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REDIGITALSILENCE

불쾌하고 불안정한, 나아가 쓸모없는 소리를 우리는 편의상 소음이라 한다. 1877년 에디슨(Thomas Edison)이 발명한 축음기부터 이전 세기말의 디지털 매체로까지, 음향기기는 군더더기 없는 재생을 위해 일직선으로 달렸고 의도되지 않은 소음은 자제되었다. 돌아보면 20세기 역사는 소음을 일으키는 작은 움직임과 이을 최소화하려는 힘의 줄다리기로 이뤄진 듯하다. 깔끔함과 좋은 음질이 동의어처럼 쓰이는 지금 시대, 다수가 간과한 소음으로 음악을 만드는 이들이 있다. 사회가 정한 질서에 끊임없이 물음표를 던져온 그들은 자신을 노이즈(Noise) 음악가라 부른다.

1990년대 우리나라에 처음 등장한 노이즈 음악가들. 20년 이상 도시와 사회의 소음에 매료된 그들의 까닭을 듣기 위해 최준용, 홍철기와 마주 앉았다. 둘은 한국 최초의 노이즈 음악 듀오 아스트로노이즈(Astronoise)와 밴드 퓨어디지탈사일런스(Puredigitalsilence, 이하 PDS)의 주축 인물이며, 이들의 주변에서 한국의 노이즈 음악은 즉흥, 실험 음악과 함께 서울에 신(Scene)을 형성했다. 최준용과 홍철기는 현재 노이즈, 실험, 그리고 즉흥 음악 음반 레이블 벌룬앤니들(Balloon & Needle)을 운영하며 지속해서 공연 및 기획 중이다.

두 번에 걸쳐 진행된 둘과의 대담은 때로는 합주실, 때로는 카페에서 이뤄졌다. 지금까지의 행보와 철학을 묻고 답하는 과정. 긴 호흡으로 진행된 만큼 인터뷰 현장을 방문한 주변 인물이 여럿 참여했다는 걸 미리 전한다. 그들은 편하게 대화를 듣고, 또 증언했다. 함께한 PDS의 정은주와 음반 레이블 대한 일렉트로닉스(Daehan Electronics)의 커티스 캄부(Curtis Cambou)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며 대담의 전문을 아래 첨부한다.

 

둘은 언제부터 알고 지냈나.

최준용: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갓 대학교에 들어간 96년도 말부터 음악적으로 교류했다. 서로 알게 된 것은 그때보다 조금 전으로, 나우누리라는 PC통신 서비스의 인터넷 동호회 ‘메탈동’을 통해서였다. 이름에 메탈이 들어간다 해서 메탈 음악만 듣지는 않았고, 인디 록(Indie Rock)부터 정말 이상한 음악까지 공유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렇게 가상공간에서만 알고 지내던 홍철기와 실제로 만난 계기는 96년도 여름, 홍철기가 주최한 오프라인 음감회였다. 만난 자리에서 서로 비슷한 점이 많다는 걸 발견하고 친해졌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이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한국의 인디 록은 하이텔, 나우누리를 비롯한 PC통신 서비스의 수혜를 입어 발달한 문화적 움직임의 한 예다. 당시 음악을 좋아하는 이에게 PC통신 동호회는 어떤 의미였나.

홍철기: 하이텔의 메탈동에서 유명한 밴드가 많이 나왔지. 어찌 됐건 그 시절은 아직 인터넷이 활성화되기 전이라 새로운 음악을 접할 창구가 많이 없었다. 미국의 잡지를 구해서 읽거나 상아 레코드 매장에서 최신 음반이 진열된 선반을 보는 정도? 그러다가 PC통신이 등장하면서 취향을 공유하는 이들과 소통할 수 있는 가상공간이 마련되었다.

최준용: 음악 관련 글의 수준이 상당히 높아서 좋은 정보를 많이 접했다.

정은주: 나아가 각자가 준비해온 음악을 함께 듣기 위해 마련한 오프라인 음감회에서는 서로 CD를 빌려주기도 했다.

홍철기: CD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인터넷이 조금씩 보급되면서 생겨난 CD 나우, CD 유니버스 같은 쇼핑몰에서 해외 결제 가능한 회원이 타 회원에게 돈을 받아 대표로 CD를 구매하는 모습도 특이할 것 없는 일상이었다.

 

처음부터 실험적인 음악에 관심이 많았나.

홍철기: 고등학생 시절에는 데스 메탈(Death Metal)을 중심으로 얼터너티브 록(Alternative Rock)이나 인디 록을 많이 들었는데 점점 얼터너티브 록과 인디 록에서 곧잘 들리는 로-파이(Lo-Fi) 음향에 관심이 가더라. 최준용이 고맙게도 로-파이 음악을 많이 알려줬지. 그러다 97년 초부터 사이키델릭(Phychedelic)한 소리와 일본 노이즈 음악의 매력에 빠져 그쪽을 파게 되었다.

최준용: 미국의 릴렙스 레코드(Relapse Records)가 큰 역할을 했다.

