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AH

시즈닝(SEASONING)이라는 이름의 패션 브랜드를 들어본 적 있는지. 일본 내 패션으로 이름난 ‘부부’가 함께 만들어가는 브랜드라고 하면 당신의 구미를 당길 수 있을까. 도쿄 기반의 스타일리스트 마사(MASAH)와 모델 이마주쿠 아사미(Asami Imajuku) 부부가 전개하는 시즈닝은 언제 어디서나 편안하게 입을 수 있는 옷에 그들만의 양념을 더한다. 두 사람 모두 오랜 시간 도쿄의 패션 신(Scene) 제일선에 머물렀던 만큼 들려주는 이야기 역시 거리 패션의 현재와 과거를 아우른다.

몇 가지 볼일로 빠듯했던 시간, 그는 90년대 하라주쿠와 시부야의 풍경, 후지와라 히로시(Hiroshi Fujiwara)와의 첫 만남 등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전했다. 도쿄 패션 면면에 대한 궁금증을 해갈해준 마사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자리를 마련해준 한남동의 편집 스토어 원더 사유(WANDER/SAYOO)에도 감사의 인사를 건네고 싶다.

 

간단한 소개 부탁한다.

스타일리스트이자 지금은 시즈닝이라는 브랜드의 디렉션을 맡고 있는 마사라고 한다.

 

스타일리스트에서 의류 브랜드 디렉터로 일하게 된 그 배경이 궁금하다.

스타일리스트 당시에도 패션 브랜드를 맡아 운영했지만, 본격적으로 디렉터를 맡게 된 결정적 계기는 지금 아내와의 결혼이다. 시즈닝이라는 브랜드는 아내 이마주쿠 아사미와 함께하는 브랜드다. 마음 맞는 사람과 결혼하며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소중히 생각하게 되었다.

그중 하나로 후지와라 히로시의 더 풀 아오야마(THE POOL AOYAMA)에서 인 더 하우스(IN THE HOUSE)라는 패션 브랜드를 기획했다. 이후 더 파킹 긴자(THE PARKING GINZA)을 통해 시즈닝을 프로젝트 브랜드로 선보인 뒤 본격적인 브랜딩을 시작했다. 특별히 어떤 확고한 콘셉트의 브랜드를 운영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함께 시간을 보내는 방편으로 옷을 만들어 보자는 의미에서 시작했다.

 

개인 인스타그램에 가족의 일상이 드러나는 점이 재미있다. 가족의 의미가 브랜드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가.

사실 시즈닝이라는 브랜드가 단순히 가족의 모습으로 비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점점 그렇게 되는 것 같다. 가족을 주제로 한 부분에서는 별도로 인 더 하우스라는 브랜드를 진행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인스타그램은 멋 부리는 공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여주는 채널로 활용하고 있다. 결과적으로는 가족이 주가 되어 버렸지만, 시즈닝은 오랜 시간 스트리트 패션 신에 종사한 나와 부인인 이마주쿠가 결과적으로는 부부의 연을 맺고 한 아이의 부모가 되는 과정을 거쳤지만, 예전 현역시절의 모습을 보여주는 브랜드였으면 한다.

 

패션에 관심을 가지게 된 시기는 언제인가.

일단 멋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중학생 때부터 생각하곤 했다. 본격적으로 옷차림에 신경 쓴 시기는 고등학생 때다. 어린 시절에는 막연히 동네 옷 잘 입는 형들을 보고 따라서 입는 정도였는데, 고등학생이 되고 시부야에서 본 멋진 사람들을 동경하게 되어 패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고등학생 때 시부야와 하라주쿠의 분위기나 트렌드는 어떠했나?

학창시절 하라주쿠와 시부야는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맴도는 무서운 분위기였다. 당시의 시부야와 하라주쿠는 지금과 같은 패셔너블한 동네라는 느낌은 없었다. 예쁘고 멋진 옷을 사는 쇼핑의 메카보다는 몇몇 사람들이 한껏 멋을 내는 장소의 성격이 강했지. 더불어 여러 장르의 패션이 공존하는 재미난 모습이었다. 시부야에는 서퍼와 조금 불량한 느낌의 아메카지, 하라주쿠에는 스케이터, 비보이가 주를 이뤘다. 각 장소마다 장르가 뚜렷해, 시부야의 시부카지, 하라주쿠의 우라하라 같은 하나의 장르로 발전하는 시기였다.

 

시즈닝의 의류 라인업을 보자면 독특한 그래픽보다는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의류가 눈에 띈다. 전반적인 브랜드 콘셉트에 관해 이야기해줄 수 있나.

후지와라 히로시의 더 콘비니(THE CONVENI)에 멋있게 입고 갈 수 있는 브랜드? 하하. 나이가 들어 멋을 바라보는 기준이 바뀐 것인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난 아이도 있고 내 나이에 맞는 옷을 입고 싶다. 굳이 무리해서 과하게 입고 싶지 않은 느낌이라고 할까? 실생활에 입기 좋은 티셔츠나 후디를 중심으로 본인의 색깔을 통해 새로운 것을 표현하는 느낌이다.

더 파킹 긴자에서 진행한 프로젝트로 시즈닝을 운영할 때, 만들고 싶은 것만 제작하라는 후지와라 히로시의 제안에 초점을 두었고, 지금 선보이는 컬렉션 또한 타 브랜드처럼 아우터나 셔츠, 팬츠 등으로 구색을 갖추는 것보다는 실생활에서 더 많이 찾는 품목으로 구성하고 있다.

 

말했다시피 시즈닝은 부부가 함께 진행하는 브랜드다, 가까운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프로젝트의 장점이나 단점이 있을 것 같은데.

아내와 싸운 다음 날에도 브랜드 업무 관련으로 함께 미팅하는 날이 종종 있다. 그런 경우 자연스레 각자의 감정을 긍정적으로 다스려야 해서 싸움이 길게 이어지지 않는다. 단점은 딱히 없다. 단점을 장점으로 바꿔야 하는 부부관계라는 특성상, 결과적으로는 장점이 많다.

아내와 나이는 같지만, 어쨌거나 그녀가 커리어의 선배였고 나는 그녀의 스타일리스트를 하면서 어시스턴트를 겸하던 입장이었다. 어쩌다 보니 결혼까지 골인했고, 나 자신도 아내에게 큰 신세를 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브랜드 설립의 배경에 선 후지와라 히로시와의 관계도 궁금하다.

아내가 우라하라를 대표하는 스트리트 모델이어서 이전부터 후지와라 히로시를 알고 있었다. 난 그와 재미있는 계기로 친해졌다. 이전 더 풀 아오야마 오픈 기념으로 발매한 뱀포드 워치 디파트먼츠 롤렉스(Bamford Watch Department) x 프라그먼트 디자인(Fragment Design)을 갖고 싶어서 지인을 통해 제품을 예약해달라고 부탁했다. 제품을 구매하러 매장에 들렀는데, 시계 가격이 무려 300만 엔이었다. 곧 아기도 태어날 시기라 돈을 아껴야 했다. 고민하던 찰나, 히로시가 매장에 방문했다. 뭔가 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에 그에게 제품을 맡아줘서 고맙다고 감사의 인사를 건네며 구매했다.

그때 히로시가 아내의 안부 인사와 함께 언제 식사라도 하자는 이야기를 건넸는데, 그때 나는 동경의 대상인 후지와라 히로시의 식사 약속을 단순한 인사치레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히로시에게 문자가 왔고, 실제로 만나서 같이 밥도 먹고 가끔 집에도 놀러 오는 친밀한 관계로 이어졌다. 어느 날 히로시로부터 복어를 먹으러 가자는 연락을 받고 나갔는데, 그 장소가 오사카였다. 결혼 후 처음으로 아내가 아닌 누군가와 도쿄를 벗어나는 순간이었지. 하하. 그렇게 오사카로 향하는 신칸센에서 히로시와 장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나는 부부가 함께하는 일을 하고 싶고, 곧 아이가 태어나는데 마땅히 입히고 싶은 아동복이 없어 아내와 함께 아동복을 만들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히로시는 내가 만들고 싶은 아동복을 더 풀 아오야마에서 전개하자는 제안과 함께 인 더 하우스라는 프로젝트를 맡겼다. 그게 인연이라면 인연이다.

 

패션 디렉터로서 바라보는 현재 일본 패션 마켓의 동향은 어떠한가?

쓸쓸하고, 허무하다. 내가 지나온 세대에는 문화가 있었다. 스케이트보드나 힙합 등의 다양한 신에서 브랜드가 뻗어 나왔다. 반면에 지금은 슈프림(Supreme)은 있지만, 슈프림을 있게 한 문화가 없다고 느껴진다. 쉽게 말하면, 지금은 재화가 움직이는 것 말고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세대의 패션 마켓에서는 반년에 한 번 정도의 페이스로 제품이 출시됐다. 덕분에 옷 하나를 사더라도 재미있는 상황을 연출할 수 있었지. 지금은 매주 나이키(Nike)에서 새로운 운동화가 출시되고, 슈프림에서 새로운 제품이 등장한다. 이전에는 극히 한정적으로 발매하는 옷이나 신발을 신고 스케이트보드를 타거나 클럽에 가는 명확한 목표가 있었는데, 지금은 ‘물건을 샀다’라는 목적밖에 없는 것 같다. 문화가 없이 단순 유행에 따라 움직이는 흐름이 허무하게 느껴진다.

 

2000년 초반의 우라하라 브랜드들이 일본뿐 아니라 세계적인 붐을 일으켰다, 마사가 기억하는 당시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난 오히려 우라하라를 꺼리는 편에 속했다. 지금은 패션 장르의 경계가 없지만, 당시 우라하라 계열과 내가 지향했던 비보이 계열은 특별한 접점이 없었고, 사이가 좋지도 않았다. 나는 그때 유행하던 베이프(A Bathing Ape)는 물론, 바운티헌터(Bounty Hunter)나 더블탭스(Wtaps), 네이버후드(Neighborhood)도 입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후지와라 히로시가 누군지도 몰랐다. 우라하라는 우라하라를 좋아하는 사람이 원하는 틀에 맞는 옷을 제작하고 판매했다. 문화로서의 브랜드라기보다는 비즈니스의 느낌이 강했다.

내가 비보이 계열을 지향한 이유 또한 우라하라 계열과는 다르게 비즈니스를 위한 패션보다는 ‘즐긴다는 느낌’이 좋았다. 나이키 스니커를 신고 멋있게 스타일링 하거나, 랄프 로렌(Ralph Lauren)이라는 고급 브랜드를 오버사이즈로 착용한 뒤 ‘난 이런 브랜드를 이렇게 입는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때만 해도 몇 년 뒤 우라하라의 대표격인 후지와라 히로시와 일할 거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지. 하하.

 

당시 즐겨 입은 브랜드는 무엇인가.

당시 랄프 로렌을 가장 좋아했다. 그러나 랄프 로렌이 폴로 스포츠(POLO Sport)라는 새로운 라벨을 전개하고 나서는 입지 않았다. 랄프 로렌은 삶의 질이 높은 상류층이 입는 브랜드처럼 느껴지지 않나. 그런데 힙합이나 비보이 계열의 사람이 색다른 스타일링으로 연출하는 방식이 좋았다. 폴로 스포츠는 판매하기 위한 옷을 제작한다는 느낌이 강해서 입지 않았다.

 

어디서 많은 영감을 얻는지 궁금하다.

딱히 영감을 받는 부분은 없다. 시즈닝의 메인 테마는 매 시즌 양념이라는 테마로 세 가지 컬러를 사용해 컬렉션을 전개한다. 그 컬러를 선정하는 데 특별한 영감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저 아내와 식사를 하거나, 함께 보내는 일상에서 컬러를 떠올린다. 그날 먹은 카레가 인상적이었다면, 노란색을 메인 컬러로 결정하는 방식이다. 나는 계절에 따라 무엇을 입을지보다는 어떤 색의 옷을 입을지 고민한다. 영감보다는 감각을 통해 브랜드의 방향성을 찾고 있다.

 

시즈닝이란 브랜드로 헤드 포터(HEAD PORTER), 프라그먼트 디자인, 윈드 앤 시(WIND AND SEA)와 협업했는데, 이외 욕심나는 브랜드가 있는지.

시즈닝이라는 브랜드명의 특색을 따라 패션 브랜드보다는 식품 브랜드와 협업하고 싶다. 예를 들자면, 농심의 신라면이나 헤인즈(Heinz)의 토마토케첩 같은 식품 브랜드.

 

일본은 패션 브랜드 각각의 독자적인 문화가 길게 유지되는 것 같다. 본인이 느끼기에 한국의 패션 마켓과는 어떤 차이점이 있나?

물론 패션 업계의 비즈니스를 따지자면 일본이 더 뛰어난 것 같은데, 개개인의 패션은 한국인이 더 스타일리시한 것 같다. 내가 스타일링을 맡았던 동방신기, 이병헌은 하나같이 멋지고 친절했다. 일본인과 다르게 서구적이랄까? 원래부터 멋진 사람이 있는 반면,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인은 원래부터 멋있기에 큰 노력을 들일 필요가 없다. 일본인은 멋있게 보이기 위해 노력하니 브랜딩이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일본 남자는 같은 남자에게 인정받고 싶어 한다. 반면에 한국 남자는 서양인처럼 이성에게 잘 보이기 위해 멋을 부린다. 예를 들어 일본 남자 탤런트는 자신이 봤을 때 멋있는 옷을 입지만, 한국 남자 탤런트는 자신이 멋있게 보이는 옷을 선호하는 부분에서 그 차이가 발생하는 것 같다.

 

지금 주목하는 일본의 아티스트, 패션 브랜드가 있는가?

스니커울프(Sneakerwolf), 주변 선배들이 이 브랜드를 입고 다니는 모습을 자주 목격했다. 뭔가 재미난 브랜드라고 생각하던 찰나, 우연히 소개를 받았는데, 일본 슈프림 매장에 크리스마스 기념 윈도우 아트를 했던 사람이더라. 나도 슈프림을 좋아하지만, 이제 나이가 있기에 무작정 입기에는 조금 창피한 느낌이 들던 찰나였다. 스니커울프를 입으면 젊은 시절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특별히 아끼는 패션 아이템이 있는지.

아끼는 아이템보다는 폴라텍이나 고어텍스 같은 기능성 소재에 관심이 많다. 스노보드를 타면서 선호하게 되었는데, 브랜드를 가리지 않고 나오는 소재라 좋아한다.

 

도쿄 내 자주 방문하는 장소가 있다면.

후지와라 히로시의 소개로 알게 된 치킨키친(Chiken Kitchen)이란 곳이다. 히로시는 이세 미에현 출신으로 미에현은 소고기가 상당히 비싼 동네라 닭고기를 소고기처럼 구워 먹는 요리가 유명하다. 치킨키친은 원래 비프키친(Beef Kitchen)의 한정 메뉴로 출시된 메뉴였는데, 워낙 인기가 좋아 따로 매장을 열었다고 한다. 이야기하는 지금도 먹고 싶고, 당신이 오면 한 번쯤 데려가고 싶은 곳이다.

 

향후 계획은 무엇인가.

트렌드에 따른 갑작스러운 성장보다는 천천히 조금씩 커지고 싶다. 유행에 따라 브랜드가 성장하면 그만큼 무너지기 쉽다고 생각한다. 소소하게 롱런하고 싶다.

SEASONING 공식 웹사이트
MASAH 개인 인스타그램 계정


진행 / 글 │ 오욱석
사진 │ 김용식

SHEPARD FAIREY

셰퍼드 페어리(Shepard Fairey)는 길거리 예술 세계에서 뱅크시와 더불어 가장 잘 알려진 아티스트다.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그는 담벼락에다 스티커, 스텐실을 비롯해 자신의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은 작품을 남겼다. 프로파간다로 대표되는 셰퍼드 페어리의 강렬한 그래픽은 의류 브랜드 오베이(Obey)로 이어지며 대중적인 명성과 상업적인 성공까지 거머쥐었다. 이와 더불어 그가 대기업 클라이언트를 상대로 일하고, 옷 떼기를 팔아치우는 돈의 노예가 되었다며 손가락질하는 이들도 늘어났다.

후술하겠지만, 셰퍼드 페어리는 정작 그들 – 스케이트보딩, 그라피티처럼 길에서 태동한 것들이 빠르게 상업화되어간다며 걱정하는 무리라고 치자 – 의 비판쯤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모두 18번이나 체포된 길거리 문화의 상징과도 같은 이 남자는 자신을 스트리트 아티스트라 정의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과연, 모호한 회피성 발언이었을까?

셰퍼드 페어리는 지난 3월 15일부터 4월 30일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위대한 낙서 셰퍼드 페어리전 : 평화와 정의’전을 성공리에 마쳤다. VISLA는 예술의전당 내 외부 가벽에 특별히 제작한 벽화 바로 밑에서 그와 대화를 나눴다. 인터뷰 중간중간 사인을 요청하거나 불쑥 근황을 묻는 팬 덕분에 셰퍼드 페어리가 아트 스타라는 사실을 새삼 체감했다.

 

 

오베이가 태동한 1989년으로 되돌아가 보자. 처음 길에서 스티커 바밍을 시작한 의도라면? 당시 주위의 반응이 어땠는지도 궁금하다.

주변 스케이터 친구들과 늘 하던 장난이었다. 스티커를 스케이트보드 스팟과 클럽, 아트 스쿨 근처에 붙이곤 했다. 언젠가부터 주변에서 이 스티커가 대체 뭐냐고 물어보더라. 그때 광고를 제외한 특정 이미지가 공공장소에서 노출될 때, 그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에게 생각의 씨앗을 제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자문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느낀 것이다. 그것을 단순한 농담이나 장난보다 더 정치적이고 진지한 질문으로 발전시켰다. 이 과정은 모두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처음으로 많은 사람의 이목을 끈 건 시장(Mayor)을 위해 만든 빌보드 간판을 바꿨을 때다. 상당히 큰 작품이었고, 지역 라디오, 신문, TV에서도 내 작품을 소개했다. 그때가 아마도 1990년이었다.

 

정치, 사회적인 메시지를 그간 작품에 계속 담아왔다. 처음부터 정치적인 목적이 뚜렷한 프로젝트였나?

나는 밥 말리(Bob Marley), 클래쉬(Clash) , 퍼블릭 에너미(Public Enemy),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Rage Against The Machine) 등 정치,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그룹의 음악을 듣고 자랐다. 또한, 바버라 크루거(Barbara Kruger)나 로비 카날(Robbie Conal) 같은 아티스트의 작품도 좋아했다. 스티커를 시작으로 크고 작은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나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조금씩 알았다. 개인의 정치적인 행동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는데, 그 결정적인 계기가 된 건 바로 조지 부시(George Bush)다. 그가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뼈저리게 느꼈지.

 

당신의 의류 브랜드 오베이가 스트리트웨어의 한 축으로 자리 잡았다. 이건 예술 활동, 메시지를 전하는 일의 연장선인가? 

물론이다. 사실, 의미 있는 옷을 만드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대다수의 의류 브랜드가 내놓는 옷에는 그다지 큰 뜻이 없다. 오베이 컬렉션 역시 하나하나가 큰 의미를 담지는 않더라도 대중을 내 작업, 예술로 잇는 통로 역할을 한다. 내 철학과 오베이 의류는 결국, 연결되어 있다. 다행히 나는 훌륭한 의류 팀과 손발을 맞춰왔기에 내가 맡은 역할에만 충실할 수 있었다. 패션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 않은가!

 

오베이의 시작은 길거리였다. 이 브랜드는 큰 반향을 일으키며 길거리 추종자들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다. 그런 만큼 셰퍼드 페어리의 상업적인 행보가 그들의 반감을 사는 것 같기도 한데, 한국 ‘예술의 전당’ 같은 대형 갤러리에서 당신의 작품을 전시한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내가 상업적으로 변질됐다는 비판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길에서 작품을 만들고, 그 사이 모두 18번이나 체포되었다. 무슨 말인지 알지? 나는 내 작품을 최대한 많은 사람이 봤으면 한다. 그 매개체는 길거리, 티셔츠 혹은 갤러리가 될 수도 있다. 내 커리어의 시작은 스트리트 컬처, 스케이트보드, 펑크, 힙합이었고, 그 안에서 티셔츠는 굉장히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나는 내 입으로 한 번도 스트리트 아티스트라고 말한 적이 없다. 여전히 길거리에서 일하고, 그 방식을 사랑하지만, 이 역시 여러 매개체 중 하나일 뿐이다.

어떤 작업은 많은 돈이 필요하기에 의류와 작품으로 얻은 수입은 대형 벽화나 더욱 큰 프로젝트에 투자한다. 더 많은 사람에게 내 작품을 도달시키는 과정일 뿐이다. 나는 이곳에서 개인전을 열게 되어 매우 기쁘다. 길거리에 있는 내 그림은 산발적으로 퍼져있기에 일련의 연관성 혹은 메시지를 즉각적으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그러나 갤러리에서는 그것이 가능하다.

 

로빈 후드 이론이 떠오르는데.

그렇다. 내가 지금보다 더 가난했을 때, 스프라이트(Sprite)를 클라이언트로 일한 적 있다. 그들의 요구대로 빌보드 광고를 만들고 나서 다시 그걸 내 작품으로 뒤덮었다. 간판에 “Obey Your Thirst”라고 쓰여 있었는데, ‘Your Thirst’ 부분을 내 로고로 덮어서 ‘Obey’만 보이게 했다. 15개 정도의 전광판을 모두 그렇게 훔쳤다. 샌디에이고, 샌프란시스코, 엘에이, 시애틀 등지에서. 하하. 그때 난 마치 로빈 후드 같았지.

 

당신의 예술이 사회적인 변화를 만들어낼 거라 예측했는지.

