 어떤 모습일지 인터뷰를 통해 확인해보자. 그는 현재 그간의 애피타이저 격 행보를 뒤로하고 진정한 메인 디쉬, 첫 번째 정규 앨범을 매듭짓고 있다.

 

 

어릴 적 어떤 학창시절을 보냈는지 궁금하다. 사고치고 다니는 학생은 아니었을 것 같다.

부모님은 흔히 말하는 좋은 대학에 가길 바라는 학구열이 높으신 분이었다. 집이 그리 잘사는 편도 아니었는데, 유명 학원가가 몰려있는 분당으로 이사 갈 정도였으니까. 큰 지출은 대부분 학원비로 나갔다. 부모님의 기대를 떠나 나 역시 공부하길 싫어하는 타입의 학생도 아니었다. 반에서 상위권이었고, 사교성도 나쁘지 않았다. 나름대로 전교 부회장을 맡기도 했으니까. 동네를 벗어나 야탑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새로운 문화를 접했다. 분당 지역을 비롯한 성남, 경기도 광주 등 다양한 지역에서 오는 친구들을 만나며 새롭게 알아간 것들이 있었다.

 

음악에 심취하게 된 계기는?

중학교 때, 같은 반에 키도 크고 가장 느낌이 좋았던 친구에게 CDP를 빌렸는데, 거기서 제이지(Jay Z)의 [The Blueprint]가 나왔다. 버즈, 엠씨더맥스와 같은 당대 유행하던 가요와는 달랐다. 힙합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그 앨범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그렇게 제이지를 시작으로, 린킨 파크(Linkin Park), 에미넴(Eminem)을 알게 되며 힙합에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2학년 때, 힙합 음악에 심취한 ‘안승’이라는 친구를 사귀며 국내 힙합 신(Scene)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 뒤로 힙합 공연을 많이 보러 다녔다. 일리네어 레코즈(Illionaire Records)의 첫 공연을 비롯해 숱한 행사를 놓치지 않았지. 막연히 저들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도 해봤다.

 

실제 요리를 배웠다고 들었다.

수능 점수가 기대한 만큼 나오지 않아서 재수를 택했다. 그때 ‘4년제 대학교에 입학하면 내가 행복해질까?’라는 의문이 들어서 전문적인 직업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릴 적 친구 집에 가서 가끔 요리를 해주면 친구는 물론 친구 할머니도 인정해줬으니 꽤 자신 있는 편이라고 해야겠지. 그렇게 어릴 적부터 소질을 보인 요리를 전공으로 한국관광대학교에 입학했다. 학교에 들어가고 나니 동기인데도 벌써 수상 경력이나 자격증의 개수가 나를 훨씬 뛰어넘은 이들이 많았다. 그때 자극을 받아서 열심히 했다.

그렇게 1년을 미친 듯이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도저히 못 하겠더라. 그 1년은 거의 ‘마스터 셰프’ TV 프로그램이었다고 보면 된다. 매일 새벽부터 일어나 실습 준비하고 요리하고 교수의 평가를 받는 나날이 반복됐다. 그러다 실습을 나가보니 그건 불 앞에서 하는 헬스와 다름없었다. 정해진 시간보다 무조건 1시간을 일찍 출근해야만 했다. 정시 출근이라도 할 때면 직원들의 고문이 시작된다. 온갖 심부름을 시키면서 괴롭히는 거지. 요리를 좋아했기에 버텼지만, 그 생활에 회의감이 들 때쯤 음악을 만들어봐야겠다고 느낀 것 같다. 어울리기 힘든 그들만의 회식 문화를 겪으면서 더 음악에 집착했다.

 

요리에서 음악 프로듀서로 방향을 급선회한 계기라면?

추운 겨울날, 1인분에 8~9만 원짜리 뷔페에 실습 나갔다가 몸과 마음이 지친 채로 버스 정류장에 서 있을 때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힙합을 알려준 친구 안승을 우연히 만났다. 내심 그 친구의 소식이 궁금했는데, 오랜만에 만나니 엄청 반가웠다. 근처 카페에서 서로 근황을 묻다가 자연스레 음악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당시 내가 빠져있던 치프키프(Chief Keef), 하이라이트 레코즈(Hi-Lite Records) 컴필레이션 앨범을 이야기했다. 한창 음악을 향한 열망이 가득 찰 때여서 어떻게 하면 음악을 만들 수 있는지, 이런저런 고민도 털어놓았지. 그 친구 역시 음악을 좋아하고, 또 랩을 하는 친구였으니 뭔가 해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며 실행할 수 있는 계획을 짰다. 믹스테잎이라는 목표를 세운 거다. 그간 벌어놓은 돈으로 아이맥을 사고, 로직 프로(Logic Pro)도 배웠다. 그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준비를 해나갔다. 그날이 인생을 바꾼 계기가 되었다.

