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hion Guide from the ATTIC #1

유행은 돌고 돈다는 말이 지금처럼 실감 나는 때가 또 있을까. 잊힌 줄로만 알았던 8~90년대의 패션이 다시금 젊은 세대의 이목을 사로잡고 있다. 이 시대의 멋쟁이들은 본인이 태어나기도 전의 문화를 일체의 거부감 없이 수용하며, 빠른 속도로 체화하고 있다. 하지만, 과거를 동경하는 젊은이에게도 언제나 큰 아쉬움이 하나 있으니, 그들에게 과거는 언제나 간접적인 경험일 수밖에 없다는 것. 결국 그 시절을 직접 살아보지 못한 우리가 당대의 문화를 조금이나마 체험하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자료를 디깅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 같은 애로사항을 잘 아는 친절한 VISLA가 다락방 먼지 속에서 방치되던 참고 자료를 잔뜩 가져왔다. 'Fashion Guide from the ATTIC’은 그때 그 시절 애니메이션과 코믹에서 패션에 대한 영감을 찾는다. 당대 젊은이의 생활상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이 작품들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유용한 팁을 줄 수 있을까.

 

“다리아(Daria)”라는 애니메이션을 아는가? 투니버스를 통해 국내에서 선보인 적 있는 이 작품은 본래 미국의 음악 전문 채널 MTV에서 1997년에 최초로 방영된 애니메이션이다. ‘병맛 애니’로 유명한 “비비스와 버트헤드(Beavis and Butthead)”의 스핀오프로 처음 공개한 이 애니메이션은 10대 소녀 다리아 몰겐도퍼(Daria Morgendorffer)의 일상을 통해 각종 사회적 모순을 비꼰다.

사회 통념적인 기준으로 봤을 때 주인공 다리아는 결코 예쁘지 않다. 칙칙한 옷차림과 검은 뿔테안경은 오히려 촌스러운 축에 속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애니메이션의 성공과 함께 다리아의 무신경한 패션은 미국의 컬트 팬들의 워너비로 떠올랐다. 그뿐만 아니라 다리아의 여동생 퀸 몰겐도퍼 (Quinn Morgendorffer)와 그녀의 패션 클럽 멤버들은 당대 여학생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던 스타일을 모조리 그려내고 있어 지금의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그 시절의 트렌드를 면멸히 보여준다.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의 스타일은 각종 매체에서도 인증된 바 있다. 등장인물의 개성 있는 스타일이 10대의 뜨거운 사랑을 받자, 해외 유수의 매거진들이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 실제로 ‘다리아’의 등장인물은 패션지 W 매거진(W Magazine)의 1999년 11월호를 장식하기도 했으며, 글래머(Glamour)와 엘르(Elle)같은 매체들은 꽤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도 ‘다리아 속 패션 클럽 멤버는 지금쯤 어떤 옷을 입고 있을까(What the Daria Fashion Club Would Wear)’ 같은 기획 기사를 쏟아냈다. 어떤가, 이 정도 명성이면 우리의 첫 교재로 사용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다리아 몰겐도퍼

애니메이션의 히로인, 다리아는 염세주의적인 모범생이다. 그녀가 즐겨 시청하는 방송 “역겹고 슬픈 세상(Sick Sad World)”의 제목이 말해주듯, 그녀를 둘러싼 세상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로 가득 차 있다. 학교 친구 비비스와 버트헤드를 주제로 ‘인간의 멍청함’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작성하기도 하는 그녀는 모두가 주목받기만을 원하는 세상에서 아웃사이더의 역할을 자처한다.

1997년 다리아의 등장은 새로운 여성 캐릭터의 탄생을 암시했다. 남성과 여성 캐릭터 모두를 성적 대상화 하던 당시의 TV 방송이 제시한 여성 캐릭터들은 모두 천편일률적인 황금색 머릿결과 풍만한 가슴을 자랑했다. “베이워치 (Baywatch)”의 파멜라 앤더슨(Pamela Anderson)이 바로 당시의 대표적인 “메인스트림 걸 (Mainstream Girl)”. 모든 여성이 그녀를 닮아야만 할 것 같은 암묵적인 요구 속에서 냉소적이고 지적인 다리아의 브라운관 데뷔는 혁신적이었다. 시니컬한 농담이 멍청한 사회와 맞서 싸우는 그녀의 무기였다면, 그녀의 갑옷은 그런지 스타일이었다.

