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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ths ago
FEATURE

빈티지 단상

“왜 빈티지를 좋아하세요?”

1. 얼마 전 VISLA라는 우리 동네 멋쟁이 친구들이 종이 잡지를 냈다고 해서 쫄래쫄래 구경 갔다가 받은 질문이었다. 멋쟁이들 앞에서 무슨 고상한 이야기를 했다가는 곧바로 화형식이라도 거행될 것 같아서, 별생각 없이 ”싸서요 하하”라고 얼버무리고 말았는데… 그렇게 집에 돌아와서 마침 미국에 갈 짐을 싸며 옷장 여기저기에 쌓인, 지난 십여 년간 모아온 출처 모를 옷가지(=걸레)를 정리하던 중 헌 옷을 보며 문득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다.

2. 일단 나는 헌 옷을 참 좋아하는구나. 근데 소위 빈티지를 좋아한다고 말하기엔 잠시 멈칫하게 된다. 빈티지 순수령이 빙의된 순수주의자들의 ‘빈티지와 구제의 구별법’ 따위의 기준에 비추어보면, 오히려 지금의 내가 좋아하는 건 빈티지보다는 구제인 것 같다. 작년까지만 해도 그나마 브랜드를 확인할 수 있는 유즈드(Used) 제품 내지는 순수주의자들이 그다지 가치를 매기지는 않지만, 내 눈에는 예쁜 90년대 챔피온(Champion)이나 출처가 불분명한 쌈마이 하와이안 셔츠, 현행 레트로 군납품 정도였다면, 지금은 그야말로 생판 처음 보는 브랜드 태그가 달린 무명의 구제 옷이나 조악하기 그지없는 미제 블랭크 티셔츠 기반의 단체 티셔츠 따위의 수드라 같은 헌 옷에만 돈을 쓰고 있다.

3. 물론 낡은 옷 위계의 최상단에 있는 ─ 명칭은 누가 정했는지 모르겠지만 ─ ‘오리지널 빈티지[1]’라는 것을 싫어할 리는 만무하다. 오늘도 습관적으로 이베이(eBay)를 쑤시면서 찾아보려 했던 건 결국 그 오리지널 빈티지로 분류되는 것이었으니까. 다만 뭔가 묘하게 지친다. 홍대 앞 유명 빈티지 매장이 라는 곳에 가서 잠깐 옷에 손을 대자마자 코스프레라도 한 듯한 직원이 나타나서는 ”이게 47년에 영국에서 입던 죄수복입니다. 아세요?”라는 식으로 설명하기 시작하면, ”정말 46년도 48년도 아닌 정확히 47년이라고!?”라고 하며 그 자리에서 죄수가 되고 싶어진단 말이다…

4.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인터넷을 통해 모두가 일정 수준 이상의 정보를 공유할 수 있게 되면서일까? 뭔가 사회 전반에서 ‘잘해야 한다’는 강박이 소비 활동에까지 미친 것 같다. 뽐뿌를 위시한 수많은 생활력 베이스 사이트를 통해 쇼핑의 정보가 창궐하면서 이제 더는 최저가로 사지 않으면 안 되고, 쿠폰과 카드 신공 같은 것들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거의 무슨 스타 최적화 빌드[2]처럼 구매에도 최적화가 생겼다. 이것이 나쁘냐고 한다면 당연히 소비자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지만, 못 하면 병신 취급을 당하다 보니 뭐 하나 구매할 때도 고민과 긴장이 수반된다. ”신도림 테크노마트에 가면 갤럭시 9이 얼만데 넌 또 동네에서 무슨 듣보잡을 10만 원이나 주고 샀냐” 따위의 이야기를 들으면 왠지 역적이라도 된 기분이니.

5. 옷도 대략은 마찬가지다. 폴로(Polo)는 당연히 공식 홈페이지에서 직접 오더를 때려야 한다든지, 일본발 헤리티지 어쩌고 브랜드를 국내 편집숍에서 사느니 비행기를 타고 가서 사 오는 게 오히려 유리하다는 건 최소한 누군가에게는 상식이 되었다. ‘백갤[3]’에서 처음 봤던 ‘어미새[4]’는 이제 단순히 신사복/정장에만 국한되지 않는 모양. 마치 뽐뿌 게시판을 연상시킬 만큼 하루에도 무수한 오픈마켓 URL과 외국 쇼핑몰의 쿠폰 번호가 각종 패션 게시판에 쉼 없이 올라오고, 심지어 대부분 너무나 유익한 정보라 못 본 척하기 무척이나 피곤한 것들이다. 그렇게 유익한 정보의 홍수 속에 있다 보니, 옷을 소비할 때도 충동 구매라던가 멍청하게 구매하는 일이 조금은 어려워진다. 뭐랄까 디아블로2를 예로 들자면, ‘난 지적인 바바리안[5]이 좋아’라고 하며 병신같이 지혜에 스탯을 찍는 짓을 더는 하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30만 원에 항공권을 샀는데 다음날 15만 원으로 내려간 항공권을 봤을 때 느끼는 허탈함을 고작 바지 하나 사면서도 느껴야 한다니.