 

‘쇼미더머니’에 래퍼로 참가한 이력이 있다고 들었다.

쇼미더머니 시즌 1에 참여한 적 있다. 막 심도 있는 가사를 쓴 건 아니고, 음악을 많이 들었으니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 당시 프로듀싱에 매진할 때였는데, 친구와 믹스테잎을 내려고 준비하다가 흐지부지되어가다 보니 급한 마음에 그냥 랩까지 해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뭐가 됐든 잡히는 대로 할 때였으니까. 결과는 물론 좋지 않았다. 하하.

 

비교적 늦게 음악을 시작한 시점에서 내공을 쌓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궁금하다.

‘쇼미더머니’가 막 인기를 얻을 때쯤 다행히도 내가 만든 음악이 주변에 들려줄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그때 백경민 선생님에게 레슨을 받았다. 살면서 그렇게 집중해본 시기가 없었다. 그때 요리와 프로듀싱을 둘 다 하던 때였는데, 쉬는 시간과 화장실에 갈 때도 프로그램을 공부했다. 영 찹(Young-Chop), 제이토벤(Zaytoven) 등 프로듀서들의 비하인드 영상도 전부 봤다. 장면을 일일이 캡처하면서 그들이 어떤 가상 악기와 프로그램을 쓰는지 확인했지. 돈이 없으면 빌려서라도 프로그램을 샀다.

 

‘Junior Chef’라는 활동명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겼나.

“HELIUM”을 낼 때는 본명으로 했다. 키스 에이프(Keith Ape, 본명 이동헌)가 키드 애쉬(Kid Ash)였던 시절, 그는 “Psycho”를 내기 직전이었는데 키드 애쉬가 아닌 이름으로 내고 싶다고 하더라. 그즈음 서로 작명에 관한 아이디어를 주고받았다. 나도 그때 이준석이 아닌 새 이름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때 키스 에이프가 활동명이 하나 필요하지 않겠냐며 이름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내 이름이 ‘준석’이니까 준(Junior)으로 가는 게 어떠냐고. 당시 나는 요리도 겸업할 때고, ‘마스터 셰프’에 빠져있던 때라 셰프(Chef)라는 단어를 붙여서 ‘Junior Chef’가 되었다.

 

당시 국내에서 생소하던 트랩에 푹 빠졌다. 트랩이 한국 힙합 신에 큰 영향을 줄 거라 생각했는지?

당시 한국에 트랩을 하는 뮤지션이 거의 없었다. 아무도 안 하는 걸 가져와야 오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해외 젊은 뮤지션들이 샘플(Sample)이 아닌 FL 스튜디오로 작업하고 그걸로 성공했다는 걸 알았다. 웹진 힙합 디엑스(Hiphop DX)를 보며 트렌드도 살폈다. 동갑내기 프로듀서 메트로 부민(Metro Boomin)이 기숙사에서 비트 만드는 영상을 보고 비교대상을 그로 설정했다. 메트로 부민이 유명하지 않을 때부터 지켜봤는데, 그는 구찌 메인(Gucci Mane)과도 협업하고, ‘19 & Boomin’이라는 프로덕션 팀도 만드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처음 프로듀서로 얼굴을 알린 건 언제인가? 주니어 셰프의 비트를 어떤 래퍼들이 탐냈는지도 궁금하다.

내가 국내 유일무이한 트랩 프로듀서라고 믿으며 칼을 갈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하이라이트 레코즈 컴필레이션 앨범 [Hi-Life] 선공개 싱글 “살아남아”를 듣자마자 패닉이 왔다. 인정할만한 트랩이었다. 그 곡의 프로듀서, 홀리데이(Holyday)가 누군지도 궁금해졌다. 그러고 나서 하이라이트를 비롯해 국내외 약 300명의 래퍼에게 내 비트를 보냈다. “설마 진짜 연락이 오겠어”라는 심정이었는데, 새벽쯤 래퍼 몇 명에게 답장이 왔다. 버벌진트(Verbal Jint), 오케이션(Okasian), 도끼(Dok2)와 같은 래퍼들이었다.

