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다함

가을빛 짙은 을지로에 나들이 온 인파는 이제 새삼스럽지도 않은 동네의 인기를 대변한다. 을지로 노가리 골목의 시작을 알리는 플라스틱 의자와 탁자는 날마다 그 세를 넓히며 거미줄 같이 펼쳐진 사잇길을 매일 밤 점령 중이다. 노상의 향연을 어렵사리 헤쳐 노가리 골목의 중심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그 가운데 자리한 만물상 우주만물(CosmosWholesale). 나의 잡동사니가 누군가의 보물이 된다는 사실을 몸소 증명하는 그곳에서 우리는 박다함을 만났다. 공연기획자, 음악가, 괴짜 등 그에게 따르는 수식어는 많고 소문도 무성하다. 10여 년의 시간 동안 그의 주변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그리고 인간 박다함은 누구인지를 엿볼 기회. 진득하니 벌어진 그와의 대화는 노가리 3마리와 맥주 한 잔으로 이어졌다. 이하는 그 문답의 전문이다.

 

간단한 소개 부탁한다.

음악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박다함이 본명이 아니라고 들었다.

그렇다. 나와 계좌번호를 주고받은 적이 없다면 본명은 알기 힘들지. 지금껏 서너 번 정도 이름을 바꿨다. 펑크(Punk)를 좋아하던 어릴 때는 인터넷 예명을 이름처럼 사용했다. 그 당시의 인터넷 자아라고 해야 하나. 노이즈 음악을 시작하고는 본명 박승준으로 활동했다. 굳이 예명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고 주변 노이즈 음악가도 거의 본명으로 활동하니 자연스러웠다.

 

박다함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된 계기는?

예전에는 여러 사람을 만나며 잘도 놀러 다녔다. 박다함은 한국에서 잠시 한국어를 공부하다가 떠난 외국인 친구가 선물한 이름이다. ‘다함’, 즉 ‘Do everything’. 당시 발바닥에 불나게 돌아다니며 활동하던 나에게 정말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 하더라. 벌써 10년도 지난 일이다.

 

이름 앞에 ‘진입장벽이 높다’라는 수식어가 자주 붙더라.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이란 의미 같다. 여태껏 갖가지 일을 해왔기 때문인 것 같은데 이와 같은 평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인데, 소셜 미디어 계정으로 방송을 즐겨 하는 노상호 작가와 아는 사이라 노상호의 친구를 소개하는 ‘노친소’ 프로그램에 얼굴을 비춘 적 있다. 다른 유명인이 출연하면 별말 안 해도 시청자가 그들의 신상 정보쯤은 꿰고 있으니 별 탈 없이 매끄럽게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하지만 내가 출연하니 소개말이 길게 늘어지더라.

 

많은 이들이 입 모아 말했다. 박다함은 서울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라고. 최근 일본으로 긴 여행을 다녀왔는데 마냥 쉬러 갔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바쁜 건 맞는데 그 앞에 ‘쓸데없이’를 붙여야 한다. 10년 전 첫 방문을 제외하면 지금까지 한 번도 일본에 편히 놀러 가본 적이 없다. 언제나 디제잉이든 이벤트든 일과 관련된 이유로 비행기에 올랐다.

 

박승준으로서 노이즈 음악을 하던 2000년대 중반, 프로젝트 그룹 플리커 비긴스(The Flicker Begins)와 불길한 저음(Master Musik)의 일부로 활동했다. 노이즈 음악 공연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류한길 씨를 비롯해 취향을 공유하는 이들이 이끌던 릴레이(Relay)라는 즉흥 음악 연주회 시리즈를 자주 보러 다녔다. 공연이 끝날 즈음 이들은 종종 관객에게 “새로운 연주자가 필요합니다”라고 말하곤 했는데, 경험과 실력이 부족하더라도 같이 할 용의가 있다면 메일로 연락을 달라고 하더라. 그들에게 내가 먼저 다가갔다. 기초가 없진 않았다. 수년간 독학하며 나만의 소리를 만들었고 이에 자신이 생겨 지원했다. 그리고 다행히 일이 잘 풀려 릴레이 공연에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이 시작이다.

