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101: 레플리카, 그 본연의 의미

현대 사회에서 현명한 소비자로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홍수처럼 넘쳐나는 사방의 광고와 유명인이 입고 있는 옷들, 그리고 금세 바뀌어버리는 트렌드에 현혹되기 쉽다. 물론 그대로 받아들이면 더 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패스트 패션이나 트렌드에 의존해서 소비한다면, 옷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있다고 보기도 어려울뿐더러, 얼마 지나지 않아 질려버리기에 십상이다. 상품을 만든 디자이너의 생각과 브랜드의 철학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특정한 제품을 구매한다면 당신의 옷장은 좀 더 자신만의 확고한 스타일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이는 바로 이 수업의 목표이기도 하다. ‘101’이란 숫자는 새내기 대학생이 완전히 처음 접하는 과목을 시작할 때 과목 옆에 붙는 숫자다. 말 그대로 생초보를 위한 수업을 의미한다. ‘히스토리 101(History 101)’은 역사가 깊은 브랜드는 물론 특정한 제품, 인물이 기초를 알려주는 수업으로 더는 인스타그래머 속‘OOTD’ 태그를 10분마다 확인하지 않아도 자신이 원하는 제품을 찾을 수 있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레플리카(Replica)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복제품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진 레플리카는 ‘짝퉁’이라는 단어를 좀 더 순화한 표현으로 여겨지지만, 이는 엄연히 본연의 의미와는 다른 것. 본래 레플리카의 뜻은 ‘레트로’에 가깝다. 레플리카는 단종된 제품을 구현하거나 작업복 혹은 운동복으로 사용된 의류를 트렌디하게 재탄생시킨 것을 말한다.

인터넷을 뒤지다 보면 쉬이 볼 수 있는 ‘레플리카’의 의미는 지금 판매 중인 제품의 디자인 혹은 명품 브랜드의 디자인을 카피하거나 타 브랜드의 로고를 무단으로 사용한 것을 일컫는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 레플리카라고 부를 수 없다. 일반 소비자가 레플리카의 의미를 잘 모른다는 사실을 상인들이 이용한 것에 불과하다. 그게 곧 지금 레플리카라는 단어의 이미지에 영향을 준 것이다.

레플리카의 출발지는 일본. 아메리칸 패션을 동경하는 일본인이 대량으로 생산되는 데님(Denim)에 불만을 느끼고 직접 빈티지 데님을 구현한 게 그 시작이다. 일본에서는 1980년대 말부터 사라진 미국 브랜드를 복각해왔다. 레플리카로 불리는 이 패션 문화는 1970년대 이전에 나온 몇몇 청바지를 완벽하게 제작하는 것을 목표로 작업복, 아웃도어, 밀리터리 의류 등으로 확장해서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일본 패션은 지난 시간 동안 남성복 산업에서 흥미로운 지점을 보여줬고, 그중 한 맥락으로 90년대 초반 도쿄의 스트리트 패션과 오사카의 레플리카 패션은 중요하다. 아주 많은 움직임이 그곳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스트리트 패션, 아방가르드, 워크웨어, 이전 아이비리그 패션으로 설명할 수 있는 ‘아메리카지’의 흐름으로 연결되는 일본 패션에 영향을 미쳤다.

 

레플리카 패션을 말하려면 우선 청바지를 언급해야 한다

리바이스(Levi’s)의 501 데님. 일본 청바지 마니아들에게 사랑받은 라인이다. 그들은 갑자기 이 데님의 원단을 비롯한 여러 요소가 비용 절감 차원에서 변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데님의 디테일 하나까지 중요히 여기던 이들은 결국 예전의 셔틀 방직기를 직접 가져와 데님을 생산한다. 이는 곧 원래의 청바지를 복각한 일명 ‘레플리카 청바지’가 된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20세기 초반 미국의 의류 제작 방식을 재현하면서 단지 데님뿐만 아니라 다른 의류에도 손을 뻗친다. 일본이 복각하는 옷의 스펙트럼을 넓힌 것이다. 빈티지 스타일을 기반으로 한 아메카지(아메리카+캐주얼)이 시대의 한 흐름이 되면서 일본은 직접 미국에서 상표를 사들여 복각하기에 이른다.

 

데님계의 아이돌, OSAKA FIVE

일본의 데님을 대표하는 도시 오사카. 이에는 오사카에서 생겨난 5개의 복각 데님 브랜드, 일명 오사카 파이브(Osaka Five)를 빼놓을 수 없다. 오사카 파이브의 기원은 197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Studio D’Artisan’, ‘Denime’, ‘Evisu’, ‘Full Count’ 그리고 ‘Warehouse’. 이 다섯 개의 브랜드는 일본 특유의 장인 정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복각 데님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알다시피 청바지의 본고장은 미국이다. 고품질의 섬유로 정평이 난 국가는 프랑스, 이탈리아 같은 유럽이다. 그리고 고급 브랜드의 상품 설명을 잘 살펴보면 일본에서 생산된 데님을 사용했다는 문구를 그리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1980년대 말, 미국이 청바지를 대량 생산 체제로 바꾸며 공급이 중단된 구형 청바지를 복원하는 브랜드가 오사카에서 우후죽순 등장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왜 하필 오사카였냐는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오사카에는 미국산 빈티지가 성황리에 거래되는 곳이기도 하다. 게다가 오사카 주변 지역에는 의류 공장이 많아서 청바지를 제작하기 좋은 환경이었다.

레플리카의 시작은 단순히 외관을 복원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생산자들은 점점 디테일을 파고든다. 눈에 보이는 데님 그 자체뿐만 아니라 그것을 제작하는 생산 체제까지 따라 했다. 미국 브랜드들이 중단한 미국 내 제품을 생산 방식까지 함께 지켜온 셈. 일본산 복각은 시작한 지 30년이 지나고 나서 세계적 흐름으로 자리 잡는다.

 

아메카지(아메리카+캐주얼)

고로즈의 액세서리와 리얼맥코이 A-2 자켓, LEE의 데님 셔츠 등 하드 아메카지 스타일과 아이템이 게재된 매거진

‘아메카지’는 아메리카와 캐주얼의 합성어다. 1960~70년대 작업복, 프레피 룩, 헌팅 룩, 마운틴 웨어 등을 모방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미국에 존재하던 스타일을 그대로 복원해서 아카이브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일본이 미국 브랜드의 브랜드 상표 사용권을 사서 원래 브랜드 이름으로 다시 복각했다는 것이다. 즉 사라진 원본을 새롭게 다시 그대로 만들어냈다.

아메리카 스타일, 이를테면 밀리터리 재킷이나 노스페이스(The North Face) 파카는 한때 일본에서만 구매할 수 있었다. 리바이스의 빈티지 라인은 미국보다 일본에서 2년 먼저 시작했다.

 

아메카지의 주역

시미즈 게이조(Keizo Shimizu). 현재 아메카지 스타일을 세계에 알린 주역. 그가 1989년 도쿄 아오야마에서 시작한 편집숍 네펜데스(Nepenthes)는 엔지니어드 가먼츠(Engineered garments)를 비롯해 니들스(Needles), 사우스2웨스트8(S2W8)를 전개했다. 그가 처음 브랜드를 전개할 당시에는 일본에서 시부야 캐주얼을 뜻하는 ‘시부카지’ 스타일이 유행이었다. 시부카지 스타일이라고 한다면 랄프 로렌 셔츠를 입고 치노 팬츠에 하이 엔드 브랜드의 가방을 메는 식. 시미즈 게이조의 네펜데스는 당시에 유행하던 스타일이 아닌 미국의 70년대 워크웨어, 일본의 장인 정신에 영향을 받아 본인만의 확고한 스타일을 구축했다.

 

1980~90년대에는 하드 아메카지의 아이콘 에구치 요스케(Ryosuke Eguchi)와 같은 패션 아이콘이 등장한다. 80년대 말부터 시작되어 90년대 초까지 이어지던 시부카지 위주의 일본 패션은 하드 아메카지가 인기를 얻으면서 더욱더 다양해진다. 시부카지 붐 이후 1994년 기무라 타쿠야가 입고 나온 에어로 레더의 하이웨이 맨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빈티지 붐이 일었다. 따라서 1950년대 영국의 로커들의 스타일을 표방한 제품들이 쏟아져 나온다. 시부카지를 시작으로 우라하라계 브랜드가 속속 출연하면서 이는 곧 우라하라계에 이르는 주류적인 흐름이 된다.

 

특유의 깔끔한 스타일로 큰 인기를 얻은 시부카지 스타일은 90년대에 이르러 좀 더 거칠고 하드한 스타일로 변화한다. 이는 앞서 말했듯, 하드 아메카지(Hard Amekazi) 붐으로 이어진다. 스타일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스타일로 개성을 확립하기 시작한 것. 1991년 미국 영화 “할리와 말보로맨(Harley Davidson And The Marlboro Man)” 스타일에 등장한 바이크 패션과 웨스턴 스타일이 떠오른다. 벤슨(Vanson)의 라이더 재킷, 리바이스 646이나 리 102 부츠컷 데님, 부츠는 토니 라마의 웨스턴 부츠와 레드윙 엔지니어 부츠, 값이 꽤 나가는 고로스(goro,s) 액세서리에 이르기까지.

 

복각이 탄생시킨 새로운 것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디테일의 차이를 알고서야 비로소 옷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잘 만든 옷을 구매해 그 옷이 닳고 색이 바랠 때까지 입으며 자신의 옷으로 체화하는 일련의 과정 또한 옷을 입는 재미가 아닐까. 처음에는 일본이 미국을 카피했고 그러면서 대량의 미국 의류들이 일본에 들어갔다. 비즈빔(Visvim), 엔지니어드 가먼츠(Engineered Garments) 같은 브랜드들이 이런 흐름을 잘 잡고 레퍼런스를 잘 활용해서 더욱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 예다.

중요한 건 결국, 외국의 문화를 자기 걸로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이는 일본인의 국민성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디테일을 중시한 결과, 자신의 것으로 완성할 수 있었다. 재밌게도 지금은 반대로 아메카지에 영향을 받은 미국 브랜드도 생겨났다. 이렇게 패션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새로운 흐름을 형성한다.