 

코홀트(Corhort) 그리고 하이라이트 레코즈(Hi-Lite Records)를 만나며 많은 곡을 뽑아냈다.

처음 내가 비트를 뿌렸을 때, 오케이션이 다음 앨범에 쓰고 싶다고 했다. 며칠이 지나 홍대 네이키드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고 클럽에 들어갔는데, 코홀트 멤버 대부분 클럽에 있더라. 그 뒤로 오케이션과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비트를 몇 개 더 보냈다. 그중 하나가 “HELIUM”으로 앨범에 실렸다. 그때 행당동에 있는 하이라이트 레코즈 스튜디오에 처음 가봤다. 거기에 제이올데이(JayALLday), 레디(Reddy), 팔로알토(Paloalto), 허클베리피(Huckleberry P)가 있었다. 특히나 음악을 잘한다고 생각한 하이라이트 레코즈 스튜디오에서 그들과 함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할 정도였지. 레이블 대표인 팔로알토와 곡을 믹싱할 때라 더 긴장했다. 제이올데이는 옆에서 술병을 든 채로 일본어, 영어를 섞어 쓰다가 다시 한국어로 말하곤 했다. 굉장히 낯선 경험이었다. 방구석에서 비트만 만들다가 나와서 그런지 그 분위기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이런 게 힙합인가 싶었다. 거기서 키드 애쉬 시절의 키스 에이프를 처음 만났다.

 

Keith Ape – It G Ma M/V

커리어에서 키스 에이프 그리고 “It G Ma”를 빼놓을 수 없다.

알고 보니 키스 에이프와 나는 같은 지역에서 학창시절을 보냈고, 집도 가까웠다. 그래서인지 서로 공유할 것도 많았고, 왕래도 잦았다. 당시 그의 스튜디오를 처음 가봤는데, 위치는 죽전 한 아울렛 주차장에 커다란 컨테이너 박스 여러 개로 만들어진 곳이었다. 러프하긴 해도 나름 방음 시설이 되어있으니 여기서 밤새 작업해보면 될 것 같았다. 그러고 나서 내 장비를 그의 스튜디오에 셋업했다. G2와의 협업 트랙인 “Space Ninja”, “Psycho”도 그 스튜디오에서 만들어졌다.

 

“It G Ma”가 알려지면서 오지 마코(OG Maco)의 트랙 “U Guessed It”과 비슷하다는 평을 들었다. 어떻게 만들어진 곡인가?

“It G Ma”는 오케이션이 어느 날, “U Guessed It”을 들려주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이 곡이 바로 넥스트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런 곡을 만들어달라고 나와 키스 에이프에게 부탁했다. 키스 에이프 역시 오케이션의 곡, “소문내(Spread the Word)” 프로듀싱을 맡기도 했고 기본적으로 비트를 만들 줄 알았으니 우리 둘에게 주문한 거지. 우린 우리보다 나이도 많고, 음악적인 비전도 그릴 줄 아는 오케이션의 말을 잘 따랐다. 우리는 오지마코의 노래에서 착안해 멜로디를 함께 완성하고 내가 드럼과 베이스를 넣어 초안을 만든 후 데모 녹음을 시작 했다. 키스 에이프의 스튜디오에 대걸레가 있었는데, 그걸 분리해서 마이크를 고정한 뒤 겨우 녹음했다.

처음 훅은 “It G Ma”가 아니라 “Bitch You Not”이었다. 이름이 바뀌게 된 계기는 당시 코홀트에서 제이올데이로부터 시작된 “잊지마”라는 농담 때문이다. 거기서 착안해 키스 에이프가 “Bitch You Not”을 “It G Ma”로 녹음했다. 오케이션에게 주려고 한 곡인데 훅과 벌스까지 키스 에이프가 해버리니까 오케이션이 그냥 이거 키스 에이프 이름으로 내자고 했다. 피처링 래퍼를 고민할 때, 제이올데이가 코오(Kohh)와 루타(Loota)라는 래퍼가 현지에서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니 같이 해보라고 제안했다.