모든 행동은 새로운 시각을 창출해낸다. 그리고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그 변화를 만들어낼 수 없다. 생각을 실천하는 과정은 내가 가진 자원을 바탕으로 진행된다. 그것은 나와 관계를 맺은 주변 사람들을 통해 놀라운 일로 번지기도 한다. 오바마(Obama) 포스터, 아웅 산 수지(Aung San Suu Kyi) 포스터 혹은 위 더 피플(We the People) 시리즈 같은 것들이 바이럴(Viral) 효과를 덕 본 케이스다. 지구환경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작품 역시 많은 그룹이 받아들였다. 예술은 좋은 커뮤니케이션 도구다. 물론, 대중이 감상하기 편한 작품을 만드는 일도 중요하지만, 이걸 단지 데코레이션으로만 여기는 건 많은 기회를 낭비하는 것이다.

 

Ph. 김기남

이번 전시에는 작품에 제목이나 캡션이 달리지 않았다. 특별한 의도가 있는가?

내 소관이 아니었다. 나는 이 전시를 구성할 작품을 선별해서 보냈고, 그 구성은 미노아아트에셋 측에 맡겼다. 그보다 전시장 곳곳에서 다양한 비디오를 재생한 게 인상적이었다. 일일이 아트워크를 설명하는 것보다 한 편의 비디오가 작가, 전시에 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이번 전시를 기념해 예술의전당 야외 가벽을 설치해 새로운 벽화를 그렸다. 간단하게 소개해줄 수 있을까?

내 아내를 그렸다. 그녀는 다양한 피가 섞인 혼혈인데,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이자 전시 제목인 ‘평화와 정의’에 정확히 들어맞는다.

 

일부 작품에서 일본의 색채가 느껴진다. 전범기가 연상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다.

서양뿐만 아니라 다양한 동양권 국가에서 영감을 얻는다. 중국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것도 있고, 한국 프로파간다 관련 책을 모으기도 했다. 내 작품 중 ‘Dark Wave Rising Sun’ 같은 경우는 일본의 쓰나미 사태 이후 그들을 돕기 위해 만들었다. 여러 국가를 대표하는 전통적인 색과 선을 차용하는 방식인데, 표현적인 측면에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라피티를 포괄하는 스트리트 아트 영역은 기존 예술과 다른 접근으로 발전했다. 사회적인 목소리를 내고 민중을 대변하는 역할도 포함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러한 측면에서 당신은 사회적인 책임과 의무감을 느끼는가?

스트리트 아트는 이 세계에 목소리를 내기 힘든 처지에 있는 이들을 위한 예술이다. 갤러리, 상업적인 공간 등 작품을 보여줄 기회가 없는 이들에 의한 예술 형식이다. 작품을 선보일 공간을 길에서 찾는 것이다. 나는 언제나 사회 정의 구현 의지를 갖추고 작업에 임한다. 그 수익을 바탕으로 사회적인 일에 쓰일 자금을 마련한다. 가난한 학교, 자선 단체, 법적인 도움이 필요한 이들은 돈이 절실하다. 이것은 내게 매우 중요한 일이다. 다만 여기에 자금을 댈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쁠 뿐이지, 무거운 의무라고 느끼지는 않는다.

 

오바마를 그린 작품 ‘HOPE’로 대중적인 지지와 동시에 정치적인 효과도 얻어냈다. 현 미국 정부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가.

끔찍하다. 오바마의 모든 정책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는 대중을 위한 정치를 펼쳤다는 사실이다. 반면에 트럼프는 자신의 에고(Ego)에만 집중한다. 그가 대통령이 된 이유는 또 다른 트로피를 받고 싶어서다. 정부는 국민의 요구에 반응해야 한다. 대다수의 미국인은 정치에 큰 관심이 없다. 현재 미국 정치 상황은 좋지 않기에 더 많은 사람이 이를 계기로 정치에 관심을 보이지 않을까. 타산지석을 통한 배움이다. 트럼프 정부의 과실이 되려 정치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대중을 나서게 한다는 말이지.

 

최근 관심사는 환경문제로 확대된 듯하다. 컬러의 변화도 느껴지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다면?

환경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고 경각심이 들고 나서부터는 쭉 환경 단체와 일해왔다. 환경, 기후 악화는 테러리즘이나 경제 위기보다 더 심각한 문제다. 실질적으로 인류와 지구에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주는 이슈라고 생각하기에 더 많은 이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임계치를 넘어가면, 인류가 뒤늦게 환경을 되돌리고자 노력해도 바꿀 수 없다. 우리는 지금 움직여야 한다. 자본주의가 세계의 모든 걸 바꿔놓고 있다. ‘환경’을 언급하는 일이 비즈니스에 방해된다고 느끼는 기업은 정부와 협력해서 대중의 눈과 귀를 먹게 한다. 그러나 이는 매우 편협한 사고다. 사람이 모두 죽어 나가는 와중에 무슨 비즈니스인가.

 

스트리트 아티스트로 활동하면서 세계각국을 여행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가 어딘지 궁금하다.

많은 도시가 각기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다. 파리는 정말 아름답다. 역사적인 건축물도 많고. 다수의 스트리트 아티스트가 파리를 무대로 활동하지 않았나. 다양한 텍스처로 시각적인 영감을 주는 홍콩도 좋다. 서울은 공원과 나무가 많더라. 이건 다른 도시에서 찾기 힘든 부분이기도 하다.

 

마지막 질문이다. 지금도 몰래 담벼락에 벽화를 그리나?

그렇다. 다만 디트로이트에서의 사건 – 그는 디트로이트 지역에 남긴 벽화로 2015년부터 약 1년간 이어진 디트로이트 시와의 법정 공방에 지쳐있었다 – 때문에 매우 신중히 처리한다. 이제 내가 길에서 문제를 일으키면,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무슨 말인지 알지?

진행 / 글ㅣ권혁인
통역ㅣ맹진환
사진ㅣ고지원, 김기남 
협조ㅣ미노아아트에셋, 웍스아웃

CHI MODU

치 모두(Chi Modu)는 1990년대 힙합을 상징하는 위대한 이미지를 만들어낸 포토그래퍼다. 그는 당시 소스(Source)지에서 경력을 쌓으며, 지금 전설로 추앙받는 래퍼들과 어울렸다. 투팍 샤커(Tupac Shakur, 이하 투팍), 노토리우스 비아이지(Notorious B.I.G, 이하 비기), 우탱 클랜(Wu-Tang Clan), 레드 맨(Red Man), 이지 이(Easy-E), 스눕 독(Snoop Dogg)…… 그들이 자신의 라임으로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갈 때, 치 모두 역시 그 순간과 함께했다. 소스 지 표지를 장식한 30장의 인상적인 사진 외에도 그는 무대 뒤에서 벌어지는 모든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했다.

치 모두가 지난 2월, 한국을 방문했다. 서울 커뮤니티 라디오와 스테레오 바이닐스가 협조한 덕분에 인터뷰는 원활하게 진행됐다. 지천명을 넘긴 포토그래퍼의 관록, 새로운 세대를 바라보는 감상 그리고 힙합의 발자취를 독자들과 공유한다.

 

 

9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힙합은 메인스트림과는 거리가 먼 문화였다. 당시 분위기를 듣고 싶다.

힙합은 거짓이 없기에 아름답다. 요즘은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래퍼에게 진정성은 어떤 필수적인 덕목과도 같았다. 90년대 힙합의 핵심이라고 한다면, 역시 날 것의 본질(Raw Essence)을 유지하는 자세다. 90년대는 새로운 문화가 태동하는 시기였고, 우리는 미지의 땅을 밟고 있었다. 오늘날의 힙합 뮤지션을 절대 깔보지는 않는다. 다만 당시 신(Scene)에 있던 이들은 흙밭에서 길을 닦았다.

 

포토저널리즘을 공부하다가 힙합 신에 뛰어들었다. 어떤 계기로 래퍼들과 작업하게 되었나?

할렘 지역 신문에 기고하고 15달러를 받았다. 그러나 필름이 8달러, 인화하는 데 8달러, 신문사까지 지하철로 가져다주고 오는 데 5달러가 들었다. 손해 보는 장사였지. 하하. 그렇게 사진 작업을 이어가다가 ‘소스’라는 잡지를 알고 나서 사무실로 찾아갔더니 마침 소속된 포토그래퍼가 없다고 하더라. 그 기회로 많은 뮤지션과 어울리며 사진을 찍었고, 소스 지의 위상이 올라갈 때마다 포토그래퍼로서 내 위치도 같이 격상했다.

사실, 힙합은 내 세대 이전부터 살아 숨 쉬던 문화였다. 런 디엠씨(Run DMC), 비스티 보이즈(Beastie Boys), 엘엘 쿨 제이(LL Cool J)와 같은 레전드를 보라. 다만 내가 한창 사진을 찍을 때는 힙합이 분명 더 높게 도약하던 시기였고, 이 문화가 커질 때 나는 마침 그곳에 있었다. 그래서 그 움직임에 일조했을 뿐이다. 90~91년도의 힙합 에너지는 정말 신선했다. 미디어가 그들을 찾고 있다는 걸 알았지. 나는 그들을 더 유명하게 만들어주는 사람이었다. 내가 그 아티스트를 찾고 있다는 건 세계가 그들을 찾고 있다는 의미였다. 여기서 세계란, ‘언더그라운드(Underground)’에 더 가깝다.

작년 9월 13일, 투팍 샤커 사진집 ‘언카테고라이즈드(UNCATEGORIZED)’를 냈다. 20년 전에 세상을 떠난 투팍의 사진을 다시 펼쳐보면서 어떤 감정이 들었는지 궁금하다.

책임을 완수했다. 투팍은 세상에 큰 영향을 미친 래퍼지만, 사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친구이기도 했다. 이 사진집은 투팍이 하늘로 간 지 20주기가 되는 2016년 9월 13일에 공개되었다. 20년이 지났다는 사실이 핵심이다. 이제 그의 죽음을 기릴 수 있는 시간이 왔다고 느꼈다. 투팍은 만인이 사랑한 뮤지션이었다. 그러니 이 사진은 내 것이라기보다는 결국, 대중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피사체로서도 그는 프로였다. 내가 어떤 방식으로 사진을 찍는지 정확하게 이해했고, 그 방식을 따랐다.

 

왜 20년의 세월이 흐르도록 사진을 묵혀둔 건가?

그럴 수밖에 없었다. 투팍이 죽은 지 10년이 지났을 때는 그저 오래된 사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그는 이 문화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추앙받았다. 2007년으로 시간을 되돌려보자. 대중은 넬리, DMX, 에미넴과 같은 래퍼에게 열광했고, 아무도 90년대를 되돌아보지 않았다. 사이클이 돌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오랜 시간이 지나 지미 헨드릭스, 롤링 스톤즈, 비틀즈와 같은 밴드가 전설이 되었고, 비기, 투팍 그리고 나스가 다시 전설이 되어가는 중이다.

 

투팍과 비기가 전설이 되었듯, 당신이 촬영한 이들의 사진도 오랜 시간 팬들의 뇌리에 머무를 것이다. 당신이 이 둘을 찍을 당시 동, 서부의 관계가 상당히 악화되지 않았나? 얼마나 험악한 분위기였나?

스위스라는 국가를 알고 있나? 포토그래퍼는 마치 스위스 같은 거다. 그들은 동, 서부에 관한 내 의견을 듣기 위해 나를 그 자리에 부른 게 아니다. 나는 오직 사진을 찍기 위해 그 자리에 있었다. 나는 양쪽을 모두 좋아했고, 잘 알았다. 그리고 사실, 동부와 서부의 문제는 별일 아니었다.

 

미디어가 부추긴 것일까?

미디어 이전에 팬이 있다. 내가 비기의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면 여전히 ‘Fuck Biggie’라는 댓글이 달린다. 그들은 투팍과 비기를 만나본 적도 없지만, 한쪽의 열렬한 팬이라는 이유로 다른 편을 증오한다. 중요한 건 자신의 싸움이 아닌 걸 지금까지도 이야기한다는 사실이다. 성숙하지 않은 시절은 누구에게나 있다. 동부와 서부 래퍼들은 성숙하지 않을 때 다퉜다. 그렇다면 지금에 와서도 그 숱한 싸움에 큰 의미가 있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오’다. 투팍과 비기는 세상에 중요한 존재였고, 나는 그 둘 모두에게 경의를 표한다. 당신이 투팍을 더 좋아하든, 비기를 더 좋아하든 간에 나는 그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자 했다.

 

그때 당신은 몇 살이었나?

나는 그들보다 세 살 정도 많았다. 그 둘의 나이는 멈췄지만, 나는 이제 50살이 됐다. 이게 현실이다.

Ph. Chi Modu

당신이 촬영한 래퍼들은 피사체로서 어떤 매력을 가지고 있었나.

서울 길거리에 있는 일반인이나 래퍼나 별반 다르지 않다. 나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중심에 뭐가 있는지 카메라에 담을 뿐이다.

 

사람들의 인간성, 중심에 자리 잡은 무언가를 사진으로 끌어내는 특별한 기술이 있다면.

내가 이곳에서 당신을 편안하게 만든 상황을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쉬울 거다. 사진을 찍을 때도 최대한 그들이 나를 편안하게 느낄 수 있게 한다. 나는 내가 촬영하는 사람을 완전하게 존중한다. 당신이 누군가를 진심으로 대한다면 그들도 당신을 믿을 것이다.

 

처음 찍은 사진을 기억하는가.

뉴저지에서 대학교를 다닐 때 찍은 셀프 포트레이트 사진이다. 1986년, 아마도 스무 살 즈음 내 첫 필름 카메라로 찍었다.

 

사진 기술의 발전이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나.

필름 사진은 도전이다. 침핑(Chimping: 사진을 찍고 나서 바로 LCD 스크린으로 확인하는 행위)도 할 수 없고 실수하기 쉬운 장비라 반듯하게 배워야 한다. 계산이 필요한 수학이나 물리학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오랜 경험을 쌓으면 사진을 찍고 현상했을 때 어떤 이미지일지 예측할 수 있다. 한 번의 슈팅 이후로 피사체가 자리를 떠날 수도 있고, 촬영한 뒤 즉시 사진을 확인할 수도 없으니 신중해야 한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면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사진이 쉬워진 거지. 디지털카메라는 모든 사람을 포토그래퍼로 만들었지만, 좋은 사진을 찍는 게 어렵다는 교훈도 줬다. 하하. 20년 전쯤 유명한 사진작가가 많았지만, 지금도 그 명성을 유지하는 이는 몇 명 없다. 시간이 좋은 사진을 골라준다. 작가가 어떤 것에 집중해왔는지, 뭘 지켜내려고 했는지는 세월이 흘러야 알 수 있다.

지금의 10~20대에게는 외려 필름 카메라가 신선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 필름에 익숙한 세대가 아니라 그런지 그 불편함까지도 즐긴다고 해야 하나.

나는 필름과 오랜 시간을 함께했다.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건 결코 쉽지 않다. 디지털카메라와 구분되는 분명한 장점도 있지만,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나는 요새 필름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필름 사진은 나에게 전혀 새롭지 않다. 이건 그냥 내 인생이었으니까. 젊은 세대가 필름 사진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물론 흥미롭다. 많은 이들이 요새 인스타그램에 삽입하는 ‘Film Photography Only’와 같은 문구가 나를 웃음 짓게 한다. “70년대도 아닌데 왜 저러는 거지?” 하면서. 하하.

 

시대가 변해도 바뀌지 않은 사진의 핵심이라면?

사진의 핵심은 여전히 타이밍과 구성요소(Composition)다. 아무리 장비가 발달한다고 해도 이 두 가지 요건을 바꿀 수는 없다. 첨단 기술이 당신의 사진에서 무엇을 지켜나갈지 가르쳐주진 않는다.

 

90년대 힙합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치 모두라는 이름은 몰라도, 당신이 찍은 사진은 분명 한 장쯤 어디선가 봤을 것이다.

그렇다. 그 덕분에 나는 바르셀로나에서도, 런던에서도 지금 서울과 비슷한 수준의 좋은 대우를 받는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건 내 사진이 지금도 사랑받고 있어서다. 나는 방금 만났을 뿐인데, 그들은 이미 내 사진과 20년에 가까운 시간을 교감한 것이다.

 

비교적 근래의 힙합도 즐기는가?

에이샙 라키(A$AP Rocky), 칸예 웨스트(Kanye West), 드레이크(Drake) 등등 많이 듣는다.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이 내가 켄드릭 라마(Kendrick Lamar)를 좋아할 것 같다고 묻는데 사실, 그렇진 않다. 물론 그는 훌륭한 래퍼지만, 아직 자신의 모든 걸 펼쳐내지 않은 채 시스템 안으로 들어가버린 것 같다. 다시 그걸 기억해내기엔 이미 늦은 것 같다.

 

그래도 그는 이름을 전 세계에 알렸다.

명성이 스타로 살아남기 위한 필수조건은 아니잖나. 엠씨 해머도 엄청나게 유명한 시절이 있었다고. 아까도 말했듯 유명한 사진작가는 몇십 년 전에도 많았지만, 지금까지 그 이름이 들리는 이는 몇 없다. 오늘날까지 내 이름이 존재하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계속 내 일을 했고, 다른 영역으로 눈 돌리지 않았다. 뮤직비디오를 찍은 적도 없고 다른 일을 해본 적도 없다. 나는 내 것에 계속 집중했고, 지금까지 해오고 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내 작업이 인정받는 건 아닐까 한다. 나는 힙합 포토그래퍼가 아니지만, 굳이 나를 그렇게 불러도 상관없다. 투팍 포토그래퍼라고 불러도 개의치 않는다. 내 사진이 정말로 좋았다면, 그것 말고도 내가 찍은 사진들을 찾아볼 테니까. 리서치하기도 쉬운 시대 아닌가. 굳이 내 정체성을 내가 규정할 필요는 없다. 나를 부르고 싶은 이름으로 불러라. 나는 그저 사람들이 내가 찍은 사진을 좋아하면 그만이다.

Ph. Chi Modu

언제 셔터를 누르는가?

사각 프레임 안에 무엇을 안에 넣고 뺄지 빨리 결정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인지한 채 셔터를 눌러라.

 

힙합 뮤지션을 찍은 사진 말고도 어떤 작업을 좋아하는지 말해 달라.

여행을 다니면서 사람을 찍는 걸 좋아한다. 사진작가로서 사람과 그 사람의 인생을 보여주고 싶다. 예멘의 사람이건 래퍼건 말이다. 대상은 변해도 기술은 같다.

 

한국 의류 브랜드 스테레오 바이닐스(Stereo Vinyls)와 협업 컬렉션을 선보였다. 어떤 기준으로 사진을 골랐는지 궁금하다.

스테레오 바이닐스 크리에이티브 팀을 믿고 권한을 넘겼다. 그들이 고른 사진이 내 마음에도 들었다.

Ph. Chi Modu

세계무역센터(World Trade Center) 앞에서 찍은 비기 사진은 여러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뉴욕의 왕’이라는 콘셉트였다. 당시 뉴욕을 대표하는 것 중 하나가 배경에 보이는 세계무역센터였다. 이 사진을 찍을 때만 해도 이 사진이 지금처럼 큰 의미로 남을 줄은 몰랐다. 그로부터 1년 뒤에 비기는 죽었고, 다시 4년이 지나 트윈 타워가 무너졌다.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풍경이지.

 

당신이 한참 활동할 시기에 유명세를 누리던 래퍼들은 하나둘씩 자취를 감추고 있다. 다음 세대를 바라보면서 느끼는 소회라면.

몇 십 년 전에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이전 세대는 우리가 하는 일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언제나 새로운 세대는 더 유명해질 것이고 승리할 것이다. 새로운 세대가 이전 세대에게 표현하는 존중도 중요하지만, 이전 세대 역시 새로운 세대를 반갑게 맞아야한다.

Chi Modu 공식 웹사이트

진행 / 글 ㅣ 권혁인 최장민
사진 ㅣ 김현수, 권혁인
도움 ㅣ SCR Radio, Stereo Vinyls

JEFF STA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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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비둘기가 그려진 나이키 SB(Nike SB) 덩크 로우 – 단 150족만을 발매했다 – 는 뉴욕시의 모든 스니커헤드를 흥분케 했다. 흰색과 회색, 선명한 오렌지색이 섞인 이 스니커는 뉴욕의 상징, 비둘기를 표현함에 모자람이 없었다. 발매로부터 11년이 지난 지금, 아직도 500만 원 이상을 호가하는 굉장한 몸값을 자랑하고 있다. 스트리트 신(Scene) 내 어마어마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는 디자이너이자 디렉터, 제프 스테이플(Jeff Staple)의 역사도 이와 함께 쓰였을 터. 현재 많은 이들이 그의 자취를 좇으며 추격전을 벌이고 있지만, 오랜 시간 쌓아온 경험과 관록은 여전히 그를 이 신의 꼭짓점에 머물게 하고 있다. 도시 속 비둘기처럼 항상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는 제프 스테이플,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자.

 

 

STAPLE LOCKUP

어떻게 스테이플(Staple)이라는 브랜드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19년 전? 꽤 오래전이다. 내년이면 이 일을 한 지 20년이 되니까. 내가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는 비슷한 부류의 길거리 문화가 전무했다. 스테이플은 항상 스트리트 신과 함께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시작점은 내가 다니던 아트 스쿨부터다. 뉴욕 주립대학교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하다가 파슨스 디자인 스쿨로 학교를 옮긴 뒤 디자인을 시작했다. 어느 날 핸드 프린트 티셔츠를 만드는 과제가 주어졌는데, 스무 장가량을 제작해서 가까운 친구들에게 나눠줬다. 그러고 나서 뉴욕 주변 갤러리에 놀러 갔을 때, 직원 한 명이 내가 입고 있는 티셔츠가 마음에 든다며 자신의 가게에서 판매할 수 없냐고 물어보더라. 그래서 열두 장을 제작했다. 금세 품절됐고, 다시 스물네 장을 찍었다. 이게 소문이 나면서 여러 스토어에서 주문이 들어왔다, 그게 비즈니스의 첫 시작이었던 것 같다.

 

 

스테이플의 탄생이었나.