홍철기: 그렇다. 주로 그라인드코어(Grindcore)나 데스 메탈을 취급하는 그들이 발매한 일본 노이즈 음악가 메르츠보우(Merzbow)의 음반 [Pulse Demon]을 듣고 ‘야, 우리도 이런 음악 해보자’라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최준용: 메르츠보우 같은 메탈 쪽에서의 실험뿐만 아니라 너바나(Nirvana)와 소닉 유스(Sonic Youth)가 애용한 기타 피드백(Feedback) 효과도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홍철기: 감상하던 음악을 토대로 각종 이펙터(Effector)를 연결한 기타와 최준용의 4트랙 레코더(4 Track Recorder)로 둘이 이것저것 실험하고 녹음했다. 뿐만 아니라 예전 미국에 거주하던 지인이 보내준 음반에서 많이 배웠다. 미국의 어두운 인디 록, 예를 들면 스완즈(Swans)빅 블랙(Big Black) 같은 밴드 말이다.

 

아스트로노이즈는 그 맥락에서 자연스럽게 결성된 것인가.

홍철기: 나는 아니었지만, 그 시점의 최준용은 아직 다른 밴드에서 활동 중이었다.

최준용: 기타 치며 노래하는 밴드를 꾸렸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동료가 입대하는 바람에 유야무야 되었다. 이왕 그렇게 된 거 홍철기와 무언가 만들어보자는 생각에 만나서 합주를 몇 번 했다. 피드백 효과를 사용해 각종 방식으로 연주한 우리는 곧 아스트로노이즈가 되었다.

 

메르츠보우의 음악이 아스트로노이즈가 결성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만큼, 자파노이즈(Japanoise, 일본의 노이즈 음악과 그 영역을 일컫는 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을 것 같다.

홍철기: 그렇진 않았다. 당시 우리가 알고 있던 자파노이즈 계열의 음악가는 둘 아니면 셋 정도라 영향을 많이 받기엔 자료가 부족했다. 2000년대를 지나 여러 일본 음악가와 교류하며 하나둘씩 중요한 역사와 인물을 알게 되었지만 그건 나중의 이야기다. 뭐랄까. 내가 만약 미국이나 유럽에서 자랐다면 현대음악이나 프리 재즈에서 느꼈을 일종의 허락, “음악을 이렇게 해도 되는구나”라는 해방감을 느낄 수 있는 계기, 바로 그것이 우리에게는 자파노이즈라는 이름이 지닌 의미였다. 드럼이나 베이스 기타가 없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지.

최준용: 메르츠보우의 [Pulse Demon]을 처음 들었을 때 얼마나 충격이 컸는지. 정말 시끄러운 음반이다.

홍철기: 그때 이어폰으로 참 많이 들었는데 지금 돌아보면 귀가 많이 상했을 것 같다.

 

자파노이즈의 음악에 본인들이 느꼈던 바와 비슷하게 타 음악가도 아스트로노이즈의 공연을 보고 해방감을 느꼈다고 여러 인터뷰를 통해 밝힌 바 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본인들의 음악을 부정하는 이는 없었나.

최준용: 그땐 공연차 가는 장소가 재머스(Jammers)를 비롯한 라이브 클럽이었는데, 공연을 자주 한 건 아니었다. 언제는 공연이 시작된 지 몇 분 후 누군가 무대로 올라와 앰프를 꺼버린 적도 있고. 첫 번째 아니면 두 번째 공연 때였다.

홍철기: 몇 번 앰프를 터트린 거로 미운털이 박혔기에 라이브 클럽에서 공연을 많이 안 잡아준 거지. 앰프를 꺼버린 그 사람은 그날 우리가 공연하기 직전에 무대에 올랐던 한 메탈 커버 밴드의 기타리스트다. 막 연주를 시작해서 한창 몰입하고 있는데 뭔가 잘못되었냐고 하면서 갑자기 앰프를 끄더라.

최준용: 그가 우리 공연 직전에 기타를 치면서 호응을 유도할 때 우리가 가만히 있어서 기분이 상했던 게 아닐까.

홍철기: 에이, 공연 준비하는데 헤드뱅잉이 웬 말인가.

최준용: 우리 음악을 부정하는 이는 그가 아니더라도 여럿 있었다. 심지어 같이 록 음악 하던 친구에게 그런 식으로 음악 할 거면 집에서 하라는 말까지 들었으니까. 말 다 했다.

 

그러다 97년, 국내 1세대 인디 음반 레이블 ‘강아지 문화 예술’의 컴필레이션 앨범 [One Day Tours]에 참여했다.

최준용: 아스트로노이즈로 활동할 땐 주변에 우릴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지. 그나마 호감을 느낀 이라면 데이트리퍼(Daytripper)로 활동한 류한길 그리고 옐로우 키친(Yellow Kitchen) 정도였다. 옐로우 키친이 강아지 문화 예술과 우리를 연결해주었다. 솔직히 그들이 우리 음악을 너무 좋아해서라기보다는 순전히 옐로우 키친의 추천 덕분이었다. 97년은 인디음악 부흥기의 중간 지점이었으니, 우리 같은 애들이 엉거주춤 참여해도 별로 이상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홍철기: 인디음악 신이 당시 참 크게 보이긴 했다. 대학교 운동권 노래패부터 메탈 밴드까지 전부 인디로 몰아넣었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참 재미있다. 그리고 그런 시대였기에 우리가 음반을 낼 수 있었다.

