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DELIGHT – 머리맡 한권의 책

매거진이란 이름 아래 모인 친구들이기에 지적 호기심 또는 허영이 어느 정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무리 인터넷이 발달했다 한들, 어린 시절부터 킨들 따위를 보며 자란 세대는 아니기에 머리맡에 ‘알고 싶은’, ‘알면 폼날 거 같은’, ‘너무 재미있는’ 등등의 이유로 선택된 책 한권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수염을 기르고 옷도 편하게 입는 사람들의 집단처럼 보일 수 있지만 각자 너무나 다른 생각을 하고 살아왔고, 또 그렇게 살고 있다. 그들의 머리맡에 어떤 책이 포개져 있을까? 지금 확인해보자.


   

설국 /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금 머리맡에 있는 책을 이야기하면 잭 트라우트(Jack Trout)와 앨 리스(Al Ries)가 쓴 마케팅 서적인 ‘포지셔닝’을 소개해야 하지만, 여기서 소개하기엔 좀 그렇다. 그 전에 최근 감명 깊게 읽은 책을 떠올려보면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이 떠오른다. 이 책은 2014년에 내가 코맥 매카시의 ‘로드’를 읽고 한 5년 만에 읽은 소설이기도 하다. ‘설국’을 읽게 된 계기는 예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장 친한 형과 일본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 주제가 일본 문학으로 흘러갔다. 앞서 ‘5년 만에’ 읽은 소설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나는 문학에 굉장히 약하다. 특히 동양 문학은 더 그렇다. 내가 읽은 문학이라 하면 ‘일리아스/오디세이아’로 시작해서 ‘파우스트’, ‘신곡’, ‘죄와 벌’, ‘제인 에어’ 같이 책장에 꽂혀있던 고전문학 모음집부터 ‘이방인’, ‘앵무새 죽이기’, 등등 오직 서양 문학뿐이다. 어찌 보면 ‘설국’은 수능을 잘 치르기 위해 읽었던 교과서 속 국내 문학을 빼면 처음으로 읽은 아시아권 문학일 것이다. 아, 삼국지연의는 빼야 한다.

‘설국’은 독자마다 해석이 분분한 책이다. 많은 문학 평론가도 각자의 해석을 내놓는다. 번역가를 골치 썩이는 부분도 이 점이다. ‘설국’의 원문은 많은 게 생략되어 있다. 그렇기에 해석도 분분하고, 출판사마다, 번역가마다 어투가 다르고 따라서 읽는 이가 그리는 그림도 달라진다. 여기까지가 나에게 ‘설국’을 추천해준 형이 말해준 이야기다. 그래서 나는 이 단편을 읽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민음사를 시작으로 여러 출판사의 ‘설국’을 읽었다. 이 책이 노벨문학상을 타게 된 결정적 이유라는 영역본을 읽기도 했다. 그래도 나는 이 책이 왜 노벨문학상을 탈 정도로 훌륭한지, ‘설국’의 도입부가 왜 그리도 유명한지, 왜 이 책을 연구한 학자나 논문이 그렇게 많은지 알지 못했다. 그러다 일어권에 사는 친구가 이 책은 하이쿠 ─ 일본의 전통 정형시 ─ 와 비슷한 점이 많고, 제대로 읽으려면 일본어 원본을 읽어야 한다는 말을 해줬다. 내가 읽은 수많은 ‘설국’의 해설에도 비슷한 말이 적혀있었다. 하지만 난 일본어로 쓰인 책을 읽을 정도로 일본어를 잘하는 건 아니다. 결국 ‘설국’은 그렇게 많은 버전을 읽었음에도 머리맡에서 떠나질 않는 책이 되었다. 아마 내가 일본어 원어를 읽을 때까지 떠나지 않을 듯하다.