글 │ 김나영
제작 │ VISLA, MUSINSA

HISTORY 101: Helmut Lang

현대 사회에서 현명한 소비자로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홍수처럼 넘쳐나는 사방의 광고와 유명인이 입고 있는 옷들, 그리고 금세 바뀌어버리는 트렌드에 현혹되기 쉽다. 물론 그대로 받아들이면 더 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패스트 패션이나 트렌드에 의존해서 소비한다면, 옷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있다고 보기도 어려울뿐더러, 얼마 지나지 않아 질려버리기에 십상이다. 상품을 만든 디자이너의 생각과 브랜드의 철학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특정한 제품을 구매한다면 당신의 옷장은 좀 더 자신만의 확고한 스타일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이는 바로 이 수업의 목표이기도 하다. ‘101’이란 숫자는 새내기 대학생이 완전히 처음 접하는 과목을 시작할 때 과목 옆에 붙는 숫자다. 말 그대로 생초보를 위한 수업을 의미한다. ‘히스토리 101(History 101)’은 역사가 깊은 브랜드는 물론 특정한 제품, 인물이 기초를 알려주는 수업으로 더는 인스타그래머 속 ‘OOTD’ 태그를 10분마다 확인하지 않아도 자신이 원하는 제품을 찾을 수 있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시대를 바꿔놓은 그의 패션

명백한 사실은 헬무트 랭(Helmut Lang)이 패션계를 바꿔놨다는 것이다. 1990년대를 풍미한 ‘헬무트 랭’의 핵심은 그가 해석한 미니멀리즘에 있다. 그의 컬렉션을 살펴보면, 전체적인 느낌은 단순해 보여도, 피스 하나하나에서 디테일한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80년대 주류를 이룬 화려하고 예술적인 옷을 지향하는 다른 디자이너와는 달리 실용적이고 심플한 자신만의 컬렉션을 구축한 그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1990년대에 이르러서다. 당시 경기침체 영향으로, 패션계에도 화려함보다는 절제된 미니멀리즘 바람이 불어왔고, 이 흐름에 헬무트 랭의 옷이 딱 맞아떨어졌다.

현대 남성 모더니즘 브랜드 속 천재 디자이너인 에디 슬리먼(Hedi Slimane)과 라프 시몬스(Raf Simons)도 헬무트 랭의 절대적 영향 아래에 있다. 실제로 그가 디자인한 당시의 옷은 이전에 없었고 지금도 유행하는, 그야말로 시대를 앞서간 의복이었다. 더 나아가 전통이나 역사 단편을 재해석하는 능력 또한 일품이었다. 이번 히스토리 101에서는 현재 패션계를 떠나 예술가의 삶을 영위하며 패션 디자이너로의 복귀 역시 불투명한 지금, 전설로 회자할 만한 커다란 업적을 남긴 헬무트 랭을 다시 살펴보기로 했다.

 

자신이 입고 싶은 옷에서 사람들이 입고 싶은 옷을 만들기까지

헬무트 랭은 1956년 비엔나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이혼한 부모 곁을 떠나 외조부모에게 보내진 그는 오스트리아 알프스 산악 지대의 한적하고 가난한 마을에서 성장한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알프스 지역에서 성장하며 자연이 주는 아름다운 풍경을 흡수하며 훗날 그가 선보일 미니멀한 디자인의 자양분을 쌓았다. 어려웠던 학창시절에 즐겨 입은 스포츠웨어와 베스트, 아노락 등의 아이템을 실제로 컬렉션에서 자주 활용하기도. 10살 무렵, 아버지가 거주하는 오스트리아 빈으로 돌아와 웨이터 일을 하면서 비즈니스 스쿨에 다니기 위해 학비를 벌었고, 당시 본인의 힘든 처지에 취향에 맞는 옷을 찾기 힘들어 원하는 디자인의 옷을 직접 제작 의뢰해서 입는다. 그렇게 제작한 옷이 친구들과 주변 사람에게 입소문이 났고, 이는 패션업계에 뛰어드는 계기가 된다. 전문적인 교육을 단 한 번도 받지 않았지만, 직관과 재능으로 패션 디자이너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그가 처음 디자이너 생활을 시작할 당시만 해도 장 폴 고티에(Jean Paul Gaultier), 칼 라거펠트(Karl Lagerfeld)와 같은 화려한 패션이 주를 이루던 시기였다. 반면에 헬무트 랭은 실제 컬렉션의 옷을 직접 입고 다닐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일상에서 무난하게 착용할 수 있는 깔끔한 옷을 선보이며 기존의 화려한 패션 풍조에 경종을 울린다. 헬무트 랭의 캐주얼한 미국 옷을 향한 집착은 계모가 그녀 아버지의 옷을 입기를 강요한 불행했던 유년 시절에서 기인한다.

“학교에서 다른 애들은 히피처럼 입었는데, 나는 청바지를 입지 못했다. 나만의 스타일을 찾는 것이 중요한 청소년 시기에 그 기회를 놓친 셈이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 이것이 내가 패션 디자이너가 된 이유일 거다. 자신의 정체성을 거부당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초 빈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스타일을 탐구하던 헬무트 랭은 1986년 오스트리아 정부 주도로 진행된 파리 퐁피두센터 전시회를 계기로 세계 패션의 중심지 파리에서 자신의 컬렉션을 선보인다. 그는 ‘Helmut Lang’ 상표를 정식 런칭하며 세계 패션의 흐름에 동참했고, 1987년 남성복 컬렉션, 1988년 뉴욕 쇼, 1990년 남성 슈즈 컬렉션 런칭을 이어가며 영역을 넓혀갔다.

 

20만 원짜리 청바지와 200만 원짜리 캐시미어 카디건

20만 원에서 200만 원을 넘나드는 다양한 범주의 가격대는 헬무트 랭의 특징. 지금도 여전히 많은 패션 하우스에 남아있는 고가 판매 관행을 따르지 않고, 모든 사람을 위한 옷을 제작했다. 이를테면, 청바지를 20만 원에 팔고, 캐시미어 카디건을 200만 원에 파는 식이었다. 당시 다른 하이엔드 브랜드의 청바지 가격을 생각한다면 혁신적인 접근이었다. 헬무트 랭의 청바지는 핵심 철학의 연장선상에 놓인 것이었다. 헬무트 랭은 누구나 리바이스(Levi’s) 501 진을 가져야 한다고 믿었고, 이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탄생시켰다.

 

새롭게 찾아간 둥지, 뉴욕

─ 10일 안에 남자 친구에게 차이는 법(How To Lose A Guy In 10 Days, 2003)의 한 장면 ─

헬무트 랭은 1997년 비엔나를 떠나 뉴욕으로 이주한다. 그는 뉴욕에서 고향과 같은 편안함을 느낀다고 말했고, 자신의 사업 기반 또한 뉴욕으로 옮기며 미국 패션계에 새로이 둥지를 튼다.

1998년 4월 예정된 그의 컬렉션은 패션계의 큰 관심을 받았고 대대적인 광고와 선전이 이어졌다. 패션 하우스 처음으로 뉴욕을 대표하는 요소인 노란 택시(Yellow Taxi)를 활용하는데, 이때 그는 ‘Helmut Lang’ 로고를 거의 모든 택시 위 광고판에 기재했다. 그 당시 영화나 드라마에도 자연스럽게 등장한 걸로 짐작해보면 얼마나 많은 택시가 헬무트 랭의 로고를 달고 다녔는지 상상이 간다.

 

당시 헬무트 랭은 뉴욕에서 컬렉션 쇼를 선보이기 3일 전에 취소하고, 최초로 인터넷을 통해 공개하는 모험을 감행했고, 이는 세계 패션 마켓 판도를 바꿀 정도로 강력한 파급효과를 낳았다. 기존 런웨이 패션쇼의 800석 게스트를 단 150명으로 줄이고 더 나아가 인터넷 기반의 쇼를 단행하며 게스트를 아예 없앴다. 일부는 스크린으로 헬무트 랭 특유의 미니멀함 속 복잡한 디테일을 확인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비판했지만, 그다음 해 다른 디자이너도 그의 방식을 따라 할 정도로 패션 시장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보여줬다.

“난 인터넷이 상상보다 훨씬 더 큰 무언가로 성장할 거라 믿었다. 그래서 바로 그 인터넷이야말로 규범에 도전하고 컬렉션을 온라인에 소개하기에 적절한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새롭게 만든 규칙

헬무트 랭은 뉴욕에서 지금까지 그의 최고의 컬렉션 리스트로 뽑히는 첫 컬렉션을 마친다. 다소 다른 도시보다 늦은 뉴욕 패션위크 기간을 문제 삼으며, 자신의 쇼를 유럽보다 한발 앞선 9월에 인터넷 생중계와 더불어 선보일 예정이라고 선언했다. 캘빈 클라인(Calvin Klein)을 비롯한 뉴욕을 대표하던 디자이너도 그의 결정을 따르기로 하면서 패션계의 오랜 전통이 깨지고 뉴욕을 시작으로 4대 컬렉션의 순서가 바뀌게 되었다.

90년대는 헬무트 랭, 그 자체였다. 그는 자신의 철학과 맞지 않는 기존 패션 규칙을 깨는 것은 물론, 지금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당시에는 파격을 선보였다. 백스테이지 사진, 각기 다른 아티스트와의 협업은 물론 이탈리아에서 수집한 일본 데님, 페인트 스플래터(Paint Splatter), 테크니컬 패브릭, 본디지 스트랩 등 헬무트 랭하면 빠질 수 없는 특이한 원단과 패턴 메이킹. 이 모든 것이 헬무트가 한 시대를 시작하고 이뤄낸 것들이다.

“나는 상표를 과시하는 옷들을 만들고 싶지는 않다. 단지 올바른 색상과 형식으로 이루어진 정확한 옷을 창조하고 싶을 뿐이다”.

 

헬무트 랭의 컬렉션은 미니멀하다. 하지만 그가 남겨놓은 옷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미니멀함 속에 디테일이 돋보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현재 컬렉터의 아이템으로 소문난 S/S 2004 시즌 마미 진(MUMMY JEANS)이 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바지에 감긴 붕대를 때고 입었다고 한다.

특히 80년대의 ‘레이버’를 위해 선보인 헬무트 랭의 1992 S/S 컬렉션은 안티 패션 무리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계기가 된다. 헬무트 랭의 슈트는 시대를 앞서가는 미래적인 느낌을 제시함과 동시에 젊음과 지적인 느낌을 함께 표현했다.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동시대 젊은이의 영혼을 대표하는 새로운 유니폼으로 인정받는다. 90년대에 이르러서 펑크와 레이버들이 새로운 창조적 계급으로 떠올랐고, 헬무트 랭이 그들의 패션으로 거듭난다.

 

과거 미니멀리즘의 새로운 변주를 선보이던 헬무트 랭이 패션계를 주도하던 1996년, 그는 질 샌더(Jil Sander), 캘빈 클라인, 프라다(Prada) 등과 더불어 1990년대 미니멀리즘의 부상에 주요한 영향을 끼친 디자이너로 평가받았다. 이들의 미니멀리즘 미학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컬렉션은 1997년 A/W, 바로 모델 케이트 모스(Kate Moss)가 등장한 컬렉션이다.