 

컴필레이션 앨범에 참여한 아티스트에게 금전적 보상을 줄 여유가 없었던 강아지 문화 예술. 대신 이들은 참여 아티스트의 앨범 제작을 약속했다고.

최준용: 그런 거지. 하지만 강아지 문화 예술이 연락했을 땐 우린 이미 PDS를 결성한 뒤였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아스트로노이즈의 음반 대신 PDS의 음반을 내기로 했지. 강아지 문화 예술은 스튜디오를 제공하고 음향 엔지니어를 한 명 붙여줬다. 비록 PDS가 추구하는 음악을 잘 몰랐지만 성심성의껏 작업을 도왔던 거로 기억한다.

 

밴드 PDS는 어떤 계기로 시작되었나.

최준용: 아까 말했듯 앰프 몇 개를 터트리는 등의 사고를 치니 아스트로노이즈가 점점 설 곳이 없어졌다. 그리고 아스트로노이즈로 활동하면서도 슈게이징(Shoegazing)이나 엠비언트(Ambient)를 계속 들어왔지. 그러다 자연스럽게 시작한 프로젝트다.

 

PDS의 구성원과 각각의 역할을 소개해달라.

최준용: 음반 작업을 하던 98년 당시의 밴드 구성은 다음과 같다. 키보드의 양용준, 드럼의 정은주 그리고 기타의 홍철기와 최준용. 그렇다고 역할이 고정된 건 아니다. 필요에 따라 양용준이 기타나 베이스를 잡기도 하고, 드럼 치는 정은주도 건반이나 기타를 잡았다.

홍철기: 음반을 녹음한 강아지 문화 예술의 스튜디오에서 참 이것저것 많이 시도했다. 심지어 정은주의 목소리도 녹음해 곡에 넣었지.

최준용: 2000년대 들어서는 또 다른 연주자가 합류해 기타를 친 적도 있는 만큼, 발전 가능성을 고려해 PDS는 최대한 개방적으로 운영했다.

 

그렇게 녹음에 들어간 PDS의 첫 앨범 [Circumfluence]. 그 당시의 PDS가 추구한 음악은 어떤 것인가.

최준용: 내가 생각한 아름다운 소리. 리버브(Reverberation)와 딜레이(Delay) 효과가 많이 들어간 소위 말하는 ‘분위기 있는(Atmospheric)’ 음악을 만들고 싶었지. 부피감도 표현하기 위해 원래 악기 소리가 묻힐 정도로 효과를 많이 넣었다.

홍철기: 지금은 똑같이 재현하려고 해도 못 한다. 더군다나 그때 사용한 리버브와 딜레이 이펙터가 생산 중단되었다더라.

최준용: [Circumfluence] 앨범에는 나 아니면 홍철기가 그전에 작곡한 곡과 스튜디오에서 다 같이 만든 곡이 섞여 있다. 하지만 추구하던 방향이 비슷했기에 일관성 있는 앨범으로 완성되었다.

 

음반을 작업할 때 마주한 어려움이나 고생스러운 에피소드가 있다면.

홍철기: 최준용이 토한 거. 중요한 사건이다. 오래전 일이지만 기억에 확실히 남았다.

최준용: 그날 집에서 카레를 먹었다. 스튜디오에 도착해서는 녹음 중간에 양파링 과자를 먹었는데 그게 체한 거다.

홍철기: 일정이 끝나고 같이 지하철로 귀가하던 중 최준용이 갑자기 압구정역에서 내리더라. 그때 PDS의 앨범 작업기를 촬영하던 친구도 같이 내렸던 것 같다. 갑자기 둘이 내려버리니 우리는 얼이 빠졌지. 곧 열차는 다시 출발했고 우리는 줄기차게 토하는 최준용을 멀찍이 바라봤다.

최준용: 토한 다음 다시 열차를 타고 집으로 갔지. 스마트폰이 없어서 참 다행이다. 지금 같으면 어딘가에 사진 찍혀서 올라갔을지도 모른다. 또 사건이라면 데이트리퍼 류한길과 [Circumfluence]에 수록된 “Image Eidétique (featuring Daytripper)”를 작업했을 때의 일이겠지.

홍철기: 류한길과 친해지기 전이었다.

최준용: 류한길은 이전부터 우리의 공연을 찾아와 좋은 평을 남겼고 자신의 음악관도 확실한 사람이라 같이 작업하고 싶은 순수한 마음에 무작정 섭외했다. 당시에도 그는 이미 언니네 이발관과 델리스파이스를 거치며 경험을 많이 쌓은 음악가였으니 우리를 보고는 많이 놀랐을 거다. 약속한 날 류한길이 TS-10이라는 엔소닉(Ensoniq)의 무거운 키보드를 낑낑대며 들고 왔는데 정작 우리는 준비한 것이 없었으니 말이다.