코오 측 회사는 코오와 한국 뮤지션의 첫 합작이다 보니 무료로 풀어서 더 많은 이들이 듣길 원했다. 어쨌든 모든 래퍼들의 벌스를 받고 난 뒤, 지루해질 수도 있는 비트를 계속 바꿔가면서 곡을 완성해나갔다. 이 곡이 정식으로 공개된 날이 바로 케이크샵(Cakeshop)에서 진행한 ‘데드앤드(DEADEND)’ 파티 때다. 데드앤드 크루가 코오와 루타를 섭외하면서 “It G Ma”가 라이브로 펼쳐졌다. 반응은 처참했다. 망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 곡을 풀기 직전이라 많이 걱정했다. 초반에는 반응이 아주 미미한 수준이었으니까.

 

시간이 지나자 해외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정작 많은 이들이 주목한 인물은 코오였다. 데프잼 레코딩스(Daf Jam Recordings)에서 우리를 찾는다는 이야길 듣고 들뜬 마음으로 기다렸는데, 키스 에이프가 시무룩한 표정을 하고선 그들이 코오와 루타를 찾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 연락의 주인이 프랭크 오션(Frank Ocean)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더 의기소침해졌지. 그들이 곧 영국에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시간이 흘러 프랭크 오션의 트랙 “Nikes”에 참여한 코오 버전의 리믹스를 접했다. 안타까웠지만 버텨내야 했지. 정신을 다잡고 키스 에이프와 펜션에 가서 며칠씩 작업하고 그랬다.

 

“It G Ma”가 미국에 진출하면서 다시금 기회가 왔다. 그 과정이 그리 순탄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당시 상황을 설명해달라.

그 뒤로 거짓말처럼 희소식이 들렸다. 미국에서 우리를 찾는다는 연락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알게 된 이야기지만, 당시 하이라이트 레코즈 계정으로 연락이 많이 왔다고 하더라. 트위터, 인스타그램을 비롯해 정말 많은 이들이 찾았다. 래퍼가 아닌 프로듀서인 나에게도 연락이 닿았으니까. 그때 분위기가 뒤집어졌다. 실제로 “It G Ma” 리믹스를 내고 싶다며 계약서 한 통이 날라왔다. 오스카(Oscar)의 주도로 미국 계약이 성사되었다. 영어와 법률에 까막눈이었던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떤 계약인지 파악하지 못했다. 단지 기억하는 부분은 “It G Ma” 리믹스와 관련된 비트의 권리금 차원으로 5000불을 받아서 절반을 나눠 가졌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우리는 미국에 가게 되었고, 한 달간 엘에이, 뉴욕, SXSW 공연을 통해 새로운 기회를 만났다. 유튜브에서만 보던 뮤지션을 두 눈으로 봤다는 게 가장 놀라웠다.

 

“It G Ma” 크레딧에 ‘Junior Chef’ 이름이 빠진 채 올라간 경우가 있더라. 소문이 무성하던 코홀트 그리고 키스 에이프와의 관계는 요즘 어떤가?

지금은 자주 왕래하지 않는다. 래퍼가 아닌 형들과는 간혹 연락한다. 사실 이 인터뷰 내용이 보는 이들에게 어떤 식으로 해석될지 우려되는 부분도 있다. 따라서 최대한 감정은 배제하고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겠다. 오스카는 코홀트 멤버와 나를 비교하며 장난치곤 했다. 스타일이나 외모와 같은 외향적인 부분을 많이 언급했다. 또한 코홀트에 들어오려면 10명에게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종종 했다. 그는 나보다 나이도 많고, 요리를 좋아하고, 이성적인 사람이라 공통점이 많다고 느꼈다. 그래서 자주 대화를 나눴다. 물론, 키스 에이프와도 스타일이나 외향적인 부분에 관한 의견을 주고받았지만, 오스카는 장난이 과한 편이었다.

“It G Ma” 리믹스 계약금이 책정되고 나서 작곡비 분배 문제로 키스 에이프와 마찰이 생겼다. 그는 자신이 50%보다 더 많이 가져가길 원했다. 다행히 제이올데이가 서로 친구 사이니 반반으로 나누자고 설득하면서 이야기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이 곡에 관련된 이해관계자가 얽히고 설키며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까지 치닫았다. 나중에는 내 이름을 “It G Ma” 리믹스의 작곡자에서 빼고 아예 편곡자로 넣으려고 했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제이올데이는 저작권 미등록 상태였고, 코오와 루타는 일본 사람이라는 이유로 제외됐다. 오케이션과 내가 10%씩, 키스 에이프가 80%였다. 편곡을 합쳐도 20%가 안 되는 수준이었다. 너무 화가 나서 키스 에이프와도 싸웠다. 나중에는 친구와의 관계나 “It G Ma”의 다음 행보를 생각하며 내려놓았다. 그렇게 엘에이에서 키스 에이프와 작업을 이어가기 위해 오스카 그리고 그의 여자친구와 미국에 갔다.