 

100명이 넘는 관객을 전부 쫓아낸 사건으로 유명한 불길한 저음에는 한국 노이즈 음악의 1세대라 알려진 홍철기와 최준용도 속해있었다. 그들과 팀을 이룬 배경이 궁금하다.

홍철기 씨와 최준용 씨는 이전부터 아스트로노이즈(Astronoise)로 활동하며 시끄러운 음악을 해온 사람들이다. 이들과 친분이 생겨 이야기를 나눠보니 시끄러운 밴드 음악을 구상 중이라지 않은가. 펑크 밴드와 플리커 비긴스에 몸담으며 비슷한 지점에 도달한 나와 방향이 비슷한 터라 함께 불길한 저음을 결성했다.

 

최준용은 CD 플레이어나 오픈 릴 테이프 레코더 등의 오류를 활용해 소음을 만들었다. 당시 박다함은 어떤 방식으로 노이즈 음악을 연주했나.

전자 기타나 다른 밴드 악기를 다뤄본 이들이라면 다들 집에 싸구려 앰프 하나씩은 있을 것이다. 싸구려 앰프를 잘 뜯어보면 안에 이상한 스프링 리버브(Spring Reverbrator)가 달려있다. 비싼 앰프에만 리버브가 달려있는 줄 알았는데 중국산 저가 앰프에도 내장된 경우가 있더라. 이 스프링을 꺼내 계속 흔들었다. 그렇게 만든 소리가 나의 소음이었고 집에 있던 기타 앰프가 나의 첫 노이즈 음악 악기였다.

마이크도 자주 사용했다. 예를 들어, 운동회에서 사회 보는 선생님의 마이크에서 나오는 귀 찢어지는 소리. 이를 하울링(Howling)이라 하는데, 스피커와 마이크가 가까워 서로 소리가 과하게 증폭되는 현상을 의미한다. 나는 이 하울링 현상을 응용해 마이크로 연주했다. 이제 노이즈 음악 공연은 잘 하지 않지만 악기들은 지금도 집 어딘가 잘 모셔놓았다.

 

과거 격렬한 공연 중 마이크가 관객에게 날아간 적이 있다고.

공중에서 돌리던 마이크가 날아간 건데, 누구 머리에 명중하더라.

 

노이즈 음악뿐만 아니라 작곡 활동도 뜸해진 것 같은데.

밴드 합주처럼 노이즈 음악도 연습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요즘은 시간이 없다. 장비는 있지만 선뜻 손이 가지 않더라. 디제잉을 하다가 노이즈 음악 연주로 돌아가기에는 상황이 모호했다. 자아가 많이 갈린 것 같다. 그래도 미술가들의 요청으로 음악은 꾸준히 만드는 중이다.

 

과거 일민 미술관에서 전시한 적도 있으며, 최근 ‘엉망전’에도 참여했다. 미술 쪽에도 관심 있나?

김희천의 작업을 시작하며 알음알음 연락이 왔다. 디제이로 알려진 건 ‘더 스크랩’이다. ‘엉망’ 같은 경우는 내가 이상한 사람이니까 음악을 알아서 틀고 골라주겠지 싶어서 찾는 것 같다. 당연히 미술에 관심도 있고, 이렇게 일을 주는 것도 감사하다. 나는 디제이로서 나를 설명할 때, 보통 “상황에 따라 음악을 틉니다”라고 말한다. 실제로도 그렇다. 특히 미술가들은 특정 상황에 뭔가 필요할 때 나를 찾는다.

 

노이즈, 즉 소음이란 박다함에게 어떤 의미인가? 노이즈 음악가 박승준 시절부터 지금의 박다함까지, 소음을 어떻게 받아들였으며 혹여 인식의 변화가 일어났는지도 궁금하다.

나에게 소음이란 어떤 일을 하든지 신경 쓰이는 요소다. 참 이상한 것이지. 내가 또 이상한 걸 매우 좋아하지 않나. 시간이 흘러도 계속 귀 기울이게 되더라. 딱히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이 변하진 않았다. 노이즈 음악은 신경을 쓰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재미있다.