홍철기: 나중에 들어보니 ‘이 새끼들 뭐지?’라고 생각했다더라. 그래도 같이 녹음하며 곡을 만들었다. 지금도 만나면 가끔 그 이야기가 나온다.

 

실제로 98년 PDS의 [Circumfluence] 앨범 작업 현장을 담은 다큐멘터리 “PDS”가 곧 공개될 예정이다. 세기말 서울의 언더그라운드 베뉴에서 공연하는 이들의 모습도 어렴풋이 담겼다고.

최준용: 고등학교에서 알게 된 친구가 촬영했다. 영상 동아리에서 활동하던, 영화를 참 좋아하는 열정 많은 친구였다. 촬영은 그 친구가 먼저 제안했고 우리가 거절할 이유는 없었지. 당시 우리의 감성과 함께 PDS가 어떻게 스튜디오에서 녹음했는지 알 수 있는 유일한 영상이다. 다만 오그라드는 부분이 많아서 난 끝까지 못 보겠더라고. PDS 관련 내용이 주를 이루지만 마지막에 내 부모님도 등장하는 등 참 많은 것이 담긴 영상이다.

 

지금까지 활발히 즉흥, 실험 음악 활동을 이어왔다. [Circumfluence]를 녹음한 98년과 이후의 음악 스타일을 비교한다면.

홍철기: 우선 그 후 약 15년간 리버브나 딜레이 효과를 사용하지 않았다. 다신 쓰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들더라.

최준용: 그렇다고 PDS 당시의 음악 세계로부터 단절된 건 아니다. PDS 세계의 위나 옆으로 십여 년간 접근 방식을 넓혔다. 그러다 보니 나이도 들고 성격도 변하더라. PDS 활동 당시엔 수줍고 내성적인 성향이었지만 지금은 더 웃긴 것도 하는 뻔뻔한 사람이 되었다. 퍼포먼스가 가미된 공연이나 구토와 눈물(Vomit & Tear)에서 둠 메탈(Doom Metal)을 하는 걸 봐도 알 수 있지 않나.

 

2018년 12월, 서울 기반 음반 레이블 대한 일렉트로닉스가 [Circumfluence]를 재발매했다. 모두가 예상치 못한 재발매를 진행한 대한 일렉트로닉스의 수장 커티스 캄부를 인터뷰에 초대해 뒷얘기를 들어보려 한다.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한다.

커티스: 이름은 커티스다. 을지로의 음반 매장 클리크 레코드를 동업자와 운영 중이며, 개인적으로는 한국의 변두리 음악을 재발매하는 음반 레이블 대한 일렉트로닉스을 이끌고 있다. 이외에도 현대 음악을 발굴하는 음반 레이블 브레인댄스 레코드(Braindance Records)도 운영하고 있다.

 

서로를 알게 된 경로가 궁금하다.

최준용: 톡식바이어스플뤠르아이비(Toxicbiasfleurivy)다미라트(Damirat)로 활동하는 프로듀서 김창희가 우리를 연결해주었다. 아스트로노이즈 활동 초기부터 우리의 음악을 들었다고 하더라. 2000년대 초반 공연에서 실제로 알게 된 사이다.

커티스: 최준용과 홍철기가 운영 중인 노이즈, 실험 그리고 즉흥 음악 음반 레이블 벌룬앤니들에 전부터 흥미가 있어서 자주 웹사이트를 방문하곤 했다. 벌룬앤니들 웹사이트에는 한국 실험 음악 관련 행사나 아티스트 정보가 자주 올라온다. 물론 본인들이 소속된 PDS의 대략적인 정보도 그 웹사이트에 기재되어 있어 이미 그 존재는 알고 있었지. 그러다 친구인 김창희가 어느 날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과거에 많이 들었다면서 PDS의 곡을 게재했다. 그때 PDS의 곡을 듣고 비로소 그들의 음악에 흠뻑 빠져 다짜고짜 연락을 보냈다. 결국 그 게시물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지.

 

[Circumfluence]의 재발매를 결심하게 된 이유라면? 음반 레이블 운영자와 원작자, 각자 나름의 고민이 있었을 법하다.

커티스: 고민은 없었다. 듣자마자 바로 확신이 왔지. 바로 진행했다. [Circumfluence]는 정신 나간 음반이다.

최준용: 그저 신기했다. 한국인도 아닌 외국인이 우리의 음악에 열정을 보이니 말이다. 커티스가 사전 조사한 내용을 보며 그의 열정을 확인했고 따라서 믿고 맡길 수 있었다. 잠깐의 화제성을 위해 뛰어든 것이 아닌, 정말 우리의 음악이 좋아 재발매를 제안한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이번 PDS의 음반을 재발매할 때 가장 신경 쓴 부분은 무엇인가.

커티스: 전부. 바이닐의 음압부터 표지 디자인까지 세밀하게 고민해서 생산했다. 그 과정에서 큰 도움을 준 포스트 포에틱스(Post Poetics)에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배포도 허술히 진행하지 않을 예정이다. 내 기준에 판단하건대 취향이 좋은 매장에서만 본 [Circumfluence] 재발매 음반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앞서 다룬 미공개 다큐멘터리 “PDS”의 최초 공개뿐만 아니라 PDS의 라이브 공연까지 담은 기념행사가 12월 23일, 합정동의 무대륙에서 열릴 예정이다. PDS의 라이브 공연은 굉장히 오랜만인 것으로 알고 있다.