 

코홀트와 키스 에이프의 미국 행보에 많은 리스너들의 이목이 쏠렸다. 그러나 “It G Ma”를 향한 높은 관심을 이어갈 만한 또렷한 결과물이 계속해서 나오지는 않았던 것 같다.

우여곡절 끝에 오스카와 미국으로 떠났다. 음악에 몰두하겠다는 일념으로 미국에 도착했지만, 막상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다. 당장 머무를 곳조차 없었으니까. 키스 에이프와도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지 잠시나마 화기애애했다. 그러나 비좁은 방에서 여럿이 지내다 보니 각자의 스트레스가 정점을 향하고 있었다. 지금껏 삶을 공유하지 않았던 사람들끼리 모여 지내니 불협화음이 생길 수밖에. 정작 음악은 뒷전이었다. 키스 에이프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시간은 흐르고, 귀국 날짜가 다가올 때쯤 공연 일정이 잡혔다. 그러면서 비행기 티켓을 새로 샀다. 이 공연이라도 해야 나름 미국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키스 에이프와의 관계는 회복된 건가?

그와는 “It G Ma” 저작권에 관련된 문제로 다시 한 번 대립했다. 키스 에이프의 아버지가 관여하면서 상황이 더 악화되었다. 결국, 우리는 어색한 사이가 되었다. [Friends Don’t Lie] EP 작업 때 오랜만에 내가 먼저 연락했다. 오랜 시간 통화하면서 서로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 오해도 풀고 화해했다. 그는 곧 공연차 중국에 가게 됐는데, 디제이를 부탁한다며 내게 제안했다. 나도 단숨에 좋다고 말했다. 시간이 지나고 출국 날짜가 다가와도 소식이 없어서 그저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준석아, 우리는 서로 다른 길을 가야겠다”는 문자를 받았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최근 엘에이에 갔을 때 한 번 연락했지만, 돌아오는 답장의 뉘앙스를 보면서 나에게 화가 많이 난 상태라고 느꼈다.

 

Dok2 – Future Flame M/V

일리네어 레코즈를 대표하는 뮤지션, 도끼의 곡 “Future Flame”을 만들었다. 어릴 적 우상 같던 뮤지션과 아티스트의 자격으로 재회한 소감은?

뮤직비디오 촬영장에서 도끼를 만났다. 한참 정신없었는데, 그가 페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자며 잠시 차에 가자고 하더라. 그때 그 외에도 매니저 한 분이 있었다. 그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준석이는 한 곡을 하기로 했는데, 두 곡을 만들었으니 뭐, 한 곡 반 정도 페이만 줘도 되겠는데”라고 했다. 그러자 도끼가 그 매니저에게 화를 내며 이렇게 말했다. “식당에서 밥을 먹은 다음에 메뉴에 적힌 가격을 깎는 사람이 어디 있냐. 나는 얼마를 더 줘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큰 울림을 받았다. 음악을 하면서 평생 잊히지 않을 말이었다.

 

프로듀서 구스범스(Goose Bumps)와 함께 파티 팀 ‘구찌버거’를 결성했다. 그와 함께한 계기 그리고 이름의 배경이 궁금하다.

프로듀싱을 하던 내가 딥코인(Dipcoin) 파티를 통해 디제이로도 데뷔했다. PNSB, 나, 구스범스까지 또래 친구들이라 친하게 지냈다. 개성도 넘치고 감이 좋은 친구들이니 교류가 잦았다. 구스범스와 나는 프로듀서니 자연스레 친해졌다. 어느 날, 구스범스가 취향도 비슷하고 같은 프로듀서 포지션이니 둘이서 파티를 한번 만들어보자고 하더라. 그렇게 구찌버거가 만들어졌다. 당시에는 릴 펌프(Lil Pump)의 “Gucci Gang”이 나오기도 전이었다. 지금처럼 구찌의 이미지가 힙하지 않을 때였는데, 나름 우리 사이에서는 넥스트였지. 그렇게 구찌라는 이름과 함께 내가 요리사라는 명분도 있고, 상반된 단어를 찾다가 버거를 떠올렸다.

