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m De Mode #6 영화와 패션이 공유하는 세계관

필름 드 모드(Film De Mode)를 시작할 때, 이렇게 밝힌 바 있다. “필름 드 모드는 영화 속에서 패션이 기능하는 바에 관한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다루며, 특정 장르의 구분 없이 영화와 패션의 교집합이 될 만한 흥미로운 콘텐츠를 소개할 예정”이라고. 이 선언에 충실히 하고자 여태까지 필름 드 모드는 영화 속 패션의 기능과 역할에 관한 디테일한 의미를 살펴보려고 했다. 그러나 이번엔 조금 더 큰 틀에서 영화와 패션을 함께 관통하는 메시지에 주목하는 건 어떨까? ‘영화와 패션을 결부 짓는 종합적인 담론’이라고 주장한 필름 드 모드의 마지막 6화를 장식할 주제는 ‘영화와 패션이 공유하는 세계관’이다.

 

디스토피아적 미래

영화 “블레이드러너(Blade Runner, 1982)”, 영화 “블레이드러너 2049(Blade Runner 2049, 2017)”
사무엘 로스(Samuel Ross)의 브랜드 “어 콜드 월(A-COLD-WALL)”

우리는 현실이 만족스럽지 못할 때, 헛된 망상에 빠지곤 한다. 그 망상이 빚어낸 비현실적 세계는 두 가지 큰 갈래로 나뉠 수 있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완전하고 이상적인 유토피아 그리고 부정적 현실을 확대 투영하여 암흑의 가상 미래를 그리는 디스토피아. 유토피아와 달리 디스토피아가 그리는 공간은 어둡고 음울하다. 리들리 스콧(Ridley Scott)의 영화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 1982)는 2019년의 망가진 도시 LA를 창조하면서 디스토피아적 미래의 단면을 보여준다. 거리는 온통 네온사인으로 가득하고 일본 게이샤의 얼굴이 도시 전광판을 채운다. 이러한 도시 풍경은 도쿄와 홍콩을 연상시키며 ‘다문화 혼성’의 세계관을 들여다보게 한다. 또한 낮아진 삶의 질과는 별개로 고도의 기술발전이 불러온 ‘사이버 펑크(Cyberpunk)’와 같은 요소를 시각적으로 구현해내며 블레이드 러너는 SF 영화의 선구자격에 이르게 된다.

 

드니 빌뇌브(Denis Villeneuve)의 블레이드 러너 2049(Blade Runner 2049, 2017)는 기존 블레이드 러너가 제시하는 우울한 미래사회를 계승하면서도 독자적인 정체성을 확장하는 데 집중했다. 2049에서 블레이드 러너 시절로부터 30년 후의 미래도시를 채우는 건 홀로그램과 3D 광고판으로 진화되었다. 드니 빌뇌브가 항상 강조하는 수직 익스트림 롱 숏은 광활한 세계를 펼쳐 보이며 우리를 압도하지만, 그곳에서 ‘생명력’은 부재한다. 그러나 인간성을 상실한 미래에서 인간보다 더 인간 같은 복제인간 ‘리플리컨트’를 통해 ‘진정한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근원적 물음은 여전히 되풀이된다. 혼돈의 경계, 디스토피아에서 답을 구할 수 있을까?

 

블레이드 러너가 디스토피아의 설정을 사이버 펑크와 연결 지었다면, 어 콜드 월(A-COLD-WALL)의 디스토피아는 디자이너 사무엘 로스(Samuel Ross) 유년기의 기억에서부터 출발한다. 풍족하지 않은 유년기를 보낸 사무엘 로스는 브랜드 콘셉트와 방향을 자신의 어린 시절 성장 환경에 기대어 풀어냈다. 어 콜드 월 컬렉션에서 낡은 벽돌색, 자갈의 회색빛과 같은 컬러가 주를 이루는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일 터. 그가 면과 컨버스 같은 거친 소재를 자주 사용하는 이유도 그것이 하위문화 계층을 대변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사무엘 로스는 센트럴 세인트 마틴의 학위가 있어야만 런던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일종의 룰을 깬 장본인이지만, 우리 사회에 늘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즉 어 콜드 월이 행하는 모든 프로젝트는 계층, 세대, 성별, 인종 등 어디에나 존재하는 차가운 벽에 관해 이야기하는 예술적 작업인 셈이다.