 

97-98 A/W 뉴욕 컬렉션이다. 방탄조끼(Bullet Proof Vest)를 모티브로 제작된 베스트는 벨크로를 통해 착용하는 형태로 선보였다. 1990년대 후반 헬무트 랭의 컬렉션은 단순한 형과 색채에 기초해 미니멀리즘과 순수주의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끝은 새로운 시작

1990년대 말 패션계에는 거대 럭셔리 그룹의 주도로 여러 패션 브랜드의 공격적인 인수 합병이 유행했다. 이는 당시 투자 기업과 브랜드 모두에게 이익을 가져올 장밋빛 전략으로 보였고, 헬무트 랭 또한 1999년 프라다 그룹에 자기 지분의 51%를 매각하여 브랜드 성장의 동력을 얻기를 희망했다. 프라다와의 파트너십 아래 최고급 럭셔리 브랜드로서 헬무트 랭의 변화를 추진했고, 2003년 S/S 시즌부터 헬무트 랭 컬렉션은 파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프라다와 헬무트 랭의 파트너십은 성공적인 결과로 이어지지 못했다. 헬무트 랭은 2004년 나머지 지분을 프라다에 모두 매각하고 2005년을 마지막으로 패션계를 벗어나 아티스트로 새로운 길을 걷는다.

 

헬무트 랭 이후의 헬무트 랭

패션계를 벗어난 이후 헬무트 랭의 삶은 전적으로 예술 창작에 몰두한다.

“나는 다양한 형태의 조각품을 만들기 위해 이미 발견된 물건과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가지고 작업한다. 본질적으로 추상적이지만, 인간의 몸과 상태를 일깨워주는 물리적 형태를 탐구하려 한다”.

그는 패션 디자이너이기보다는 실제 아티스트에 가까웠다. 헬무트 랭이 패션 브랜드 최초로 내셔널 지오그래피에 광고를 기재한 행보가 이를 바로 보여준다. 90년대 부흥했던 헬무트 랭을 다시 볼 수는 없겠지만, 과거의 영광을 복구하려는 브랜드 핼무트 랭의 새로운 시도는 과연 주목할 만하다. 물론 현재의 헬무트 랭은 헬무트 랭 시기의 컬렉션과는 상당히 다르다. 이들은 새로운 캠페인을 연이어 발표하며, 90년대를 살아보지 않았던 밀레니엄 세대에게 과거의 판타지를 새로 주입해 브랜드 이미지를 확장하는 중이니 말이다.

 

무의식중에 입는 옷에서 묻어나는 그의 영향력

헬무트 랭을 몰라도 사람들은 무의식중에 그의 영향이 녹아든 옷을 입는다. 헬무트 랭이 그의 레이블을 떠난 지 10년도 더 지났지만, 여전히 그의 영향력은 곳곳에서 여전하다. 그의 남다름은 옷뿐만 아니라 옷을 보여주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옷의 본질에 의문을 제기하는 그는 왜 패션인지, 왜 패션이 그렇게 정의되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패션을 어떻게 바꿀 수 있었는지 질문했고, 옷으로 보여줬다.

헬무트 랭은 자신의 컬렉션에서 기본적인 컬러 톤을 기조로, 모던하고 실용적인 의상을 발표해왔다. 현실주의자였던 헬무트 랭에게 패션의 최고 가치는 과시적인 화려함이 아니라 완벽한 재단과 소재, 일상적인 편안함과 편리함을 의미했다. 인간에게 적합하고 편한 옷을 만드는 방식이 그에게는 가장 중요한 철학이었던 것. 한 시대를 풍미했다는 표현이 부족한 그의 아카이브는 여전히 거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글 │ 김나영
제작 │ VISLA, MUSINSA

HISTORY 101: 월드컵 특집, 축구컬처와 패션의 상관관계

101 수업: [미] (대학의) 기초 과정의, 입문의, 개론의; 초보의, 기본이 되는 수업

현대 사회에서 현명한 소비자로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홍수처럼 넘쳐나는 사방의 광고와 유명인의 패션, 금세 바뀌어 버리는 트렌드의 유혹까지. 물론,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 의복생활이 더 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패스트 패션이나 유행에 의존해 소비한다면, 의복의 제대로 된 이해가 있다고 보기도 어려울뿐더러, 얼마 지나지 않아 질려버리기에 십상이다. 옷을 창작한 디자이너의 생각과 브랜드의 철학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특정한 제품을 구매한다면 당신의 옷장은 자신만의 확고한 스타일로 가득 찰 것.

이는 바로 이 수업의 목표이기도 하다. ‘101’이란 숫자는 새내기 대학생이 완전히 처음 접하는 과목의 옆에 붙는 숫자다. 말 그대로 기초 수업을 의미한다. ‘히스토리 101(History 101)’은 역사가 깊은 브랜드는 물론 특정한 제품과 인물을 아우르는 수업으로 더 이상 인스타그램 속 ‘OOTD’ 태그의 참고 없이 자신이 원하는 제품을 찾을 수 있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2018 러시아 월드컵이 개막했다. 이 거대한 행사에 앞서 패션계도 축구 문화를 향한 애정을 꾸준히 보여준 바 있다. 러시아 디자이너 고샤 루브친스키(Gosha Rubchinskiy)는 2018 A/W 쇼에서 아디다스(adidas)와 함께 축구에서 영감받은 의류와 스니커즈를 내놓았고, 최근 가장 핫한 디자이너로 추앙받는 버질 아블로(Virgil Abloh) 또한 나이키(Nike)와의 협업을 통해 자신의 브랜드 오프-화이트(Off-White)와 협업한 축구 유니폼, 축구화 등을 선보였다. 프랑스 패션 브랜드 코세(Koché)는 2018 S/S 패션쇼에서 파리 축구 클럽 파리 생제르맹(Paris Saint-Germain)과 협업해 축구 유니폼을 응용한 의상을 선보였다. 열성 축구팬의 상징인 팀 스카프도 패션 액세서리로 활용된다. 베르사체(Versace), 발렌시아가(Balenciaga), 지방시(Givenchy), 오프 화이트 등이 가상의 축구 클럽 엠블럼을 새긴 팀 스카프를 출시했다. 한때 촌스럽다는 이유로 패션에서 자취를 감추다시피 했던 ‘로고’가 다시 수면 위로 등장한 것처럼 말이다.

축구라는 스포츠를 좋아하지 않아도, 디자인 자체에 매료되어 착용하는 경우도 있다. 마치 농구를 딱히 즐기지 않아도 에어 조던(Air Jordan) 신발을 착용하거나, 랄프로렌(Ralph Lauren)이라는 브랜드를 통해 폴로(Polo)라는 스포츠를 알게 되는 것과 같다. 축구 또한 대중문화와 하위문화를 아우른다. 흔히 스케이트보드와 힙합을 일컬어 스트리트 컬처를 지탱하는 문화라고 하지만, 이는 미국 중심의 해석이다. 유럽에서는 축구가 스트리트 컬처를 상징한다. 영국에서는 축구가 노동자 계급의 전유물로 여겨졌고, 광팬으로 구성된 훌리건 문화가 만들어졌다. 훌리건에 관한 내용을 자세히 알고 싶다면, 과거 VISLA 매거진에서 훌리건을 다뤘으니 확인해보자. 이들은 1970~80년대에 이르러 고급스러운 스포츠웨어를 추구하는 ‘캐주얼(Casual)’로 발전했고, 90년대 스트리트 컬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결국, 90년대 복고풍과 스트리트 컬처가 패션계에 영향을 미치는 지금, 축구는 빼놓을 수 없는 서브컬처인 셈. 이번 101에서는 월드컵 시즌을 맞아 축구라는 문화와 패션을 소개하려 한다.

 

소셜 미디어 인플루언서가 패션 시장을 좌우하는 시대

왜 이와 같은 유행이 일어나고 있는지 자세히 들여다보면 더 흥미롭다. 어떤 유행이든 다 이유가 있기 마련. 물론, 2018년이 월드컵의 해이긴 하지만, 브랜드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로고 플레이와 인스타그램(Instagram)이 패션 시대를 정의하는 지금의 세태와 절대 무관하지 않다. 소셜 미디어에서 볼 수 있는 인플루언서가 ‘다름’을 드러내기 위해 올리는 ‘착용 샷’은 지금의 패션 시장에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지닌다. 베르사체, 오프 화이트, 버버리(Berberry)를 비롯한 럭셔리, 하이엔드 브랜드가 축구 스카프와 셔츠를 전격적으로 런웨이에 올려놓으며 그 공세에 합류했다.

사실 패션과 축구는 크게 관련 없을지도 모른다. 스타 선수 대부분은 어린 나이부터 팀에 소속되어 연습에 몰두하기에 자신만의 패션을 연구하는 시간이 부족한 게 사실이다. 이후 이들이 보상으로 받는 금액은 천문학적이지만. 다른 면에서 그들에게 패션은 하나의 사업 아이템이 되기도 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역사적으로 많은 스포츠 스타가 패션에 손을 뻗어 왔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Manchester United) 소속의 미드필더 폴 포그바(Paul Pogba)는 본인의 아디다스 서브 레이블을 갖고 있으며, 크리스티아누 호날두(Cristiano Ronaldo)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데님 브랜드를 런칭했다. 그렇다면 디자인은 어떨까? 각자의 생각에 맡기겠다. 어쩌면 앞서 언급한 자연스러운 흐름이 축구스타와 패션이 만난 전통적인 패러다임이었다. 이럴 때 스포츠는 허영심이 집약된 매개체처럼 보이기도 한다.

 

좌: 꼼데가르송(Comme Des Garcons) / 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응원 스카프

하지만 최근 몇 년간 축구와 패션은 새로운 접점을 찾은 듯하다. 최근 파리와 밀라노 패션 위크에서 축구 스카프와 축구 유니폼은 다양한 사람들의 스타일로 대두됐다. 고샤 루브친스키, 그리고 베트멍(Betements), 발렌시아가의 뎀나 바살리아(Demna Gvasalia)가 선도한 유행이었다. 당시 두 디자이너는 자신의 컬렉션에 팬들이 평소 팀을 향한 충성심을 표현하기 위해 입는 것처럼 축구 스카프를 포함했다.

 

트라이벌리즘(Tribalism)

최근 트라이벌리즘은 뚜렷한 경향성을 보인다. 티셔츠 앞에 ‘구찌(Gucci)’를 커다랗게 새긴 티셔츠도 트라이벌리즘의 표본이다. 슈프림(Supreme) 박스 로고가 그려진 옷을 입은 길거리 스쳐 가는 이름 모를 이에게, 스케이트보드 문화를 몰라도 동질감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축구 유니폼 또한 비슷한 역할을 수행한다.

 

축구 유니폼을 통해 표현된 트라이벌리즘의 개념은 디에고 마라도나(Diego Maradona)가 SSC 나폴리(SSC Napoli)에 소속되었을 당시의 유니폼에 영감받아 이탈리아 디자인 듀오 돌체 앤 가바나(Dolce & Gabbana)가 런웨이에 올렸던 2016년 가을 알타모다(Alta Moda) 컬렉션으로 대표된다.