스테이플의 시작은 조금 더 나중의 일이다. 그 이름은 95~97년 사이에 지어졌으니까. 이전 스케이트보드 문화는 디씨 슈즈(DC Shoes), 빌라봉(Billabong), 퀵실버(Quicksilver) 같은 서부 브랜드가 주류였고, 동부는 션 존(Sean John), 로카웨어(Rocawear), 팻 팜(Pat farm) 등의 힙합 브랜드가 주름잡고 있었다. 이 두 문화는 완전히 다른 카테고리로 구분되어 있었지. 난 백인도 흑인도 아닌 아시아인이었기에 이 두 문화를 좀 더 유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내 디자인 또한 두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덕분에 더욱 새롭고 신선한 느낌을 줄 수 있었다. 당시 힙합은 무거운 금색 체인, 롤스로이스로 대변할 수 있는 ‘Bling’, 그 자체였다. 후부(Fubu)나 로카웨어 같은 브랜드가 그런 분위기를 이어갔고 커다란 로고가 담긴 티셔츠, 배기바지를 주력으로 생산했다. 난 그런 문화의 반대편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고 싶었다.

 

 

스테이플이라는 브랜드의 테마는 무엇인가.

스테이플의 의미는 가장 기본적이고, 우리의 삶과 동떨어져 있지 않은 ‘무엇’을 주제로 한다. 쉽게 말해 일상생활에서 보고 느낄 수 있는 게 우리의 주된 영감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과 좋아하는 걸 스테이플 안에 넣는 게 가장 큰 목적이다. 스테이플이라는 브랜드 이름의 유래가 꽤 재밌는데, 어느 순간 나도 모르는 사이 사람들이 내 이름 제프 뒤에 스테이플을 붙여서 부르기 시작했다. 마치 내 본명인 것처럼, 하하. 생각해보니 처음 티셔츠를 주문했던 직원이 나를 제프 스테이플이라고 불렀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 얘기했는데도 자기는 계속 그렇게 부르겠다고 말하더라. 이제는 그게 정말 내 이름처럼 되어버렸지.

 

 

긴 시간 브랜드를 이끄는 과정에서 다져진 철학이라면. 

스테이플의 기본 철학은 긍정(Positive), 사회(Social) 그리고 접촉(Contagion)이다. 내게 긍정이라는 단어는 지구를 구한다든가, 육식을 하지 않는 그런 거창한 게 아니다. 그저 당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거지. 사회는 곧 사람이다. 접촉은 한 사람에서부터 다른 사람으로 퍼져나가는 과정을 말한다. 결국, 사람들이 모여서 발전을 이루고 그것을 퍼뜨리게 하자는 이야기다. 비둘기가 그려진 스테이플은 의류 라인이며, 스테이플 디자인은 크리에이티브 에이전시다. 리드 스페이스(Reed Space)는 리테일 스토어의 기능을 한다. 이 세 파트 모드 위 철학을 따르고 있다. 의류 스테이플을 대표하는 또 다른 문구는 ‘Flock with us’인데, 이게 ‘Fuck with us’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하. 아무튼, 이 세 회사는 모두 독립되어 있으며, 심지어 은행 계좌도 전부 다르다. 나는 이 모든 그룹의 파운더로 일하고 있다.

 

 

오랜 시간 비둘기를 스테이플의 상징으로 삼아왔다.

난 계속 비둘기를 사랑해왔다. 비록 많은 이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동물이지만, 난 항상 비둘기를 존경해왔지. 비둘기는 굉장한 허슬러다. 당신이 나에게 인스타그램 다이렉트 메시지로 인터뷰 요청을 한 것도 일종의 비둘기 허슬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매체가 제프 스테이플이 한국에 온 사실을 알고 인터뷰 요청을 할지 말지 고민할 때 당신은 연락처도 모른 채 DM으로 연락하지 않았나.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이야기도 나눌 수 있는 거다. 이게 바로 허슬이다. 자신의 목소리를 크게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비둘기를 높게 산다.

 

 

서울에도 꽤 많은 비둘기가 살고 있는데, 혹시 본 적 있나?

스테이플이 비둘기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전 세계 모든 도시에 비둘기가 있어서다. 전 세계에 널린 게 비둘기 아닌가. 하하. 내가 처음 비둘기 로고를 사용했을 때, 난 비둘기가 뉴욕에만 많은 줄 알았다. 근데 도시 대부분이 비둘기와 연결고리를 갖고 있었지. 뉴욕은 분명 큰 도시다. 스테이플은 뉴욕에서 탄생했고 스트리트 패션을 모토로 하고 있다. 비둘기가 있는 도시에 사는 모든 사람은 스테이플의 잠재적인 팬이다. 스테이플이 빠르게 퍼져나갈 수 있었던 기저에 이런 사실이 자리한 거지. 어린 시절 난 폴로 랄프로렌(Polo Ralph Lauren)의 빅 팬이었다. 누구나 알겠지만, 폴로의 로고는 바로 폴로 게임을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폴로 게임은커녕 말을 보기조차 어렵다. 뭐 부자나 시골에 사는 사람이라면 쉽게 볼 수 있겠지만. 확실한 건 도시인에게 말은 친근한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나는 비둘기가 새로운 세대의 아이콘이라고 생각한다. 도시에서 자란 사람은 비둘기와 평생을 함께한다. 그리고 그들이 비둘기가 그려진 스테이플 의류를 걸칠 때 스스로 자랑스러울 수 있는 거지.

 

 

어떤 이는 스테이플의 비둘기가 한계에 다다랐다고 말하기도 한다. 

뭐, 멍청한 사람은 그런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지. 그런 이야기를 지겹도록 들었고 굳이 비난하고 싶지도 않다. 브랜드의 의미를 잘 모를 뿐이니까. 그들은 어떤 브랜드의 디자이너일 수도 있다. 직접 티셔츠나 모자 몇 개를 만들어봤을 수도 있다. 그러나 20년 동안 브랜드를 유지한다는 생각은 못 해봤겠지. 어쩌면 다음 달 집세를 어떻게 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이런 비평은 ‘왜 나이키(Nike)는 아직도 스우시(Swoosh)를 사용하는 거야, 왜 삼선을 사용하지 않는 거지?’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한 가지를 유지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다 대부분 그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그들은 그저 내 아이디어가 고갈되었다고 생각한다. 스테이플, 스테이플 디자인, 리드 스페이스가 해온 모든 것을 훑은 다음, 닥치고 꺼지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가 해온 일의 1%만 보고 말하는 건 굉장히 섣부르다. 블랙 스케일(Black Scale)을 운영하는 메가(Mega)는 모든 코멘트에 일일이 ‘Fuck You’라는 댓글을 쓰더라. 굉장한 스트레스겠지. 벤 볼러(Ben Baller)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열세 살짜리 아이랑 온라인으로 설전을 펼치는 일일 수도 있지. 차라리 그런 아이들을 스테이플 사무실에 초대해서 우리가 그동안 이룬 것을 보고 스스로 깨닫게 해주는 편이 나을 것 같다.

 

 

긴 시간 회사를 운영하면서 겪은 어려움이라면.

스테이플을 시작하고 5년이 지났을 때, 여러 비즈니스 전문가가 위기를 이야기했다. 그들의 말은 대부분 사실이다. 90%는 이 고비를 넘지 못하고 10% 정도가 이를 통과한다. 10년을 넘기는 경우는 당연히 훨씬 적겠지. 스테이플이 5년을 맞이했을 때, 정말 힘들고 떠나고 싶었다. 어느 땐가 함께 일하던 다섯 명의 팀원에게 더는 이 일을 못할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너무 어려웠고 스트레스도 굉장했다. 처음 비즈니스를 시작할 때는 즐거웠다. 하지만, 직원이 생기고 매달 월세를 내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생기는 스트레스는 엄청나다. 달마다 임대료, 각종 세금, 월급을 계산해야 하고 모든 직원은 먹고살기 위해 나만을 바라본다. 모든 책임이 나에게 있고, 매달 일정 액수를 벌어야 하며, 그 액수를 만들지 못하면 자신의 몫은 0이 된다. 이런 짓거리를 매달 해야 하는 거지. 내가 떠나고 싶다고 말했을 때, 직원들은 떠나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그들은 당신이라는 선장이 우리에게 배에 탈 것을 요청했는데, 혼자 수영해서 떠나는 일과 같다고 말했다. 바다 저 너머까지 인도해달라고 했다. 그 메시지는 꽤 강력하게 작용했다. 그 미팅에서 눈물이 나올 정도였으니까. 그때 다시 시작할 것을 결심했다. 이때만큼 어려웠던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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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연 리드 스페이스의 문을 닫았다. 그 이유는?

리드 스페이스의 문을 닫는 일은 이 년 전부터 생각했다. 그 뒤로 정확히 이 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지. 왜 이 년씩이나 걸렸냐고? 새 직업이 필요하게 될 직원과 그동안 진행한 100여 개가 넘는 브랜드 때문이다. 영업을 멈추는 건 내 자식을 없애는 것과 같은 희생과 고통이 따른다. 스스로 리드 스페이스의 혁신적인 재탄생에 관해 배워야만 했지. 그대로 끝내기보다는 혁신을 이루고 싶었고 진화를 생각했다. 지금도 그 생각은 이어지고 있으며 90% 정도 정리가 끝났다. 다음에 어떤 일을 시작할지도 생각해냈지. 문을 닫았을 때 많은 사람이 아쉬워했지만, 최근 난 꽤 들떠있다. 난 이제 뭘 시작해야 할지 알고 있으니까. 아마 첫 번째 리드 스페이스를 잊게 될 정도로 멋진 공간이 탄생할 것이다. 시대가 바뀌었다. 인터넷 덕분에 오프라인 스토어를 여는 일은 더욱 큰 위험부담을 안게 되었다. 건물주는 월세를 계속 올리길 원하고 직원은 더욱 많은 임금을 원한다. 모든 비용이 오르지만, 당신이 파는 옷의 가격은 같고 버는 돈 역시 같다. 하하. 그저 손님이 문을 열고 들어와서 물건을 사는 일을 기다리는 방식은 한물갔다. 이게 리드 스페이스가 전환점을 맞이한 이유다.

 

 

언제 문을 새로 열게 될지 말해 줄 수 있나?

정확한 일자는 미정이지만, 2017년 3월쯤으로 예상한다.

 

 

여전히 스테이플 브랜드의 디렉터이자 디자이너 역할을 맡고 있는지.

디렉터와 디자이너, 이 두 단계 사이에는 많은 일이 필요하다. 다행히 나는 매우 강력한 디자인 팀을 보유하고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디자인과 기본 콘셉트에 관여한다. 의류 하나를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많은 디테일이 필요하기도 하고. 내가 콘셉트와 마케팅, 비주얼을 관리한다면, 제품의 봉제와 같은 작은 부분은 디자인 팀이 담당한다. 내게 스테이플과 스테이플 디자인, 리드 스페이스를 운영할 수 있는 자유를 주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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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니커에도 큰 애착을 보이는 편이다. 최근 흥미로웠던 스니커가 있다면 무엇인가?

지금 착용한 스니커. 내 친구 에롤슨 휴(Errolson Hugh)가 디자인한 에어 프레스토(Acronym x Nike Air Presto)를 좋아한다. 그밖에 아디다스(adidas)가 진행 중인 프로젝트 역시 눈여겨 보고 있다. 최근 스테이플은 푸마(Puma)와 협업을 진행했고, 이전에는 휠라(Fila)와도 제품을 만들었다. 지금은 스니커헤드가 되기 좋은 시기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소비자는 오직 두 개의 브랜드만을 원했다. 나이키와 에어 조던(Air Jordan), 이 또한 같은 회사였지. 그러나 요새는 모두가 멋진 스니커를 만들고 있다. 브룩스(Brooks), 서코니(Saucony), 디아도라(Diadora) 같은 작은 회사도 멋진 신발을 내놓지 않나.

 

 

가장 사랑하는 브랜드가 나이키인가?

어린 시절 최고의 스니커 브랜드는 리복(Reebok)이었다. 2000년대는 나이키가 조금 게을렀던 것 같다. 하하. 그동안 아디다스가 엄청나게 노력하면서 나이키보다 재밌는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번 나이키의 아크로님 에어 프레스토는 그간 만든 스니커 중 최고다. 아디다스는 최근 NMD, 알파 부스트(Alpha Boost), 울트라 부스트(Ultra Boost) 이지(Yeezy) 등 굉장한 신발을 쉬지 않고 발매하고 있다. 테크놀로지도 마찬가지다. 애플(Apple)도 슬슬 잠드는 것 같지 않나. 1등을 유지하는 일은 쉽지 않다. 최근 삼성과 구글(google)이 하는 일을 봐라. 애플과 나이키도 1등을 유지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하고 있다. 재밌는 사실은 두 분야의 1위 끼리 서로 가까운 비즈니스 파트너라는 점이다. 동시에 이 둘만이 함께한다는 것 또한 재미없는 일이기도 하지. 요즘 아디다스가 ‘그래 너희끼리 잘해봐. 난 아티스트와 놀 테니까’라고 말하는 그림이랄까.

 

 

지금까지 스테이플은 정말 많은 협업을 해왔다. 협업을 진행함에 있어서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부분은 뭘까.

지금은 모두가 협업을 진행하고 있지 않나? 하입비스트(Hypebeast)만 봐도 매일 같이 브랜드 협업 기사를 써낸다. 이미 많은 브랜드가 서로 협업하는 게 비즈니스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그러니까 각자 쉬지 않고 전화를 돌려대면서 협업을 요청하고 있겠지. 난 협업을 진행할 때 그 브랜드와 직접 만나서 스케치를 해보거나 저녁을 먹는다. 구식이지만, 이런 과정이 ‘진짜 협업’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여러 브랜드가 하는 협업은 서로를 정확히 파악하지도 않은 채 그저 이 메일과 몇 통의 문자, 파일을 주고받으며 샘플을 제작하고 보여주는 정도로 협업을 진행한다. 아마 길에서 만나도 서로 누군지 몰라서 인사조차 못 하고 지나치겠지. 스테이플은 역사에 비해 비교적 적은 협업을 진행했다. 한 해 평균 두 건에서 네 건 사이 정도였으니까. 다른 브랜드는 한 달에 한 번은 협업하는 것 같다. 가끔 내 비즈니스 파트너와 세일즈 담당자가 왜 협업하지 않느냐고 물어볼 때가 있다. 내 대답은 간단하다. ‘협업하고 싶은 브랜드가 없으니까.’ ‘혹은 내가 협업하고 싶은 브랜드 디렉터를 만난 적이 없어서.’ 이렇게 두 가지다. 어떤 회사의 경우는 시즌 카탈로그의 준비서류에 ‘협업?’이라고 적힌 네모 박스를 마련해둔다. 누구랑 하던지 상관없으니 무조건 협업을 하자는 의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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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번 푸마와의 협업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1년 반 정도의 시간이 걸린 프로젝트였다. 3년 전 푸마와 일본판 클라이드로 협업을 진행한 적이 있다. 200달러 정도의 가격에 한정판으로 발매했는데, 나름대로 흡족했던 프로젝트다. 시간이 지나 이전보다 가격을 줄이고 수량을 늘려서 많은 사람이 쉽게 구매할 수 있는 스니커를 만들고 싶었다. 다시 시작함과 동시에 이번에는 일본이 아닌 다른 국가에서 제작하길 원했지. 비둘기의 대표 컬러인 흰색, 회색, 검은색을 스웨이드 스니커에 배분했다. 그리고 각 스니커의 발매 국가를 전부 다르게 설정함으로써 네 가지로 이루어진 스니커 세트를 모으는 걸 어렵게 만들었다. 하하.

 

 

어느 국가에 배분했나.

흰색은 북, 남아메리카, 회색은 유럽과 중동, 검정은 아시아와 호주에서 발매했다. 오래전 나이키는 도쿄, 런던, LA, 뉴욕 등 지역별로 다른 스니커를 만들었다. 뉴욕에 살면서 도쿄발 신발을 갖는 건 어려운 일이었지. 직접 스니커 사냥꾼이 되어야만 다른 지역의 스니커를 소유할 수 있었다. 현재 나이키 랩(Nike Lab)에서 발매하는 제품은 소량이지만, 전 세계 누구나 가질 수 있다. 푸마와 함께 예전의 스니커 수집에 대한 향수를 끄집어내고 싶었던 거다. 우리는 한 가지 반칙을 했는데, 스테이플의 웹사이트에서 전 세계 정식 발매일보다 일주일 빠르게 네 가지 신발을 모두 판매했다.

 

 

그렇다면 스테이플이 지향하는 방식의 협업은 무엇인가.

우리는 자연스럽게 진행하는 협업을 원한다. 내년은 스테이플의 20주년이기에 많은 협업을 진행 중이지만, 여전히 내 방식의 협업은 쉽지 않다. 해외에 있는 브랜드의 경우에는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직접 대화를 나눠야 한다. 내게 협업은 데이트와 같다. 대화를 나누면서 내가 이 사람과 잘 맞는지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협업에 있어 각각의 브랜드는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서로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협업을 진행할 수 없겠지. 당장 협업을 하지 않아도 알고 지내는 일 또한 좋은 것 아닌가? 서로 알아가는 시간을 가지고 나서 그 브랜드가 마음에 들면 우리가 함께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결정할 수 있다. 이런 식의 진행은 한 달부터 일 년이 걸릴 수도 있다. 스테이플은 단순히 돈으로 움직이는 협업을 지향하지 않는다. 특히 의류 라인 협업은 우리 컬렉션의 1% 정도만을 차지할 뿐이다. 나는 협업을 위해 적당한 시간을 보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헌드레즈(The Hundreds)와는 무려 5년간 함께 시간을 보냈지만, 아직도 협업하지 않았다. 하하. 불과 지난달 바비 헌드레드(Bobby Hundred)를 만났는데도 결정하지 못 했다. 결코 서두를 필요가 없다. 어느 순간 적당한 때가 찾아오고 물 흐르듯 일을 진행하면 된다. 나는 대표로서 다른 회사의 대표와 이야기를 나눈다. 각자 디자인 팀이 있기에 세부적인 사항은 그들이 또 이야기하겠지. 그러나 일 속에는 반드시 자연스럽고 긴 과정을 포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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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온라인 강의 프로그램인 스킬쉐어(Skillshare)에서 강의를 진행 중이다. 그동안 스킬쉐어로 진행한 프로그램을 소개해달라.

스킬쉐어는 매우 좋은 프로그램이다. 나는 스킬쉐어 이전부터 대학교에서 강의했다. NYU, 콜롬비아 등 다양한 학교 강단에 섰고, 30명 정도 되는 학생이 내 수업을 들었다. 그리고 이 30명은 대부분 부유한 집에서 자랐지. 내 강의를 듣는 데 큰 걸림돌이 되는 건 아니지만, 내가 선호하는 타입의 학생도 아니었다. 새롭고 젊은 친구와 교류하고 지식을 나누는 게 내가 강단에 서는 목적이다. 그런 학생들이라면 돈을 안 받는 게 차라리 나을 수도 있지. 스킬쉐어는 나만의 교실을 만들어준다. 학생은 전 세계 사람이다. 최다 수강생은 25,000명이었다. 웹사이트를 통해 대화하고 과제를 내주는 것 또한 가능하다. 학생이 직접 당신에게 강의료를 지급하니 더 많은 돈을 벌 수도 있다.

 

 

신생 브랜드 디렉터들을 한 데 모아서 진행한 수업이 있다고 들었다.

난 지금까지 6개의 수업을 진행했다. 내 첫 수업은 콘테스트 방식을 취했는데, 8,000명이 넘은 학생이 자신의 브랜드를 나에게 보내줬다. LA부터 아프리카까지 정말 다양했지. 이 많은 브랜드끼리 서로 교류하고 의견을 주고받았다. 난 이 중 탑 50을 선정했고, 다시 10개로 줄였다. 그 10개 브랜드 디렉터를 뉴욕에 초대한 뒤 1:1 조언을 해줬지. 한국 브랜드 이세(IISE) 또한 이 중 하나였다. 난 그들에게 과제를 주고 1등을 선별해서 세계에서 가장 큰 스트리트 패션쇼 ‘아젠다 쇼(Agenda Show)’ 부스를 선물했다. 돈만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 쇼지. 남아프리카에서 온 브랜드가 우승해서 부스를 받았다. 이런 일은 스킬쉐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스킬쉐어를 통해 어떤 성과를 거두고 싶은가.

목표는 이미 달성했다. 그들이 나를 통해 무언가를 배우고 나도 그들에게 배운다. 전 세계 창의력 있는 인재를 연결하는 일도 스킬쉐어의 목적 중 하나다. 이런 모든 일은 나 혼자서 해낼 수 없는 일이지. 특히 나보다 훨씬 어린 학생의 브랜드를 보는 건 매우 흥미롭다. 인터넷과 함께 자란 이들의 브랜드는 내가 생각하는 것과 매우 다르다. 그들의 생각을 내 방식으로 어떻게 풀 수 있을까 항상 고민한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내가 터득한 회사 경영이나 비즈니스 경험에 관해 이야기하고 정보를 나누는 거다.

 

 

혹시 스킬쉐어의 성격을 띤 다른 플랫폼이 있는지.

이미 스킬쉐어를 베껴낸 여러 플랫폼이 생겨나고 있다. 나 또한 요청받은 적도 있다. 하지만 난 스킬쉐어에서만 강의를 진행한다. 너무나 많은 회사가 생겼기에 자신과 맞는 회사를 선택하는 게 제일 좋겠지.

 

 

가까운 시일에 다른 수업을 진행할 계획이 있는가?