 

이승린의 2017년 논문, ‘1990년대 이후 국내 노이즈 음악의 위상과 질적 변화에 대한 연구’는 90년대에 등장한 노이즈 음악가와 그 이후를 1, 2세대로 나눴다. 본 논문에서 1세대 노이즈 음악가 홍철기는 인터뷰를 통해, 박다함을 위시한 2세대의 음악가가 노이즈 음악을 더 경계 없이 잘 받아들인다고 언급했다.

“거의 10년 만에 새로 등장한 사람이 당신이다”. 내가 노이즈 음악 신(Scene)에 등장하자 누군가 한 말이다. 새로운 인물이 그렇게까지 없나 싶어서 나는 관심사가 비슷한 친구들을 끌어모았다. 요즘 DYDSU라는 이름으로 활동 중인 용녀 씨도 그중 한 명이었고. 그렇게 새로운 인물들을 모으다 시작한 공연 시리즈가 네버 라이트(Never Right)다.

인디 음악을 하는 이들과 노이즈 음악을 하는 이들이 한 공간에 모여 뭐든지 때려 박는 공연, 이것이 네버 라이트인데, 시작한 계기는 별거 없다. 언젠가 소울식(Soulseek, 음악 전문 P2P 프로그램)을 통해 누군지 모를 이의 음악 폴더를 보니 힙합, 포스트 록, 노이즈 음악 등 다양한 장르가 마구 뒤섞여 있더라. 뒤죽박죽인 그 폴더의 구성이 너무나 부러웠다. 네버 라이트는 그걸 공연장으로 구현한 것이다. 아마 홍철기 씨를 비롯한 선배님들은 네버 라이트의 모습을 보고 위와 같은 생각을 하신 게 아닐까?

 

2011년으로 돌아가자. 당시 밴드 신에서 활발한 행보를 보인 것으로 알고 있다. 마음 맞는 이들과 문을 연 베뉴 문래동 로라이즈(Lowrise)에 관한 이야기가 듣고 싶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불만이나 생각이 많아질 때면 손으로 직접 만들고 본다. 나의 가장 큰 불만은 우리만의 공연장이 없다는 점이었다. 계속 장소를 옮겨 다니며 참여한 이들에게 보수도 주지 못하는 이 엉망진창인 상황의 해결책은 과연 무엇일까 고민해보니, 우리만의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 답이겠거니 싶었다. 그러던 와중에 두리반 사태가 벌어졌다. 두리반은 홍대 앞 한구석에 자리한 식당이었는데, 이곳의 강제 철거를 막고자 여러 단체가 힘을 합쳤다. 뜻을 함께한 이들 중엔 나를 포함한 자립 음악인들이 있었고 우리는 ‘51+’를 비롯한 각종 행사로 두리반에서 목소리를 올렸다. 그 사태가 정리되니 어느덧 2011년이더라. 그다음 행보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었다. 모아진 음악인들의 힘을 자양분 삼아 우리만의 공간, 음악인이 자신의 음악을 자유롭게 선보일 공간을 마련할 절호의 기회라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는 밴드는 이전에 공연할 곳이 없기도 했고.

새로운 공간으로 낙점한 곳은 이전부터 눈독 들이던 문래동 한 건물의 널찍한 2층 공간이었다. 그러나 업주가 한 번도 대관해주지 않았다. 짜증 나서 내가 말했다. “대관 안 해줄 거면 나갈 때 말해라. 내가 들어가겠다”. 그러고 나서 정말로 업주에게 연락이 왔다. 시기가 딱 두리반 사태가 정리된 때였기에 뜻을 함께하는 이들과 보증금을 모아 냉큼 들어갔다. 이것이 바로 로라이즈였다. 2년 동안 잘 운영했다. 좋은 경험이 되었지. 그때 함께한 이들은 지금 사라지거나 곁에 남았다. 누군가에겐 로라이즈가 전설로 남았다지만 대다수는 기억도 못 할 것이다.

 

문래동 로라이즈뿐만 아니라 지금은 문을 닫은 한남동 꽃당 등의 장소에서 활동하던 때를 추억하면 어떤 감정이 드나.