돌체 앤 가바나가 이 유니폼을 택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이탈리아는 당시 남쪽과 북쪽의 사회 격차가 심했다. 산업화를 바탕으로 기업이 주도하는 북쪽과 달리 거친 땅의 시골이 대부분이었던 남쪽은 축구 경기에서 또한 격차가 나타났다. 지금 명문 축구 클럽에 해당하는 AC 밀란(AC. Milan), 유벤투스(Juventus), FC 로마(FC Roma), 인터 밀란(Inter Milan)이 이탈리아의 최상위 리그인 ‘세리에 A(Serie A)’를 주도하고 있으며, 이외에는 그 어떤 남부 팀도 타이틀을 차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1984년 마라도나가 SSC 나폴리에 합류하며 이탈리아를 뒤집어 놓은 것이다.

그는 입단한 지 단 두 시즌 만인 1987년에 SSC 나폴리의 우승을 가능케 했다. 마라도나의 놀라운 저력은 무려 일곱 시즌 동안 계속되었고, 결국 나폴리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시기를 선물한다. 그는 이탈리아 남부에 축구 그 이상의 기쁨을 주었다. 나폴리 그리고 이탈리아 남쪽의 자존심을 세워준 셈이다. 30년이 지난 지금, 그의 유산은 도시 전역의 벽화와 포스터를 통해 살아 숨쉬고 있다.

 

축구 유니폼 디자인의 황금기 90년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축구 유니폼 역사를 훑어보면 90년대 특유의 화려한 프린팅에 놀라게 된다. 난해하고 복잡한 패턴의 그래픽은 마치 약물을 복용하고 만든 디자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쯤 되면 90년대에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궁금해진다.

80~90년대는 애시드 하우스(Acid House)의 황금기였다. 애시드 하우스는 하우스 장르 음악 스타일 중 한 갈래로, 1960년대 사이키델릭으로 회귀하는 사운드가 특징이다. 흥미로운 점은 90년대 유니폼 패턴에서도 애시드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는 것. 축구 광신도 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훌리건 또한 애시드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애시드 하우스는 60년대부터 시작해 80년대에 붐을 이뤘으며, 1987년부터 애시드 하우스 신(Scene)에서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았다. 다양한 집단을 하나로 모았다는 점에서 다른 음악적 움직임과 차별화된다. 흑인, 백인, 게이, 스트레이트, 악명 높은 훌리건까지.

 

이는 지금 유행하는 스타일과도 관련이 있다. 그 시절을 떠오르게 하는 유니폼이 다시 살아나고, 하나의 패션 경향을 형성한 이유는 ‘어글리 패션’이 유행하는 맥락과도 무관하지 않다. 어떻게 보면 난잡한 디자인이 그 당시에는 어떻게 멋진 패션으로 등장했는지 의아하지만, 단연 시대를 앞선 디자인임은 분명하다. 88년에 선보인 괴랄한 그래픽 패턴의 유니폼은 90년대 애시드 하우스 그래픽 패턴으로 흐름을 이어간다. 아래 영상을 보면 어떤 분위기였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

 

영국의 대중문화, 서브컬처의 많은 부분이 축구, 음악, 패션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특히 축구와 패션이 연결되는 일련의 역사를 뒤돌아보면, 50년대 테디 보이(Teddy Boy)와 60년대 초반의 모즈(Mods), 60년대 말의 스킨헤드(Skinhead) 그리고 70년대 말 모드의 부활(Mod Revival)이 있다. 캐주얼은 1980년대 초반 즈음부터 영국 전역으로 퍼졌다. 축구 응원 문화, 그중에서도 훌리건 문화에서 파생됐다. 하도 여기저기서 싸워대니 경찰의 표적이 되는 건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 결과로 경기장 출입이 어려워지면서부터 80년대 말 애시드 하우스와 레이브(Rave), 매드체스터(Madchester)와 같은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문화가 득세하며 폭력적인 캐주얼 문화는 서서히 사라진다.

 

예전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유니폼 디자인

이번 한국 국가대표팀은 이번 월드컵에 20년 전 유니폼 디자인을 부활시켰다. 1996년 한국대표팀 유니폼은 역사적인 유니폼 중 하나로 지금껏 한국이 유지해온 빨간색 상의와 파란색 하의 스타일을 뒤로하고 나이키의 클래식한 색 조합인 검정/빨강 컬러 배치에 상의 한 가운데 자리한 태극 문양 무늬로 다시 찾아왔다. 이는 많은 사람이 기억하는 컬렉터의 아이템이자 유니폼이다.

해외의 다른 팀 또한 이러한 물결에 합류한다. 특히 아디다스는 80~90년대의 유니폼을 본보기 삼아 러시아와 독일, 콜롬비아의 유니폼을 선보였다.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디자인을 지속해서 선보이는 그들의 행보는 레트로 감성에 빠진 현재의 패션 흐름과 맞아떨어지며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지점을 만들어낸다.

 

이번 월드컵 대회가 시작하기 전부터 화제를 모은 나이지리아 대표팀 유니폼 또한 같은 경우다. 1994년 월드컵에서 착용한 선명하고 밝은 초록색과 지그재그 패턴의 레트로는 물론, 나이지리아 국가대표팀의 마스코트이자 별명인 ‘슈퍼 이글스(Super Eagles)’에서 차용한 독수리의 이미지를 형상화했다. 정가 90달러의 홈/어웨이 유니폼 상의는 웹스토어에서 3분 만에 매진되었고, 매장에서는 3시간 안에 완판되며 그 인기를 증명했다. 아쉽게도 나이키는 재입고 계획이 없다고 밝혔고, 이후 유니폼은 몇 배씩 오른 가격으로 거래되기도 했다. 지난 2월 디자인을 공개하고 6월까지 시판을 미뤘던 탓에 나이지리아 서부 라고스시에서는 정식 제품이 판매되기도 전에 ‘짝퉁’ 제품이 등장했는데, 나이키에서 판매하는 원제품이 매진되자 이 모조품 판매량 역시 올라가는 웃지 못 할 상황까지 발생했다. 정작 나이지리아에서는 저렴한 가격의 짝퉁이 더 잘 팔린다고.

 

축구와 패션이 주는 환희

최근 몇 년간 패션계에서 축구 문화를 다룬 역사를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그 중 안토니오 마라스(Antonio Marrs) S/S 2015 컬렉션은 과연 눈여겨 볼만하다. 현존하는 축구 구단의 유니폼을 기본으로 한 디자인이 위 영상에서 약 10분가량 등장하는데, 가히 하이라이트라 할 만하다. 영상 말미 디자이너와 모델 그리고 퍼포먼서가 함께 축구를 즐기는 모습은 축구로 하나가 된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클래식한 축구 유니폼과 안토니오 특유의 감성이 묻어난, 축구 팬에게는 놓칠 수 없는 재미가 쏠쏠한 컬렉션이다. 축구 관련 컬렉션에서 고샤 루브친스키와 버질 아블로가 스포트라이트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어쩌면 가장 본질적으로 축구 컬처에 접근한 컬렉션 중 하나다.

디자이너가 포착하는 청년 문화는 이미 동시대 패션을 선도하는 하나의 원동력이 된 지 오래. 축구도 굳건한 자리를 지키고 있음은 물론이다. 축구 경기를 만들어 내고 보는 행위, 열광하고 사람들을 움직이는 원동력. 그것 또한 패션이 많은 사람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무언가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계속될 축구와 패션. 이 둘이 만들어내는 진한 환희와 스펙터클의 순간을 기대해본다.

글 │ 김나영
제작 │ VISLA, MUSINSA

HISTORY 101: 시대를 대표하는 패션 아이콘과 아이템

101 수업: [미] (대학의) 기초 과정의, 입문의, 개론의; 초보의, 기본이 되는 수업


현대 사회에서 현명한 소비자로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홍수처럼 넘쳐나는 사방의 광고와 유명인의 패션, 금세 바뀌어 버리는 트렌드의 유혹까지. 물론,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 의복생활이 더 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패스트 패션이나 유행에 의존해 소비한다면, 의복의 제대로 된 이해가 있다고 보기도 어려울뿐더러, 얼마 지나지 않아 질려버리기에 십상이다. 옷을 창작한 디자이너의 생각과 브랜드의 철학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특정한 제품을 구매한다면 당신의 옷장은 자신만의 확고한 스타일로 가득 찰 것.

이는 바로 이 수업의 목표이기도 하다. ‘101’이란 숫자는 새내기 대학생이 완전히 처음 접하는 과목의 옆에 붙는 숫자다. 말 그대로 기초 수업을 의미한다. ‘히스토리 101(History 101)’은 역사가 깊은 브랜드는 물론 특정한 제품과 인물을 아우르는 수업으로 더 이상 인스타그램 속 ‘OOTD’ 태그의 참고 없이 자신이 원하는 제품을 찾을 수 있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가 과거에 연연하는 증거는 곳곳에 있다. 지금의 문화 기준점이 회상의 분위기를 유도하는 것도 한몫한다. 실제 과거의 향수가 소비 심리를 끌어내는 데 매우 효과적인 도구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따라서 과거를 끌어와 현재를 조명하는 레트로 콘텐츠는 시대를 불문하고 성행한다. 영화 “백 투 더 퓨처(Back to the Future)”를 봤던 이라면, 2015년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80년대 카페’를 만들어 과거를 추억하는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지금 이 글을 눈에 담는 당신이 경험한 시대는 반가움으로, 경험해보지 못한 시대는 일종의 동경으로 다가올지 모른다.

이번 히스토리 101은 잠시 브랜드 소개를 접어두고,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시대의 패션 아이콘에 관해 이야기하려 한다. 덧붙여, 그 당시 유행한 스타일을 소개해볼 참이다.

 

CHAPTER 1: 70, 80년대, 펑크와 함께한 변화의 물결

 

펑크 룩의 창시자 비비안 웨스트우드(Vivienn Westwood)

젊은 시절의 비비안 웨스트우드와 말콤 맥라렌(Malcolm Mclaren)

펑크란 무엇일까. 70년대의 갈기갈기 찢어진 티셔츠, 높이 세운 모히칸 헤어스타일, 히피, 섹스, 파괴, 미래에 대한 불안감, 사회의 만연한 관습에 분노와 저항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해체하고, 혁신하는 펑크는 패션에서 더없이 짜릿하고 매력적인 장르다. 이에 매 컬렉션, 펑크를 향한 뜨거운 열정을 반영하는 비비안 웨스트우드를 빼놓으면 섭섭할 것. 그녀는 1970년대 런던 펑크 문화의 탄생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1980년대 이후에는 패션 디자이너로서 경력을 개척하는 가운데 역사와 전통, 문화, 섹슈얼리티와 관련된 지적 탐구의 과정을 작품 세계에 표현해왔다.