심은보(Editor)


영알남의 영어의 진실 – 영단어 / 양승준

영어를 처음 배우기 시작한 게 10살 무렵이니까 2000년. 그때부터 지금까지 총 19년이라는 세월 동안 나는 영어 학원, 과외, 스터디 등 수많은 강사의 손을 거쳐 갔다. 근데 아직도 제대로 된 영어 문장 하나 완성하기가 벅차다. 정말 잘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이걸 노력의 문제라고 꼬집는다면 쿨하게 인정할 수 있다. 학창시절 열심히 공부하던 범생이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글로벌 시대라지만, 나에게 영어란 성적을 위한 수단 그 이상이 되진 못했다. 더욱이 내가 나고 자란 포항은 영어가 필요한 환경이 아니었고, 자주 보던 해외 웹 기사는 구글 만능 번역기에 넣어 버리면 명쾌하진 않지만, 대충 문맥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번역해주었다.

사회로 진출했을 당시까지도 영어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나 퇴사 직후, 서울에서 백수 생활을 전전할 때가 돼서야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스스로 펜을 잡고 영어 공부를 시작한 게 그 무렵이다. 그때 결제한 게 시원스쿨 초급 영어회화. 꾸준히 영어를 습득하면 실력이 유창하게 늘 것이라는 이시원 강사의 말을 100% 신뢰했다. 이때가 아마 내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영어를 습득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니터 너머 입으로 따라 하라는 가르침엔 기시감을 잔뜩 느끼고, 강사가 영어를 발음할 때는 머리로만 되뇌었다. 100% 신뢰라고 하기에는 여전히 노력이 부족했던 것 같다. 말하기가 전혀 늘지 않았다. 그래서 다음으론 실제 사람과 대화를 하기 위해 영어 스터디에 가입했다. 동시에 영어를 꽤나 잘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영어로 말하는 비법을 묻고 다녔다. 그리고 이 책은 자문에 응한 친구의 대답이다. 이 책을 추천하며 내 생일을 기념한 고마운 친구의 설명은 이랬다. “유튜버 영알남이 만든 책인데, 영단어를 좀 더 근본적인 느낌으로 설명해준다”. 복잡한 단어의 근본부터 설명해준다니, 내 마음만큼은 이미 영어를 통달한 경지에 이르렀다. 그때부터 이 책이 내 침대 머리맡을 지키기 시작했다. 영어는 여전히 젬병이다. 그냥 내 머리맡에 놓여 있을 뿐. 내가 이 책의 내용을 단 한 줄도 적지 못하는 이유다.

황선웅(Editor)


수줍음도 지나치면 병 / 권정혜 이정윤 조선미 공저

언젠가부터 젊은이들이 서로를 인싸, 혹은 아싸라는 이름으로 구분 짓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낯간지러운 네이밍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나 스스로를 굳이 분류해보자면 아싸 쪽에 가까운 성향을 가졌음을 부정할 수 없다. 책의 부제에 적힌 사회공포증까지는 아니라고 스스로 자위하지만, 그래도 남들보다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이고, 사람들 눈치도 적잖히 보는 편이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완전 정신 나간 소리지 싶지만, 어쩌면 나는 모든 사람의 마음에 들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어릴 때 무슨 마음의 상처라도 있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나보다 남을 먼저 만족시키도록 가르치는 잘못된 교육 때문이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랬다. 그런데 내 일거수일투족을 남들의 기준에 맞추면서 자신을 소진하다 보니, 남들에게 완벽한 모습을 보일 수 없는 자리라면 나도 모르게 피하게 되더라. 가끔씩 남들에게 서툰 모습이라도 보인 날에는 스스로를 지나칠 정도로 자책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로 마주친 이 책의 제목에 나는 명치를 한 대 씨게 얻어맞았다. ‘수줍음도 지나치면 병’그야말로 일직선으로 냅다 지르는 스트레이트다. 그 위에 적힌 ‘사회공포증의 인지 치료라는 부제도 매력적이었다. 어쨌든 그때 내가 필요한 건 ‘가이드’나 ‘꿀팁’ 같은 막연한 것들이 아니라 효과가 어느 정도 검증된 ‘치료’였으니까.

제목에서 설명하고 있듯, 이 책은 사회공포증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한 치료법을 쉽게 따라 할 수 있도록 풀어놓은 것이다. 1998년에 초판이 나왔으니 안에 담긴 내용도 구닥다리일 것이라는 오판은 하지 말도록. 책 속에 등장하는 ‘정대리’, ‘김양’, ‘황원장’의 사례들을 읽다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똑같은 걱정과 불안을 느끼고 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마음에 드는 이성이 대화 도중에 시계를 본다면 내 유우머가 그렇게 구렸었나 곱씹어 보게 되는 것이 쫄보들의 인지상정이다.