현재 6개의 수업이 있다. 새로운 분야의 강의를 만들기 위해서는 나 역시 공부해야겠지. 또한, 많은 사람을 모이게 하려면 흥미로운 소재가 필요하다. 아마 좀 더 명확한 강의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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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히 유명한 후지와라 히로시(Hiroshi Fujiwara) 또한 크리에이티브 컨설턴트로 활약 중이다. 이 직업은 많은 이들이 동경하는 일이다. 그러나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나와 후지와라는 하는 일이 조금 다르다. 예컨대 크리에이티브 컨설팅은 통역사이자 항해사다. 큰 회사는 젊은 사람, 자주 대면하지 못한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한다. 난 큰 회사가 뭘 원하는지 파악하고 전달해주는 역할을 하지. 당신이 입고 있는 스톤 아일랜드는 정말 크고 오래된 기업이다. 그러다 그들은 스켑타(Skepta)를 필요로 하지. 이런 경우 스켑타는 스톤 아일랜드의 통역사 역할을 하는 거다. 스켑타가 스톤 아일랜드에서 광고료를 받지 않더라도 팬에게 ‘이 X되는 브랜드, 스톤아일랜드를 체크해봐!’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즉시 스톤 아일랜드를 파고든다. 젊은 세대를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지도를 펴고 항로를 결정해야 한다. 후지와라 히로시나 나에게 마법 물약 따위는 없다. ‘쿨’한 프로덕트를 내놓는 필승의 방식을 내놓을 수 없다는 얘기다. 모든 고객과 상황에 맞는 각각의 요구가 있다. 그걸 정확히 짚어내는 일을 크리에이티브 큐레이션(Creative Curation)이라고 부르겠지. 히로시는 내 멘토이자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명이다. 그는 사람의 취향을 만드는 테이스트 메이커에 가깝다. 일종의 음식평론가라고 설명할 수 있다. 음식평론가는 음식점에서 음식을 맛보고 그게 어떤지 평가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그 의견에 따른다. 난 브랜드와 무언가를 만들어내야 하는 입장이다. 그가 프라그먼트 디자인(Fragment Design) 로고를 상품에 넣는 일은 이 제품이 좋다는 평가이자 증명이다.

 

 

일하는 방식의 차이에 관해서 조금 더 자세히 들려줄 수 있나?

난 항상 뭔가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아직 그의 레벨에는 닿지 못했다. 아마 나도 언젠가는 비둘기 로고만 넣어도 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하. 그는 자신이 테니스 클래식 스니커를 새롭게 디자인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저 “나는 테니스 클래식이 마음에 들어, 이건 정말 훌륭해.”라고 의견을 내비치는 거다. 내가 푸마와 협업할 때 흰색 푸마 스웨이드에 비둘기 로고만을 넣을 수는 없다. 콘셉트와 나아갈 방법을 구상하는 일이 필수적으로 뒷받침된다. 이 두 프로세스가 우리가 일하는 방식이다. 히로시는 프라그먼트 디자인의 협업, 프로덕트를 언급할 때 직접 만들지 않았다고 말하는 걸 즐긴다. 실제로 프라그먼트 디자인 오피스엔 창고가 없다. 모든 것은 나이키나 리바이스(Levi‘s), 버튼(burton)이 만들고, 재고와 비즈니스까지 담당한다. 프라그먼트 디자인은 아이디어를 던져 줄 뿐이다. 프라그먼트 디자인에 얼마나 많은 직원이 있을 것 같나? 히로시 외 두 명이 회사를 이끌어가고 있다. 내 아래엔 48명의 직원이 움직이고 있다. 난 단추와 지퍼를 제작하는 직원, 배송할 직원도 필요하지만, 히로시는 이런 이들이 필요하지 않다. 나도 그처럼 일할 수 있길 원한다. 그러나 난 아직 그 정도 인물이 되지 못 했다. 히로시는 나보다 훨씬 영리한 사람이다.

 

 

패션필드에서 많은 일을 해왔다. 당신의 다음 목표는 무엇인가?

패션, 디자인, 판매, 교육까지 이미 너무 많은 일을 벌여 놨다. 하하. 지금 하는 일을 더 멋지게 잘하고 싶을 뿐이다. 더는 새로운 일을 벌이고 싶진 않다.

 

진행 / 글 ㅣ 오욱석, 이신재

사진 ㅣ 백윤범

Staple Design 공식 웹사이트
Jeff Staple 인스타그램 계정

선우정아

INTERVIEW: 선우정아

선우정아는 다양한 얼굴을 가진 뮤지션이다. 1집 [Masstige]에서는 독특한 목소리로 주목받았고, 2집 [It’s Okay, Dear]에 와서는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아티스트로 거듭났다. “봄처녀”를 부를 때 그녀는 마치 관록 있는 아이유처럼 보였다. 휠라 오리지날레(FILA Originale)와 삼청동 146이 진행하는 ‘그라운드 프로젝트(Ground Project)’의 첫 번째 뮤지션, 다양한 얼굴로 내면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선우정아와 오랜 대화를 나눴다.

 

간단한 소개 부탁한다.

한국에서 음악 하는 여자다. ‘한국’과 ‘여자’라는 단어가 내 음악과 정체성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인터뷰는 얼마 만인가.

정말 오랜만이다. 반년이 넘었다.

 

프로듀서, 싱어송라이터를 비롯해 ‘선우정아’라는 음악가를 수식하는 단어가 많다. 가장 맘에 드는 말이 있다면 무엇인가.

내가 선택할 수 있다면 ‘음악인’이다. 이게 좀 각 잡는 어감으로 들릴 땐 ‘싱어송라이터’라고 한다.

 

‘네이버 온스테이지’는 당신을 보헤미안이라 칭했다.

내가 사람들에게 알려진 건 2집 [It’s Okay, Dear]를 냈을 때부터인데, 보헤미안의 이미지가 있는지 그때 처음 알았다.

 

왜 하필 보헤미안인 것 같나.

그 당시 내 머리를 ‘해그리드 스타일’이라고 부르더라. 헤어스타일 덕분에 그런 별명이 생긴 것 같다. 사실 나는 보헤미안이 뭔지 잘 모른다. 내가 멋있게 무대를 꾸미기보다는 자유로운 감정으로 노래하는 사람이라서 보헤미안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 같기도 하다.

 

음악을 시작한 계기는?

너무 축복받은 이야기인데, 어릴 때부터 음악 하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다. 피아노를 여섯 살 때 치기 시작했다. 자라면서 대중가요로 넘어갔는데, 어릴 때 피아노를 친 게 도움이 되더라. 20살이 지나서는 모던록 밴드를 꾸려서 활동했다. 그러던 와중에 1집을 발매한 회사와 연락이 닿았고, 회사 측에서 밴드는 안 된다고 하는 바람에 결국, 해체했다. 그렇게 나온 앨범이 [Masstige]다. 자연스럽게 망했다. 이후 대학에 복학했고, 재즈 신(Scene)에서 활동했다.

 

밴드를 하던 당시 지금과는 보컬이 사뭇 달랐을 것 같다.

왜 팝 보컬 따라 하는 여자애들 있지 않나. 그게 나였다. 20대 초반부터 강한 사운드에 꽂히긴 했지만, 그래도 내 보컬은 늘 팝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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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선우정아의 보컬에 ‘재즈’라는 수식어가 붙은 건 아무래도 대학교의 영향이 큰 건가?

그렇다. 학교에서 재즈라는 걸 처음 배웠고, 재즈 보컬을 익혔다. 학교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오래 걸렸을 것이다. 학교에서 공부하며 단단하게 다졌다.

 

상당히 큰 전환점인 것 같다.

맞다. 편곡도 학교에서 배웠다. 1집은 편곡을 맡겼는데, 그때는 작곡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편곡을 모르면 내가 원하는 바를 전달할 수가 없다는 걸 그때 배웠다. 그래서 복학 후 편곡을 공부했다. 프로듀서로 활동한 것 역시 학교에서 배운 영향이 크다.

 

본인이 졸업한 대학교에 출강한 적도 있다. 감회가 남다를 법도 한데.

나도 아직 어리지만, 대중예술계에 있다 보면 1년, 2년이 굉장히 길다. 1년 전에는 학생이던 친구가 오늘은 동등한 뮤지션의 입장으로 만날 수도 있다. 그래서 민망했다. 그 민망함만큼이나 즐거운 게 있다. 개인적인 활동만 고집하면 고인 물이 될 수 있다. 그러다가 후배들이 잔뜩 모인 그 자리에는 굉장히 상쾌해지게 하는 에너지가 있다. 나도 그들에게 많은 걸 배운다.

 

당신은 팝 아티스트가 되고 싶다고 밝힌 적 있다. 지금도 변함이 없나.

그렇다. 팝이라는 게 광범위하지 않나. 나는 트렌드를 배제하지 않는 음악이 팝이라고 생각한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독창적인 것도 하고 싶지만, 대중성이 아예 배제된 곡보다는 조금 더 공감 가는 범위 안에서 내 정체성을 간직한 음악을 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팝 뮤지션이 되고 싶은 거고.

선우정아 – 아파 Live

 

[Masstige]의 “아파”는 슬픈 가사에 비해 멜로디는 굉장히 밝다. 선우정아의 음악엔 이런 형태가 많다.

그 곡의 편곡은 당시 활동했던 밴드가 맡았다. 물론 내가 그런 특유의 느낌을 좋아하기도 한다. 메이저, 혹은 마이너로 치우친 곡보다는 ‘웃픈 느낌’이라고 할까? 그런 게 더 슬프게 느껴진다. 내가 그 감정을 잘 표현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웃픈’ 곡이 많을지도.

 

[It’s Okay, Dear]로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최우수 팝’과 ‘올해의 음악인’을 수상하지 않았나. 한국에서 팝과 가요의 양상이 다른데, 그 간격이 무엇인 것 같은가?

말로 표현하긴 어렵다. 완전 메인스트림에서 작업을 하게 되면, 음악적으로 자연스러운 것보다는 다양한 취향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 보니 음악적 틀이 잡혀있다. 무형적이지만, 가요와 팝의 차이가 그런 것 같다. 예를 들자면, 메인스트림에서는 4분이 넘어가면 긴장한다. 4분을 넘어가면 실제로 대중이 지루해한다. 4분이 넘어가지 않게 자르면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만지는 게 메인스트림 프로듀서의 능력인 것 같다.

 

YG와 작업은 어떻게 성사된 것인가?

인맥, 그리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과거에 내 팀과 함께 홍대 클럽에서 공연할 때, 당시 유행하던 가요를 내 스타일로 편곡해서 불렀다. 언젠가 손담비의 “토요일 밤에”를 재즈 풍으로 편곡한 적이 있는데, 그 동영상이 싸이월드에서 꽤 퍼졌다. 내 친한 친구의 오빠가 당시 YG 메인 프로듀서였는데, “토요일 밤에”를 양현석에게 보여줬고, 그렇게 “I Don’t Care” 리믹스에 참여했다.

 

비요크(Björk)를 굉장히 좋아하는 것 같더라. 그녀는 오래전부터 전자음악을 차용해왔는데, 진보(Jinbo)와 대니 애런즈(Danny Arens)와 함께 한 “여름캠프 마지막 밤”에서 약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여름캠프 마지막 밤”은 내가 작곡한 건 아니다. 그렇지만, 비요크를 정말 좋아한다. 말했듯이, 비요크는 예전부터 전자음악과 클래식 사운드를 즐겨 쓰지 않았나. 거기서 영감을 되게 많이 받았다. 이제야 비로소 비요크와 비슷한 음악을 조금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몸에 익으려면 시간이 걸리지만, “불꽃놀이” 같은 곡에서 비슷한 시도를 했고, [It’s Okay, Dear]에서도 조금씩 건드린 부분이다. 완전히 전자음악에 집중한 건 아니겠지만, 다음 앨범은 그 비중이 커지지 않을까?

 

2015년은 디스코가 유행한 해였는데, “봄처녀”에서 이를 반영한 사운드가 느껴졌다. 트렌드에 민감한가?

그렇다. 고전도 좋고 재즈도 좋지만, 나는 최근의 팝, 좋은 팝 음악을 들으며 생기를 얻는다. 유행을 빨리 읽어내는 편은 아니다. “봄처녀” 같은 경우는 굉장히 오래전에 쓴 곡인데, 편곡하고 사운드를 입히던 시기에 그 당시 트렌드를 많이 따라갔다. 퍼렐 윌리엄스(Pharrell Williams)가 프로듀싱한 음악에서 영감을 많이 받았다.

 

‘좋은 음악’의 기준은 무엇인가?

내 기준은 양심적인 음악이다. 그런데 일하는 횟수가 늘다 보니, 안 좋은 곡이 꼭 양심을 버린 음악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외부요인에 치우친 음악은 잘 듣지 않는다. 그런 건 음악에서도 티가 난다. 물론, 저스틴 비버(Justin Bieber)처럼 이미지가 썩 좋지 않더라도, 진정성이 느껴진다면 즐겨 듣는다. 반대로 내가 좋아하는 뮤지션이어도 자기 색에 너무 갇혔거나, 날로 먹은 느낌이 들면 실망스럽다.

선우정아 – 뱁새 M/V

 

[It’s Okay, Dear]를 듣다 보면 낮은 자존감 같은 게 느껴진다. 타이틀곡 “뱁새”부터가 황새 따라가다가 다치는 이야기 아닌가.

맞다. 루저 소울이 담긴 앨범이다. 내 카카오톡 아이디로도 사용하는 문구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상대적인 소외감이 드러나기 쉽지 않나. 자본주의라는 게 많이 가진, 많이 가질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이 빛나는 곳이기도 하다. 대부분은 이 지점에서 많은 유혹에 흔들린다. 나도 정말 보통 사람이고, 속물근성이 있다. 그게 근간이 되는 것 같다. 또, 한창 YG와 재즈 신이라는 극과 극을 오가며 작업한 앨범이다. 연주는 엄청나게 잘하는데, 2시간 공연 후 몇 만 원 받는, 월세 내기도 힘든 재즈 뮤지션과 작업하고, YG 작업실에 넘어가서 또 작업했다. 냄새부터가 다르지 않나. YG도 음악으로 놓고 보면 너무 순수하고, 배울 점도 많다. 그렇기에 두 작업 모두 즐거웠다. 근데 당연히 비교될 수밖에 없다. 잡생각도 들고. 나는 패션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아닌데, 굳이 나한테 필요 없는 브랜드를 사기도 했다. 속으로 ‘아주 지랄한다’고 생각했지. 백날 사봤자 나는 뱁샌데. 근데 그 틈을 어둡고, 구질구질하게 표현하고 싶진 않았다. “야, 나 결국 그거 샀다? 내가 그걸 바른다고 전지현이 되는 건 아니지. 근데 샀다고”. 술자리에서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한 느낌의 앨범이 됐으면 했다.

 

[It’s Okay, Dear]에서 ‘Dear’가 본인에게 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특별한 뜻은 없다. 앨범 제목을 지을 때, 고민이 많았다. 에너지는 연결되었는데, 장르나 사운드, 이야기가 너무 달랐다. 전체적으로 내 자신을 털어내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앨범 커버 사진을 찍어준 친구 구송이가 내 얘길 듣다가 “It’s Okay, Dear”라고 말하더라. 나한테 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고, 상대방에게 하는 말일 수도 있다. ‘Dear’를 내 식대로 해석하자면 ‘인마’ 정도가 아닐까.

 

“Purple Daddy”는 실제 아버지 이야기 같은데?

맞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한 달 뒤 꿈을 꿨는데, 당시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화를 냈을 법한 잘못을 했다. 그 죄책감에서 비롯된 곡이 “Purple Daddy”다. 아버지가 보고 싶을 때는 나오지 않다가, 잘못을 저지른 뒤 꿈에서 굳은 얼굴로 너무 생생하게 나왔으니까. 또, 장례를 치를 때 가족들은 시신을 확인하지 않나. 내가 알던 얼굴이 아니어서 큰 충격을 받았다. 꿈에서 본 아버지 모습과 장례 당시의 모습이 합쳐져 “Purple Daddy”가 나왔다.

 

“알 수 없는 작곡가”는 오해, 편견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이는 악플에 관한 이야기인가?

지금도 물론 그렇지만, 당시에도 악플이 달릴 만큼 인지도가 없었다. 하하. “알 수 없는 작곡가”는 관계자들에게 들은 이야기다. 남에게 들은 이야기니 비슷하긴 하다. 나는 음악을 어릴 때부터 시작한 만큼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만났다. 양아치도 만나고, 나쁜 사람들도 있었고. 그때 들었던 얘기를 종합한 곡이다. 지금은 현실을 조금이나마 알지만, 이 노래는 젊은 치기에 반발하며 쓴 곡이기도 하고 어떤 다짐이기도 하다. 상업적인 뮤지션에 가까워지더라도, 내가 원하는 방향에 더 가까이 있어야겠다는 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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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준비하면서 느낀 점은 선우정아의 곡은 특정한 이미지가 보인다는 거다.

2집을 준비하면서 처음으로 프로듀싱에 제대로 참여했다. 되게 욕심이 많았다. 그중 하나가 영상이었다. 음악을 들으면 영상이 보이는 그런 음악. “비온다”는 물론, 빗소리를 넣은 게 분위기를 잡고 들어갔다. 하하. 내가 느낀 걸 최대한 표현한다는 생각으로 주제에 관련된 영화를 찾아보거나, 그림을 그려보거나, 소설을 쓰는 등 음악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같은 이야기를 표현해본다.

 

자신의 감정을 곡에 밀어 넣는 과정이 궁금하다. 조금 더 말해 달라.

“비온다”로 얘기해보면, 일단 비가 오면 괜히 울적하지 않나. 멍 때린 채 빗소리와 공기를 즐기게 된다. 그러다 어릴 때 추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비 오면 나가서 맞으려고 하고 맛보고 그랬다. 비를 맞으며 놀던 게 생각이 나면서 문득 그 시절이 그리워지더라. 사람이 살면서 아주 어렸을 때를 그리워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딱 아련하게 떠오르는 정도인데, 그때 처음으로 10대 이전의 시절을 그리워했다. 한편으로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라 그런지, 온 가족이 화목하던 때를 그리워한 것일 수도 있고, 외부적인 괴로움도 없던 순수한 시절이 그리웠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런 감정적인 이미지를 그려내는 거다.

 

“그러려니”의 소개 글을 본인이 썼다. 보통 회사에 맡기는데, 직접 쓴 이유가 궁금하다.

회사에서 쓰라고 해서 썼다. 하하. 글을 쓰는 담당자가 “그러려니”가 워낙 자전적인 곡이기에, 직접 써보는 게 어떻냐고 제안했다. 나름 에너지를 낮추고 쓴 건데 내 얘기라 그런지 차분하게 쓰지는 못하겠더라. 기분 좋은 건 보통, 인스타그램 같은 걸 찾아보면 노래 가사와 커버를 올리지 않나. 근데 “그러려니”는 소개 글을 함께 올린 걸 봤다.

 

“Far Away”는 “그러려니”의 영어 버전이지 않나. 처음에는 다른 곡인 줄 알았다.

편곡이 다르다. 미세하지만, 사운드 결 자체가 다르다. 똑같이 피아노를 쓰지만, 톤 역시 다르다. “Far Away”는 햇볕을 쬐는 따사로운 느낌이었으면 했다. 반대로 “그러려니”는 심연의 바다에 빠져드는 기분으로 만들었다.

 

평범한 일상에서 영감을 많이 받나?

그렇다. 소리라는 게 되게 재밌다. 나보다 더 빠진 음악가들은 소리를 따서 곡을 만들거나, 수음 전문 기사가 되겠지. 난 그 정도는 아니지만, 어쨌든 너무 재밌다. 생명이 없는 사물도 소리를 가지고 있다는 거 역시.

 

당신의 앨범을 들어보면, 1집과 2집에서 하는 이야기가 상당히 다르다.

1집 수록곡 중 일부는 다른 사람이 가사를 썼다. 하하. 처음 가사를 받았을 때 깜짝 놀랐다. ‘이런 걸 나보고 부르라고?’라는 느낌이었다. 그것도 그렇고, 프로듀싱 역시 내가 온전히 한 게 아니었다. 2집은 그걸 나름 갖춘 상태였기에, 앨범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자세가 전부 다를 수밖에.

 

최근 인디 신에서 여성 솔로 음악가들이 주목을 받고 있다. 이를테면 김사월 같은 뮤지션이 있다. 근데 방송 안에서는 영향력 있는 여성 솔로를 찾기 어렵다. 이 지점에 관해 생각해본 적 있나.

당연하다. 재작년부터 머릿속에 있는 주제다. 예전에는 클럽과 재즈 신에서만 활동했지만, 지금 회사를 만나며 조금은 내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어쨌든 나는 팝을 지향하는 사람이기에 인기를 얻고 싶은 욕심도 있다. 그래서 왜 여성 솔로가 잘 안 되는지 고민했다. 나뿐 아니라 주변 동료들도 그랬으니 말이다. 모르겠다. 아직 색깔 있는 여자 뮤지션이 상품성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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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그 안에 속한 뮤지션으로서 어떤 행동을 취하고 있는가.

나도 둥글게 살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할 거고 세상이 변하기를 기다리기도 해야겠지. 남자들도 비슷하지 않나. 혁오나 자이언티(Zion. T) 같은 뮤지션이 몇 년 전만 해도 아이콘이 될 수 없던 시절이 있었다. 근데 유일무이한 색채를 지닌 사람들이 이제는 대중스타 자리에 앉아있다. 여자 뮤지션들의 시기도 언젠가 오겠지. 전통적으로 남아선호사상이 지배하던 나라이기도 하니까 쉽게 풀리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가장 쉬운 건 내가 예뻐지는 건데 그건 좀 어려울 것 같다. 하하.

 

박정현이나 이소라 같은 뮤지션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여성 뮤지션이다.

박정현, 이은미, 이소라 선배님들에게 고마움을 많이 느낀다. 마지막 디바가 거미, 박정현 선배님인 것 같다.

 

컴필레이션 앨범과 피처링 작업도 많았다. 수락하는 기준이 있나?

우선은 시기다. 물리적인 거니까 가장 우선시한다. 또, 음악적인 에너지가 맞는지 고려한다. 이 둘 사이에 인간관계가 있다. 하하. 아무리 바빠도 인간관계에서 어떤 고리가 있다면 생각할 수밖에 없다.

 

유난히 힙합 뮤지션의 러브콜이 잦던데.

그러게 말이다. 왜 그럴까? 우선 브랜뉴뮤직(Brand New Music)에서 산이(San E)와 피타입(P Type)과 함께한 곡 덕분인 것 같다. 저스디스(Justhis)와의 작업도 피타입 소개로 하게 된 거다. 재즈와 힙합 모두 같은 뿌리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일까. 잘은 모르지만, 힙합 역시 옛날 흑인 음악에서 소스를 많이 차용하는 것 같은데, 멜로디 파트도 재지하고 블루지한 걸 선호하는 것 같다.