그녀는 원래 영국 한 지방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일했지만, 말콤 맥라렌을 만나며 삶이 새로운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와의 만남을 통해 웨스트우드는 주류 문화에 반(反)하는 태도를 드러내고, 이를 패션으로 표출하는 힘을 배운다. 1971년, 그녀는 430 킹스 로드에서 첫 번째 숍, ‘Let it Rock’을 열었고, 파트너이자 연인인 말콤 맥라렌의 조언으로 시대를 풍미하는 디자인을 선보이며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맥라렌은 당시 70년대 영국의 펑크록 밴드 ‘섹스 피스톨즈(Sex Pistols)’ 매니저였고, 웨스트우드가 디자인한 의상을 멤버들에게 입혔다. 이는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펑크 룩 창시의 핵심 인물로 떠오른 계기가 되었다. 당시 영국의 실업률은 최고조에 달했고, 이로 인한 실업청년의 울분과 반항적인 태도가 펑크 패션과 만나며 폭발적인 시너지를 냈다. 이들에게 펑크만큼 잘 어울리는 스타일도 없었을 것이다. 과연, 시대의 진정한 펑크 히로인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다.

“일부러 혁명을 일으키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왜 한 가지 방식으로만 해야 하고, 다른 방식으로 하면 안 되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다.” – 비비안 웨스트우드

1970년대, 영국 런던의 19 킹스 로드에 있던 펑크족들

 

David Bowie

뮤지션으로서 쌓은 명성과 별개로,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는 대중음악 속 패션이 하나의 중요한 요소임을 증명했다. 70년대 앨범 커버의 데이비드 보위, 당시 화사한 꽃무늬의 벨벳 드레스를 입고 카메라 앞에 선 모습은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 아마 최초의 드레스를 입은 남성 로커였을 것.

계기는 이렇다. 70년대 당시 데이비드 보위의 아내 앤지 보위(Angie Bowie)는 어느 부티크에서 옷을 고르던 중 장난삼아 자신이 입어보던 드레스를 그에게 입혔다. 예상대로 옷은 그와 묘하게 어울렸고 가게 주인은 보위에게 옷을 무상으로 줄 테니 많은 사람 앞에서 자신의 작품을 읽어달라고 요청했다. 얼마 후 보위는 자신을 위해 ‘남성용 드레스’를 따로 디자인해달라고 부탁하며, ‘중성적인 외모’를 잘 활용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드레스를 입은 남성 로커’의 비주얼은 사람들을 불쾌하게 했고, 여왕을 타깃으로 한 콘셉트는 왕실을 심기를 건드렸다. 앨범은 판매 금지되었고, 소속 레코드사는 보위를 해고하기에 이른다. 일각에서는 그를 공개적으로 여장을 즐기는 변태적 복장 도착자로 분류했다. 소속 레코드사나 스폰서 하나 없이 만들어진 다음 앨범에서 그는 마치 로런 버콜(Lauren Bacall)과 그레이스 켈리(Grace Patricia Kelly) 같은 흑백영화 속 미모 여배우를 연상케 하는 특유의 비주얼을 전면에 부각한다. 그러나 야유와 욕설이 쏟아지는 다른 한쪽으로 어디선가, 분명 미묘한 지각 변동의 기운이 일었다. 패션계는 그 혁신의 공기를 누구보다 민감하게 읽어내고 빠르게 반응하고 있었다. ‘메트로 섹슈얼’의 붐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애초에 하층 노동계급 남성의 노동가이며 고달픈 삶의 위안으로 출발한 록 음악은 태생적으로 남성적인 섹슈얼리티 그 자체였다. 60년대 중반, 비틀즈(Beatles)가 젠틀한 모드족의 전형으로 소녀의 마음을 뺏을 때, 그 반대편에서 롤링 스톤즈의 믹 재거(Mick Jagger)는 “여자는 내 엄지손가락 밑에 있는 존재들”이라는 말로 원색적인 마초이즘을 뱉어댔다.

 

David Bowie – Ziggy Stardust (live 1972)

70년대의 시작과 함께 당시 무명의 로커 데이비드 보위가 선보인 파행적인 이미지는 고정관념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었다. 데이비드 보위, 티렉스(T. Rex)의 마크 볼란(Marc Bolan)을 뒤이어 70년대 전반에 등장한 글램 로커는 보수적 전통 속에서 거세된 양성적 비주얼을 과장되게 표출하는 것으로 세상의 편견에 도전한다. 플랫폼 슈즈, 주름 장식의 빅토리안 스타일 셔츠, 깃털과 반짝이는 스팽글, 짙은 아이라인에 대담한 메이크업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야한 남자들의 시대. 그가 만들어낸 무대 위의 분신, “Ziggy Stardust”의 비주얼은 전통적 복장 관습의 파괴였고 그 영향은 무시하지 못할 파장으로 대중문화에 스며들었다. 무엇보다 패션이야말로 글램에 가장 적당한 장르였다. 이후 글램은 디올(Dior), 구찌(Gucci), 지방시(Givenchy), 조르지오 아르마니(Giorgio Armani)와 같은 패션 브랜드를 홀린 영감이 된다.

‘패션’으로 손쉽게 통칭하는 트렌드의 흐름 속에서 과연 자신만의 ‘스타일’을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진정한 스타일리스트는 얼마나 될까. 보위는 ‘패션’과 ‘스타일’은 엄연히 다른 것이라고 말했다. 아래는 데이비드 보위의 인터뷰 중 일부. ‘스타일’에 관한 날카로우면서도 명확한 규정이 매우 흥미롭게 다가온다.

데이비드 보위: 철학적으로 생각해보세요. 스타일이란 ‘좋아하는 문화에 당신이 내리는 결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의자를 하나 산다고 가정합시다. 어떤 스타일의 의자를 살까요? 왜 어떤 의자는 사기가 싫을까요? 왜냐면 당신의 집에 놓일 의자 자체가 당신과 관련된 어떤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에요. 이런 게 의자라든가 양말 같은 것까지. 심지어 당신이 데이트하는 여자나 당신이 하는 모든 일에 적용되는 겁니다. 우리가 보고 고르는 모든 것은 스스로가 원하는 자신의 모습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입니다. 결국, 스타일이란 ‘각 개인이 창조하는 그 자신의 문화’라는 이야기죠.

기자: 아마도 그것이 오늘날 미디어가 패션에 집착하는 이유군요?

데이비드 보위: 그들은 패션을 ‘스타일’이라고 착각하고 있어요.

 

대퍼 댄(DAPPER DAN) 그리고 구찌 메이드 인 코리아?

80년대 다수의 래퍼가 유명 브랜드를 입는 행위는 그들이 가난에서 벗어나 부와 지위를 얻었다는 증표였다. 그리고 그 가운데 대퍼 댄(Dapper Dan)이 있었다. 그는 구찌, 루이뷔통(Louis Vuitton), 펜디(Fendi) 등 유명 패션 하우스의 모노그램을 이용해 트랙 슈트와 오버사이즈 재킷 등 자신만의 ‘명품’ 옷을 만든 할렘 출신 재단사다. 그 당시 댄은 모든 MC의 패션 레퍼런스였다. 솔트 앤 페파(Salt-N-Pepa), 런 디엠씨(Run D.M.C), 퍼블릭 에너미(Public Enemy) 그리고 팻 보이즈(The Fat Boys) 같은 그 시대 가장 유명한 밴드와 아티스트 모두 그의 작품을 입었다.

댄의 디자인은 단연 성공적이었지만 그가 ‘훔친’ 상징적인 로고를 소유한 패션 회사는 입장이 달랐다. 그는 루이뷔통과 구찌를 포함한 여러 패션 하우스로부터 소송에 휘말리게 된다. 그는 표절과 지적 재산권 침해로 유죄 판결을 받고 1992년 활동을 중단해야만 했다.

수년이 지난 후 현재, 다소 아이러니하게 저작권을 침해한 혐의로 댄을 법정으로 데려간 패션 하우스가 그의 스타일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예로 알레산드로 미켈레(Alessandro Michele)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은 ‘구찌 2018 크루즈’ 컬렉션에서 나온 의상은 누가 봐도 대퍼 댄 스타일의 작품이었다. 그렇다, 구찌는 자신의 디자인을 카피한 디자인을 다시 카피해내며 자신들만의 모조품의 모조품을 만들었다.

 

미켈레는 표절을 향한 비난에 대응함과 동시에 대퍼 댄이 곧 구찌와 협력하기를 바라며 단지 대퍼 댄에 경의를 보낸 컬렉션이라고 밝혔다. 이후 그는 다음 컬렉션에 실제로 구찌 남성 캠페인을 통해 대퍼 댄과의 협업을 성사했다.

대퍼 댄 외 80년대 뉴욕 전역 한국인과 중국인 판매자가 생산, 판매한 가짜 구찌 티셔츠 또한 현재 미켈레의 구찌를 대표하는 디자인 중 하나다. 과거 더스트 백, 박스 등의 패키지 디자인에서 이미지를 따온 이 셔츠는 저렴한 건 물론 당시 패션 하우스 또한 아무런 대응이 없었기에 더욱 빠르게 퍼졌다. 이렇게 80년대의 ‘모조품’이 100만 원이 넘는 가격에 팔리는 상황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단지 진품을 카피한 디자인이 아닌 나름의 독창성을 인정받았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CHAPTER 2: 새로운 시도가 가득했던 90년대

 

지금의 패션을 바꿔 놓은 헬무트 랭(Helmut Lang) | A/W 1998

1990년대는 헬무트 랭의 것이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켈빈 클라인(Calvin Klein)과 알렉산더 맥퀸(Alexander McQueen)이 팝 문화의 대중성을 가졌을지 모르지만, 랭처럼 스타일을 주도적으로 이끈 브랜드는 없었다. 이탈리아에서 수집한 일본 데님, 페인트 스플래터, 테크니컬 패브릭, 본디지 스트랩, 생방송으로 진행한 패션쇼, 금속성 패브릭, CD로 제작한 쇼 초청장, 이 모든 것이 랭이 본인의 이름을 건 브랜드에 있던 시절에 시도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가장 영향력 있는 런웨이를 논할 때 헬무트 랭 1998 A/W 쇼는 빠지지 않는다. 그는 미니멀리스틱 특유의 감성으로 밀리터리 룩과 마감되지 않은 옷감 디테일을 선보였고 여느 디자이너보다 혁신적인 기술을 시도했다. 쇼는 콘크리트 벽이 돋보이는 공간에서 진행되었는데, 인터넷이 막 보급되기 시작할 무렵 웹을 통해 런웨이를 생방송했다. 이 비디오는 추후 CD로도 만들어져 배포되었다.

 

실험적이고 아방가르드한 스타일의 뷔욕(Bjork)

뷔욕의 스타일을 본 적 있는가. 실험적이고 아방가르드한 사운드만큼이나 스타일 역시 남다른 뮤지션. 마치 지적 능력을 갖춘 외계 생명체가 지구의 옷을 입는다면 이러할까. 아이슬란드 출신의 싱어송라이터 뷔욕은 매번 음악, 패션, 영화 등 분야를 막론한 다양한 콘셉트를 시도해왔다. 자신의 명성만큼이나 독특한 개성을 지닌 패션 또한 한몫했을 것. 뷔욕을 주시해온 사람이라면, 그녀의 앨범 아트워크와 라이브 퍼포먼스에서 의복과 커스텀의 역할 관계를 확실히 반영했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마틴 마르지엘라(Martin Margiela)를 착용한 뷔욕

디자이너 알렉산더 맥퀸의 오랜 친구이자 협력자인 뷔욕은 그의 장례식에서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의 “Gloomy Sunday”를 불렀다. 뷔욕의 네 번째 앨범, [Homogenic]의 앨범 커버는 알렉산더 맥퀸의 작품이다. 그는 “Alarm Call” 뮤직비디오를 감독하며 본인의 상상력을 펼쳤다.