언젠가 “그래, 그땐 그랬지”라고 하며 그때 그 사람들과 과거를 안주 삼아 술을 마시는 내 모습을 그려본 적이 있다. 그런 사람이 될 것이라 상상하니 조금 무섭더라. 계속 같은 곳에 발을 담그고 있으면 다신 나올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새롭게 시작하자는 각오로 과거의 나와 이후의 나를 칼로 자르듯 나눴다. 감정을 확실히 정리할 기회 아닌 기회도 있었다. 그때까지의 활동을 타임라인으로 정리한 것이 바로 2015년, 서울시립미술관 ‘서브컬처: 성난젊음’ 전시였다. 전시를 준비하면서 난 내가 지나온 각종 행사, 사건을 좌르륵 나열해놓았다. 일정이 종료되고 나서 서류 가방 하나에 이전의 자료를 몽땅 몰아넣었다. 그러고는 다시 꺼내 보지 않았다. 질문에 대답하자면, 별다른 감정은 들지 않는다. 지금은 깔끔히 정리하고 나아간 상태다.

 

2012년부터 이끌어온 음반 레이블 헬리콥터 레코드(Helicopter Records)를 소개하자면.

우여곡절 끝 마련한 공연장 로라이즈의 간판을 달고 보니 녹음 작업도 가능한 환경이 되더라. 그래서 우선 2인조 밴드 404의 첫 정규 앨범 [1]을 녹음했다. 결과물이 나오면 발매할 레이블이 있어야 하지 않나. 그래서 헬리콥터 레코드를 만들었다. 사실, 헬리콥터 레코드를 세우기 전에 개인적으로 스플릿 앨범 두 장을 발매했다. 밤섬해적단&앵클어택의 [The Split]과 김일두&하헌진의 [34:03]이 바로 그것인데 막상 내놓고 나니 적잖이 팔렸다. 거기서 어느 정도 레이블을 이끌 자신감을 얻었다.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취미처럼 운영하는 중이다. 요즘은 국내 밴드나 아티스트를 관리하는 일은 많지 않고 믹스테잎 위주로 음악을 내놓는다.

 

레이블을 운영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강한 동기 없이는 꾸준히 이어나가기 힘들 텐데.

나는 동력이 없으면 잘 안 돌아가는 사람이다. 고백하자면 근 2, 3년간 레코드 페어와 언리미티드 에디션(Unlimited Edition – Seoul Art Book Fair)에 참가하기 위해 레이블을 운영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 행사조차 없었다면 난 그냥 멍하게 있지 않았을까. 두 행사를 빌미로 결과물 몇 개를 만들었다. 처음엔 김일두, 404를 비롯한 여러 아티스트와 함께하며 재미있게 운영했다. 김일두는 EBS 음악 프로그램 ‘스페이스 공감’에 나가기도 했고, 매체에서 그를 꾸준히 다루는 걸 보니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찬찬히 살펴보니 나 한 명이 제어할 수 있는 규모의 사업이 아니더라. 계속 밀고 나갈 수도 있었지만 난 취미의 수준에서 홀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 머물기로 했다.

 

헬리콥터 레코드가 내놓는 음악의 주안점은?

헬리콥터 레코드는 ‘음악을 소개하는 레이블’이다. 그 앞의 괄호에는 수식어가 몇 개 들어간다. 아무도 잘 안 듣는, 알려주고 싶은, 이상한. 공연을 기획할 때와 같은 맥락이다. 아무도 소개하지 않은 음악에 꽂혀 열심히 소개하고 있다.

 

이상한 음악이라고 한다면?

올해 3월 해브어굿타임(Have a good time) 파티로 내한한 릴 모포(Lil Mofo)나 창시(Changsie)처럼 잘 알려지지 않은 이들이 소개하는 음악이 좋다. 올해 아시안 뮤직 파티에 참석한 소이48(Soi48)도 참 멋진 셀렉터다.

 

특히 일본과의 교류가 잦은데, 일본 밴드 피 헤비(P-Heavy)의 2009년 내한 공연이 박다함 공연기획 이력의 전환점이라 알고 있다.