 

“HUMAN. FORM. STRUCTURE.”라는 슬로건으로 진행된 2019 S/S 컬렉션은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배경으로 새로운 세대와 함께 장벽을 무너뜨리는 퍼포먼스였다. 쇼는 공사장 같은 건물 내부에서 진행되었고 참석자들에게 건설용 마스크와 안경이 제공됐다. 아노락을 입고 잿빛 점토로 뒤덮인 채 등장하는 사람들은 흡사 외계인처럼 보인다. 이런 황폐해진 공간, 암울한 미래도시에서 틀을 깨고 나오는 새로운 세대에 주목하게 만드는 독창적 방식은 브랜드의 가치를 압축해 완벽히 컬렉션에 녹여냈다고 할 수 있다. 사무엘 로스가 주장하는 어 콜드 월의 역할이 낡은 관념과 선입견을 깨부수고, 과거와는 다른 미래를 제시하는 것이므로.

 

 

젊은 날의 초상

영화 “아메리칸 허니(American Honey, 2016)”
브랜드 리암 호지스(Liam Hodges)

리암 호지스(Liam Hodges)가 옷에 접근하는 태도는 독특하고 대담하다. 그러나 그를 정의하는 것 중에 반드시 언급되어야 할 키워드는 ‘유쾌함’이다. 리암 호지스는 휠라(FILA)와 함께 작업하면서 패션이 주는 즐거움과 젊음을 절대 버려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의 모든 컬렉션이 그러했지만, 특히 “Everybody’s Free” 2018 AW는 뉴 웨이브(New Wave) 장르인 블록 헤드 펑크(Blockhead punk)의 음악, 90년대 키즈 TV에 영감받아 리암 호지스만의 유스 컬처(Youth Culture)와 서브컬처(Subculture)를 표현했다. 각각의 복장과 패턴은 술집이나 거리, 공원, 댄스 플로어 등 어디에서나 입을 수 있는 모든 젊은이의 드림플렉스(Dreamplex)를 반영한 것.

 

리암 호지스는 ‘Everybody’s Free’ 컬렉션을 두고 유스 컬처를 언급,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말한다. 그리고 즐거움은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 성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패션이 그 자체로 사람을 웃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음을 상기시켰다. 그의 강점이기도 한 재분열, 재조합 방식으로 구성된 옷은 물론, 손으로 에어브러쉬한 데님은 장인정신을 중요시한다고 몇 차례 밝혀왔던 그의 말을 몸소 증명한다. 그래피티 플라워가 새겨진 바지는 언더그라운드 스타일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그가 유스 컬처를 대하는 방식 그리고 그의 재치와 유머 감각은 2014년 데뷔 컬렉션 이후 리암 호지스라는 브랜드를 패션에 민감한 젊은이 사이에서 빠르게 유행하게 했다. 화려한 색감의 옷과 스모키 메이크업, 초록색으로 염색한 머리카락, 눈에 그려진 X자 스프레이 페인트 등 모델의 일관되지 않은 룩을 통해 리암 호지스는 표현의 자유에 관한 메시지를 던진다. 젊음의 힘을 누리라고.

 

청춘의 젊음과 그 자유로운 몸짓에 관한 영화도 있다. 영화 “아메리칸 허니(American Honey, 2016)”는 미국을 횡단하며 잡지를 파는 10대 아이들, 그 크루에 합류한 소녀 ‘스타’에 관한 이야기다. 안드레아 아놀드(Andrea Arnold) 감독의 로드 트립 경험을 바탕으로 ‘스타’역의 사샤 레인(Sasha Lane)을 비롯한 주요 배우들의 길거리 캐스팅, 전체적인 윤곽만 잡은 채 실제 미국을 횡단하며 진행한 촬영은 이 영화가 진정한 ‘로드 무비’라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아메리칸 허니의 4:3 화면 비율은 화면에 잡힌 한 사람에게 집중할 수 있게 돕는다. 이러한 포맷은 ‘돈’과 ‘자유’ 그리고 ‘꿈’을 쫓는 젊은이들의 진짜 표정을 담아내는데, 그 중심에 ‘스타’가 있다. 2시간 40분이라는 긴 러닝타임 동안 영화는 루즈해지는 것을 오히려 방관하듯 그들을 관찰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렇게 영화가 관찰한 ‘젊음’은 끝내 미국의 빈곤과 마주하게 된다. 그러나 감독은 ‘빈곤’이라는 소재에 영화적으로 어떠한 제스처도 취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메리칸 허니는 젊음을 그저 ‘보여주는’ 영화니까. 감독이 데려가는 미국 로드 트립의 여정 속으로 몸을 맡겨보자.