 

Alarm Call (Directed by McQueen)

그녀는 1994년 개봉한 프랑스의 패션쇼를 다룬 영화 “패션쇼(Pret-a-Porter)”에 출연한 바 있다. 데뷔 당시인 90년대 초반의 사진을 봐도 시대적 차이를 전혀 느낄 수 없다. 그녀는 옷을 예술로 승화하고 음악 세계와 접합하는 능력 또한 탁월하다. 시대를 이야기하는 동시에 뛰어넘기도 해야 하는 예술가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아티스트가 바로 뷔욕이 아닐까.

 

90년대를 정의한 스타일 트리오, TLC

90년대 TLC는 전에 없던 새로운 스타일과 함께 등장했다. 1집 활동 시절 커다란 사이즈의 배기팬츠와 오버사이즈 티셔츠를 즐겨 입으며, 그들만의 힙합 스타일을 선보였다. 신생 스트리트 브랜드 ‘크로스 컬러스(Cross Colours)’ 제품을 즐겨 입었는데, 화려한 원색을 여러 개 쓰는 크로스 컬러스 특유의 디자인은 TLC의 생기발랄한 캐릭터와 어우러져 옷과 그룹 모두 인상적으로 보이게 했다. TLC가 큰 성공을 거두며, 크로스 컬러스의 인지도도 단숨에 올라갔다. 그룹은 에어로졸 스프레이로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린 옷을 입곤 했다. 이런 그래피티 패션은 1980년대 초반 흑인 밀집 지역에서 잠시 유행하다가, 어느 순간 자취를 감췄지만 TLC의 덕을 보며 다시 한번 대중 앞에 등장한 계기가 되었다.

 

TLC – No Scrubs

초창기에는 멤버 레프트 아이(Left-Eye)가 단연 돋보였다. 그녀는 오른쪽 안경알에 콘돔을 붙여 씀으로써 독보적인 스타일을 완성했다. 그녀가 콘돔을 붙인 첫 번째 이유는 오른쪽 눈을 가려서 자신의 닉네임을 부각하기 위함이었다. 더불어 당시 에이즈(AIDS)의 확산이 중대한 사회적 이슈 중 하나였기 때문에 질병을 예방하고 안전한 성관계를 하자는 주장을 담기도 했다. 게다가 TLC가 지향해온 스타일, 음악의 가사를 상기하면 그들은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오히려 지금의 관계를 역전시키는 시도를 거행했다. 자신들에게 남성이란 즐거움의 원천인 동시에 계몽 대상이라며 선구적인 메시지를 남겼다.

 

그런지 룩의 아이콘, 커트 코베인(Kurt Cobain)

커트 코베인의 사진은 하나같이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더 없이 찢어진 청바지에 기름때가 누덕누덕 붙어있는 모습, 그는 이른바 그런지 룩의 아이콘이었다. 1980년대 하이패션과 엘리트주의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더럽고 지저분한 스타일로 정의되는 그런지 룩은 도회적 보헤미아니즘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1960~70년대 히피룩의 영향을 받았다. 거리의 반항기 어린 청소년으로부터 시작한 이 하위 패션은 결국 파리와 밀라노의 캣워크마저 점령해버릴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그는 남성이 쉽게 건드리지 않는 여성 문제부터 시작해 에이즈, 인종차별 문제 등 사회적 이슈를 만들 법한 메시지 역시 서슴지 않았다.

 

오늘날 ‘패션 아이콘’이란 칭호는 너무 쉽게 붙여지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90년대에는 진정한 스타일 아이콘 커트 코베인이 있었다. 얼룩은 ‘그런지’라는 멋스러움으로 포장되었으며, 그의 지친 표정은 삶의 저항을 온몸으로 표현한 밴드 너바나(Nirvana)의 전성기 뒤에 있었다. 성공에 가린 커트 코베인의 이야기는 사진 속 그의 모습처럼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반항적인 성향이 무언가를 부숴버리지 않고 창작하는 데 발현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조각난 마음에서 음악이란 환풍구를 찾았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개척해냈다.

20년이 지난 지금 커트 코베인 특유의 과장되지 않은 스타일은 지금까지 조명을 받고 있다. 이후 다양한 패션 브랜드의 디자이너는 자신의 컬렉션에 커트 코베인과 그의 밴드 너바나에 경의를 표하는 컬렉션을 구성했다. 그 대표적인 예로 타카히로 미야시타(Miyashita Takahiro)의 넘버 나인(Number (N)ine)과 더 솔로이스트(The Soloist)에서 찾아볼 수 있다. 타카히로 미야시타는 유스컬처와 커트 코베인이 자신이 누구인지 보여주는 완벽한 본보기라고 말한 바 있다. 그가 커트 코베인, 구스 반 산트(Gus Van Sant), 데이비드 보위가 제외된 옷을 디자인하는 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룩북과 런웨이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찢어진 패치워크 청바지와 느슨히 흘러내리는 카디건에 레이어된 체크 셔츠 그리고 커다란 선글라스까지,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가.

 

CHAPTER 3: 스트리트웨어가 주도한 2000년대 초반

 

I hate the new Kanye, I miss the sweet Kanye

2000년대 초반은 베이프(A Bathing Ape)와 BBC(Billionaire Boys Club), 아이스크림(Icecream)과 같은 스트리트웨어 브랜드가 힙합 패션을 주도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칸예 웨스트(Kanye West)가 있었다. 상상하기 어렵지만, 그는 2000년대 초반 힙합 아티스트 중 가장 화려한 색을 즐겨 입는 부류였다.

2004년 칸예 웨스트는 그의 데뷔 앨범인 [The College Dropout]을 발매했는데, 이 앨범은 기존 ‘갱스터 랩’의 틀을 깨며 좀 더 익살스럽고 자아가 드러나는 스타일의 랩을 선보였다. 이 앨범은 힙합 업계의 판도를 바꿨을 정도로 큰 영향을 끼쳤다. 그 당시 칸예가 입었던 컬러풀한 폴로셔츠, 핑크 스웨터, 루이뷔통 백팩은 이전 XXXL사이즈 티셔츠와 다리까지 내려오는 배기한 청바지 스타일을 선호하던 힙합 아티스트와 거리가 있었다. 다행히 댐 대쉬(Dame Dash)와 제이지(Jay-Z)가 있는 로커펠라(Roc-A-Fella)에서 레코드 계약을 성사했지만, 그의 다소 컬러풀하고 활기찬 스타일로 힙합 거장을 설득하기란 쉽지 않았다.

 

최근 노예제도를 두고 모호한 발언을 남기고, 미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Donald John Trump)를 지지하는 뉘앙스로 논란을 일으킨 칸예 웨스트. 그가 특이한 비전을 가졌다는 건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얼핏 보기에 어색해 보이는 행보 또한 결국 다 그만의 비전이 있다는 것을 지금까지의 행보를 통해 증명해왔다. 2000년대 초반 그가 셔터 쉐이드(Shutter shade)라는 괴상한 선글라스를 착용했을 때를 기억하는가. “Stronger” 뮤직비디오에서 쓰고 나온 이 선글라스는 곧 모든 옷가게에 진열되었고 유행을 이끌었다.

 

‘단 한 번’을 위해 만들어진 나이키 에어 맥스 360 하이브리드 x 에어 맥스 97 “원 타임 온리”(Nike Air Max 360 Hybrid x Air Max 97 “One Time Only”) 시리즈

지금이야 역대 에어 맥스 시리즈를 섞어 놓은 하이브리드 모델을 흔히 볼 수 있지만, 2000년대 초반에는 이러한 디자인이 흔치 않았다.

나이키는 97년 아웃솔 전체를 감싸는 에어 버블을 갖춘 에어 맥스 97을 출시한 뒤 2006년 에어 버블이 100% 솔을 감싸는 에어 맥스 360(Air max 360)를 새롭게 발표하며 독보적인 기술력을 자랑했다. 위 “One Time Only”, 즉 ‘단 한 번’ 시리즈는 360 시리즈를 홍보하기 위해 2006년도에 출시했으며 에어맥스의 아이코닉한 실루엣 아래 360 에어 버블 솔을 결합해 태어났다.

 

스케이트보드 슈즈에서 영감을 받은 어글리 슈즈

1990년대 그리고 2000년대 초반의 스케이트 슈즈는 그 어떤 스니커보다 두꺼운 실루엣을 자랑했다. 어글리 슈즈 열풍이 무섭게 퍼지는 지금 에이샙 라키(A$AP Rocky)는 그 트렌드를 이어가며 최근 ‘LAB RAT’이라는 퍼포먼스로 위 2000년대 초반 스케이트 슈즈를 연상시키는 언더 아머(Under Armour)와의 협업 스니커즈를 정식 공개했다.

 

최근 에이샙 라키의 퍼포먼스

비디오 속 라키가 보여 준 검정 색상의 스니커는 그 소재 외 자세한 정보를 확인할 수 없다. 2001년 스케이트보드 브랜드 오시리스(Osiris)에서 발매한 스니커 모델 D3를 연상케 하는 협업 스니커는 이미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고 있다.

데이비드 보위부터 칸예 웨스트까지. 음악뿐 아니라 패션까지 눈여겨볼 지점을 던져주는 이들이다. 실제 많은 디자이너는 이전에 존재하던 패션으로부터 영감을 얻는다. 그 이유는 뭘까.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한 가지 이유를 제시해본다면, 빠르게 급변하는 세상 속 그 아무도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과거는 미래의 또 다른 거울이 되는 게 아닐까.


글 │ 김나영
이미지 디자인 │ 이남훈
제작 │ VISLA, MUSINSA

HISTORY 101: UNDERCOVER

101 수업: [미] (대학의) 기초 과정의, 입문의, 개론의; 초보의, 기본이 되는 수업


현대 사회에서 현명한 소비자로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홍수처럼 넘쳐나는 사방의 광고와 유명인의 패션, 금세 바뀌어 버리는 트렌드의 유혹까지. 물론,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 의복생활이 더 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패스트 패션이나 유행에 의존해 소비한다면, 의복의 제대로 된 이해가 있다고 보기도 어려울뿐더러, 얼마 지나지 않아 질려버리기에 십상이다. 옷을 창작한 디자이너의 생각과 브랜드의 철학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특정한 제품을 구매한다면 당신의 옷장은 자신만의 확고한 스타일로 가득 찰 것.