6. 아이콘 TV에서 전설의 에피소드를 남긴 제이에스(Jayass)가 에스프레소 머신인가, 임스 체어를 조립하면서였나. 왜 이렇게 옛날 걸 사느냐는 진행자의 질문을 받았을 때 뭔가 떼기의 아버지답게 나름의 의미와 철학을 담은 대답을 하리라 기대했는데, “존나 스트레스 푸는 거지”라고 쿨하게 대답하는 장면이 꽤 인상적이었다. 예전 아이멧뮤직에 올라왔던 ‘디깅에 관한 DJ들의 생각’이라는 피처에서도, “디깅은 모든 걸 의미하지만 그게 고상한 취미라고 생각하는 애들은 좆까세요”라고 했던 디제이가 있었는데. 하하. 결국은 엄격한 기준에서 벗어나는, 일탈(=바보짓)이 주는 기묘한 기쁨이란 게 빈티지에도 존재하는 것 같다. 온갖 미사여구와 당위를 부여하려 애쓰지만 결국 빈티지는 위에서 말하는 합리적 소비와는 사실 그다지 맞닿는 영역이 아니다. 분명히 매력 있고 의미 있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현행 제품보다 족히 3~4배는 비싼 돈을 주고 몇십 년 된 낡은 옷을 사는 행위를 감히 ‘합리적 소비’, ‘최적화된 소비’라 할 순 없는 것이다. 따라서 비효율적이기에 만끽할 수 있는 소비의 즐거움이 분명히 있다. 어차피 하나밖에 없는 빈티지, 내가 사면 매진되니 필수템이라 부를 수도 없고, 당연히 최저가도 적용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내 눈에 예쁜걸 사면 되고, 사이즈도 당연히 원사이즈니 전전긍긍할 이유가 없다.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입는 불편함이 오히려 즐거움이었다. 사회 전반에 흐르는 ‘잘해야 한다’라는 명제로부터 받는 스트레스를 그나마 여기에서 바보짓을 하며 해소하는 것이다.

7. 그렇게 헌 옷을 좋아하고 새 옷을 멀리하는 지옥의 나선에 올라서고, 그나마 뭐가 더 좋은 건지 찾다 보니 자연스럽게 오리지널 빈티지라는 영역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전통적인 멋쟁이 형님(=바보계의 대선배님)이 종종 올리는 일본 잡지 큐레이팅, 사실 그보다도 밀덕 아저씨들의 카페 글과 중고장터 시세 등을 통해 무엇이 멋진 제품인지 어렴풋하게 배웠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멋쟁이 형님들이 콘셉트가 명확한 빈티지 매장을 냈고, 복각 브랜드와 헤리티지가 한국에서도 중요한 트렌드가 되며 그렇게 나름의 영역이 구축됐다. 그 무렵부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느새 헌 옷이 의미하는 뉘앙스가 조금은 달라졌다. 내 안에도 빈프라임과 옴니피플, 구제와 빈티지를 바라보는 대략의 구분 선이 생기고, 그중에서도 ─ 일본 매거진에서 70년대에 정했으리라 짐작하는 ─ 오리지널 섹션에 들어갈 수 있는 나름 이 바닥의 하잎(Hype), 그레일드[6](Grailed) 제품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스톡X[7](StockX)에서 정해준 건 아니지만, 전 세계적으로 보이지 않는 손이라도 개입했는지 시세도 적당히 형성되었다. 아주 적은 확률이지만, 그래도 이베이나 하물며 국내 유즈드몰, 오프라인 헌 옷집 등을 쑤시다 싼값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하는, 마치 밥 제임스[8]의 [1]을 1.99달러에 사는 듯한 디깅의 기쁨 같은 건 쉬이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빈티지를 구매할 때도 프로토타입과 최적화 비슷한 것이 생기고, 심지어 사이즈조차 거의 완벽하게 구분되다 보니 헌 옷을 사는 데 사이즈 실패까지 걱정하기에 이른다. 이래서는 제이에스가 말하는 ‘스트레스 해소’는커녕, 결국 합리적 구매가 주는 기묘한 피로와 긴장, 스트레스를 이쪽에서조차 느끼게 되는 것이다.