 

그래서 카프카(Kafka)와의 작업이 재밌다. 기타로 달리는 음악이다 보니, 보컬도 다른 색이 느껴졌다.

노래마다 변신하는 건 너무 즐겁다. 여자가 화장하듯이 말이다. 그래도 내 색은 지키려고 한다. 선우정아가 느껴지게 하면서 최대한 아무거나 하는 거. 또, 내가 쓴 곡이 아니기에 프로듀서의 의도도 반영해야 한다.

 

록 보컬로서 선우정아는 어떤 것 같나.

완벽하다. 하하. 농담이고 어릴 적부터 마릴린 맨슨(Marilyn Mason), 슬립낫(Slipknot) 같은 걸 즐겨들었다. 지금은 듣기 힘들지만, 예전에는 등교하면서 즐겨 들었다. 당시에는 그로울링(Growling, 포효주법: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창법)이 너무 하고 싶었다. 근데 나는 워낙 악기가 얇고 맑은 톤이라 절대 안 되더라. 그게 너무 싫어서 지금은 끊었지만, 담배도 피우고 소리도 지르고 했다. 그래도 목소리는 두꺼워지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록 감성을 굉장히 많이 가지고 있다. 재즈 공연 때도 스캣(Scat)을 할 때, 에너지를 거침없이 내지른다. 어떤 분들은 “너는 재즈가 아니라 록을 하러 온 것 같다”고 싫어하는 경우도 있는데 나는 그게 좋다.

 

‘기타에는 영혼이 담겨있다’고 하지 않나. 그래서인지 몰라도 염신혜와 함께한 [Riano Poom]에서는 감정이 절제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악기 영향이 있다. 또, 함께 하는 거라 맞춰갈 수밖에 없었다. 염신혜 역시 화려한 건반이 아니라 필요한 만큼만 치는 연주자라서 나도 단아한 느낌을 내고 싶었다. 재즈긴 재즌데, 한복과 다과가 잘 어울리는 그런 음악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서 감정을 뺄 거면 확 빼보자는 의도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단둘이 진행하는 작업이라 호흡이 중요했다. 한 방에서 녹음을 받는 방식이라 한쪽이 잘했는데, 다른 쪽이 못하면 못쓰게 되기도 하고 굉장히 어려웠다. 근데 이 긴장감이 당시에는 부담스러웠는데 만들고 나니 만족스러웠다.

마정채 – Feel Like Makin’ Love

 

휠라 오리지날레(Fila originale)와 삼청로 146의 협업인 그라운드 프로젝트(Ground Project) 타이틀로 공연하는 ‘마정채’에 대한 간단한 소개 부탁한다. 

마정채는 마더 바이브(Mothervibes), 선우정아, 강이채를 줄인 말이다. ‘태티서’의 아줌마 버전이다. 중국진출을 노리고 만들었다. 하하. 줄여봤는데 묘하게 사람 이름처럼 되었다.

 

 

마정채 멤버들과의 호흡은 좋은가?

나는 공연할 때, 내가 유리 벽 안에 전시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왜, 연주할 때 관객들과 눈을 마주치며 소통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나. 그 에너지가 너무 잘 전해지는 사람들 말이다. 근데 나는 그쪽이 아니다. 나는 유리 벽 안에서 최대한 다 해줄 테니 그저 보라는 식으로 공연한다. 밴드와 눈이 마주쳐도 내가 먼저 고개를 돌릴 정도니까. 근데 마정채와 함께 할 때는 실시간으로 에너지 교감이 가능하다. 편하게 시선을 맞출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동료라고 생각한다. 그들 덕분에 이런 즐거움을 처음 느꼈다. 언젠가 관객들과 소통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들 정도로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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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영화 “오늘은 내가 요리사”에서 주연을 맡았다.

연기에 대한 로망이 있다. 편집으로 부족한 연기를 커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순간적으로 집중하는 건 잘한다고 믿었으니까. 근데 영화는 내가 건드릴 영역이 아니었다. 물론, 감독님이 나를 생각하며 만든 캐릭터라기에 받은 배역이긴 하지만, 너무 어려웠다. 매 순간이 미안하고, 어렵고. 하하. 큰 추억과 경험을 남겼다. 다시는 눈독들이지 말자는 교훈도 얻었다.

 

최근 인상 깊게 본 영화는 무엇인가.

“더 랍스터(The Lobster)”. 콜린 패럴(Colin Farrell)이 출연하고 그리스 출신 감독이 찍은 영화다. 나는 예술 영화는 잘 못 본다. 진중하게 음악을 해서 그런지 다른 취미는 편하게 감상하는 게 좋다. 때려 부수고 단순한 것들. 근데 어쩌다가 좋은 영화를 봤을 때 충격이 오래가더라. 이 영화도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뮤지컬 음악도 담당하지 않았나. 그때 경험이 라이브 비주얼에 영향을 미쳤을 것 같다.

뮤지컬 무대 미술을 보면서 배운 게 많다. 스케일이 다르다 보니, 뮤지션 개인적으로 실현하기엔 너무 어려운 얘기긴 하다. 다만 어떤 식으로 구현하는지 먼발치에서라도 봤기에 여러 의견을 낼 수 있게 되었다. 예전엔 뮤지션 시각 내에서만 아이디어가 나왔다면, 이제는 그 밖에서 바라볼 줄도 알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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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즈데이 프로젝트’에서는 공연마다 악기를 바꾸기도 했다.

미친 짓이었다. 너무 아쉬운 건 역사에 남는 공연이었고, 정말 열심히 찍었는데 영상만 남고 녹음된 소스가 들어있는 하드디스크가 날아갔다. 여하튼 너무 의미 있는 시도였고,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불가능은 없다고 느꼈다. 어떤 편성에서도 원하는 사운드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도 얻었다. 그냥 너무 재미있었다.

 

어떻게 시작한 프로젝트인가.

‘웬즈데이 프로젝트’라는 5회성 프로젝트를 제안받았다. 시리즈 공연도 처음이었는데, 전에 하던 사람이 매회 게스트를 다르게 진행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나는 악기를 바꾸겠다고 툭 뱉었지. 정작 주변 사람들은 내가 무슨 꿍꿍이가 있으니까 이런 말을 뱉었을 거라고 자연스럽게 믿은 것 같다. 근데 난 아무 생각이 없었다. 하하. 그래서 그때부터 편곡을 시작했다. 그때 했던 게 1회는 베이스, 2회는 오르간, 3회에는 관악기, 4회는 스트링, 5회에는 피아노와 라틴 퍼커션을 사용했다. 뒤로 갈수록 에너지를 풀어주는 형태가 되었다. 베이스 두 개에 보컬 나 한 명이면 아무도 화성을 담당하지 않기에 극도의 긴장 상태가 된다. 회가 거듭될 때마다 화성이 생긴다. 혹시라도 5회 공연에 모두 오는 사람들에게 재미를 주고 싶었다.

 

같은 곡도 5번 연습해야 하는 것 아닌가?

5회 모두 레퍼토리가 똑같았다. 10곡 정도를 했는데, 다 다른 편곡을 했다. 그러니까 나는 50곡의 연습을 해야 했던 거지. 근데 너무 재밌었다. 매회 망했다고 하면서 한 회 한 회 어떻게든 성공해냈다. 연주자들도 처음에는 ‘무슨 개소리야’ 하는 식이다가 마지막엔 서로 부둥켜안고 자축했다. 당시 무대는 너무 긴장된 상태라 큰 소리를 안 내도 에너지가 정말 많이 소요됐다. 또 하나 염두에 둔 부분은 디지털의 확장을 최소화시키는 것이었다. 마이킹을 정말 최소한, 뒷자리까지만 들릴 정도로 했다. 앞의 관객들은 내 생소리만 들었을 거다. 그러다 보니 의자 한 번만 움직여도 엄청난 방해가 되니 모두 굉장히 긴장한 상태로 공연이 진행됐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다면?

내 음악에 관해서는 많이 이야기한 것 같다. 다음 행보를 기대해달라는 상투적인 말로 끝내겠다.

 

진행 / 글 ㅣ 심은보
사진 ㅣ 백윤범, 황성민
협조 ㅣ FILA Originale

TIGER DIS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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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일본 애니메이션 ‘사이버 포뮬러’의 주인공 하야토. 그는 경기 중 결국, 제로의 영역을 넘어선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미지의 세계에 돌입한 그는 자신이 곧 아스라다가 되고, 아스라다가 자신이 되는 물아일체를 경험한다. 디스코(Disco)와 훵(Funk), 동요와 전통민요, 그리고 7080 대중가요까지 신명 나게 버무려서 이 음악들로 하여금 관객을 제로의 영역으로 인도하는 남자가 있다. 그 이름은 타이거 디스코(Tiger Disco). 그는 어떤 장소에서건 관객이 ‘걸판지게’ 놀 수 있도록 자신의 역할을 기민하게 수행한다. 앉은뱅이도 일으켜 세워 춤추게 한다는 이야기는 결코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자 그럼 제군들. 그를 맞이할 준비는 ‘단디’ 했는지. 뜨거운 박수와 함께 타이거 디스코의 실체를 탐구해보자!

 

자기소개를 부탁한다.

이름은 이기범, YMEA라는 크루에서 디스코 음악을 트는 디제이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본업은 한식 요리사였다. 지금 내 상태는 백수라고 부르는 편이 더 어울릴 것 같다. 가끔 디제잉도 하고, 그림도 그리면서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마지막 논문을 준비하는 대학생이기도 하고. 하하.

 

대학에서 뭘 전공했나?

우송대학교 졸업 후 경기대학원에서 외식산업경영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YMEA 크루의 소식이 뜸한데, 요새는 어떤 활동을 하고 있나.

올봄에 ‘Roller Boogie Night’이라는 파티를 연다. 옛날 ‘고고장’처럼 롤러스케이트를 타면서 80년대 음악을 듣는 콘셉트인데, YMEA가 진행하는 파티 중 가장 규모가 크다.

 

YMEA 멤버는 본업이 따로 있다고 들었다.

전부 직장을 다니고 있다. 음악이 본업인 분도 있고, 나 같은 사람도 있고, 로스쿨을 준비하는 친구도 있다. VJ, 머천다이징도 내부적으로 진행하는 만큼 나름 세분화된 편이다. 모두 17명 정도의 인원이 현재 YMEA로 활동 중이다.

 

타이거 디스코라는 이름의 유래는?

디스코 디제이라 그런지 이름에 ‘디스코’를 꼭 넣고 싶었다. 디스코와 어울릴 만한 단어를 쭉 나열해보다가 동물까지 나왔다. 마지막 후보가 Lion과 Tiger였는데, Tiger가 어감이 더 좋았다. 또 내가 호랑이띠다.

Tiger Disco Mix Set

 

작년까지 호텔 요리사로 일했다. 언제부터 요리사의 꿈을 키웠나.

조리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요리에 발을 들였다. 대학을 다니면서도 계속 요리 공부를 했고, 군대에서도 취사병으로 복무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바로 호텔에 취직했다. 롯데 호텔에서 2년 정도 일했고, 최근까지 일하던 곳은 여의도 콘래드 호텔이다.

 

호텔에서 나이지리아로 홍보 차 방문했을 때 심적 부담감이 컸다고 들었다.

대리님, 조리장님과 함께 갔는데, 모두 치안을 많이 걱정했다. 힐튼 호텔이 세계적인 브랜드라 그런지 종종 해외 호텔과 협력해서 프로모션을 진행한다. 좋은 취지의 프로그램이지만, 나이지리아는 솔직히 엄청나게 불안한 국가 아닌가. 호텔 입구에서 사설 경찰이 총 들고 근무하더라. 로비를 지나면 검색대에서 가방도 검사한다. 그래도 우리는 귀빈 대접을 받았다. 방탄차를 대기시키고, 앞뒤로는 사설 경찰차도 붙여줬다. 그때가 故 김영삼 전 대통령이 막 서거한 시점이라 한국인에게 문제가 생기면 외교적인 쟁점이 될 수 있으니 특별히 더 조심하는 것 같았다.

 

그곳에서 어떤 교류를 했는가?

‘한국인의 밥상’이라는 콘셉트로 600인분 뷔페를 준비했다. 나이지리아 대사관까지 와서 격려해주더라. 엄청나게 반응이 좋았다. 두 명이 이 많은 음식을 어떻게 다 준비했냐면서. 막상 요리를 시작하니까 치안에 대한 불안감은 사그라졌다.

 

호텔과의 마찰로 요리사를 그만둔 건가? 소셜 미디어에 직접 언급했던데.

콘래드 호텔은 힐튼 호텔 계열 10개 브랜드 중에서도 상위 럭셔리 브랜드다. 나는 오픈 멤버로 들어가서 한식요리를 3년 정도 했다. 자세한 부분은 인스타그램에서 언급했지만, 역시 가장 큰 이유는 금전 문제다. 초과 근무에 대한 수당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 특급호텔인데도 불구하고, 초과 수당을 제대로 챙겨주지 않는 모습에 적잖이 실망했다. 새벽 4시에 나와서 약 12시간을 근무하는데, 돈까지 못 받으면 서럽지 않나.

 

호텔 측에서 어떻게 대응했나.

나는 정말 혼자 날뛰었다. 소셜 미디어로 알리고, 회사 인사부나 쉐프들과도 다퉜다. 호텔 근무가 하루 8시간, 주 40시간 근무로 명시되어 있는데,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윗사람들이 볼 때는 되게 껄끄러운 놈이었겠지. 다행히도 조금씩 개선이 됐다. 그러나 개인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더 큰 분쟁을 만들면, 아무래도 내가 큰 손해를 감당해야 할 것 같았다. 나 같은 놈들을 대처하는 방법쯤이야 얼마든지 강구해 뒀을 테니까. 그냥 미련 없이 나왔다.

 

디제이로서 하나의 라이브러리를 구축하기까지 큰 영향을 끼친 뮤지션은?

나는 대가족 가정에서 자랐다.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 이모, 부모님 모두 다 같이 살았다. 당시 삼촌들이 일본으로 유학을 갔는데, 종종 일본 음악 CD를 가지고 돌아오셨다. 난 말도 제대로 못 하면서 일본 음악을 들었지. 그게 내가 처음 들은 음악에 대한 기억이다. 지금도 기억나는 곡은 야마시타 타츠로의 “Christmas Eve”. J-funk의 대가, 일본의 조용필이라고 하면 이해가 되려나. 부모님은 집에서 가요톱텐보다도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 비지스(Bee-Gees)의 뮤직비디오를 틀어주셨다. 그 영향인지, 또래 친구들과는 다른 음악을 들으면서 성장했다. 학교에서 내가 이런 얘기를 하면 친구들은 나를 아예 다른 세계의 사람을 보듯 쳐다봤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내가 조금 다르게 성장했다는 걸 느낀다.

 

예전부터 디스코 음악을 틀었나? 7~80년대 디스코를 즐길 수 있는 파티가 거의 없지 않나.

디스코 음악을 틀고 싶어서 디제잉을 시작했다. 그때가 2008년 즈음인데, 일렉트로닉 뮤직이 강세일 때였다. 어차피 나 같은 성향의 디제이가 거의 없으니 특정한 크루나 클럽에 속하지는 못할 거로 생각했다. 나는 좋아하는 음악을 틀고 싶어서 디제잉을 하는 거지, 명성이나 돈 때문에 하는 게 아니다.

 

존경하는 7080 한국 뮤지션은?

유명한 뮤지션의 음악을 제외하자면, 돌아가신 故 장덕의 음악을 좋아한다. 싱어송라이터였는데, 지금 들어도 노래, 가사말 모두 빼어나다.

 

파티에서 자주 트는 한국 곡이 있다면?

빛과 소금. 예전 故 김현식 선생님과 봄여름가을겨울 밴드를 같이 하던 분들인데, 원년 멤버에서 나뉘어 빛과 소금이 되었다. 우리가 익숙한 현재 봄여름가을겨울(김종진, 전태관)은 한국적인 정서에 맞게 팝, 록적인 요소가 섞인 대중적인 음악을 지향하고, 빛과 소금(박성식, 장기호)은 재즈 퓨전 쪽으로 발전했다. 빛과 소금의 음악은 정말 다 좋지만, 그중에서도 “오래된 친구”를 많이 튼다. 굉장히 세련된 곡이고, 이 노래를 틀면 관객도 반긴다.

 

혹시 극성팬이 있나?

좋아서 막 안기는 사람은 없었다. 하하. 파티 때마다 와서 사진을 찍어주는 분이 있다. 파티에 와서 이전에 찍은 사진을 건네주곤 했는데, 그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정말 고마운 분이다. 나 진짜 뭣도 아닌데.

 

언제까지 음악을 할 생각인가.

나는 디제이지만, 뮤지션은 아니다. 오리지널 트랙을 만드는 바가지(Bagagee) 같은 디제이는 뮤지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남이 만든 음악을 플레이한다. 선곡, 믹싱 스킬이 훌륭하다고 해서 그 디제이를 음악 하는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가끔 디제이 소개 영상이나 인터뷰를 보면, 자기 트랙도 만들지 않는 사람들이 “제 음악은요…”라면서 운을 뗄 때가 있다. 나는 그게 거슬린다. 나는 쉐프가 아니라 요리사다. 또한, 뮤지션이 아니라 디제이다.

 

자신의 오리지널 트랙을 만들어볼 생각이 있는지?

서두를 생각은 없다. Night Tempo라는 친구와 팀을 짜서 활동할 계획인데, 그 친구는 일본 음악으로만 리믹스를 해서 고유한 Future Funk 영역을 만들어냈다. 나도 리믹스부터 배워나가면서 시작하려고 한다. 나는 한국 ‘뽕 끼’가 있고, 그 친구는 일본 ‘뽕 끼’가 있으니 잘 어울릴 거 같다.

 

디제잉을 하면서 실수도 많이 하나? 재밌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들려 달라.

부끄러운 말이지만, 항상 실수한다. 노래를 꺼트리는 대형사고도 쳐봤고, 비트 매칭도 자주 엇나간다. CD가 튈 때도 있다. 그럴 땐 “아, 죄송합니다”라고 말하고, 다시 튼다. 하하. 예전에 나는 프로페셔널 디제이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페이를 받는 게 부담스러웠다. 입장료를 내고 온 관객에게 실례니까. 일부러 돈을 안 받은 적도 꽤 있다. 비트매칭이 조금만 어긋나도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죄책감이 들었는데 이제는 부담을 덜어냈다. 내가 트는 음악이 요즘 EDM처럼 컴퓨터로 찍어낸 비트도 아니고, 조금씩 엇나갈 수도 있지 않나. 최대한 실수를 안 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요새는 마음 편하게 즐기는 편이다.

 

타이거 디스코의 패션 역시 눈에 띄는 부분이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는 편인가.

딱히 거부감은 없다. 예전부터 복고풍으로 입었으니까. 아버지 세대처럼 헐렁하게 정장을 입고, 광장시장에서 낡은 옷을 사서 입는 것이 좋았다. 나를 쳐다보는 사람들이 있긴 한데, 내가 연예인도 아니고 일일이 다 신경 쓸 필요 있나. 한번 쳐다보고 마는 거다. 확실히 달라진 건 요즘에는 레트로가 유행이다, 뭐다 해서 나와 비슷한 옷차림을 하거나 옛날 한국 음악을 듣는 분들이 많아졌다. ‘응답하라’ 시리즈의 엄청난 인기만 봐도 느낄 수 있지 않나. 촌스럽고 유치한 부분이 있지만, 분명 끌리는 요소가 있으니까 다시 주목받는 게 아닐까?

 

가수 기린도 비슷한 케이스다.

맞다. 나야 뭐 혼자 좋아서 하는 거지만, 그분은 뉴 잭 스윙을 하면서 휠라(FILA)와 협업도 하고, 예전 문화의 멋진 모습을 다시 보여주는 것 같다.

 

어디서 옷을 사나?

주로 종로를 돌아다닌다. 동묘~신설동 일대, 광장시장을 좋아한다.

 

그곳은 지드래곤을 비롯한 많은 연예인으로 인해 유명세를 치른 곳이지 않나.

예전부터 혁오 밴드를 좋아하던 팬들이 이런 말 많이 하지 않았나? 나만 알고 있던 혁오가 유명해져서 싫다고. 사실 나도 그런 장소가 몇 군데 있다. 경리단길이나 동묘가 그렇다. 그런데 뭐 어쩔 수 있나. 미디어에 노출되면 사람이 모이는 게 당연한 거지.

 

본인과 비슷한 옷차림을 한 사람을 본 적이 있나?

나와 비슷한 사람은 몇 명 봤다. 그런데 나 정도로 옛날 사람처럼 입는 분은 없더라. 나는 그냥 이게 좋다. 옛날 음악, 옷, 술집. 7~80년대를 온전히 살아본 것은 아니지만, 최대한 그 시대 사람처럼 살려고 한다.

 

해서 자주 가는 장소가 있나? 술을 마실 수 있는 곳이라든지, 음악을 즐긴다든지.

집 근처에 ‘기찻길’이라는 술집이 있다. 자주 가는 곳이다. 탑골 공원 뒤쪽도 좋아한다. 꼭 그 술집이 목적인 게 아니고 그곳을 가는 길, 풍경까지 모두 즐긴다. 어르신들이 들었을 때는 우스운 소리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시대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정말 마음 깊이 좋아한다. 그래서 그 정서를 표현하고 싶고, 옛날 사람처럼 살고 싶다. ‘튀고 싶어서 그러는 걸까?’라는 질문을 나 자신에게 던져보았는데 그건 아니었다.

 

타이거 디스코에게 흥이란 무엇인가.

내가 가지고 있는 게 흥 아닐까. 춤추고 노래하는 걸 좋아한다. DJ Conan은 자신이 ‘흥 부자’라고 인터뷰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데 어떤 말인지 공감된다.

 

요리할 때도 흥이 넘치나?