이는 바로 이 수업의 목표이기도 하다. ‘101’이란 숫자는 새내기 대학생이 완전히 처음 접하는 과목의 옆에 붙는 숫자다. 말 그대로 기초 수업을 의미한다. ‘히스토리 101(History 101)’은 역사가 깊은 브랜드는 물론 특정한 제품과 인물을 아우르는 수업으로 더 이상 인스타그램 속 ‘OOTD’ 태그의 참고 없이 자신이 원하는 제품을 찾을 수 있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언더커버(Undercover)는 그 이름처럼 비밀스러운 구석이 있다. 시작부터 지금까지의 컬렉션을 훑어보아도 어쩐지 더욱 모호해지는 기분만 든다. 다만, 확실한 것은 언더커버가 지난 25년간 독보적인 컬트와 문화를 지닌 브랜드로 성장했다는 사실이다. 명료하게 설명하자면, 언더커버는 펑크 정신을 기반으로 한 브랜드다. 이는 펑크를 바라보는 준 타카하시(Takahashi Jun)의 철학으로 또다시 대변된다. “내 생각에 ‘펑크’라는 건 정직하고 올바른 생각을 지닌 사람이 아니면 오히려 이해하기 힘들다. 펑크는 ‘아웃사이더’를 뜻하기도 하지만, 난 일반적 삶의 방식을 펑크로부터 배웠다. 아무래도 펑크라는 건 세간의 그릇된 시각에 저항하는 의견과 행동을 대변하는 거니까”.

디자이너 준 타카하시는 자신이 창조한 것을 전적으로 이해하고 의류에 반영한다. 언더커버 첫 컬렉션의 의류가 최근까지 등장하는 사실은 그저 하나의 컬렉션에서 맥락이 끝나는 것이 아닌 연속 선상에 놓인 장기적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하이엔드와 스트리트의 경계를 허물었다는 점도 언더커버의 업적. 모든 틀과 제약에서 벗어나는 언더커버의 본질은 무의식적 감정의 불협화음을 만드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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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체제전복적인 브랜드언더커버의 컬트 지휘관, 준 타카하시

언더커버라는 브랜드를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디자이너 준 타카하시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1969년, 군마현 키류(Kiryu)시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은 만화와 음악 잡지로 가득했고, 많은 시간을 어머니의 옷과 액세서리를 뒤지며 보냈다. 무엇보다 타카하시의 유년기를 통과한 지난 1970년에서 1990년 사이의 일본은 격동의 시기로 사회 전반 큰 변화를 겪었다. 전쟁이 끝난 뒤 7년간의 미국 점령 시기를 지나면서, 서구의 문화가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왔고 80년대 중반까지는 메탈과 펑크 록이 도쿄를 뒤덮었다. 세계화의 물결은 일본을 통해 또 다른 영향력을 행사했다. 당시 준 타카하시는 비비안 웨스트우드(Vivien Westwood)와 기타무라 노부히코(Nobuhiko Kitamura)의 패션 레이블 히스테릭 글래머(Hysteric Glamour)가 패션을 매체로 문화와 음악을 아우르는 방식을 보며 새로운 세계에 관심을 보였다.

무수한 팬과 마니아에게 굉장한 지지를 받는 패션계의 록스타 준 타카하시, 그러나 그의 브랜드 ‘언더커버’라는 이름처럼 우리는 그를 잘 알지 못한다. 허나 그는 앞으로도 이어질 패션 역사 속 우상이자 국제적인 디자이너로 우뚝 선 인물이다. 그의 런웨이에서는 늘 뭔가 이상하고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다.

 

CHAPTER 2: 우라하라(Urahara) 그리고 언더커버의 시작

1988년 성인이 된 준 타카하시는 도쿄의 패션전문학교 문화복장학원에 입학한다. 디자인을 공부하면서 영국의 펑크 록 밴드 ‘섹스 피스톨즈(Sex Pistols)’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로 ‘도쿄 섹스 피스톨즈’라는 밴드를 결성하기도 했다. 그는 학창 시절 친구가 끌고 들어간 꼼 데 가르송(Comme des Garçons)쇼를 보기 전까지는 앞으로 정확히 뭘 해야 할지 모르던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레이 가와쿠보(Kawakubo Rei)의 패션쇼 직후 큰 감명을 받고, 패션 디자인이야말로 완전히 자유로운 창조적인 표현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후 1989, 혹은 1990년 즈음 ─ 그 스스로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고 밝혔다 ─ 에 친구 히노리 이치노세(Ichinose Hinori)의 도움으로 언더커버를 설립했다. 언더커버의 초기 제품은 대부분 타카하시가 직접 리메이크한 빈티지 티셔츠와 각종 피스로 구성되어 있었다. 성공은 꽤 빨리 찾아왔고, 당시 유명한 하라주쿠 패션 숍 빌리(Billy)나 밀크보이(Milk Boy)의 행거가 언더커버로 채워졌다.

1993년은 그에게도 기념비적인 해인데, 하라주쿠의 전설적인 브랜드 베이프(A Bathing Ape)를 설립한 니고(NIGO)를 만나 ‘Nowhere’라는 자그마한 스토어를 오픈한다 ─ 이 숍은 철조망으로 가운데를 나누고, 한쪽에는 언더커버를, 반대편에는 니고가 큐레이팅한 상품을 진열하는 방식으로 운영했다 ─ . 그의 레이블이 점점 유명세를 탐과 동시에 준 타카하시 자신도 니고와 팝 컬처 잡지 타카라지마 매거진(Takarajima Magazine)에 칼럼을 기고하며 점차 자신의 이름을 알린다. 다양한 활동이 쌓이며 준 타카하시는 어느새 우라하라의 가장 중요한 인물 리스트에 오른다.

 

CHAPTER 3: 레이 가와쿠보, 마틴 마르지엘라(Martin Margiela) 그리고 해체주의

1994년 언더커버의 첫 런웨이 쇼에서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2002년 파리에서 쇼를 열도록 격려해준 인물이 레이 카와쿠보라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 보수적이던 일본 패션계에 준 타카하시의 등장은 신선함 그 자체였다.

준 타카하시가 본격적인 패션 커리어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레이 가와쿠보였지만, 그의 마음을 앗아간 디자이너는 바로 마틴 마르지엘라(Martin Margiela)였다. 그는 시부야의 한 백화점에서 마르지엘라의 디자인을 처음 접하게 된다. 이후 그 시각을 더욱 가까이 옮기며, 자신의 비전을 확신한다. 타카하시는 우라하라에서 꾸준히 사업을 운영했지만, 이와 함께 우상의 방식을 빌려 자신의 옷을 실험하고자 했다.

본격적으로 무대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느낀 그는 1994년 4월 18일 자신이 좋아하던 뮤지션 유유 우치다(Uchida Yuyu)로부터 영감을 받은 컬렉션을 완성했다. 그리고 도쿄 패션 위크의 일환으로 다이칸야마 개러지(The Garage)에서 언더커버의 첫 패션쇼를 선보인다. 제목이 정해지지 않은 1995 A/W 여성 컬렉션은 준 다카하시의 커리어 내내 다시 돌아가서 찾아볼 만할 정도의 미적 원칙을 확립했다. 펑크 컬처의 요소와 스트리트 스타일을 결합한 하이패션, 언더커버는 20년 전부터 스트리트 스타일과 하이엔드 패션 경계의 미래를 제시했다.

 

CHAPTER 4: 매 시즌 다양한 스펙트럼의 아이코닉한 컬렉션

준 타카하시는 그저 모델의 워킹으로 끝나고 마는 단순한 패션쇼에는 관심 없다. 그는 쇼를 하나의 엔터테인먼트로 여기고 대중이 자신의 쇼에 감정적으로 빠져들기를 바란다. 타카하시는 매 시즌 변화무쌍한 세계관을 선보인다. 여러 브랜드의 패션쇼를 보면 브랜드 분위기가 전 시즌과 비교해 급변한 것을 느낄 때가 있다. 이는 종래 패션 하우스의 디렉터가 바뀌었을 때 보이는 현상으로 최근 뎀나 바잘리아(Demna Gvasalia)의 발렌시아가(Balenciaga) 합류 후 이전 컬렉션과 180도 바뀐 분위기를 생각해본다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언더커버는 브랜드 설립부터 지금껏 준 타카하시가 언더커버의 모든 디렉팅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각각 다른 디자이너가 작업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라고 느껴질 정도로 다양하고 뚜렷한 컬렉션을 보여준다.

 

S/S 1996 “Under the Cover”

이 쇼를 위해 타카하시는 ‘엘름 스트리트(Elm Street)의 악몽’ 시리즈로 잘 알려진 특수 효과 아티스트 매드 조지(Mad George)의 도움을 구했다. ‘Under the Cover’라는 적절한 제목의 컬렉션은 괴상한 유령과 프레디 크루거(Freddy Krueger-esque) 괴물이 타이트한 코트와 디지털 스컬 패턴 밀리터리 재킷을 선보인다. 다른 디자이너가 사진으로 컬렉션을 기록하는 데 만족하는 동안, 준 타카하시는 자신의 공동 작업을 기록하기 위해 쇼의 비하인드 신이 담긴 VHS 테이프, 티셔츠 등으로 구성한 ‘블리스터 팩(Blister Pack)’이 담긴 아트북을 제작했다.

 

S/S 2003 “Scab”

언더커버의 2003 S/S 컬렉션 “Scab”은 그 방대한 아카이브 속 빼놓을 수 없는 전설적인 무대다. 파리 패션 위크의 하이라이트였을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패션 숍 바이어와 언론의 관심을 독차지했으며, 언더커버가 일본을 넘어 세계적인 컬트를 갖게 만든 계기가 된 컬렉션이다. 언뜻 보면 마구잡이로 찢고 붙인 넝마처럼 보이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여본다면 옷 하나하나에 삽입한 에스닉 트라이브(Ethenic Tribe) 패턴과 손수 삽입한 터치에서 나오는 디테일에 경외감이 들 정도. 자세히 볼수록 아름답다는 말이 어울리는 컬렉션이다.

 

S/S 2010 “Less But Better

언더커버 역사상 유일무이한, 남성복으로만 구성된 런웨이 쇼 “Less But Better”. 언더커버가 파리에 데뷔한 이후 새로운 수준의 성공을 거두었고, 각국의 패션 스토어에 소매 공세를 시작했지만, 주 고객층은 여전히 일본에 국한되었다. 그러던 중 2010년 타카하시는 ‘피티 워모 이매진(Pitt Uomo Imagine)’의 게스트 대표로 초청받는다.

준 타카하시는 이를 계기로 피렌체에서 남성복에만 집중할 수 있는 귀중한 기회를 얻는다. “Less But Better”는 간결하고 현대적인 디자인으로 잘 알려진 산업 디자이너 디터 람스(Dieter Rams)를 레퍼런스로 반사적인 레인 재킷, 베이지 컬러의 코트, 회색 슬랙스 및 단순한 그래픽 티를 연이어 선보였는데, 이는 지금껏 그가 해온 컬렉션 중 가장 세련된 것으로 손꼽힌다. 이 쇼로 그는 남성복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역량을 지녔음을 스스로 증명했다.