최준용: 2002년이 마지막이었다.

 

공연을 멈춘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최준용: 그때는 공연을 기획한다는 일이 쉽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누가 먼저 불러줘야 공연을 할 수 있다는 수동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고. 결국 점점 우릴 찾는 곳이 없어지니 공연도 이어지지 못했다. DIY(Do It Yourself)로 직접 장소를 찾아 담당자와 이야기하며 공연을 기획하는 습관이 밴 것은 그 후의 일이다. 세월이 지나며 나의 인식도 바뀌었지.

 

그렇다면 16년 만의 PDS 라이브 공연인 셈이다. 각자 음악 활동을 해왔다고 하지만 오랜만에 뭉치는 만큼 조금의 난항을 겪었을 것 같다.

최준용: 물론 걱정이 많았지. 그래서 커티스가 행사 당일 라이브 공연을 제안했을 때 바로 확답을 주지 않았다. 어색할 수도 있고. 결과물이 이전보다 좋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리허설을 진행해보니 생각보다 더 호흡이 좋았다. 16년 전 화학작용이 남아있는 덕분인지 크게 힘들지 않았다. 다만, 모두 각자의 일정이 있으므로 합주 시간을 정하는 게 난관이라면 난관이었다.

 

이제 조금 더 깊게 들어가 본인이 몸담은 분야의 음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한다. 먼저, 노이즈라 분류되는 본인의 음악을 설명해달라.

홍철기: PDS로 활동하던 시기를 돌아보면, 만들 수 있는 소리를 전부 긁어모아 음악으로 승화하려는 욕구가 강했던 것 같다. 딱히 어떤 실험을 통해 소음을 만든다기보다는 그저 귀에서 들끓는 소리가 좋았다. 윙윙 울리고 들끓는 소리엔 박자나 선율이 필요 없다고 여겼기에 그런 소리를 어떻게든 고안해 음악을 만들었다. 샘플링이란 개념이 국내에 막 들어온 시기였으니 세계 실험 음악계에서 어떤 시도가 있었는지 우리가 알 리가 있나. 그냥 내가 듣기에 좋은 소리로 만든 것이 나의 음악이었다.

최준용: 노이즈가 무엇이냐에 대한 내 대답은 세월이 흐르며 계속 변해왔다. 편의를 위해 내가 하는 음악을 노이즈 음악이라 말할 때도 있다. 노이즈 음악이라고 하면 다들 알아서 해석하니까. 본론으로 돌아가 모두가 생각하는 백색소음 비슷한 것 말고도 노이즈는 다양하다. 지금 우리를 둘러싼 모든 소리가 노이즈이며 그렇게 인식한다면 당신이 앉은 카페의 배경음악도 노이즈다. 요즘 노이즈 사이즈를 사용해 곡을 만들었다고 말하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 하지만 양념처럼 뭘 넣었다고 전부 노이즈 음악이라 부를 있는 건 아니다. 왜냐, 노이즈 음악은 태도다. 그렇기에 펑크나 힙합 음악 중에도 노이즈 음악으로 느껴지는 것들이 있지. 개인적인 인식일 수도 있고, 구분이 모호한 장르인 것은 확실하다.

홍철기: 그 시절 내가 로-파이 작업을 선호했던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기본적으로 4트랙 레코더에 내장된 히싱 잡음(Hissing Noise) 때문이다. 심지어 녹음 매체도 잡음 낀 카세트테잎이니 당연히 뭔가를 녹음하면 노이즈는 기본으로 배경에 깔리기 마련이었다. 나에겐 그 역시 곡의 중요한 요소였고 이를 마땅히 수정해야 하는 오류로 보는 다수의 시선에 반감이 들었다. 노이즈란 단어에는 그런 의미도 포함된 것 같다. 사람들이 낮춰 평가할 수 있는, 언뜻 들었을 때 쓰레기 같은 소리. 방금 말한 히싱 잡음이 그 예다. 하지만 사람들이 업신여긴다고 해서 절대 후진 것은 아니지. 요즘은 또 이런 생각도 든다. 다른 걸 못 듣게 하는 소리가 노이즈가 아닐까라는. 노이즈 음악이 그렇다. 공연을 찾아가 보면 어떤 때는 시끄러워서, 혹은 이해가 안 되니까 뭘 듣는지 모를 때가 많거든. 귀를 공격하고 몸을 쳐대는, 또 내가 왜 이걸 듣고 있는지 모르는 소리. 그 속에서 집중하며 도전하는 거다. 자신이 무엇인가를 듣고 있음을 다시 인식하게 하는 과정. 노이즈와 노이즈 음악은 이를 가능케 한다.

 

앞서 메탈 뮤지션이 아스트로노이즈의 공연 중 무대로 올라와 앰프를 꺼버린 일화를 들었다. 이는 당시 나름대로 포용력 있던 인디 음악 신에서도 노이즈를 음악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는 걸 암시하는 사건으로 보인다. 음악과 음악이 아닌 것의 경계에 관한 의견이 궁금하다.