 

많은 해외 뮤지션이 구찌버거를 거쳐 갔다. 트래비스 스캇(Travis Scott)의 메인 프로듀서 원다걸’(WondaGurl)도 섭외하려고 했다고 들었다.

2015년 “It G Ma”로 미국에 갔을 때 드레이크(Drake)가 앨범 [If You’re Reading This It’s Too Late]를 냈다. 프로듀서 크레딧을 살펴보니 ‘Daxz’라는 생소한 이름이 눈에 띄었다. 찾아봐도 특별한 정보를 알 수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는 드레이크 곡 “Back to Back”의 프로듀서였다. 어쨌든 시간이 흐른 뒤에 그 친구에게 연락을 받고 일본에서 만났다. 그가 머무르는 숙소에 갔는데 그곳에 원다걸도 있었다. 그 뒤로 연락을 이어가며, 구찌버거 게스트로 섭외하려 했지만, 계속해서 일정이 맞지 않았다. 결국, 원다걸 대신 영 린(Young Lean)을 스타로 만든 프로듀서, 수어사이드이어(SUICIDEYEAR)를 섭외했다.

 

영 린을 우연히 케이크샵에서 만났다고 들었다.

그가 한국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인스타그램을 켰더니 진짜로 케이크샵에 와있더라. 그걸 보자마자 단숨에 차를 돌렸다. 이전에 DM을 주고받은 적은 있지만, 실제로 만난 건 처음이었다. 그는 원래 “It G Ma” 리믹스에서 함께하려고 했지만, 결국 콘셉트가 맞지 않아서 아쉽게 함께하지 못했다. 파더(Father)로 교체되었지. 인연이 있었기에 만남이 어색하지는 않았다. 음악부터 여러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그를 이태원에서 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국내 리스너에게는 이미 “It G Ma”로도 친숙한 인물, 코오 또한 구찌버거에서 공연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키스 에이프와 갈등이 심해지고 나서 코오와 친해졌다. “It G Ma” 이후 만족할 만한 무언가를 만들어내지 못한 상황이라 나는 당시 마음이 초조했다. 결국, 코오를 만나기 위해 일본에 갔고, 일본에서 공부하는 친구 기숙사에 지내면서 그와 교류했다. 한 가지 기억나는 건 코오가 직접 그려놓은 그림을 보다가 “어떻게 그린 거야?”라고 물은 적 있는데, 나더러 눈을 감은 채로 펜을 잡고 하나의 사물을 떠올린 다음 다 그릴 때까지 펜을 멈추지 말라고 하더라. 예술에 접근하는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메종 키츠네 컴필레이션 프로젝트 [Kitsuné Afterwork, Vol. 1]에 “Together(みんなで)”라는 곡에 코오와 함께 참여했는데.

원다걸의 나비효과라고도 할 수 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아시아 투어를 준비하다가 메종 키츠네 팀에서 원다걸을 부킹하고 싶다고 나에게 연락한 적 있다. 그러나 결국 부킹이 성사되지 못하면서 방향을 돌려 일본 로컬 신에서 잠재력을 가진 뮤지션들을 섭외했다. 그때 ‘JP THE WAVY’, ‘SALU’, ‘Yeti Out’ 등의 뮤지션과 나까지 포함해서 라인업을 꾸렸다. 당시에는 나도 그들을 상세히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현재는 모두 아시아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뮤지션으로 성장했다. 그 이벤트를 준비하면서 내 앨범에 관한 아이디어도 얻었지.

 

첫 정규 앨범 발매를 앞두고 있다. 어떤 앨범인가?

메종 키츠네 컴필레이션을 계기로 일본 뮤지션과 교류하면서 그들과 작업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국내외 뮤지션들과 협업을 시작했고, 욕심을 부리다 보니 트랙이 많아져서 모두 20 트랙 정도 예상하고 있다. 가장 최근 소식이라면, 프로듀서 마시멜로(Marshmello)도 앨범에 참여한다는 것? 구찌버거로 내한한 뮤지션 대부분이 앨범에도 참여했다. 앨범을 구찌버거로 해도 될 정도니까. 하하. 앨범의 모든 믹싱/마스터링은 트래비스 스캇(Travis Scott)의 목소리를 만든 엔지니어, 지미 캐시(Jimmy Cash)가 담당한다. 여러 뮤지션과 작업하다 보니 딜레이되긴 했지만, 대략적인 그림은 이미 나왔다.