요리할 때는 성격이 완전히 바뀐다. 사실, 내가 성격이 좀 더럽다. 예민하기도 하고. 애들이 잘못하면 막 물건도 집어 던지고, 욕한다. 기본적인 부분이 지켜지지 않으면 심하게 혼낸다. 같이 요리해본 사람들이 내 성격을 잘 안다. 아마 다 개새끼라고 할 거다. 하하. 애들 못살게 굴고, 혼내고, 욕도 많이 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위생, 기본적인 재료 관리가 잘 안되면 참기 힘들다. 물론 디제잉을 할 때는 그럴 일이 없다. 나 혼자 하는 거니까.

 

요리를 엄하게 배웠는지.

나 같은 사람은 없었다. 내가 착한 사람이 아니라 그렇다. 나는 기본적인 것이 지켜지지 않으면 절대 봐주지 않는다.

 

행복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아야 한다. 어제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는데, 다들 하는 말이 “야, 너 진짜 멋있게 산다”였다. 다들 월급쟁이에다가, 뭘 새로 하기에는 겁이 난다고 말하더라. 그래서 나는 꿈을 위해 뭘 투자해봤느냐고 물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걸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특히 한국 사람이 그렇다. 다들 하라는 대로 공부하고, 대학을 나와 취업하고 결혼을 생각하지 않나. 그들만의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렸을 때는 부모님을 위해 살고, 결혼하고 나면, 와이프와 가정을 위해 산다. ‘노인이 됐을 때 과연 나에게 과연 무엇이 남을까?’ ‘난 무엇을 좋아했을까?’ ‘난 정말 열심히 살았는데?’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이 너무 많다. 사회적인 문제다. 돈을 벌고, 번 돈으로 좋아하는 일에 투자하는 것이 순환되면 삶은 나아질 것이다.

 

한국에서 과연 쉬운 일일까?

가끔 학교에 특강을 나갈 때가 있다. 특급호텔에 취업하는 비결, 인턴십 취득 방법과 같은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어차피 다른 사람들이 다 말할 내용 아닌가. 4천5백만 한국인이 들었을 “공부 열심히 해라”가 아닌 “너는 무엇을 좋아하니?”라는 질문이 중요하다. 이렇게 물어보는 어른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심각한 문제다. 난 호텔에서 일할 때도 밑에서 일하는 친구들이 업무시간을 초과하면, 최대한 빨리 집에 보냈다. 그 시간에 차라리 책을 읽거나, 공연을 보라고 했다. 진급도 중요한 문제다. 그런데 인생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이 일이 인생에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하겠느냐는 말이지. 사실, 나는 행운아다. 어렸을 때부터 뭘 좋아하는지 확실히 알고 있었으니까.

 

이태원의 멋진 베뉴를 소개해 달라.

이태원에는 두 가지 종류의 클럽이 있다. 흔히 말하는 대형 클럽, 음악보다는 여자를 꼬시기 위한 때깔 좋은 클럽과 진짜 잘 노는 친구들이 즐기는 작은 클럽, 라운지로 나뉜다. 나는 주로 후자인 곳에서 노는데, 요새는 녹사평 쪽 피스틸(Pistil) 라운지나 경리단 길 앨리 사운드(Alley Sound)를 즐겨 찾는다. 앨리 사운드는 음악이 정말 좋다. 케이크숍은 뭐 이제 누구나 아는 클럽 아닌가? 워낙 잘 되는 클럽이라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페이크 버진(Fake Virgin)에서 주최한 Com Truise 내한 공연 라인업에 이름을 올렸다. 어떻게 합류한 건가?

페이크 버진 쪽 친구를 한 명 알고 지냈는데, Com Truise가 내한할 때 본격적으로 섭외 제의가 왔다.

 

끝나고 Com Truise와 막걸리 한잔 했나.

일정 때문에 함께하지 못했다. 한국에 오자마자 무대 세팅하고 리허설을 진행했는데도, 피곤한 기색 하나 보이지 않고 공연을 마쳤다. 게다가 친절했다. 호주 투어 일정으로 다음날 바로 한국을 떠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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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사로서 지켜나가는 신념이나 고집이 있다면?

나는 남이 맛있다고 하건 맛없다고 하건 신경 쓰지 않는다. 내가 먹었을 때 맛있어야 한다. 한국에 사는 모두가 한국 음식을 먹는 데다가 각자 먹는 방식도 다르다. 한국 사람 모두가 한식에 관해서 만큼은 전문가라는 말이다. 한식은 요리사 입장에서 정말 어려운 음식이다. 그래서 나는 기본에 충실하고, 내 입맛에 맞게 요리한다.

 

‘컴플레인’이 들어올 때 어떤 태도를 유지해야 할까.

음식이 너무 달거나 짜면 당연히 문제다. 그러나 특별한 이유 없이 지극히 취향을 반영한 불만에 대응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저 한 사람의 의견일 뿐이지 않나. 요리하는 사람은 자신의 음식과 미각에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요리하면서 기쁨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

요리를 막 배울 때는 정말 재미있었다. 식자재와 도구를 가지고 하나의 요리를 완성한다는 게 너무 신기했다. 예전보다는 즐기면서 요리하지는 못하지만, 지금도 팀워크가 완벽히 맞아서 음식이 제대로 나올 때는 상당한 쾌감을 느낀다.

 

개인 식당을 낼 생각은 없나.

요새 쉐프의 전성시대 아닌가. 요리사가 미디어의 조명을 받고, 방송 출연도 잦아지면서 몸값이 엄청나게 올라갔다. 그런데 내가 볼 때 정통 한식으로 명성을 얻은 요리사는 아직 없다. 대개 양식을 가미한 스타일인데, 나는 그런 쪽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소박한 식당을 하나 차리고 싶을 뿐이다. 육개장이면 육개장, 북엇국이면 북엇국, 이렇게 메뉴 하나를 제대로 내는 식당이 좋다. 사실 한식 코스도 어색하다. 찌개에 밥 말아서 반찬 옆에 그득히 두고 푸짐하게 먹고 나면, 보리차 한잔 할 수 있는 그런 식당이 더 좋다. 제대로 된 밥집을 요새 본 적 있나?

 

그림은 언제부터 그리기 시작했나.

어렸을 때부터 어렴풋이 생각하던 부분이다. 팝아트를 되게 좋아한다. 뚜렷한 색상과 선이 매력적이다. 키스 해링도 좋아하고, 무엇보다도 앤디 워홀의 광팬이다.

 

직접 그린 그림이 팔렸다고 들었다.

6~7점 정도 팔았다.

 

롤 모델이 있는지.

YMEA의 디제이 황박사(Hwangbaxa). 형을 처음 본 게 2009년 아디다스에서 진행하는 파티였다. 문래동 공장 부지에서 열린 파티였는데, 박사 형이 트는 누 디스코(Nu-Disco)를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디스코는 디스코인데, 왜 이렇게 세련됐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하하. 그때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중에 형이 한국에 두고 간 CD 백 하나를 받았다. 그런데 내가 듣는 음악과 상당수 겹치는 거다. 모르던 음악인데 굉장히 좋은 것들도 많았고, 내가 좋아하는 음악도 많이 수록되어 있었다. 아무튼, 내가 존경하는 사람이 듣는 음악과 내가 듣는 음악이 비슷하다는 게 굉장히 뿌듯했다. 그때 그 CD 백을 보물단지처럼 애지중지했다. 지금도 한국 디제이 중에서 황박사 형을 가장 존경한다.

 

과거 인물 중에서는?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앤디 워홀이다. 그는 상업적이면서도 예술적인 면모를 마음껏 펼치고 나서 세상을 떠난 사람이다. 어떤 이들은 저게 무슨 예술가냐고 비판하지만, 나는 그 모습마저도 멋있다고 생각한다. 남들이 머리로만 생각할 때 그것을 현실로 풀어낸 예술가가 앤디 워홀이다.

 

최근 감명 깊게 읽은 책이라면.

이대화 평론가가 쓴 ‘BACK TO THE HOUSE’와 사이먼 레이놀즈의 ‘레트로 마니아’. 레트로 마니아는 근래에 와 번역된 책이다. 흥미로운 점은 지금 시대에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새로운 것보다도 한물간 뮤지션들이 재결합을 하거나 결성 몇십 주년을 기념하는 앨범에 환호한다는 거다. 영화도 그렇지 않나. 새로운 영화보다도 오히려 스타워즈, 어벤저스처럼 기존 애니메이션을 각색하거나 예전 이야기를 다시 끄집어낸 것들이 대박을 터트린다. 여하튼, 저 두 권의 책을 감명 깊게 읽었다.

 

강아지와 고양이 중에서 어떤 녀석을 키우고 싶나?

둘 다 키우거나 아예 안 키우거나. 하하. 사실 요새 소라게나 물방개를 사고 싶어서 동대문 운동장 뒤쪽 수족관을 다니며 알아보는 중이다. 바퀴벌레 같은 게 되게 귀엽다.

 

소장하는 물건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무엇인가.

아주 어렸을 때 선물 받은 장난감 로봇이다. 5살 때였나? 철인 28호 FX에 나오는 블랙옥스라는 검은색 로봇이다. 삼촌이 일본에서 사다 주셨다.

 

아버지 옷이 굉장히 탐났을 것 같은데.

많진 않다. 아버지가 쌍용 회사에 다닐 때, 항상 쌍용 배지를 단 정장을 입고 출근하셨다. 난 그게 너무 가지고 싶었다. 지금은 물론 그 정장과 배지 모두 내가 가지고 있지.

 

술을 무척 좋아하는 것 같더라. 주량이 얼마나 되나.

소주 3병까지 먹는다. 술을 가리지는 않지만, 맥주는 정말 좋아한다. 발효법도 다 외우면서 공부할 정도니까. 예전에는 맥주를 엄청나게 마셨는데, 요새는 배가 불러서 잘 안 마신다.

 

음주 후 집에 가지 않고, 길에서 잔다는 소문을 들었다. 사실인가?

보통 한강대교에서 잔다. 하하. 여름부터 10월까지는 밖에서 자는 것 같다. 최근 마지막으로 잔 곳은 집 앞 자전거 보관함이다. 그날 스투시 모자를 잃어버렸다는 걸 집에 와서 알았다. 일본에서 산 건데, 내가 굉장히 아끼는 모자여서 그런지 온종일 무기력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파트 주변을 찾아보니 내가 잔 곳에 아주 예쁘게 걸려 있더라.

 

왜 밖에서 자는 건가?

더우니까. 하하. 술 마시면 집에 가는 게 귀찮기도 하고. 아파트 복도에서 잔적도 많다.

 

추후 계획을 말해 달라.

앞서 언급한 Night Tempo와 함께 ‘파워 브레이크’라는 듀오를 결성해서 활동할 생각이다. 이 듀오의 최종 목표는 UMF에서 낮 시간대 서브스테이지에서 플레이 하는 거다. 작지만 큰 소망이다. 그림 전시도 준비 중이고, 팔도를 돌아다니면서 한식을 배울 계획도 있다. KBS 1TV ‘한국인의 밥상’이라고 최불암 선생님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이제 내가 포스트 최불암이 되는 거지. 호텔 요리사는 우물 안 개구리다. 한식만 해도 팔도에 갖가지 음식이 있는데, 이걸 먹어보지도 않고 한식 요리사라고 말하기엔 놓친 게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YMEA 파티도 준비 중이고, 이박사 선생님과 함께 새로운 프로그램도 기획하고 있는데, 아직은 구체적인 사항이 나온 게 없으니 말을 아끼겠다. 아, 논문도 써야 한다. 하아…..

 

진행 / 글ㅣ 한준기 권혁인

사진 ㅣ 권혁인

기린 X ZEN LA R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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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뉴 잭 스윙(New Jack Swing) 대표 주자, ‘Kirin comin at ya’ 기린(Kirin)과 도쿄에서 온 젠라 락(Zen-La-Rock). 만나야 할 사람들이 만났다. 둘은 협업 앨범 [THE FUNK LUV]을 발매하며 한국과 일본 음악 신(Scene)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그들의 마음 깊숙이 자리한 90년대와 뉴 잭 스윙. 그리고 한국과 일본, 그 국경을 초월하여 피라미드 맨 위에 서 있는 아시아의 프린스, 기린과 젠라 락을 만났다.

 

만나서 반갑다. 간단한 소개를 부탁한다.

기린: 뉴 잭 스윙 가수 기린이다. 2008년부터 본격적으로 음악을 시작했고, 살롱(Salon)이라는 크루에서 잠시 활동한 적도 있다.

젠라 락: 도쿄에서 온 젠라 락(Zen La Rock)이다. 일본에서 18년 동안 젠라락이라는 이름으로 음악을 했다. 솔로로는 11년째다.

 

당신보다 먼저 젠라 락이라는 예명을 쓴 사람이 일본에 있다고 들었다.

젠라 락: 그런 것까지 알고 있나? 하하. 존경하는 선배가 주최한 파티에 갔는데, 그분이 멀리서 나를 젠라 락이라고 부르더라. 아마도 당시 젠라 락이라는 이름을 쓰던 다른 분과 착각한 것 같았다. 이후 젠라 락에게 정식으로 이름을 받았다. 어쨌든 지금 젠라 락은 오직 나뿐이다.

 

기린과 젠라 락은 보기 드문 이상적인 듀오라고 생각한다. 이 기가 막힌 제안은 누가 먼저 했나?

기린: 처음부터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은 사이는 아니었다. 라인(LINE)으로 메시지를 주고받다가 나중에는 만나서 서로 음악을 체크하고, 공연도 같이하다 보니 자연스레 리믹스 트랙을 만들게 됐다. 상대방의 곡을 리믹스 하면서 앨범 작업까지 급물살을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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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뮤지션 모두 80~90년대에 많은 애착을 가지고 있다. 분명 한국의 90년대와 일본의 90년대는 묘하게 다른데, 90년대는 한국 음악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지점이었다. 힙합, 알엔비와 같은 흑인음악이 대중에게 인식되었고, 지금의 케이팝이라 부를 수 있는 음악, 즉 아이돌 시장이 형성되기 직전의 시기였다. 그와 반대로 일본은 세계 3대 음악 시장 대열에 계속 합류해왔고, 언더그라운드 신 역시 활발했다. 그 시기 어떤 것에 영감 받았나?

기린: 90년대, 그러니까 어렸을 때 나는 지누션이나 이현도, 서태지와 아이들, 솔리드 음악을 좋아했다. 얼마 전 지누션 콘서트에 갔는데, 5~6학년 때 엄청나게 좋아하던 1집 [Jinusean] 수록곡들, 이를테면 “Young Nation”이라든지 “Gasoline”, “Jinusean Bomb”과 같은 힙합을 쏟아내더라. 솔직히 이제는 그런 힙합 음악을 안 할 것으로 생각했다. 정말 좋아하는 노래를 콘서트에서 라이브로 들으니까 눈물이 나더라. 지금까지 공연 보면서 운 적이 없는데. 하하. 그만큼 그 시절은 나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젠라 락: 나 역시 초등학생이었다. 사이타마에서 자랐는데, 그 지역은 이지매가 심해서 도쿄로 넘어왔다. 내가 느낀 일본의 90년대 사회 분위기는 그랬다. 또한, 90년대 일본에는 힙합이 존재했지만, 미미했다. 2000년대에 접어들며 언더그라운드 힙합 신이 커졌다. 그러면서 스케이트보드 문화라든지, 스트리트 패션이 전체적으로 발전한 것 같다.

 

2015년은 패션이든 음악이든 90년대 레트로가 열풍이었다. 앞으로는 어떤 흐름을 예상하는가?

기린: 유행은 언제나 돌고 도는 거니까. 90년대 레트로는 느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유명해진 것도 아니고 그렇게 되고 싶어서 음악을 하는 것도 아니다. 한국의 레트로는 대중이 인식하기에 일종의 ‘추억팔이’ 같다.

젠라 락: 체감할 정도는 아니다. 일본은 음악보다도 패션에서 90년대로의 회귀가 눈에 띈다.

 

기린과 FILA, 젠라 락과 NEMES는 자신을 대표하는 패션 브랜드다. 심지어 NEMES는 젠라 락이 직접 운영하는 브랜드다. 음악 외에도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둘의 패션이 눈에 띈다.

기린: 꼭 음악에 맞게 옷을 입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최대한 맞추려고 노력한다. 사실 주변을 보면 우리와 비슷한 취향을 가지고 있지만, 옷은 깔끔하게 입고 다니는 사람들도 많지 않나. 나는 옷도 취향이 드러나게끔 입는 게 멋지다고 생각한다. 계속 이렇게 입어왔고.

젠라 락: NEMES를 처음 만든 분이 나에게 브랜드를 함께 운영하자고 제안했다. 패션에 관심이 많아서 흔쾌히 합류했는데, 뭘 만들어야 할지 처음에는 고민이 많았다. 원체 모자를 좋아해서 결국, 모자를 만들었다. 모자는 패션의 양념이자 완성이지 않나. 그래서 나는 NEMES에서 내가 쓰고 싶은 모자를 만든다.

 

본격적으로 한국 시장에 진출할 생각이 있나? 최근 래퍼 송민호가 NEMES 모자를 쓰고 나와 화제가 됐다.

젠라 락: 몰랐다. 처음 듣는 이야기다. 예전에 G-Dragon이 뮤직비디오에서 NEMES 모자를 쓰고 나온 걸 봤는데, 우연이라고 하기엔 내 스타일과 굉장히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헨즈 숍에 납품한 지 이제 1년 정도 됐다. 한국에 직접 진출할 계획은 없지만, 반응이 좋은 것 같아서 기분 좋다.

Spack Dandy OST) Zen-La-Rock – “Space Fun Club”

일본 애니메이션 “Space Dandy” OST에도 참여한 것으로 알고 있다. 작업에 들어가기 전, 와타나베 신이치로(Shinichiro Watanabe) 감독과 어떤 이야기를 나눴나?

젠라 락: 감독님이 내 음악을 애니메이션에 쓰고 싶다고 하셨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최근 발표한 음악이 아니라 “FUNK JUICE / SPACE MCEE’Z” 라고 2007년에 발표한 트랙이더라. 워낙 오래전에 작업한 곡이기도 하고, 그런 분위기의 음악은 얼마든지 더 만들 수 있었기에 아예 새로 만들자고 말했다. 하하. 그러니 바로 만나자고 하셨다. 애니메이션 거장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그분의 작품을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딱히 긴장되지는 않았다. 감독님은 “FUNK JUICE / SPACE MCEE’Z”의 음악적 스타일이나 배경, 그리고 분위기까지 먼저 이야기할 정도로 음악에 박식했다. 그렇게 만나서 음악, 작품, 그리고 감독님이 가져오신 플레이 리스트에 관해 3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다. 감독님을 직접 만나 뵙고 충분히 설명을 들어서 그런지 곡을 만드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전에 발표한 솔로작 [Moon], [Gwig Gwig Gwig], [Summer Vacation]은 [THE FUNK LUV]와 비교해봤을 때 하우스, 일렉트로닉의 요소가 많이 느껴진다. 심지어 앨범 커버 분위기까지 지금 기린과의 호흡과는 사뭇 다른 색깔인 것 같더라.

젠라 락: 뉴 잭 스윙은 아니지만, 젠라 락 스타일이다. ‘나’라고 말할 수 있는 음악이지. 앨범 커버가 마음에 들었나? [Moon] 커버는 Fuguriddim이라는 아티스트가 그렸다. 재미있는 친구다.

 

우리도 그의 그림을 좋아한다. 한국에도 Fuguriddim을 아는 사람들이 있다.

젠라 락: 그림도 그리지만, 음악도 하는 친구다. 80년대 레게를 하는데, 굉장히 흥미롭다. 한번 체크해보라.

 

기린은 2015년에 영상 매거진, Very Happy Magazine을 통해 “요절복통 도시라이프 : 씨티콤”을 공개하고, 회화 ‘지네 인간’ 전시도 진행하며 뮤지션 외적인 면모도 보였다. 또한, “SUMMER HOLiDAY(’97 in Love)” 싱글 활동을 하면서 2015년 한 해 동안 기린의 이름을 더욱 널리 알렸다. 지난 한 해를 돌아봤을 때, 그동안의 행보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요즘 세대 연애방식”에 참여한 후디(Hoody)는 AOMG에 갔던데.

기린: 막상 후디는 별생각 없을 것 같다. 나도 달라진 점이 있다. 뭐랄까. 나빼고 내 주위 사람들이 모두 잘되는 느낌? 하하. 이제는 젠라 락과 잘 되겠지.

 

둘의 음악에 힘이 되어준 것들이라면?

젠라 락: 친구들이다. 이 중에는 뮤지션도 많고, 라이프스타일도 비슷해서 같이 어울리다 보면 알게 모르게 많은 영향을 받는다. 특정한 뮤지션이나 다른 음악을 통해서 영감을 받지는 않는다.

기린: 나도 비슷하다. 주변 사람들과의 에피소드에서 많이 영향을 받는 거 같다. 요즘에는 종종 일본에 가다 보니, 새롭게 만나는 친구들에게서도 좋은 에너지를 얻는다. 좀 다른 이야기지만, 미국의 대표 뉴 잭 스윙 뮤지션인 베이비페이스(Babyface)가 어떤 인터뷰에서 “왜 음악을 시작하게 되었나?”라는 질문에 여자를 꼬시기 위해서라고 답한 적 있다. 그 말에 동의한다. 꼭 이성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누군가에게 나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음악은 굉장히 멋진 무기라고 생각한다. 그런 부분들도 나에게 동기부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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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UNK LUV]를 함께 작업하면서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을 것 같은데, 특별히 인상 깊었던 부분이 있나.

기린: 젠라는 음악이나 패션, 하나하나 굉장히 신중하게 고른다. 늘 좋은 선택을 하려고 노력한다. 배울 점이지. 예를 들어 이번 앨범의 테이프와 CD 구성이 다른데, 트랙리스트를 비롯해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쓰더라. 최상의 선택을 끌어내기까지 노력도 많이 하고, 노하우도 있다.