맞다. 홍대 앞 라이브클럽 쌈(Ssam)에서 진행한 그 공연은 내가 처음으로 성사시킨 해외 아티스트의 내한공연이기도 하다. 정말 순진한 마음 하나로 이뤄낸 일이지. 10년 전, 난생처음 일본에 가서 레코드숍을 돌아보던 중, 한 곳에서 대놓고 음악을 추천해달라고 부탁했다. 추천받은 앨범을 구매해서 직접 들어봤더니 정말 좋더라. 그 앨범 커버에 밴드의 이메일 주소가 적혀있었고 별생각 없이 그 주소로 편지를 한 통 보냈다. 당신네 음악이 정말 좋으니 언젠가 서울에 오면 좋겠다는 간단한 내용이었지. 얼마 후 서울에 올 수 있다며 답장이 왔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난 공연기획 관련 지식이 전무했다. 얼떨결에 기회를 잡은 거지. 물론 이전에도 국내 공연은 여러 차례 맡았으니 그 경험을 살려 차질 없이 진행했다. 공연이 끝나고 나서 그들과 연결된 다른 일본 아티스트들과도 내한을 추진했고. 일종의 연쇄작용이 일어났다. 그 연쇄작용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일본에서는 자신을 뭐라고 소개하는가? 가끔 애먹을 때도 있을 것 같다.

나를 안다고 하더라도 단편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독립 다큐멘터리 “파티51”의 등장인물, 디제이 혹은 노이즈 음악가 중 하나로 알고 있더라. 그래서 갈 때마다 요즘은 어떤 일을 하는지 계속 알리려 한다. 오랜 시간 자신을 타인에게 소개하다 보면 가끔 지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내가 세운 목표점을 상기하며 나아간다. 또, 스케이트보드를 타진 않지만 인터넷으로 스케이터의 영상을 자주 찾아본다. 연습이 일상인 이들이 새로운 기술을 익혀나가는 모습을 보고 자극을 많이 받는다.

 

2014년에 이르러 ‘미친다’나 ‘아시안 뮤직 파티’를 비롯한 각종 디제이 파티를 주최하는 것이 박다함의 다음 행보였던가.

그렇다. 사실 그 이전에도 관련 문화를 눈여겨보긴 했다. 그러다 시대의 흐름을 타고 점차 활동 영역이 옮겨 간 것이다. 2009년 언저리였나. 당시 힙스터 세계를 점령한 피치포크(Pitchfork)가 유튜브(Youtube)와 손잡고 아케이드 파이어(Arcade Fire)의 공연을 인터넷으로 생중계했다. 당시 같이 살던 정세현(Cong Vu)과 함께 열광하며 본 기억이 있는데, 눈 감았다가 떠보니 밴드 음악이 와르르 망해있더라. 그 많던 피치포크 직원들도 집에서 놀고 있고. 그렇게 자연스레 나도 디제이 문화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관련 관심사를 가장 많이 공유했던 이는 역시 정세현이다. 그러던 중 이태원 소재 클럽 케이크샵(Cakeshop Seoul)이 개업해 각종 파티를 펼치는 것을 보고, “그렇다면 우리도 한번 해볼까?”라고 하면서 잘 몰라도 일단 열어본 파티가 ‘피자 파티’였다. 그냥 좋아하는 음악 틀어놓고 피자도 잔뜩 사서 먹었다. 가끔 역행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와 내 주변은 그렇게 흐르듯 디제이 파티를 열었다.

 

과거 디제이 네임이 페퍼로니 피자(DJ Pepperoni Pizza)이기도 했다. 피자를 좋아하나?

다들 좋아하지 않나? 한국인의 딜리버리 음식은 피자다. 외국인들이 와도 한국처럼 피자가 싼 동네가 없다고 이야기한다. 혼자 살면서부터 피자를 자주 시켜 먹었다. 요리하기는 귀찮으니까. 식은 피자도 나름의 맛이 있다. 지금도 집들이 같은 걸 한다면 음식으로는 피자와 치즈볼, 이렇게 두 가지만 고를 거 같다.