8. 한 달에 10달러가 안 되는 돈에 전 세계 모든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세상에서 테이프와 바이닐을 사는 행위 역시 기준을 한참 벗어난 소비행위다. 이 사회 모두가 부르짖는 합리, 가성비, 효율 따위의 가치로부터 이탈한 이러한 행위는 어찌 됐건 수집이 주는 만족이든, 바보짓에서 느끼는 기묘한 재미든 간에 분명히 음악을 듣는다는 목적만을 위해서는 아닐 것이고, 분명히 유희를 위해 자행하는 일일 터. 다만 여기에서 이러한 일탈(?)이 기쁨이 되려면, 그 바보짓으로 발생할 손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어야겠지. 골동품 시장을 쑤셔서 바이닐을 찾아내는 디깅이라면 얼마든지 괜찮을지 모르지만, 전문가가 큐레이트한 바이닐 전문 매장에서 6만 원 넘게 돈을 주고 판을 사야 한다면 그때부터는 단순히 바보짓으로서의 즐거움을 넘어서는, 어떤 숭고함(?)과 사명감(??)까지도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9. 그렇다면 오리지널 빈티지라는 것에도 그러한 숭고함이니 사명감이니 하는 단어를 들먹일 만큼의 멋과 가치가 있느냐 하면… 물론이다. 오리지널 제품은 아무리 봐도 최고다. 하하. 일본의 어마어마한 오타쿠들이 지난 수십여 년에 걸쳐서 빨아줄 만한 마땅한 이유가 있으며, 오리지널 M-51이나 70년대 노스페이스(The North Face) 다운재킷 같은 건,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문화시민이라면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하. 다만, 지금은 잠정 휴업 중인 360 라디오에 헤리티지 플로스(Heritage Floss)의 디렉터이자 당시 ‘빈킹’으로 불리던 이윤호가 출연했을 때, “보통 어떻게 빈티지 제품을 구입합니까?”라는 질문에 존나 쿨하게 “솔직히 돈만 있으면 다 구하죠”라고 대답한 일이 생각난다 ─ 물론 전부라고 하기엔 그렇지 않은 것도 분명 존재하겠지만 ─ . 동시에 “디깅은 1달러로 그 누구도 들어보지 못한 진짜 좋은 판을 찾는 거예요. 비싼 판 가게에 가서 누가 샘플링했는지 적혀 있는 300달러짜리 판을 사는 애들은 엿 먹으라 그래요” 라는 어떤 디제이의 말도. 무라카미 하루키는 취미생활에 룰과 제한이 없으면 그보다 재미없는 취미도 없다고 했다. 결국은 재미라는 기준에서 봤을 때, 지금의 상향 평준화(?)된 시장에서 나 같은 일개 좆밥이 오리지널 빈티지를 사는 건 차라리 빔즈(BEAMS)에서 발매되는 이쁘장한 신상품을 사는 것보다도 뭔가 뻐근하고 재미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10. 아직 개인적인 재미를 찾을만한 시장이 남아있다면 소위 빈티지 순수주의자들이 그토록 경멸(?)해 마지않는 구제다. 이쪽은 아직도 멍청하고 비효율적이며 몰상식적인 소비가 가능하다. 그 누구도 칭찬해 주진 않지만, 그 누구도 비난하진 않는다. 벌 당 2천 원짜리 티셔츠를 사는데 이것이 70년대 미제인지 베트남 현행인지, 혼용률이 50/50인지 90/10인지 따위를 구분하는 건 아무 의미 없지 않은가. 하물며 사이즈가 맞지 않아도 되고, 맞아도 된다. 꼭 사야 할 것이 하나도 없기에, 대신 아무거나 사도 된다. 아무도 사지 않기에, 얼마에 사든 크게 상관없다. ‘구매 활동조차 잘해야 한다’는 합리적 소비의 압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병신 같은 돈 지랄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도 비교적 싼 값에.

11. 그래서 “왜 빈티지를 좋아하세요?”라고 하면 “싸서요” 라고 대답할 수 있겠다. 뭐 이런 바보 같은 변을, 하하.


오리지널 빈티지[1]

단순 구제 의류가 아닌 나름의 역사와 가치를 지닌 빈티지, 예를 들면 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진짜배기 밀리터리 웨어.

스타 최적화빌드[2]

블리자드(Blizzard)가 제작한 ‘스타크래프트’ 게임 내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건물을 짓는 순서와 타이밍. 게이머들은 연구를 통해 자신의 전략에 가장 적합한 ‘최적화 빌드’를 구사한다.

백갤[3]

커뮤니티 사이트 디시인사이드(DCinside) 내 백화점, 마트 갤러리의 약칭.

어미새[4]

백갤 내 저렴한 제품, 할인 정보에 관한 게시물을 이르는 말.

바바리안[5]

블리자드가 제작한 게임 디아블로 2(Diablo 2)에 등장하는 주인공 캐릭터. 강한 힘과 육체, 무기를 들고 직접 싸우며 근접전에 능하다. 무식하고 힘만 센 이미지.

그레일드[6]

어떠한 카테고리 내에서 마니아, 컬렉터에게 칭송받는 꿈의 아이템을 뜻한다.

스톡X[7]

스니커와 스트리트웨어 등을 매수와 매도 방식의 주식 시스템을 활용해 판매/구매할 수 있는 웹사이트.

밥 제임스[8]

재즈 피아니스트이자 프로듀서. 재즈를 넘어 다양한 영역에서 수십 년이 넘도록 활동한 거장. 한국 소주를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인터뷰는 작년 10월에 발간된 VISLA Paper 6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VISLA Paper는 지정 배포처 및 정기구독을 통해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김선중
김선중 / KS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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