젠라 락: 기린은 다재다능한 친구다. 뭐, 일단 둘이 서 있으면 바로 느낌 나오지 않나? 서로 채워줄 부분이 명확히 보이기에 우리는 좋은 콤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적으로도 기린은 좋은 사람이다. 하하.

 

미국에서 뉴 잭 스윙은 80년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큰 반향을 일으킨 장르지만, 그 수명이 짧았던 만큼 세계적으로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따라서 한국과 일본에서는 이를 체감할 만한 음악이나 신도 없었을 텐데, 이런 데서 오는 괴리감은 없나?

기린: 장르 음악으로 한국에 소개된 것이 아니지 않나. 뉴 잭 스윙은 그저 그 당시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던 팝이었고, 한국 대중은 “아, 이런 음악이 미국에서 유행하는구나” 정도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90년대 한국 가요를 보면, 뉴 잭 스윙 리듬이 묻어나는 곡이 은근히 많다.

젠라 락: 물론 차이가 크다. 그러나 깊게 생각해보지는 않았다. 나는 일본인이고 미국에서 자란 뮤지션과는 다른 감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뉴 잭 스윙도 있고, 이를 듣고 영향 받은 기린의 음악도 있고, 내 음악도 있고 뭐 그런 거겠지.

 

FILA가 주최한 ‘360 Sounds Present Fresh Box’ 파티에서 멋진 라이브 무대를 선보였다. 당시 분위기가 궁금하다.

기린: 일단 ‘Fresh Box’는 정말 오랜만에 다시 여는 파티라 감회가 새로웠다. 그 날이 젠라와 함께 호흡을 맞춘 첫 무대였고, 분위기는 굉장했다. 각자 따로 연습하던 시기라 무대 리허설 같은 건 해보지 않았는데, 상당히 합이 좋았다.

젠라 락: 내가 한국에 잘 알려진 뮤지션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반응이 뜨거워서 놀랐다. 그 무대를 하면서 기린과 함께 앨범을 내야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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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과 젠라 락은 좋은 듀오지만, 한편으로는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서 앨범을 만드는 과정에서 음악적인 이해나 접근방식에 오해가 생길 수도 있을 것 같다. 실제로 [THE FUNK LUV] 앨범은 어떤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나?

기린: 주로 메일과 라인 메시지를 통해 아이디어를 공유했다. 그 과정에서 특별히 어려운 점은 없었다. 언어는 다르지만, 번역기를 통해 대강 의미를 짐작할 수 있었기에 가사의 무드를 수월하게 조율할 수 있었다. 곡 구성도 마찬가지로 녹음한 걸 보내면 피드백을 받는 식으로 계속 의견을 조정했다.

젠라 락: 처음부터 언어를 반으로 나누고, 공연 역시 일본과 한국에서 한 번씩 진행하기로 했다. 언어의 장벽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작년 12월 11일, 도쿄에서 ageHA [THE FUNK LUV] EP 쇼케이스를 성공적으로 펼쳤다. 일본 현지 반응은 어땠나?

젠라 락: 엄청나게 좋았다. 클럽에 수영장이 있는데, 사람들이 그 위를 뛰어다닐 정도로 열광적이었다. 올해 4월 공연 부킹이 벌써 들어온 상태다.

 

[THE FUNK LUV]는 크라우드펀딩으로 제작되었다. FILA의 든든한 후원이 있었지만, 투자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자칫 앨범 제작이 힘들어질 수도 있었을 텐데. 어떤 확신이 있었나?

기린: 한국은 크라우드펀딩이 아직 대중적으로 좀 낯설지 않나. 그런데 젠라가 일본에서는 흔히들 사용하는 투자 방식이라고 하더라. 거의 다 우리 친구들이 도와줬다. 파티 때도 그렇고 언제나 주변 사람들에게 감사하다.

기린 X Zen-La-Rock – “PURPLE JACK CITY” M/V

Jazzy Sport 레이블의 프로듀서, Grooveman Spot이 프로듀싱한 “PURPLE JACK CITY”가 인상적이다. 그에게 멜로디나 사운드 측면에서 특별히 어떤 주문을 한 건가?

젠라 락: 전혀. 이 앨범이 만들어진 과정과 기린의 예전 음악들을 전해줬을 뿐. 국제적인 앨범이니 알아서 잘 만들라고 했다. 간단하지만, 그만큼 큰 압박도 없지. 하하.

 

국내 음반 시장에는 앨범마다 타이틀곡이 존재한다. 굳이 “PURPLE JACK CITY”을 타이틀로 선정한 이유가 있나?

기린: 특별히 타이틀곡을 정하지는 않았지만, Grooveman Spot의 곡을 들으며, 우리는 직감했다. 이거라고. 다른 곡들도 물론 좋지만, 우리 음악의 공통분모가 자연스레 묻어나는 곡으로는 “PURPLE JACK CITY”가 제격이라고 느꼈다.

 

뮤직비디오 역시 음악의 특유한 분위기가 잘 드러난다. 영상에 등장한 매력적인 여성들은 누구인가?

젠라 락: 그중 한 명이 친구다. 비디오의 분위기를 일반 여성들에게 말해봤자 잘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아서 그 친구에게 콘셉트를 전달했더니 알아서 데려오더라. 그 여성분들은 처음 뵌 거다. 하하.

 

뮤직비디오에서 입고 나오는 턱시도는 동대문에서 구했다던데.

기린: 일본에서 녹음을 마치고, 뮤직비디오 촬영을 앞두고 있었다. 그때 한국에서 공연 요청을 받고 1박 2일 스케줄로 잠시 들어왔는데, 그때 동대문에서 구한 거다. 공연을 마치고 그날 바로 동대문에 가서 밤새 돌아다녔다. 아주 힘겹게 구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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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곡을 리믹스한 ‘MAD’ 트랙으로 각자 “JAM”과 “NEW JACK UR BODY”를 골랐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일본 아이튠즈에서 1위를 찍은 “ICE ICE BABY feat. JOY McRAW”나 기린의 “요즘 세대 연애방식” 같은 곡도 많이 사랑받지 않았나.

기린: 사실 엄청난 고민을 한 건 아니다. 라이브 할 때, 잘 어울리기도 하고, 앨범 콘셉트를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 곡을 선택했다.

젠라 락: 나 역시 이번 앨범 콘셉트에 맞췄다. 기린과 협업한 첫 계기 역시 “NEW JACK UR BODY”라 이 곡을 하고 싶었다.

 

“NEW JACK UR BODY”에 어떤 에피소드가 있었나?

기린: 나랑 비슷한 음악을 하는 친구가 아시아 쪽에 있을까 궁금해서 찾아봤는데, ZEN LA ROCK의 “NEW JACK UR BODY” 뮤직비디오가 나오더라. 그 비디오를 보고 내가 바로 젠라에게 연락했다.

 

후속으로 풀 렝스 앨범을 기대해도 되나?

기린: 이미 아이디어를 수집 중이다. 올 4월에 ageHA 클럽 공연이 잡혀 있는데, 그전까지 1~2곡 정도는 완성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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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음악을 더 보여주고 싶은가?

기린: 이현도 라이브 앨범 [D.O Still Alive] 1번 트랙, “이현도”를 들으면 아직도 소름이 돋는다. 사실 이 곡은 음악이 아니라 콘서트장에 이현도가 등장하기 전까지 팬들이 그의 이름을 외치는 함성을 담은 거다. 나중에 내 음악을 들었을 때, 어떤 무드가 됐건 사람들에게서 감정을 끄집어낼 수 있는 뮤지션이 되고 싶다.

젠라 락: 우리는 사실 지금 시대에 흔하지 않은 음악을 하고 있다. 주변에서도 왜 그렇게 마이너한 취향을 고집하느냐고 묻곤 하는데 어찌 보면 이게 내 숙명인 것 같다. 젠라 락을 굳건히 지켜나갈 생각이다.

 

기린과 젠라 락은 성공적으로 2015년을 마무리했다. 2016년에는 어떤 계획을 세웠나?

기린: 약 4개의 EP를 준비 중이다. 2016년에는 공격적으로 할 예정이니까 방어를 잘해주셨으면 좋겠다. 하하.

젠라 락: 나 역시 솔로 앨범을 계획하고 있다. 아마 정규앨범이 될 것이다. [THE FUNK LUV] 앨범 활동도 하면서 개인 앨범을 내고 싶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나.

기린: [THE FUNK LUV]은 꽤 오랜 시간 고민하고, 정성을 들여서 만든 앨범이다. 작은 디테일까지 즐겨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젠라 락: よろしく.

 

진행/텍스트 ㅣ 이철빈 권혁인
사진 ㅣ 백윤범
장소 협조ㅣThe Henz Club
번역 ㅣ 백지훈

김용지(Demi_Kim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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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그램의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프리랜서들의 영역 또한 빠르게 확장되었다. 굳이 회사 이메일을 뒤져가며 포트폴리오를 보내지 않더라도, 이제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전 세계에 알리는 것이 가능하다. 이러한 시대에 대중과의 직접 소통이 가능한 SNS를 잘 활용하는 것은 그들의 직무만큼이나 중요한 재주가 아닐까. 올해 유독 빠른 인지도를 확보한 여성 프리랜서 모델 김용지는 얼굴은 익숙하지만, 아직 대중에게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패션에 민감한 이들이라면 그녀의 이름은 몰라도 @Demi_Kimee라는 인스타그램 계정에는 한 번쯤 접속해본 적이 있을 것. 어딘지 중국 여배우를 연상케 하는 김용지를 만나보았다.

 

올해부터 각종 매체, 잡지 화보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당신은 누구인가?

대학교를 졸업하고, 현재 모델 활동을 하는 김용지다.

 

어쩌다 모델이 되었나.

포토그래퍼 이구노와 개인 작업을 한 것이 첫 번째 ‘모델’ 경험이었다 . 그 뒤로 친구들 일도 돕고, 데이즈드, 아메리칸 어패럴 화보도 찍으면서 자연스레 이쪽 일을 하게 됐다.

 

대학에 다닐 때 뭘 전공했는가?

연극 연출을 전공했다. 졸업한 뒤, 올해 봄부터 모델 일을 시작했다.

 

막상 해보니 어떤가. 일은 재미있나.

나를 섭외하는 브랜드나 포토그래퍼는 나에게서 특정한 이미지를 원하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그분들이 전달하는 콘셉트는 대부분 비슷한 뉘앙스를 풍기지만, 사진을 찍을 때마다 그 안에서 또 다른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것 같아 재미있다.

 

어떤 콘셉트를 말하는 건가?

중성적인 매력이 있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래서 파악이 잘 안 된다고 해야 하나? 국적, 성별도 잘 모르겠다고 하더라.

 

혹시 외국에서 살다 왔나?

고등학교 때 1학년 때 캐나다에 가서 3년간 살다 왔다. 혼혈은 아니다.

 

에이전시를 구한다는 트윗을 올렸던데.

무슨 소리인가? 난 트위터를 하지 않는다. 사칭 계정인 것 같다. 너무 재밌는데?

 

본인 대신 알아보고 있더라.

소름 끼치는 일이다. 난 회사에 들어갈 생각이 없다. 하하.

 

짧은 기간 동안 매우 많은 작업을 했다. 일을 고르는 기준이 있다면?

여성스럽거나 귀여운 이미지가 강조되는 콘셉트는 가급적이면 피한다. 처음에는 거절하기 쉽지 않았지만, 이제는 딱 잘라서 거절하는 편이다. 모델 이미지를 떠나서 개인적으로도 캐주얼한 옷차림을 즐기는 편이다.

 

패션 브랜드에서 당신에게 특유의 이미지를 원한다고 했다. 본인이 구축하고 있는 캐릭터가 있는지 궁금하다.

특정한 캐릭터로 구체화한 적은 없다. 그래도 내가 원하는 내 모습이란 게 있지 않나. 내 평소 라이프스타일과 너무 동떨어진 모습이라면 보는 사람도 어색하지 않을까? 내가 나다워야 더 자신감도 생기고, 자신감 있는 모습이 카메라에 담겼을 때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화보가 나올 것 같다.

 

연기도 잘 어울릴 것 같다.

모델 일과 똑같다. 기회가 닿거나 일이 재미있을 것 같으면 한번 도전해볼 수는 있다. 그러나 기획사에 들어가서 연예인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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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델로서 성공을 꿈꾸나?

사실 이게 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많은 것에 흥미를 느낀다. 언젠가는 영상을 만들고 싶다.

 

혹시 본인이 만든 영상이 있나.

아직 없다. 이제 걸음마 단계지 뭐. 예전에 뮤직비디오 조감독으로 일한 경험은 있다.

 

스타일에 굉장히 공을 들이는 편이 아닌가.

글쎄. 내가 예민하게 옷을 입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단 편한 게 우선이고, 재질이 부드러운 옷을 좋아한다.

 

남자친구가 옷을 더럽게 못 입는다면 어떻게 할 건가?

남자친구의 취향을 최대한 존중하는 편이다. 정 맘에 안 들면 선물을 줘서 우회적으로 표현할 것 같다. 만약 바지가 맘에 안 든다면 그 상의에 어울리는 바지를 사줄 것 같은데?

 

패션에 영향을 준 인물이 있다면?

글쎄. 우리 언니? 언니가 프랑스에서 13년을 살아서 그런지 파리지앵 특유의 느낌이 묻어나오는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같이 쇼핑하면서 알게 모르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당신은 분명 유니크한 모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최근 쇼핑몰, 화보, 뮤직비디오를 가리지 않고 너무 많은 일을 하면서 이미지를 단시간에 소비하는 듯하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공장처럼 찍어내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하하. 일을 갓 시작해서 아무것도 모르던 때, 프리랜서로 명확한 기준도 서지 않은 상태에서 일을 닥치는 대로 했던 것 같다. 지금 인터넷에서 떠도는 이미지들도 초반에 가리지 않고 찍었던 것들이 다수다.

 

거절하는 방법을 알게 된 지금은 어떤가?

두어 달 정도 일하다 보니 자연스레 어떤 확신이 생겼다. 내가 기준을 제대로 세워야 프리랜서로서 내 커리어가 확고해질 것 같았다.

 

모델이 되고 나서 친해진 동료는 누구인가.

황해인 언니. 언니랑 같이 섭외될 경우 브랜드 스타일이 잘 안 맞아도 일부러 할 정도로 친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촬영은? 

지난가을에 찍은 야광 토끼의 뮤직비디오. 아마 내년 1~2월에 공개될 예정이다. 되게 특이한 콘셉트였는데, 홍콩 영화가 떠오르는 그런 분위기였다. 연기도 그렇고,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시도였다.

 

 

사실, 이국적인 외모가 먼저 눈에 들어 온다. 모델로서 오히려 방해되는 부분이 아닐까.

내가 좀 독특해서 그런가. 화보에서 내 캐릭터가 드러나는 건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패션, 포토그래퍼, 장소, 배경, 그리고 내가 앙상블을 이루며 완성되는 게 룩북 아닌가. 그들이 나를 섭외하는 이유에는 김용지라는 캐릭터까지 함께 녹여내고 싶다는 의도가 바탕에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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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에이전시를 거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다. 앞으로도 새로운 분야에 계속해서 도전하고 싶어서 회사가 원하는 만큼 내가 일을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물론 회사에 속하면, 돈을 많이 벌거나 더 프로페셔널하게 일을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나는 자유롭게 일하고 싶다.

 

인스타그램, 페이스북을 통해 자신을 홍보하는 프리랜서들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인스타그램이 당신과 같은 프리랜서 모델이 성장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나?

절대 무시할 수 없다. 인스타그램 DM을 통해 일이 들어오는 경우가 잦다. 실제로 인스타그램 등장 이후, 전 세계의 모델이 더 많은 영향력을 펼치고 있다.

 

앞서 모델 활동 외에도 영상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어떤 영상인가?

뮤직비디오. 뮤직비디오를 만드는 게 내 최종목표다. 우드키드(Woodkid)를 보면서 영상 감독의 꿈을 키워왔다. 나에게 있어 그는 아이돌 같은 존재다. 음악, 비주얼, 그래픽 디자인 모두 직접 해내는 사람이다. 항상 많은 자극을 받는다.

Woodkid – “Iron”

최근 재밌게 본 뮤직비디오가 있나.

CL의 “Hello Bitches”. 평소 댄서들을 항상 동경해왔는데, 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표기한 점이 우선 마음에 들었다. 정말 카리스마가 엄청나더라.

 

영화를 즐겨 본다고 들었다. 올해 본 것 중 최악의 영화는?

사도. 너무 불필요한 장면이 많았다. 영화도 너무 신파적이어서 보기 부담스러웠다.

 

그럼 어떤 영화를 좋아하나.

오해의 소지가 없었으면 좋겠다. 나는 퀴어(Queer) 영화를 좋아한다. 또 틴에이지 감성이 물씬 나는 것도 즐겨 본다. 반항적인 주인공이 등장하는 영화도 좋아한다. 마치 파이트 클럽(Fight Club) 같은…

 

‘트레인스포팅’이 딱 당신 취향일 것 같다.

좋아한다. 하하. 마약을 다룬 영화도 좋아한다. 다만 이것도 오해하지 말아줬으면 한다.

 

무슨 음악을 듣나?

흑인 음악. 중학교 때부터 즐겨 들었다.

 

자주 듣는 노래 좀 공유해 달라.

유명한 힙합은 거의 다 듣는 편이다. 그리고 자주 듣는 곡은 Erykah Badu의 “The other side of the game”, 그리고 Avan Lava의 “Sisters”.

 

누군가 당신에게 ‘힙스터(Hipster)’라고 한다면?

그런 말을 들어본 적 있다. 그런데 기분이 나빴다. 겉모습으로만 자신을 표현하는 사람들에게 힙스터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나. 남을 칭찬할 때 힙스터라고 하지는 않잖아?

 

‘VISLA X Yoonkee’ 티셔츠를 입고 찍은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더라. 어떤 경로로 구매한 건가?

구노 오빠가 선물해줬다. 내가 워낙 개를 좋아해서. 하하.

 

자기 전에 뭘 하나?

‘강사모’에 들어간다. 지금 사는 집이 오피스텔이라 개를 키우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매일 들어가서 확인한다.

 

애견인이 많아지면서 유기견 또한 그 숫자가 매우 늘어났다. 사회적인 이슈 아닌가.

나는 아직 직접 어떤 활동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동물보호단체 ‘생명공감’ 네이버 카페에 들어가 동향을 계속 살피고 있다. 사람들이 작은 강아지를 선호하다 보니 업자들은 계속 새끼를 낳게 하고, 안 팔린 강아지는 키우는 데 돈이 드니 곧바로 안락사하는 것이 현실이다. 강아지가 크면 인기가 없어지니까 그냥 죽이는 거지.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다 보니 강아지는 넘쳐나고, 수용할 시설과 비용은 터무니없이 부족한 상태다.

 

유기견을 데려다 키우는 것은 물론 바람직하지만, 제도적인 차원에서 해결책이 필요하지 않을까?

‘토이’ 강아지만을 선호하는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그리고 애견인들이 단합해서 더욱 큰 보이콧을 펼칠 필요도 있다. 많은 사람이 힘을 모아서 민원을 넣으면, 그제야 정부 차원에서 조사한다고 하더라.

 

미안한 말이지만, 보신탕은 먹어봤나.

아주 어렸을 때 보신탕인지도 모르고 먹어본 적은 있다. 그러나 지금은 절대 먹지 않는다. 보신탕을 먹는 문화도 싫지만,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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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그램 자주 하나? 매일 들어가는 계정을 하나 알려 달라.

@universe.animals 귀여운 강아지 사진이 엄청 많다! 개를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모두 좋아할 거 같은데. 하하.

 

모델에 발을 들였고, 뮤직비디오 감독이라는 목표가 남아 있다. 또 하고 싶은 건 없나.

세계일주. 본격적인 모델 일을 시작하는 계기가 된 것도 세계일주를 할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일정이 빡빡해지면서 원래 계획보다는 조금 미뤄졌지만, 이른 시일 내에 여행을 떠날 생각이다. 해외를 돌아다니면서 현지 포토그래퍼와 새로운 콘셉트의 촬영을 하는 것이 또 하나의 목표다.

진행 ㅣ 권혁인 최장민
텍스트 ㅣ 권혁인
사진 ㅣ 오세린

씨피카(CIFI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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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운드클라우드에 돌연 나타나 존재감을 드러낸 여성 뮤지션, CIFIKA는 자신의 독특한 세계관을 전자음악으로 펼쳐낸다. 그녀의 몽롱한 목소리는 청자를 잠시 다른 차원의 공간으로 데려다 놓는다. 본격적으로 음악을 시작한 지 6개월째. CIFIKA는 쏟아지는 영감에 벅차오른다. 즐거운 탐험에 나선 그녀를 만났다.

 

CIFIKA의 의미는?

아무 의미 없다. Pacifica Avenue를 지나다니면서 항상 ‘Cifika’라고 장난치듯 말하곤 했는데, 마음에 들어서 예명으로 정했다.

 

나이가 궁금하다. 혹시 학생인가?

1990년생이다. 학생이고, 간간히 음악 작업도 하고 있다. 광고미술을 전공했으며, 재작년에는 잠시 아트디렉터로서 일도 하다가 비자 문제로 다시 학생 신분이 되었다.

 

언제부터 미국에서 살았나?

중학교 3학년 때 유학을 가서 올해로 10년째다. 방학 때마다 한국에 머물러서 딱히 향수병은 없다. 다만 대학을 졸업하고 3년간 한국 땅을 밟지 못해서 그동안 바뀐 한국이 무척 궁금하다.

 

음악을 만들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다.

LA에서 대학을 다닐 때, 100불짜리 카시오 키보드를 사서 가지고 놀았다. 기본 코드 두 개를 번갈아 치고, 그 위에 가사를 얹어서 완성된 노래를 친구들에게 선물한 적이 있다. 본격적으로 음악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반년 정도 전부터. 그러니까 4월쯤? Washed out의 [Within and Without] 앨범을 듣고 이 멋진 음악이 베드룸에서 컴퓨터 한 대와 마이크 하나로 완성됐다는 걸 믿을 수 없어서 직접 과정이라도 알아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이상한 말이지만, 음악을 배운 적은 없나?