 

2011 “Underman”

2011년의 “Underman” 컬렉션은 1996년 S/S 컬렉션 “Under the Cover”처럼 쇼를 포기하는 대신 복잡한 프레젠테이션을 개발한 결과물이다. 반 영웅적 성격의 언더맨과 그가 거주하는 공상 세계를 중심으로 한 이 컬렉션은 흔히 볼 수 있는 사람이 공상적으로 옷을 입는 방식을 보여준다. 그 콘셉트 자체로 담고 있는 의미가 풍부했던 “Underman”은 프랑스의 전자음악 듀오 다프트 펑크(Daft punk)를 연상시키는 헬멧 등 기발한 의류를 대거 준비했다. 준 타카하시는 옷뿐 아닌 메디콤(Medicom)과 공동으로 제작한 연재만화와 고해상 액션 룩북, 액션 피겨 시리즈를 제작했다. 제작기를 기록한 아래의 비하인드 영상만 봐도 하나의 룩북보다는 영화에 가까운 인상을 준다.

 

 

CHAPTER 5: 준 타카하시 영감의 원천이자 마인드 뱅크

준 타카하시는 자기 전에 독서한 뒤 책에서 얻은 생각을 정리한 뒤 잠자리에 드는 습관이 있다. 그는 패션쇼를 준비하기에 앞서 자신이 만족하는 아이디어가 나올 때까지 브레인스토밍을 하고 그에서 비롯된 상상력을 숨김없이 쇼에 드러낸다. 브랜드의 원천이자 타카하시의 삶이라고 할 수 있는 펑크는 언더커버의 아이덴티티로 자리 잡았고, 나아가 영화, 미술을 비롯한 광범위한 스펙트럼의 예술에서 양분을 얻는다.

 

 

A/W 2015

언더커버는 펑크 정신을 기반으로 한 브랜드인 만큼 펑크 록 밴드를 마르고 닳도록 오마주한다. 이 컬렉션은 텔레비전(Television) 밴드의 앨범 [MARQUE MOON]을 루즈한 핏의 ma-1 재킷과 코트에 언더커버 특유의 올오버 프린팅을 입혔다. 이 옷을 입고도 밴드 텔레비전이 뭔지 모른다고 한다면 꽤 창피할 터.

 

 

Fall 2018

준 타카하시는 77년 스타워즈의 네 번째 에피소드 ‘새로운 희망’을 레퍼런스 삼은 1999-2000 A/W 컬렉션 이후 다시 한번 스탠리 큐브릭(Stanley’s Kubricks)의 대표작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2001: A Space Odyssey)’를 통해 우주와 공상과학을 이야기한다. 영화 주요 장면을 삽입한 올오버 프린팅 판초, 다운재킷이 인상적으로 각양각색의 다운재킷과 영화를 비교한 사진은 영화와 쇼의 구분을 모호하게 한다. 준 타카하시는 인터뷰를 통해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왠지 모르게 20분 이상 틀어놓지 못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시즌을 준비하며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오르는 순간, 당시 ‘Order / Disorder’에 테마를 둔 컬렉션에 완벽히 부합한다고 느껴서 곧바로 작업에 돌입했다고.

 

S/S 2018 “JANUS”

제일 최근에 공개한 여성 컬렉션 2018 S/S 컬렉션 “JANUS”는 미국 포토그래퍼이자 필름 디렉터인 신디 셔먼(Cindy Sherman)과 영화 샤이닝(Shining)으로부터 탄생했다. 영화 샤이닝에 등장하는 그래디 트윈스(Grady Twins)는 하늘색 드레스와 하얀 양말을 곱게 차려입은 여자 쌍둥이다.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라는 테마 속 새로운 그래디 트윈스는 왠지 모를 섬뜩한 느낌을 준다.

 

CHAPTER 5: 쉽게 따라할 수 없는 독보적인 그래픽 디자인

준 타카하시가 브랜드를 시작할 당시에는 옷을 만드는 행위보다도 그래픽 제작에 더욱 흥미를 느꼈다. 언더커버의 남성 컬렉션 속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은 매 시즌 활용되는 다양한 스타일의 그래픽이다. 시즌별로 티셔츠에 프린팅한 ‘U’ 로고부터 다운재킷에서 스웨터까지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독보적인 그래픽 디자인은 언더커버만의 분명한 차별점이다. 언더커버의 시작점이 콜라주를 비롯한 실크 스크린 프린팅을 통해 시작되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준 타카하시는 패션 디자이너인 동시에 뛰어난 그래픽 디자이너이다. 동료와 아파트 욕조에서 만들어냈다는 언더커버의 그래픽 티셔츠는 현재까지 사랑받는 아이템이다.

 

CHAPTER 6: 굳이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의 다양한 레이블과 태그

UNDERCOVER, UNDAKOVRIT, UNDAKOVRIST, UNDAKOVR ONE-OFF, JOHN/SUE UNDERCOVER…….

최소 몇 시즌 이상 언더커버를 봐온 사람이라면 알 테지만, 언더커버에는 많은 레이블과 태그가 존재한다. 의류와 사이즈 별로 시즌마다 4, 5개의 태그가 있으니 언더커버의 모든 레이블과 태그 종류를 알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마틴 마르지엘라 또한 브랜드 속 10개가 넘는 레이블을 보유하고 있다. 아마 마르지엘라와 준 타카하시 모두 레이블이라는 규격과 상상력의 제한을 탈피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을까. 언더커버에 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준 타카하시 자체가 언더커버다. 그는 컬렉션을 만들 때 그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아낌없이 발산하고 대중은 그에 매혹된다.

 

CHAPTER 7: 언더커버의 협업 컬렉션

언더커버가 하는 모든 협업에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다. 헬로키티(Hello Kitty)든 슈프림(Supreme)이든 언더커버는 브랜드 자체만으로는 할 수 없는 부분을 협업을 통해 충실히 보완한다. ‘유니클로(UNIQLO)와 진행한 UU 컬렉션’을 예로 들어보자. 타카하시는 자신의 딸을 위한 옷을 디자인하는 것이 오랜 바람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런 협업을 통해 기존에 시도하지 않았던 아동복을 제작했고 이는 더욱 광범위한 고객층에게 언더커버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전략을 달성한다.

바로 이 점이 언더커버의 협업이 일회성에 그치지 않는 이유다. 타카하시와 작업하는 브랜드는 그가 단지 한 명의 디자이너를 넘어, 그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완벽히 이해하고 끊임없이 예술적 시도를 반복하는 과정을 목격한다. 타카하시는 언더커버 초반부터 오토바이 라이트를 부착한 사과를 지속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디스토피안 괴물을 만들기 위해 빈티지 오토바이 조명으로 눈을 만들어 사용한 프로젝트인 ‘그레이스(Grace)’가 그렇다. 그레이스는 소품 그 이상으로 언더커버의 세계에서 되풀이되는 캐릭터인데, 이는 아이들이 그린 만화와 생물의 진화에 초점을 맞춘 일련의 예술 이미지로 이루어진다.

 

(좌: 언더커버의 94년 티셔츠 디자인 / 우: 슈프림과 언더커버의 협업, S/S 2015 ‘Street’ 트렌치코트 )

슈프림과의 최초 협업, S/S 2015 ‘Street’는 기존 언더커버의 메인 라인보다 조금 더 합리적인 가격대의 컬렉션이다. 가죽 재킷과 그래픽 티셔츠에 ‘ANARCHY IS THE KEY’ 그래픽을 새겨 어쩌면 준 타카하시의 지난 NOWHERE 시절을 회상한다. 언더커버의 미약한 시작을 생각해본다면, 슈프림과의 협업은 준 타카하시에게 새삼 우라하라 시절에 대한 향수로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글로벌 스포츠웨어 브랜드 나이키(Nike)와 준 타카하시의 끈끈한 관계의 산물로 시작한 ‘갸쿠소우(Gyakusou)’는 러닝에 대한 준 타카하시의 애정으로부터 비롯됐다. ‘역주행(Running in Reverse)’을 일본어로 옮긴 액티브웨어 컬렉션 갸쿠소우는 정해진 흐름에 역행하고 러너(Runner)가 선택한 경로에 의문을 제기하는 디자인으로 러너가 페이스를 유지하기 위한 기능적이고 기술적인 조건을 제공한다. 갸쿠소우는 나이키의 기술력과 준 타카하시의 창의성을 결합해 러닝웨어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준 타카하시는 매일 일정한 시간에 러닝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러닝은 내 창의력의 큰 원천이다. 내가 일정한 시간을 할애하는 러닝을 위해 어패럴 및 풋웨어를 만든다는 말도 일리 있다. 정확한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나는 항상 나의 감성을 의류를 통해 표출하기를 강하게 열망해왔다”고 말하며 러닝에 강한 애착을 밝힌 바 있다.

 

CHAPTER 8: “WE MAKE NOISE, NOT CLOTHES”

언더커버의 설립부터 지금까지 25년이 지난 지금, 국제적인 명성과 컬트적 지위를 얻은 준 타카하시. ‘존(JOHN)’과 ‘슈언더커버(SUEundercover)’라는 새로운 라인까지 확장하며, 새로운 지평을 열었지만, 언더커버의 고유한 성질을 여전히 간직한다. 항상 그래왔듯이, 언더커버는 펑크로 이어진다. 펑크에서 뻗어 나오는 공격적인 요소가 표면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이 모두가 언더커버 디자인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준 타카하시의 재능은 그를 지켜보는 이로부터 질문을 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그가 추구하는 펑크라는 단어의 진정한 의미에 질문을 던지는 것은 그의 옷을 입는다는 행위와 맞닿아있다. 펑크는 단순히 음악이나 패션 스타일을 뜻하는 단어가 아니다. 이는 바로 ‘옷을 입는다’는 개념을 부수거나, 새로운 것에 적극적으로 도전하는 정신인 셈이다. 준 타카하시에게 옷을 만드는 행위는 사회에 만연한 고정관념과 편견에 도전하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남과 다르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그는 이에 완전히 반하고자 한다. 어떤 흐름 속에서도 개인의 ‘개별성’을 획득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조금 거창하게 표현하자면, 언더커버를 입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답게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일지 모른다. 이러한 사유 속에서 앞으로 패션은 어떤 방향을 향해야 할지, 더 나아가서 개인의 삶에 실존적 고민을 던지는 언더커버의 철학은 더욱 가치 있게 다가온다.

“우리는 옷이 아니라 소음을 만든다(WE MAKE NOISE, NOT CLOTHES)”. 이것은 바로 언더커버의 모토다. 타카하시와 그의 브랜드는 90년대 초부터 소음을 내고 있으며 그 소음이 점점 커지고 있다.

글 │ 김나영
제작 │ VISLA, MUSINS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