 

검고 투박한 컴뱃 부츠, 오버사이즈 재킷과 커다란 안경. 무심한 그녀의 스타일은 타인의 기대에 순응하기를 거부한다. 그녀의 저항적인 스타일은 1990년도 중반에 힙합 패션과 함께 절정을 누렸던 그런지 룩을 잘 보여준다. 그런지 룩을 위해 당시의 여성들은 닥터 마틴(Dr. Martens), 오버사이즈 스웨터, 밴드 티셔츠, 플란넬 셔츠, 디스트로이드 진 등의 아이템을 선택했으며, 머룬, 인디고, 포레스트 그린, 브라운 등의 컬러가 주를 이뤘다. 이 같은 그런지 룩의 예시들은 당시 유행했던 하이틴 드라마 “마이 소 콜드 라이프(My So-Called Life)” 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90년대 그런지 스타일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해내는 디자이너로는 에디 슬리먼(Hedi Slimane)이 대표적이다. 디올 (Dior)과 생로랑(Saint Laurent)를 거치며 그런지의 부흥을 가져온 에디 슬리먼은 생 로랑의 2013 F/W 레디투웨어와 2016 S/S시즌에서 과감한 그런지 무드를 과시했다. 런웨이를 장식한 다양한 아이템 중 특히 2013년에 그가 선보인 컴뱃 부츠와 2016년의 그런지 티아라는 다리아의 안티 히어로적인 면모와도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는 듯하다. 비록 최근에는 셀린(Celine)에서 ‘패션계의 트럼프’라는 오명을 얻으며 팬들의 뭇매를 맞았지만, 그의 그런지 스타일만큼은 그야말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전매특허니 현대적이고 여성적인 그런지 룩을 원한다면 반드시 체크해볼 것을 권한다.

 

퀸 몰겐도퍼와 패션 클럽

다리아의 친동생 퀸은 전형적인 90년대 여고생이다. 론데일(Lawndale) 고교 패션 클럽의 부회장이자 월프(Walf) 매거진의 열혈 독자인 그녀의 가장 큰 관심사는 패션과 남자. “학교와 감옥의 유일한 차이는 패션(The only difference between school and prison is the wardrobe)”이라는 명대사를 날리기도 하는 퀸과 친구들을 보고 있자면 90년대 여학생의 동경의 대상이었던 슈퍼모델 빅 파이브 ─ 나오미 캠벨 (Naomi Campbell), 신디 크로포드 (Cindy Crawford), 크리스티 털링턴 (Christy Turlington), 린다 에반젤리스타 (Linda Evangelista), 클라우디아 쉬퍼 (Claudia Schiffer) ─ 나 걸그룹 스파이스 걸스(Spice Girls)가 떠오른다. 최고의 명성과 대중적 인기를 누렸던 이들의 영향 덕분이었을까. 소녀들의 패션은 이전보다 더욱 과감하고 다양해졌다.

 

극 중 퀸이 자주 입고 등장하는 스마일 크롭 탑에 집중하자. 이는 90년대의 주요한 트렌드 두 가지, 앙증맞은 캐릭터 프린트와 크롭 탑을 합쳐 놓은 중요한 단서다. 90년대 중반에는 디즈니(Disney)와 루니 튠스(Looney Tunes) 등의 캐릭터들에서 영감을 받은 아이템이 큰 사랑을 받았는데, 프린트 티셔츠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캐릭터 모양의 가방을 들고 다니는 모습도 종종 발견할 수 있었다. 크롭 탑 역시 90년대 패션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아이템이다. 미니스커트나 루즈한 카고 팬츠와 곧잘 매치되곤 했던 이 아이템은 그웬 스테파니(Gwen Stefani)나 스파이스 걸스 같은 패션 아이콘을 통해 유명해졌다. 당시에는 배꼽 피어싱을 더해 스타일링을 완성하기도 했으나, 이는 다소 익스트림한 경우이니 본인 취향에 맞게 선택하도록 하자.

 

우리가 주목할 두 번째 아이템은 이미지 속 좌측, 패션 클럽의 멤버 티파니(Tiffany Blum- Deckler)가 입고 있는 슬립 드레스. 과거 드레스 안에 입는 속옷의 개념이었던 이 아이템은 1990년대에 디자이너 존 갈리아노(John Galliano)와 몇몇 스타일 아이콘에 의해 일상복의 영역으로 넘어왔다. 슬립 드레스의 유행을 이끈 스타 중 우리가 참고할 예시는 위그필드(Whigfield)와 케이트 모스(Kate Moss)다. 위그필드가 화려한 소재와 컬러의 드레스로 대중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면, 케이트 모스는 마른 몸매에 미니멀한 스타일의 슬립 드레스를 입어 자연스러운 파티 룩을 완성시켰다. 슬립 드레스를 입을 때 주의해야 할 점은 과한 액세서리로 시선을 분산시키지 않는 것. 하지만 90년대의 쿨한 무드를 살리고 싶다면 심플한 초커 정도는 더해볼 수 있겠다.