 

성별을 초월한 젠더리스

영화 “로렌스 애니웨이(Laurence Anyways, 2012)”
━ 브랜드 “마틴 로즈(Martione Rose)”

마틴 로즈(Martione Rose)의 존재를 지우는 건 현재 런던 패션계에서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녀는 작업할 때, 자신이 가진 히스토리를 작품에 녹여내는 방식을 택한다. 그 역사란 90년대 무드와 서브컬처다. 따라서 마틴 로즈의 의상은 90년대 무드를 완벽히 이해하고 재현한다는 평을 받는다. 그러나 90년대 무드와 더불어 마틴 로즈를 지탱하는 정체성은 ‘젠더리스(Genderless)’가 아닐까 싶다. 본인이 입고 싶은 것을 디자인하겠다는 그녀의 철학을 곱씹어보면, 여성 디자이너로서 ‘남성복’을 만든다는 행위에 그다지 큰 방점이 찍혀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녀는 그저 남성 의류로 분류되는 옷을 많은 여성이 입는다고 생각했고, 사람들이 그 디자인 철학에 공감했기에 지금의 위치에 올라섰다고 믿는다. 컬렉션에 굳이 ‘여성 의류’를 선보이지 않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2017년부터 진행된 이탈리아 아웃도어 브랜드 나파 피리(Napapijri)와의 협업에서는 성별을 구분 짓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과장된 실루엣을 선보인다. 마틴 로즈 2017 FW 컬렉션에서 공개한 밑위가 길고 통이 넓은 바지는 언뜻 치마처럼 보이기도 한다. 최근 진행한 2019 S/S 컬렉션은 어떨까? 여전히 90년대 무드를 가져가며 런던 커뮤니티를 말한다. 그러나 변함없이 그녀의 컬렉션에 등장한 것은 마틴 로즈 고유의 비대칭 디자인과 언발란스한 의상이다. 옷에 성별의 경계를 지우는 작업이 어떻게 ‘여성이 남성복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남성복을 여성이 입는다’는 순환 구조로 이어지는지 감상해보자.

마틴 로즈와 영화 “로렌스 애니웨이(Laurence Anyways, 2012)”가 동일 선상에 놓일 수 있다면 그 이유는 첫째로 영화적 배경이 90년대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Gender)’에 영화가 취하는 태도에 있다. 영원히 행복한 연인일 것만 같았던 로렌스와 프레드가 있다. 이 두 사람의 관계는 로렌스가 남은 생을 여자로 살고 싶다고 선언하면서 균열이 생긴다. 남성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내적 자아는 여성인 로렌스, 그의 충격적인 고백으로 괴로운 프레드, 그럼에도 필연적으로 끌리는 두 사람. 영화는 이들에게 견디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비로소 자기 자신으로 사는 삶을 택한 사람의 열망과 그로 인해 자기 자신이 부정당하는 느낌을 받는 사람의 고통이 공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렌스와 프레드는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 불가능에 가까운 사랑 속에 기꺼이 몸을 맡기고 헤매기를 반복한다. 감독 자비에 돌란(Xavier Dolan)은 이러한 캐릭터의 형언할 수 없는 느낌이나 인물의 감춰진 내면을 표현할 때, 판타지가 효과적이라 판단했다. 로렌스 애니웨이의 과장된 미장센이 의도된 연출이란 것을 알고 본다면, 성을 초월한 사랑 이야기에 미술적 색을 입혔을 때 나오는 시너지에 주목하게 될 것이다.

위에서 선별한 영화와 패션 브랜드는 ‘디스토피아’, ‘유스 컬처’, ‘젠더리스’라는 키워드로 묶였지만, 이것은 하나의 관점일 뿐이다. 예술을 감상하는 가장 즐거운 방법은 본인만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게 아닐까. 따라서 개별 영화와 패션은 언제든지 다른 키워드로 해석할 수 있고, 같은 키워드지만 다른 영화와 브랜드가 연결될 수도 있다. 영화와 패션을 연결하는 무언가는 끝없이 존재할 것이다. 이제 본인만의 필름 드 모드를 만들어 보길 바라며 시리즈를 마친다.


글 │ 최세담
커버 이미지 │ 박진우
제작 │ VISLA, MUSIN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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