 

‘페퍼로니 피자’에서 ‘예스예스’로 바꾼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들이 ‘ㅇㅇ’라고 많이 쓰지 않나. 그래서 나도 써봤는데, 어느 순간 영어로 이름을 써야 하는 순간이 왔다. 뭘 할까 고민하다가 ‘ㅇㅇ’가 곧 ‘Yes’를 의미하니 ‘Yesyes’로 다시 변경했다.

 

디제이로서 어떤 셀렉션을 선보이는지 궁금하다.

예전에 디제잉을 시작했을 때는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처럼 풋워크를 많이 들었다. 그러다 일본 풋워크의 하위 장르인 고르게(Gorge)를 틀었다. 그러다 보니 계속 인터넷에 잔존물처럼 남은 쓰레기 음악을 찾았다. 이번 상하이나 베이징을 다녀오면서 그쪽 신도 궁금해졌다. 하이피(Hyph11e)나 샨티(Scintii)를 보고 온 이유도 그 때문이다. 포레스트(FORESTS 森林)를 초청하면서 존 두(Jon Du)와 디제잉 한 것 역시 대만에 테크노를 비롯한 이상한 음악 신이 있을 것 같다는 기대에서다. 싱가포르는 파티를 만드는 일만 해도 존나 힘들 텐데 어찌어찌 레이브(Rave) 신도 있고 해서 요즘은 그쪽에 관심이 생긴다. 일종의 유행이라고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개버(Gabber)나 하드 테크노에서 파생한 다크 웨이브 같은 음악 있지 않나. 이런 걸 듣다 보면, 나는 아무래도 BPM이 빠른 음악을 좋아하는 거 같다. 이상한 리듬을 가진 음악들.

 

박다함이라는 이름에서 떠오르는 직종이 아주 많은데, 그중에서 현재 본인에게 가장 가까운 일은 무엇인가?

지금은 음악을 소개하는 사람이다. 매일 국제특송우편(EMS)으로 음반을 받는다. 지금도 음반을 가져다 팔고 있지 않나. 밴드나 디제이를 불러오는 경우는 많아봤자 1년에 서너 번이다. 파티는 매달 하지만, 지금의 나와는 가깝지 않다. 음반 컬렉터가 적당한 것 같다. 일본에 가서 가장 많이 하는 일도 음반 수입이다.

 

외부에서 바라보는 박다함은 어떤 인물일까?

인스타그램을 보고 이상한 사람 정도로 생각하지 않을까. 최근에는 선셋 롤러코스터(Sunset Rollercoaster)를 불러온 사람. 아니면 디제이 예스예스(DJ Yesyes) 정도가 아닐까 싶다.

 

최근엔 하이디라오(Hai Di Lao Hot Pot)에 자주 간다고.

최근 중국 투어를 다녀왔다. 거긴 24시간 음식이 훠궈다. 그래서 클럽에서 놀다가 하이디라오 가서 해장하고 그랬다. 하이디라오 좋지 않나. 한국이 더 싼 거 같은데. 명동점 분위기가 개짱이다. 중국인들이 돈 뿌리러 온 느낌이지.

 

그때그때 꽂히는 음식이 있는 듯하다.

원래 먹는 걸 좋아한다. 해외에 나가서도 음식이 없으면 짜증이 난다. 이번에 일본에 갔을 때는 커리만 먹었다. 일본은 인도인 이민자가 많다 보니, 지역마다 고유의 커리 문화가 있더라. 한 열세 곳 정도 방문한 거 같다. 친구들이 왜 일본에서 소바나 스시 안 먹고 커리만 먹고 다니냐고 했다. 나는 음악도 그렇지만, 음식도 중독되면 끝이 없다.

 

일하지 않을 때는 보통 뭘 하나?

월, 화요일이 내게는 휴일이다. 우선 아침에 일어나서 북마크한 레코드숍 웹사이트 12군데에서 4시간 동안 신보를 듣는다. 그리고 피자를 시키고, 쇼미더머니를 볼 거 같다. 프로듀스48도 봤다. 오디션 프로그램을 좋아한다. 오히려 넷플릭스는 잘 안 보게 된다. 아니면 아무것도 안 하거나… 휴일은 보통 이런 식이다.