 

패션 클럽의 아이템 중 우리가 마지막으로 참고할 것은 이미지 속 티파니와 퀸의 스타일링을 완성한 머리끈이다. 90년대에는 헤어클립, 반다나 등 다양한 헤어 액세서리들이 있었지만, 그중 머리끈의 인기가 단연 돋보였다. 국내에서는 SES 바다가 착용하고 나와 소녀들의 사랑을 받았던 이 ‘곱창 머리끈’의 키 포인트는 정수리 부분에 높게 묶는 것. 만일 90년대식 스타일링이 부담스럽게 느껴진다면, 벨라 하디드(Bella Hadid)와 헤일리 볼드윈(Hailey Baldwin)의 착용법을 참고해보자. 일명 ‘더듬이 앞머리’를 남기지 않고 전부 묶어버리는 이 방식은 더욱 건강하고 당당한 모습을 연출할 수 있게 한다.

 

번외) 트렌트와 제인 레인

다리아와 퀸 자매만으로는 아쉽다고 느낄 구독자를 위해 1화의 마지막은 트렌트(Trent Lane)와 제인 레인(Jane Lane) 남매(이미지 속 우측 두 명)를 간단히 언급하며 마무리하고자 한다. 다리아의 절친한 친구인 제인과 그녀의 오빠 트렌트의 패션에는 펑크적인 요소가 곳곳에서 발견된다. 얼핏 단순하게 느껴질 수 있는 심플한 룩에 각종 액세서리를 곁들여 반항적인 무드를 완성했는데, 피어싱, 반지 등과 함께 우리가 주목해야 할 아이템은 선글라스다.

 

애니메이션 속 트렌트와 제인은 종종 선글라스를 착용한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이들 중 제인의 선글라스를 잘 살펴보자. 작고 각진 직사각형 형태의 프레임과 상대적으로 높은 곳에 위치한 안경 코. 선글라스의 형태를 보고 미래지향적인 느낌을 받았다면 정확하다. 영화 “매트릭스 (The Matrix)”에서 키아누 리브스(Keanu Reeves)와 캐리앤 모스(Carrie- Anne Moss)가 착용해 ‘매트릭스 선글라스’라고도 불리는 이 선글라스는 올봄부터 가장 뜨거운 트렌드로 부상한 타이니 선글라스(Tiny Sunglasses)의 한 종류다.

발렌시아가(Balenciaga)의 2017년 가을 레디투웨어에 등장한 타이니 선글라스는 놀라운 속도로 할리우드 스타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지난 1월, 킴 카다시안(Kim Kardashian)은 남편 칸예 웨스트(Kanye West)로부터 큰 선글라스 쓰는 것을 그만두라는 내용과 함께 작은 안경을 쓴 90년대 인물들의 사진 수백만 장을 이메일로 받기도 했다고 하니 이쯤이면 공공연한 트렌드로 인정받은 셈이다. 햇빛을 전혀 차단하지 못할 것 같은 모양새가 재미있는 이 선글라스는 본래 위치보다 살짝 내려 콧잔등에 걸치는 것이 포인트다. 해외에서는 켄달 제너(Kendall Jenner)와 테일러 힐(Taylor Hill) 등의 영향력 덕분인지 없어서 못 팔 정도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고 하지만, 이상하게도 국내에서는 소수의 멋쟁이들에게만 사랑받을 뿐 아직도 ‘철이와 미애 선글라스’ 정도로 취급받는 비운의 아이템이기도 하다.

만화 “다리아”로 시작한 Fashion Guide from the Attic의 1화는 이쯤에서 마치도록 하자. 설명은 장황했지만, 사실 90년대 패션을 따라 하는 일은 크게 어렵지 않다. 구성이 좋은 빈티지 숍을 몇 군데 둘러보거나, 인스타그램 멋쟁이들이 좋아하는 UNIF Clothing 류의 브랜드에서 주문만 하면 간단히 끝날 일일지도. 하지만 진정 패션을 즐길 줄 아는 멋쟁이들이라면, 쇼핑에 앞서 어떠한 방식으로든 그 시대의 삶과 문화를 공부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떤지. 아는 만큼 보인다는 옛 어른들의 말처럼,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이 ‘패션 게임’의 새로운 재미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글 │ 김홍식
이미지 출처 │ MTV, Courtesy Everett Collection, Rruby.tistory.com, Getty Images, GC Images, American Broadcasting Companies, Inc, Directexpose.com, Pinterest, Hellogiggles.com, Playbuzz, Last.fm
제작 │ VISLA, MUSINSA

*해당 기사는 무신사(MUSINSA)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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