최준용: 자기가 음악이라고 생각하는 곳까지가 음악이다. 듣는 사람, 혹은 만든 사람이 음악이라 여기면 그만. 듣는 사람이 갸우뚱하더라도 만든 이가 꿋꿋이 “그래도 이건 음악입니다”라고 하면 더는 할 말이 없는 거지.

홍철기: 요즘은 장르 가릴 것 없이 노이즈가 들어간다. 주류 음악계가 그렇게 변화해서인지, 어디까지가 음악인지 아닌지에 관한 고민을 하는 사람은 요즘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아스트로노이즈나 PDS로 활동하던 90년대는 달랐다. 당시 음악과 비음악의 경계선은 정말 굵었지.

 

지금은 그 경계가 희미해졌다는 뜻인가.

최준용: 세월이 지나며 대중이 음악을 인식하는 범위가 넓어졌다. 미친놈들이 많이 나타난 덕분인지, 아니면 평소 접하는 정보의 양이 달라진 것이 이유인지 지금은 90년대와 다르다.

홍철기: 인터넷이 결정적이었지. 현대음악이나 아방가르드 음악이라는 수십 년 전 미국이나 유럽 여기저기에서 일어난 움직임을 접할 방법이 우리에겐 잡지나 교과서밖에 없었으니까. 그마저도 엉터리 같은 정보가 참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인터넷을 통해서 손쉽게 듣고 구할 수 있지 않은가.

최준용: 인터넷의 발전으로 노이즈에 영향을 받은 일본 음악가들이 점차 한국 땅을 밟았다. 2000년대 초부터 시작된 이들과의 교류로 많은 한국 음악가가 영감을 얻었다.

 

해외 아티스트와의 교류가 이뤄진 곳으로는 국내 실험/즉흥 음악가의 모임장인 불가사리(Bulgasari)닻올림 연주회(Dotolim) 그리고 지금은 없어진 릴레이(Relay)가 있다.

홍철기: 불가사리에 관한 설명은 그 운영을 책임지고 있는 사토 유키에(Yukie Sato)나 이한주에게 들으면 정확하다. 닻올림 역시 진상태가 잘 설명해 줄 것이고. 그래도 우리가 경험한 걸 토대로 이야기를 풀어보자면 우선 20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신촌의 러시(Rush)라는 록카페로 드럼 연주자 요시다 타츠야(Tatsuya Yoshida)가 리더로 있는 일본 유명 노이즈 록 밴드 루인즈(Ruins)가 내한 공연을 진행했다. 이 공연을 보러 간 최준용이 그 자리에서 사토 유키에를 만나 이야기하게 된 것이다.

최준용: 사토 유키에는 그가 이끄는 실험 음악 연주회 시리즈 불가사리 3회의 전단을 나눠주고 있었다. 그것이 한국의 록 음악에 심취한 나머지 한국에서 록 밴드 곱창전골을 결성하고 실험 음악에도 손을 뻗은 사토 유키에와의 첫 만남이다. 그리고 전단에 적힌 그의 불가사리 공연을 찾아간 나는 그에게 우리도 비슷한 음악을 하고 있다고 알렸다. 그 인연으로 2003년 5월부터 2005년까지 아스트로노이즈로서 꾸준히 불가사리에 참여하게 되었다. 불가사리는 정말 자유로운 분위기의 연주회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 그 자리에서 합주가 결정된다. 하지만 조금 더 연주자의 음악에 집중하는 자리를 만들고 싶었던 나와 홍철기 그리고 불가사리에 자주 얼굴을 비추던 진상태와 류한길은 새로운 연주회 시리즈, 릴레이를 만들었다.

홍: 2005년 시작한 릴레이 공연은 정해진 공간 없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이뤄졌다. 하지만 역시나 장소의 불안정성 탓에 2008년에 막을 내렸다. 정기적으로 모여 즉흥적으로 연주하는 모임은 한국은 물론이고 다른 나라에도 많으나, 유지 관건은 그들만의 공간이 있느냐 없느냐다. 공간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면 적어도 회마다 공간을 대여할 수 있게 지속적인 재원이 있어야겠지. 유럽의 경우, 오래된 공연 시리즈를 시 차원에서 지원해 주는 경우가 가끔 있다. 하지만 한국은 힘들지. 릴레이의 경우, 류한길이 노력한 덕에 초기엔 정부의 지원을 조금 받을 수 있었으나 실상은 못 받은 때가 더 많았다. 그뿐만 아니라 류한길이 혼자 서류 작업을 전담하며 전원이 보조금에 목을 매던 상황이었다. 소모적인 활동이었지. 모두가 음악을 향한 열정으로 달릴 준비가 된 상태였으나 지원금이 뚝 끊기니 참.

최준용: 2008년 릴레이가 멈출 무렵, 진상태는 자신의 사무실 공간을 공연장으로 삼은 닻올림 연주회를 시작했다. 2018년으로 10주년을 맞이한 이들은 지금도 국내 실험 음악 신을 기록하고 있다. 진상태의 큰 노력과 준비된 공연장. 이것이 바로 닻올림의 장수 비결이다.

