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유머를 잉크에 흩트리는 일러스트레이터, Harry Wyld

인간의 손이 따라갈 수 없는 디지털 기술의 압도적인 성능은 숱한 미장이들의 붓을 내려놓게 하거나 작업환경을 모니터 앞으로 옮기게 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섬세하지 못한 오래전 극장 간판이나 포스터에 매력을 느낀다. 조금 더 감성적으로 표현하자면 군데군데 묻어나는 잉크 자국과 몇 밀리씩 오차가 생길 수밖에 없는 엄밀하지 않은 디자인에서 빌어먹을 안도감을 느끼는 걸지도 모른다.

해리 와일드(Harry Wyld)는 이렇게 디지털로 점철된 세상에서 손맛을 동경하는 소수 부류의 일러스트레이터다. 그는 흑연과 잉크의 흔적을 남기는 데 인색하지 않다. 오타를 지우지 않고 쓱쓱 긋고 다시 씀으로써 개인적인 실수를 일련의 디자인적 장치로 활용한다. 철두철미한 상업 디자인이 용인하지 않는 실수의 미학. 그로테스크한 흑백 드로잉은 자칫 어둡게 흘러가는 듯하지만, 작가의 허술한 유머가 결합하며 균형을 이룬다. 작년 현대카드 스토리지(Storage)를 통해 작품을 선보인 데이비드 슈리글리(David Shrigley)와도 통하는바.

엉성함을 의도하는 해리의 스타일은 오른팔이 부러져 감각을 잃었을 때 필연적으로 왼손을 사용할 수밖에 없던 대학 시절 자연스레 체득한 것이다. 그때 그는 허술해진 자신의 그림을 포용하기로 했다고. 작가의 전화위복은 장차 다른 이들과 구분될 수 있는 독자적인 형식을 낳았다. 세련됨의 홍수에 지친 이들이라면 더욱 반길 해리 와일드의 작업물을 감상해보자.

Harry Wyld 공식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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