물론 책 속 치료법이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효험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냥 시리즈의 이름처럼, ‘팝사이컬러지 북스를 한 권 읽는다는 가벼운 생각으로 읽어보시라. 만일 지나가는 사람들의 웃음이 나 때문일까 신경 쓰여 옷 매무새를 점검해 본 적이 있다면, 혹은 이성 앞에서 언제나 완벽해 보이고 싶다는 강박에 시달려 만남 자체가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더욱더 일독을 권한다. 남들 눈치만 보다가 말라 죽게 만드는 이 헬조선을 바꿀 수 없다면, 나라도 변해야 조금은 살만해질 테니까.

김홍식(Editor)


지하생활자의 수기 / 도스토옙스키

도스토옙스키라는 이름은 아마도 후대의 작가들에게, 글 깨나 쓴다는 이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거라 생각한다. 톨스토이와 함께 러시아의 대문호로 칭송받는 그의 작품은 작가 지망생에게 한 번쯤은 열어야 할 문인 동시에 가벼이 오르지 못할 산으로 다가올 터. 문학의 재미를 느낀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로서는 러시아 문학의 거대한 벽이라는 것이 정확히 어느 정도의 두께인지 가늠하기 쉽지 않지만, 어느 날 아주 우연히 중고서점에서 장바구니로 옮겨진 도스토옙스키, 이 대단한 양반은 그 뒤로도 내 머리맡에서 꿈틀대고 있다.

서점에서 집어 든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은 단편 ‘지하생활자의 수기’였다. 그저 내 상황에 잘 들어맞는다고 느꼈던 ‘지하생활자’라는 단어 하나가 그와의 첫 만남을 이어준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한남오거리를 지나 옥수 쪽으로 올라가는 언덕 골목에 붙은 작은 반지하에 살았다. 두 다리를 다 뻗어도 머리가 문밖으로 나올 듯 말 듯한 코딱지만 한 방에서, 불을 끄고 나면 한 줌의 칠흑 같은 어둠으로 변하는 지하에서 ‘만약 내가 감옥에 간다면 내 방 같은 곳에서 몇 년을 살아야 하겠구나’라고 상상하며 잠이 들곤 했다. 그런 내게 이 책은 퇴근 후 새벽녘, 남 몰래 더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는 승강장이었다. 지하에서 홀로서기를 시작한 나의 동반자였다.

단편인 만큼 단숨에 읽을 수 있을 분량에 내용도 복잡하지 않다. 물론 체르니셉스키가 자신의 이성적 이기주의 이론을 형상화한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도스토옙스키의 답변이자, 본인의 이데올로기적인 변화를 통한 사상의 전환점을 드러낸 물꼬 같은 작품이었다는 사실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당시의 이데올로기와 시대상까지 조목조목 짚어가며 감탄하지 않더라도 어딘지 징그럽기까지 한 심리 묘사, 인물의 고독과 적개심, 냄새가 진동하고 질척거리는 지하실의 체취가 묻어나는 이 소설은 여러 가지 의미로 내 기억에 선명한 자국을 남겼기에 지금도 심심할 때면 아무 페이지나 들춰내서 잠시 문장을 곱씹곤 한다.

지금은 지하에 있던 9평짜리 사무실도 4층으로 이전하고, 집도 지하방에서 3층으로 이사했다. 나는 다시 ‘지하생활자’라는 말이 익숙하지 않은 상태로 되돌아 간 것이다. 사실 특별히 경제적인 어려움이라고 할 게 없는 소박한 가정에서 자란 내가 스스로 지하생활자라는 칭호(?)를 갖다 붙인다는 것은 애시당초 기만적인 행위일 것이다. 다만 안락한 보금자리에서 벗어나 별 볼 일 없는 알몸으로 벗겨진 당시의 얄팍한 감상을 오래전 대문호가 써낸 문학 작품과 동일시했다니, 퍽 우습지 않은가.

권혁인(Editor in Chi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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