 

을지로 소재 우주만물을 통해 일본, 대만 등지에서 앨범을 들여오고 있다. 한국에 조용히 인기몰이 중인 대만의 선셋 롤러코스터나 9m88을 소개한 이력도 있다. 음반을 들여오는 특별한 기준이 있나.

내 기준으로 센스 있는 음악가의 음반을 들여온다. 보통 나는 이걸 감각이라 표현하고 언제나 감각이 서 있으려 노력한다. 선셋 롤러코스터 같은 뮤지션은 감각이 뾰족하게 서 있는 좋은 예다. 그런 이들의 음악은 듣는 사람을 혹하게 하는 매력이 있고. 나는 그런 음악을 골라서 가져온다. 선셋 롤러코스터나 9m88도 좋지만 나의 취향은 더 이상한 지점에 있다.

 

꼭 수입하고 싶은 음반이 있다면?

당장 수입하고 싶은 음반은 딱히 없다. 옛날에 비슷하게 노상호가 무덤까지 갖고 들어가고 싶은 음악이 있냐고 물었는데, 없다고 대답했다. 사실 음악에 그렇게 집착하지는 않는다. 파티 이름도 노 뮤직(No Music)이지 않나. 어디 가서 눈에 보이면 신나서 사는 거지. 뭔가를 못 구하면 하루 정도 애타긴 하는데, 다음날이면 날아간다.

 

어김없이 소셜 미디어를 달구며 관심을 모았던 ‘서울인기 페스티벌’을 성황리에 마쳤다고 들었다. 다채로운 아티스트 라인업이 단연 눈에 띄었는데, 본인이 기획한 부분이라고.

페어브라더(Fairbrother)로 활동 중인 정우영과 함께 음악 감독을 맡아 첫 번째 행사부터 힘을 싣는 중이다. 원래 서울인기 페스티벌의 주최는 따로 있는데, 이들이 음악 프로그램을 기획하기 위해 정우영을 섭외했고 그 후 나도 합류했다. 전체적인 그림을 어떻게 그릴지 많이 고민했다. 그러다가 일본의 한 페스티벌에서 밴드와 디제이가 무대를 같이 쓰는 모습이 떠올랐다. ‘뒤섞여서 놀자’라는 아이디어에서 발전한 형태가 지금의 서울인기 페스티벌이다. 어려운 점이라면 당연히 금전적인 부분이다. 쉬운 해결책은 역시 투자인데, 기획 회의 때 언제나 단골 안건으로 나온다. 그러나 스폰서가 개입하면 서울인기의 색이 사라질 것만 같다. 따라서 납득할 만한 지점을 찾으려 노력 중이다.

 

작년 서울인기의 라인업과 비교했을 때, 이번 라인업은 예측할 수 있는 아티스트 군에서 벗어났다는 의견도 있다.

행사를 기획하다 보면 이런저런 이유로 처음 계획했던 라인업에서 빗겨나가기 마련이다. 이번 서울인기도 처음 라인업에서 뒷걸음치다가 만들어지는 라인업이다. 어쨌든 우리가 좋아하고, 서울 언더그라운드에서 가장 재밌는 걸 하는 사람들을 불러오려고 한다.

 

소이48과 함께한 아시안 뮤직 파티는 어떤 프로그램인가?

내가 일본에서 소이48을 보고 놀란 건 일본 사람이 태국 음악을 꾸준히 모아 튼다는 점이었다. 어떻게 보면 되게 이상하지 않나. 아시아인이 다른 아시아 국가의 음악을 디깅한다는 사실이 굉장히 이상했다. 왜 그들이 태국 음악을 모으는지 궁금했고, 그들이 일본이 아닌 한국이나 태국에서 공연한다면 어떨까 싶은 호기심도 생겼다. 아시안 뮤직 파티는 제대로는 아니더라도 다양한 아시아 음악을 소개하려는 파티다. 여력이 좀 더 생기면 파티에서 나아가 웹진이나 인터뷰 같은 형식으로도 내용을 풀고 싶지만 아직은 파티로만 진행하고 있다.