 

다시 경계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2000년대 초 국내 예술계에서 유행한 ‘사운드아트(Sound Art)’. 주로 소음을 다루는 사운드아트의 성질 탓에 덩달아 노이즈 음악 신도 주목을 받았고 동시에 국내 사운드 아티스트와 노이즈 음악가의 경계도 희미해졌다. 그 둘의 관계에 대한 해석이 지금도 학계에서 갈리는 것으로 아는데.

홍철기: 기본적으로 음악 하는 사람과 미술 하는 사람이 싸우는 거다. 누가 주도권을 갖느냐, 그 문제다. 파워 싸움이지. 요즘은 무의미한 실랑이가 아닌가 하는 의문도 든다.

최준용: 예전에는 사운드 아티스트라 불리는 것을 싫어했었다. 사운드 아티스트는 음악가가 아니니까. 연주하는 행위를 중요시한 나는 자신을 음악가라 생각했기에 사운드아트에 대한 반감도 강했다. 하지만 이젠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단순한 이름 붙이기에 지나지 않으니까. 요즘은 필요할 땐 자신을 사운드 아티스트라 말하기도 한다. 크게 상관없다.

 

그러면 무엇이 중요한 것일까. 호칭에 좌지우지되지 않음은 곧 본인만의 곧은 기준이 있다는 말로 들린다.

최준용: 중요한 건 없다. 그걸 아는 것이 중요하다. 요즘은 어떤 것이 아마추어가 만든 음악인지, 전문가가 만든 음악인지 모르겠다. 뭐가 우월하고 열등한지도 모호하다. 가치 판단의 잣대는 위아래, 양옆으로 길게 뻗어 사람 수만큼 존재한다. 개인의 경험, 다시 말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듣고 연주하냐가 모든 걸 결정하겠지.

홍철기: 나도 비슷하게 생각한다. 굳이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경험해 볼 수 있는 것이 늘어나도록 계속 찾는 것.

 

존 케이지(John Cage)가 4분 33초 동안 침묵으로 일관해 객석의 소음을 무대로 끌어올린 때부터 포스트 록과 펑크 그리고 악기의 전통적인 쓰임새를 부정한 인더스트리얼(Industrial) 음악까지, 소음은 역사적으로 기존 사회질서에 반하는 저항 수단이었다. 하지만 길게 노이즈 음악가로 활동한 본인들의 이야기를 듣자니 소음이 꼭 저항의 도구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홍철기: 물론 그 역사적 뿌리는 그렇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겠더라. 과거에는 나도 노이즈 음악에 관한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시기가 있었다. 그것도 어떠한 저항이겠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노이즈 또한 음악이라고 인정받고 싶은 선에 머무는 정도였다. 그래도 음악, 공연, 밴드는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다면 아니라고 말하겠다. 예를 들자면, 스피커는 꼭 관객 앞에 있어야 하는지에 관한 물음. 최준용은 공연 중 자주 PA 스피커를 옮기고 다녔다. 이불에 싸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자연히 누군가와의 의견 충돌이 생기지. 공연 보다 화나서 나가기도 하고. 애초에 왜 관객이 다 만족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여하튼, 그렇게 언제나 누군가와의 긴장 관계를 계속 유지해왔다.

최준용: 노이즈 음악으로 기존의 사회질서에 저항하는 인물도 분명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에너지를 밖이 아닌 나의 내면으로 쏟았다. 식상함에서 지속해서 탈피하고 변화하려는 노력이지. 주류문화가 우릴 음악이 아니라고 무시하는 일에는 신경 안 쓴 지 오래다. 하지만 학교에서 우리를 잘못 다루는 점에는 확실히 반감을 품고 대항한다.

 

최준용이 PA 스피커를 옮기고 다녔던 공연의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다.

최준용: 스피커를 본격적으로 끌고 다니기 시작한 것은 2011년 오스트리아 빈 공연부터다. 꽤 큰 크기의 스피커를 끌고 다녔지.

홍철기: 최준용은 그날 연주하다 스피커를 끌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노이즈 음악가는 각자 애착이 가는 악기를 적어도 하나는 가지고 있다고 이전 노이즈 음악가이자 공연 기획자 박다함이 인터뷰를 통해 밝힌 적 있다.

홍철기: 전에는 그랬으나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 악기가 다르다고 크게 달라지는 건 없거든. 인풋(Input)이나 아웃풋(Output)은 대부분 비슷하다. 뭐가 되었든 두들기고 때리고 떨리는 것을 인풋으로 받아, 스피커 같은 아웃풋으로 신호를 증폭하겠지.

최준용: 동의한다. 자주 사용하는 기구나 악기는 있다. CD 플레이어, 탁구공, 안마기 등에 애착이 생기지만 언제나 대체될 수 있고 없어도 된다. 악기가 없어진다면 뒷산에 올라 나뭇잎과 돌멩이를 주워와 공연해야지. 농담이 아니라 실제로 해외 공연을 하러 간 류한길에게 일어난 일이다. 돌발 상황이긴 하지만 그날 류한길은 진짜배기 즉흥연주를 펼쳤다.