 

Gucciburger Party @Henz / Special Guest. KOHH

최근 많은 해외 일정을 소화 중인데, 그들이 한국 음악 시장 혹은 국내 아티스트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는지도 궁금하다.

프로듀서나 래퍼, A&R 등 관계자를 만나서 종종 이야기하는데, 그들이 음악을 추천해달라고 했을 때 자신 있게 소개할만한 콘텐츠가 그리 많지 않다. 최소 트랩이라는 카테고리에서 해외의 것들과 비교했을 때, 차별화되거나 앞서나간 사운드를 찾기 힘들다. 최근 재키와이(Jvcki Wai)라는 래퍼가 외국에서 많은 관심을 받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작년 미국 콤플렉스 콘(Complex Con)에서 에이트랙(A-Trak)의 공연을 보고 영감을 많이 받았다.

 

세계적인 음악 축제이자 컨퍼런스인 텍사스 SXSW 2018에 다녀온 소감은?

디피알 라이브(DPR LIVE)를 통해 텍사스 SXSW에 다녀왔다. 케이팝 스테이지뿐 아니라 ‘DJ Carnage’가 섰던 스테이지에서도 공연을 진행했다. 힙합 신에서 빼놓을 수 없는 뮤직비디오 감독 콜 베넷(Cole Bennett)이 기획한 리리컬 레모네이드(Lyrical Lemonade) 스테이지에도 섰다. 스모크펄프(Smokepurpp)가 소속된 인터스코프(Interscope)의 또 다른 레이블 ‘Alamo Records’ 신예 래퍼 ‘Comethazine’의 백업 디제이를 맡기도 했다. 그때 여러 명의 신예를 만났다. 한 어린 뮤지션은 중학교 때 “It G Ma”를 좋아했다고 말했다. 음악을 하면서 보람을 느낀 순간이었다. 반면에 아예 그 곡을 모르는 뮤지션도 많았다. 하하. 미국에서 그렇게 유명한 곡은 아니더라고.

 

선망하던 프로듀서 구찌 메인이 한국 아이돌 그룹 갓세븐(Got 7)과 협업했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나?

멋진 작업물을 만들어야 언젠가 구찌 메인 같은 거물과 작업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막연하게 생각한 적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구찌 메인과 작업한 아이돌 뉴스를 보고 나서 케이팝으로 이런 식의 결과를 만들어내는 게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자본의 힘이든 뭐든 어쨌든 결과적으로 구찌 메인과 작업한 최초의 한국 뮤지션이 아이돌이 됐다. 지금 힙합 트렌드가 만들어지기까지 중추적인 역할을 한 장본인이 바로 구찌 메인인데 그 상징적인 인물과 아이돌이 뮤직비디오를 찍었으니 나로서는 큰 충격이었다. 단순히 맞다 그르다를 논할 레벨이 아니었지.

 

기대되는 뮤지션이 있다면?

YG 소속 뮤지션 원(One)이다. 쇼미더머니에서 만들어진 연예인 이미지도 있고, 잘생긴 외모가 먼저 주목받은 케이스인데, 사실 나는 코오를 처음 봤을 때 원이 떠올랐다. 그래서 일본에 갔을 때, 이 둘을 만나게 해줬다.

 

프로듀서로서 어떤 목표를 지향하는가?

국내외 힙합 신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고 싶다. 이를테면 영화 “토르”에서 게이트를 연결하는 ‘헤임달’처럼. 인기나 명성보다는 전반적으로 음악 업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프로듀서를 목표로 하고 있다. 단순히 음악을 잘 만드는 프로듀서의 범주에서 벗어나 좋은 선구안, 음악을 선별하는 안목을 바탕으로 더 넓은 범위에서 신을 이끌고 싶다. 한마디로 닥터 드레(Dr. Dre) 같은 인물이지.

‘David Letterman’s Netflix Show’에 출연한 제이지가 이런 말을 하더라. “50년 뒤에 들어도 촌스럽지 않고 여전히 좋은 앨범을 만들고 싶다”. 50년까지는 아니더라도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세련된 비트, 음악을 만들고 싶다. 또한, 취향이 또렷한 뮤지션들과 계속해서 협업을 이어나가고 싶다. 꼭 위대한 무언가를 만들어야 예술인 걸까? 그저 마지막까지 정성을 쏟는 예술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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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 │ 이철빈
글 │ 이철빈 권혁인
사진 │ 본인 제공, 김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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