 

아시아 음악을 다룬다는 명목으로 많은 공연을 이어나갔다. 그중 가장 보람찬 순간이라면.

가장 보람찬 순간인지는 모르겠지만, 선셋 롤러코스터를 한국에 소개한 일은 좋은 경험이었다. 그들이 한국에서 인기를 얻는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한국인은 대만 음악을 잘 모르지 않나. 영어 가사라 쉽게 들리고 잘 만든 음악이라는 이유도 뒷받침하겠지만. 어쨌든 계속해서 사람들이 그들의 음악을 찾아 들으니 기분 좋지. 가게에서도 선셋 롤러코스터의 음반이 많이 팔린다. 선셋을 사러 왔다가 다른 것까지 사가는 고객도 있다. 가장 재밌던 건 이번 서울인기 페스티벌에서의 소이48이었다. 그 말을 해주려고 갔더니, 이미 한국 공연이 가장 재미있었다고 주변에다 말하고 다니더라. 그래… 그럼 다행이다 싶은 거지.

 

공연 기획, 음반 레이블 헬리콥터 레코드 운영, 디제잉, 음반 수입 등 하는 일이 많다. 여러 역할을 병행하기 벅차지 않나.

맞다. 그래서 매번 잘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에만 집중하는 사람은 자신의 100%를 투자해 멋지게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의 경우는 허덕허덕 발버둥 치다가 결국 “아, 망했다”나 “아 씨발, 겨우 해냈다” 정도의 느낌이지. 혼자 여러 가지를 다 이끌어가는 이들은 거의 다 비슷한 상황이지 않을까. 역시 쉽지는 않다.

 

이미 많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더 욕심이 생긴다면?

가능한 한 많이 하고 싶다. 인터뷰, 프로모션 같은 걸 전부. 지금은 파티를 열고, 앨범을 우주만물에 가져다 두는 정도다. 여기에 서울 커뮤니티 라디오(Seoul Community Radio, SCR)에 나가는 일이 하나 더 추가된 거지. 내가 불러온 이들의 국가에 놀러 갔을 땐 새로운 이들과 이벤트를 만들려고 한다. 계속 주고받으려고 한다.

 

새로운 아티스트를 만날 때 미리 연락하고 가는가?

사실 인스타그램 같은 소셜 미디어로는 정확히 판단하기 어렵다. 그런 식으로 불렀더니 실제는 많이 다른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말 안 하고 공연을 보러 갈 때가 더 많다. 일본이나 대만은 직접 가기에도 크게 부담스럽지 않아 직접 찾아가서 눈으로 확인하는 편이다.

 

추후 일정을 이야기해준다면?

언젠가 9m88을 데려올 거다. 항공권을 사서 공연을 보러 갈 정도로 좋아하는 뮤지션이다. 하세가와 요헤이와 믹스테잎도 계속 낼 예정이다. 유기농맥주와 함께 아시아 투어도 준비 중이다. 올해 말에는 소이48과 태국, 라오스에서 한 3주 정도 지낼 예정이다. 다른 얘기로 대만에 웨이팅 룸(Waiting Room)이라는 숍이 있다. 거기서 진행하는 ‘룸서비스’라는 이벤트가 있는데 기대 중이다. 대만에 실력 있는 뮤지션이 많은데도 소셜 미디어에서 확인하기 힘들다. 그럴 땐 어쩔 수 없이 직접 가야 한다. 가서 봐야 한다.

 

혹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남았나.

지금 뉴스레터를 하나 쓰고 있다. 이 인터뷰를 보는 사람 중 이상한 음악에 호기심이 있다면, 우주만물에 와도 좋고, 이벤트에 와도 좋을 듯하다. 언제까지 이 세상에 내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저 인간이 저런 걸 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으로 체크하러 왔으면 좋겠다. 늦은 체크는 슬픔밖에 없어.


진행 / 글 │ 홍석민, 심은보
사진 │ 고지원, 이강혁

*해당 인터뷰는 지난 10월에 발간된 VISLA Paper 6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VISLA Paper는 지정 배포처 및 정기구독을 통해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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