 

해외 아티스트를 초청하거나 해외에서 공연하는 등 다른 국가와 교류가 활발하다. 국내외 아티스트와의 협업 또는 교류는 어떻게 이뤄지는가.

최준용: 확실히 일본은 가까우니 아는 음악가를 통해 연결되는 경우가 잦다. 한번 공연을 같이 기획하면 그 후 지속해서 교류하게 되더라. 유럽 음악가의 경우도 마찬가지. 신이 작다 보니 한두 다리 걸치면 알게 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아무런 관계가 없어도 음악이 좋으면 이메일로 연락하곤 하지. 우리도 그렇지만 다들 누군가를 통해 공연을 잡거나 투어를 기획한다. 닻올림 연주회의 경우도 해외에선 이미 꽤 알려져 한국을 방문하는 음악가들이 공연을 희망하는 이메일을 보낸다. 하지만 일정이 꽉 차서 성사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더라.

 

90년대 아스트로노이즈와 PDS로 활동하던 때와 지금까지, 본인들이 감지한 국내 노이즈 음악 신의 가장 큰 변화를 꼽는다면.

홍철기: 최준용이 앉아서 연주하다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한 것. 아주 큰 변화였다. 정확한 시점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농담이 아니다. 이전 최준용이 모든 기구를 탁자에 올려두고 연주하는 모습을 누군가는 테이블 코어(Table Core)의 일종이라 치부할 정도로 안 일어나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걸어 다니기 시작하더라.

최준용: 레퍼런스가 없었던 건 아니다. 일본의 가와구치 타카히로(Takahiro Kawaguchi)도 비슷한 퍼포먼스를 했었다.

홍철기: 물론 그랬겠지만 우리 중에선 누구보다 먼저 걷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책상도 없이 공연도 몇 번 하고 있더라. 2008년 즈음의 일이다. 이 신에서 가장 큰 변화였다.

최준용: 내가 감지한 가장 큰 변화는 관객의 태도다. 90년대 후반 아스트로노이즈나 PDS 공연을 찾은 이의 반응이 “이 새끼들 뭐하나”였다면 2000년대 초반 릴레이나 불가사리를 관람하는 이의 얼굴에선 호기심을 찾을 수 있었다. 나아가 요즘은 우리가 하는 음악을 조금씩 이해하는 단계에 접어든 거 같다. 실제로 공연을 관람하는 이의 수도 늘었고. 하지만 우릴 향한 적대감이 사라져서 긴장 관계가 예전 같지 않은 건 좀 아쉽다.

홍철기: 스릴이 없지.

최준용: 90년대처럼 우리 음악이 자위행위라고 비난할 사람은 이제 없을 거다. 지금은 다양성을 무시하는 사람이 바보인 세상이니.

홍철기: 자위라는 표현이 나와서 말인데, 가끔 실험 음악 공연에서 감동하고 가는 이가 있더라. 왜 감동하는 걸까. 그거야말로 자위가 아닌가 싶다.

 

노이즈 음악 공연에서 공연자와 관객은 어떤 관계를 이루는가.

홍철기: 청취자는 공연자와 크게 다를 게 없다. 노이즈 음악 공연은 특성상 웬만하면 공연자가 따로 음향을 모니터할 필요 없지 않나. 결국 그 둘은 같은 공간에서 다른 위치에 있을 뿐이다.

 

노이즈 음악을 ‘잘’ 들으려면?

홍철기: 확실히 마스터링이 잘된 팝 음악을 들을 때와는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우선 라이브 현장을 찾아야겠지. 그리고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과 본인이 듣고 있는 소리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 다시 말해, 듣는 행위 자체를 의식하는 것이 노이즈 음악을 듣는 법이라 생각한다. 대단한 노력이 필요한 일은 절대 아니니 계속 시도하면 언젠가 귀로 무언가를 느꼈다는 감이 올 것이다.

최준용: 뭐가 더 좋은 청취 행위냐의 문제가 아니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들어도 나쁠 건 없지만 연주회에서 졸거나 쉬다 가도 잘못된 형태의 듣기는 아닌 것 같다. 만약 부정적인 경험을 하고 간다고 하더라도 얻는 게 분명 있을 것이다.

 

해외에 알려져 교류가 많아지고 닻올림의 관객이 늘어난 지금 노이즈 음악의 미래를 점쳐본다면.

홍철기: 모르지. 하지만 닻올림이 잘 유지된다면 지금보다 더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게 될 것 같다.

최준용: 전망이 꼭 좋을 필요는 없지만 나쁘지도 않은 것 같다. 젊은 연주자도 생겼고 관심 있는 사람도 늘었고.

 

마지막으로 더하고 싶은 말이 있나.

최준용: 대한 일렉트로닉스와 커티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덕분에 오랜만에 PDS로 모여 공연하게 되어 기쁘다.

Balloon & Needle 공식 웹사이트
Daehan Electronics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


진행 / 글 │ 홍석민
사진 │ 배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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