전문적으로 배운 적은 없다. 초등학교 때 피아노를 조금 배웠고, 작년에 학교에서 로직X 기초 클래스, 그리고 음악 기초이론을 수강하면서 기본적인 음악이론이나 DAW(Digital Audio Workstation)를 알게 되었다. 지금 쓰는 DAW는 에이블튼 라이브(Ableton Live)인데, 이건 독학했다. 그래서 아직 서투르다. 첫 오디오 인터페이스를 갖춘 9월 초부터 보컬 녹음을 시작했다.

 

영감을 준 아티스트가 있다면?

Marvin Gaye, Pierre Schaeffer, James Blake, London grammar, FKA twigs, Arca, Oneohtrix Point Never, Four tet, Com Truise, M83, Nosaj Thing.

 

본인의 음악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진부하지만, 당신의 음악에서 신비롭고 우주적인 이미지가 떠오른다.

음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뚜렷한 색깔이 완성되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다만 내가 평소에 즐겨 듣고, 보고, 관심이 가는 주제를 음악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실험적인 전자음악이나 우주에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좋아해서 그런 성향이 음악에 묻어나오는 것 같기도 하다.

 

보컬적인 측면에서는 왠지 이상은과 겹친다. 그녀의 음악에서도 영향을 받았는지?

그분의 음악을 이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다. 똑같은 피드백을 여러 번 받고 나서 이상은 씨의 음악을 접했는데, 음색이 비슷한 것 같더라. 아무튼, 나에게는 감사한 일이다.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얻은 영감을 자신의 곡으로 표현한 뮤지션이 상당히 많은데, 최근 국내에서는 빈지노의 “Dali, Van, Picasso”가 유사한 케이스였다. 당신의 “Ed Ruscha” 역시 그런 점에서 흥미롭지만, 풀어내는 방식에서는 분명 다르다. 뭘 말하고 싶었나?

영화 ‘Midnight in Paris’처럼 평소 존경하는 예술가나 철학자와 만나는 상상을 하며 잠드는 걸 좋아하는데(꿈으로 연결된 적이 많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음악으로 표현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충동적으로 만든 곡이다. 딱히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기보다는 이 곡으로 인해 누군가의 사색이 시작되길 바랐다.

 

본인의 아이폰 음악 중에서 가장 오래된 곡이라면?

MP3는 없고 평소 CD를 수집하는데, 지금 가장 밑에 있는 CD가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이다.

 

장르적인 의식을 하는지.

전혀 하지 않는다. 현재 음악적 정체성을 찾는 중이다. 앞으로 어떤 장르의 음악이 내 안에서 나올지는 나도 모르는 일이다. 일렉트로닉 뮤직 메인 장르와 서브 장르까지 다하면 수없이 많은데, 그중에 굳이 장르를 골라서 구분한다는 게 필요한 일인가 싶다. 지금은 다양한 관점에서 실험하고 있다. 너무 재미있고 놀라운 경험의 연속이지만, 사실 음악을 만들 때마다 너무 다르게 나와서 걱정되는 부분도 많다.

 

CIFIKA 음악의 원천이라면.

‘호기심’이 내 음악의 원천이다. 음악과 관련되지 않은 모든 것에서 영감을 받는다. 과학 다큐멘터리, 내가 좋아하는 영화, 존경하는 작가의 글, 현대미술 등 아름다운 요소를 발견하면 나는 그걸 아무도 모르게 내 음악으로 훔쳐온다. 하하.

 

사운드클라우드를 통해 처음으로 공개한 트랙이 “Cali Vibe”다. 혹시 이전에도 만들어놓은 트랙이 있나?

사실 “Race”를 먼저 만들었다. 그 다음 날에 만든 곡이 ”Cali Vibe”다. “Race” 전에 만든 곡이 하나 더 있는데 그건 증발시킬 생각이다. 혁오 밴드의 ”와리가리“와 ”Hooka”를 칠스텝(Chillstep) 버전으로 만든 커버 곡도 있지만, 그것 역시 구름 속으로 날렸다. 하하.

한국 여성 싱어로는 드물게 비트도 직접 만든다. 보컬과 비트메이킹을 모두 직접 하는 것이 긍정적으로 작용하는가?

자유롭게 곡을 만들 수 있다. 나는 애초부터 보컬을 염두에 둔 상태로 비트를 만들고, 미리 써놓은 가사를 멜로디와 맞춰나가면서 곡을 만든다. 내가 만든 비트에 정확히 원하는 만큼의 보컬을 표현하는 거다. 이렇게 작업을 하면 완전히 내 노래라는 생각이 든다. 다른 프로듀서가 만든 곡에 보컬을 얹는 형식의 작업도 재미있지만, 프로덕션과 보컬, 두 가지 요소를 내가 모두 컨트롤할 수 있다는 점이 굉장히 매력적이다. 중간에 드럼 킥을 뺄지, 보컬의 어느 부분을 잘라 25번째 바(Bar)에 샘플링을 할지, 모든 게 내 선택에 달려 있다.

 

지금까지 함께한 동료들이 있다면.

최근에 공개한 “Pale”에서는 프로듀서 jimmy와, ”Sinkansen”과 “Decay”는 프로듀서 Zighway와 함께했다.

 

현재 사용 중인 음악 장비를 알려 달라.

15인치 맥북 프로, 에이블튼 라이브, 슈어 58 마이크, 아포지 듀엣2 인터페이스, 야마하 HS5 모니터, 야마하 DGX-650 키보드.

 

뮤지션으로서 지향점은?

장르나 지역에 국한되지 않은 실험적인 전자음악을 만들고 싶다.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음악. 해외에서 한글로 완성된 전자음악으로 공연한다면 아주 멋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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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기복이 심한 편인가?

그렇지 않다고 믿고 있다. 다만 음악을 시작하고 나서부터 음악적으로나 정서적으로 교감할 수 있는 동료 뮤지션이 주변에 없어서 힘들었다. 혼자 고립됐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래서 내년 봄에는 한국에 갈 계획이다.

 

함께 작업하고 싶은 한국 뮤지션은 누구인가.

오혁, Jayvito, 선우정아, 자이언티, 언니네 이발관.

 

10년 내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나?

추구하는 사상, 예술 세계가 비슷하거나 상이한 여러 아티스트들과 다양한 일을 해보고 싶다. 세계적인 음악 페스티벌에서 한국말로 공연하고 싶다. 또한, 새로운 전자음악의 길을 걷고 싶다. 오랜 길을 함께 걸어갈 동료들을 한국에서 만날 것 같아 벌써 설렌다.

CIFIKA 공식 사운드클라우드 계정

진행/텍스트 ㅣ 권혁인
사진 ㅣ 조유경

MONKIDS 신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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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히 사랑받는 브랜드는 그 나름의 철학을 지닌다. 몬키즈(Monkids)의 디렉터 신재섭은 오랜 시간 모자를 만들어 왔다. 홀로 모든 일을 도맡아서 진행하는 이의 고집은 브랜드에서 고스란히 드러나기 마련이다. ‘외길’이라는 말은 그를 제일 잘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닐까. 국산 모자의 새로운 기준, New Standard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몬키즈 신재섭을 만나보았다.

 

간단한 소개를 부탁한다.

브랜드 몬키즈(Monkids)를 운영하는 신재섭이라고 한다.

 

말투에 사투리가 섞여 있는 것 같은데?

24살 때 안동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그때부터 쭉 서울에서 지내고 있다.

 

처음 모자를 만들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서울에 올라와 날염, 인쇄 공장에서 3년 정도 일을 했다. 공장 일을 그만두고 나서는 친구 한 명과 티셔츠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사실, 몬키즈는 크루넥(Crewneck)부터 만들기 시작한 브랜드다. 어느 날, 그래픽을 담당하던 친구가 좋은 기회를 얻어 이직했다. 혼자서는 그래픽을 할 수 없으니 막막하더라. 그래픽을 배제한 상품이 뭐가 있을까 골똘히 생각하던 중에 모자가 생각났다. 원래 모자를 전문적으로 하려는 계획은 아니었는데, 막상 해보니 모자를 만드는 게 꽤 재미있었다. 그래서 몬키즈는 모자 전문 브랜드가 되었지.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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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키즈의 메인 상품은 캠프 캡이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내가 캠프 캡을 좋아한다. 좋아하는 것을 만들었을 뿐이다.

 

모자 패턴까지 직접 제작하는 것인가.

그건 아니다. 공장에 제작 요청을 한 뒤 받아서 판매하고 있다. 대신 샘플을 위해 간단하게 만드는 일은 내가 하고 있다.

 

모자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라면?

전체적인 모양도 생각하고, 주자재와 부자재의 조합도 봐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품질이다. 무엇을 만들든 간에 품질이 떨어지면 안 된다.

 

고집 센 브랜드다. 나름의 철학이 있을 것 같은데.

매년 장롱에서 꺼내 쓸 수 있는 모자를 만들고 싶다.

 

품질이 뛰어난 것? 아니면 유행을 타지 않는다는 의미인가?

근본은 ‘내가 좋아하는 모자’라는 것이다. 내가 좋아서 산 모자니까 유행이 지나도 꾸준히 쓸 수 있는 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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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키즈의 새 슬로건, 뉴 스탠다드(New Standard)의 탄생배경에 대해 알려 달라.

기존 모자들은 대부분 해외 원단을 써서 다시 제작하기가 번거로웠다. 품목당 약 100개 정도의 수량을 생산하고 더는 만들지 않았으니까. 이에 소비자들로부터 불평 아닌 불평을 들었고, 이런 한계가 언젠가 브랜드의 발목을 잡지는 않을까 생각했다. 고민 뒤에 탄생한 것이 뉴 스탠다드다. 내가 만드는 모자가 새로운 표준이 될 것이라는 뜻이지. 일종의 포부다. 뉴 스탠다드가 몬키즈의 시그니처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소량 제작의 장, 단점은?

판매자와 소비자 양쪽의 입장이 있는데, 나로서는 재고 부담이 적다는 것이 장점이다. 단점은 많은 돈을 벌 수 없다는 것. 고객은 리미티드의 느낌을 강하게 받을 수 있다.

 

몬키즈의 제품이 가장 잘 팔리는 딜러 숍은 어디인가.

역시 소품(Sopooom)이다.

 

몬키즈 자체 사이트에서 제품 판매를 하지 않는 것이 의아하다.

일단 나 혼자 쇼핑몰을 운영할 수가 없다. 어떻게 보면 포기한 일이기도 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의 문제다. 처음 위탁 숍에서 몬키즈의 제품을 팔아주는 것에 대해 굉장히 감사하게 생각했다. 첫 딜러 숍은 틴틴이라고 불리던 이태원 다코너(Dakoner)였다. 그다음이 GVG. 그 두 군데에서 판매를 시작했다. 오프라인에서만 판매해야 하던 때였으니까. 소품도 마찬가지다. 제품을 맡기는 입장에서 브랜드가 좀 잘된다고 자체 판매를 시작하면 위탁 숍에 소홀해질 것 같았다. 판매 과정에서 내가 도움을 많이 받아서 지금은 보답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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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의 트렌드를 파악하면서 브랜드를 진행하는지.

누구도 유행을 확신할 수는 없지만, 오랜 시간 일을 하다 보면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하다. 유행의 흐름은 피라미드 구조와 흡사하다. 상위에 있는 하이엔드 디자이너 브랜드, 셀레브리티 주도로 약간의 움직임이 생긴다. 이후 하위 브랜드로의 전파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유행에 민감한 소규모 브랜드가 진행하면 다음엔 대기업이 손을 대고, 마지막으로 동대문 시장에서 대량 생산하는 방식이다. 소비도 마찬가지다. 일례로 슈프림(Supreme)이 3-4년 전 정점을 찍었을 때, 캠프 캡이 큰 인기를 끌었다. 그 뒤 놈코어(Nomcore)라는 90년대 패션이 돌아오며 볼 캡, 6 패널이 함께 유행하고 있다. 볼 캡의 인기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다. 최근 해외에서 많은 사람이 캠프 캡을 쓰기 시작한 걸 보면, 캠프 캡 또한 다시 유행할 거고.

 

1인 브랜드 운영은 분명 어려운 길이다. 이를 고집하는 이유는?

일단 내 자신 외에 다른 사람을 믿을 수가 없다. 누구와 함께 일하려면 또 다른 내가 있어야 가능하겠지만, 막상 또 다른 나도 믿지 못할 것 같다. 하하. 직원을 둔다고 했을 때, 업무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크다 보니, 그걸 맞추지 못하면 일을 쉽게 못 주는 성격이다. 공장에 일을 맡기고 계속 확인하러 가는 게 내 일상이다. 혼자 모든 공정을 처리하다 보니 꼼꼼히 확인하면서 일하는 습관이 생겼다.

 

홀로 제작과 마케팅을 병행하는 것은 상당히 힘든 일일 텐데.

몬키즈의 마케팅은 특별한 것이 없다. 지하철에 앉아서도 할 수 있는 정도니까. 보면 알겠지만, 대부분 버스 정류장, 지하철 등 이동하며 찍은 것이 많다. 집에서 찍은 것도 있고. 1인 체제로 모든 일을 하는 것은 분명 비효율적이다.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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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단은 보통 어디서 구하나.

모자의 원단은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다. 분명 원단에 대해서 나보다 훨씬 많이 알고 있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디자이너 같은 경우에는 직접 그래픽을 개발할 수 있지 않나. 나 같은 경우에는 어느 정도 원단을 잘 공수하고 있다는 정도? 좋은 원단 업체 사장님을 만나 많은 도움을 받기도 했고.

 

해외에서 원단을 공수할 때가 많다고 들었다. 어떤 루트로 접근한 건가?

돌아다니다가 건지는 식이다. 원단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상태도 무작정 갔다가 없으면 허탕 치는 거지. 일본에 두 번 다녀왔는데, 모두 원단을 구하러 갔다. 많은 종류의 원단 중에서도 모자로 제작 가능한 것, 기준에 적합한 것을 찾는 게 우선이다. 국내에서 해외 원단을 구할 때도 마찬가지다. 몬키즈의 원단은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 반영되는 부분이다.

 

영감은 어디서 얻는가.

내 모든 관심사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개인적으로 스니커를 매우 좋아한다. 머릿속에 이미 스니커에 관련한 디자인 수십 가지가 있다. 심지어 이번에 나온 이지 부스트 350의 모자 디자인까지 모두 끝냈다. 제작만 못 했을 뿐이지. 하하. 로니 피그가 제작했던 아식스 젤 라이트 3샐먼 토(Asics Gel lyte Salmon Toe) 제품은 무려 샘플까지 만들었다. 신발의 다양한 디테일을 모자에 적용하는 방법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 브랜드를 하다가 지치거나, 상대적으로 비수기인 겨울에 직접 제작해보려고 재봉 연습도 종종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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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 스크린(Silk Screen) 강연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실크 스크린이 대중화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했다. 굉장히 상업화된 기술일 뿐이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작업이다. 대량 제작 공정에 적합한 방식이라 제품 한, 두 개를 만들 때는 번거롭지만, 배워둔다면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실크 스크린은 굉장히 재밌는 요소가 많다. 다양한 그래픽이나 포스터에도 적용할 수 있을 만큼 그 범위가 넓다.

 

몬키즈 모자의 매력은?

사실 소비자의 피드백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하하.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것? 누구나 쓰지 않는 모자. 아는 사람들이 많이 없다는 게 장점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브랜드는?

일본의 캐주얼 아웃도어 브랜드 나나미카(Nanamica)를 좋아한다. 최근 인상 깊었던 브랜드는 아크로님(Acronym). 기능성 의류를 상당히 좋아한다. 우산을 들고 걷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자연스레 기능성 소재를 사용하는 디자이너 브랜드를 선호하게 되었다. 디자이너 중에는 쿠라이시 카즈키(Kazuki Kuraishi)를 꼽고 싶다.

 

몬키즈의 특별한 마케팅 전략은?

나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 마케팅의 포인트다.

 

좋은 모자의 조건은?

예전 좋은 모자의 기준은 핏, 퀄리티, 디테일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고객이 만족하는 모자, 혹은 강한 구매력을 당기는 모자가 좋은 모자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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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프림 캠프 캡은 좋은 모자인가?

좋은 모자다. 전체적인 밸런스도 좋고, 소재가 바뀔 때 부자재도 따라서 변형시키는 작업은 제작자의 측면에서 봤을 때 전반적으로 신경을 많이 썼다는 인상을 준다. 슈프림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번엔 나도 하나 샀다. 하하. 나일론으로 제작된 제품인데, 상대적으로 어려운 공정을 잘 처리했더라.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탁월하다.

 

추천하고 싶지 않은 모자는 어떤 것인가.

쉽게 말하긴 어렵지만, 중국에서 생산된 모자는 조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정확히는 중국에서 생산된 미화 40달러 이상의 모자. 중국산 모자는 대개 오래 쓰지 못한다. 싸게 만든 것을 싸게 사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그렇지 않다면 분명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새롭게 도전해보고 싶은 부분이 있는지.

지금 몬키즈에서 나오는 제품은 비슷한 모자 형태에 소재만 바뀌고 있다. 디자이너 브랜드에서 나올 법한 특이한 외형의 모자는 없었다. 아까 스니커의 디자인, 디테일을 적용한 모자 이야기를 조금 하지 않았나. 그동안 계획했던 스니커 콘셉트의 모자를 제작해보고 싶다.

 

꾸준히 모자를 만들어오면서 아쉬운 점은 없었나?

공들인 제품에 10만 원 이상의 가격이 매겨지더라도, 그것을 소비자가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패션 브랜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필요하다. 무책임한 말일 수 있지만, 제작하는 사람도 소비자를 너무 두려워하면 안 될 것 같다.

 

몬키즈의 앞날, 어떤 것을 기대해 볼 수 있을까?

기능성 소재를 사용한 옷을 제작해보고 싶다. 의류는 예전부터 항상 욕심이 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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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중에 기능성 소재를 사용한 모자가 있는지.

기능성이 좋은 모자는 물론 있다. 고어텍스도 원단을 아예 못 구하는 것은 아니니. 기본적으로 아웃도어 브랜드는 고어텍스와 계약을 체결한 상태라 그런 데서 발매하는 모자는 방수 기능이 탑재되어 있다.

 

패션 브랜드에서는 기능성 소재를 사용한 모자를 찾아보기 힘든 것 같다.

아웃도어를 제외한 패션 브랜드에서는 기껏 해봐야 나일론 소재를 쓰거나, 생활방수 코팅을 해놓은 정도다.

 

모자를 관리하는 팁을 하나 알려 달라.

모자를 세탁하면 형태가 무너지기 때문에 세탁하지 않는 것을 추천한다. 근본적인 방법은 모자를 벗고 땀을 말린 후에 다시 쓰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다. 부득이하게 세탁해야 한다면, 짧은 시간, 빠르게 세탁해야 한다. 때를 빼기 위해 물에 담가 놓는다면 이염이 일어나기 쉬운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모자를 제작할 때는 보통 겉감과 안감을 접착하는 방식을 많이 쓴다. 힘을 줘서 빨거나 물에 오래 담가 놓거나, 비벼서 빨면 두 부분이 쉽게 해체된다. 건조할 때는 모자의 챙 쪽을 하늘로 향하는 것이 좋다. 이후 다 말린 모자를 보관할 때 모자를 반 접어서 차곡차곡 넣는 것을 추천한다. 그리고 모자를 뒤집어쓰는 것도 사실 모자의 수명을 단축하는 일이다. 뒤통수가 이마처럼 생긴 사람은 없지 않나.

 

몬키즈의 시작과 현재, 어떤 것이 달라졌나.

글쎄, 마음은 항상 똑같다. 달라진 것은 모자의 종류가 많아진 것. 그리고 알아봐 주시는 분들이 많아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조금 더 일에 치여 살고 있다.

 

앞으로 어떤 브랜드가 되고 싶은가?

지금 같은 브랜드면 좋을 것 같다. 규모를 키워서 돈도 더 많이 벌고, 벤츠고 사고, 롤렉스도 사면 좋겠지만, 그런 욕심보다는 꾸준히 이어나가고 싶은 바람이 더 크다.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 주변에서는 불가능한 시장에 뛰어들었다고 말하더라. “지금 서있는 자리에서 한 바퀴 돌아봐라, 모자 쓴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고 하면서. 하하. 그땐 정말 100명 중 2~3명밖에 없었다. 지금은 모자 안 쓴 사람보다 쓴 사람을 찾는 게 더 쉽지 않나. 이제는 액세서리가 아닌 의류의 일부가 될 정도로 다양한 모자를 찾아서 쓸 수 있는 시대가 왔다. 더불어 소비자도 유행에 휩쓸려서 착용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관심 있는 자신만의 아이템을 찾을 수 있는 노력을 했으면 한다.

 

진행/텍스트 ㅣ 오욱석
사진 ㅣ 백윤범

Monkids의 공식 텀블러 계정

서울 헤리티지 작가 인터뷰 Part.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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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전, 서울 헤리티지(Seoul Heritage)에 참여한 9명의 작가들은 서울을 통해 관객들과 다양한 시각을 공유했다. 또한, 서울 헤리티지 후기 인터뷰 필름인 ‘서울, 각자의 시선’에서는 작가의 의도, 사진에 담긴 이야기, 각자의 서울을 엿볼 수 있었다. 분량상 인터뷰 필름에 미처 다 담지 못한 대화를 공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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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서울 헤리티지 사진전에서 가장 많은 사진을 전시했다. 왜 그렇게 욕심을 부렸나?

송대섭(이하 송): 많이 전시할 생각은 없었다. 좋은 사진이 몇 장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까지 찍어온 사진들을 다시 쭉 훑어보니 예전에는 그냥 지나쳤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는 괜찮은 사진인지 몰랐던 거지. 그렇게 숫자를 좀 늘리다 보니 계획보다 많아지더라.

 

예전 여자 친구 사진을 가장 큰 A1 크기로 인화했더라.

송: 만약 내가 그 사진을 여자 친구라고 생각했다면, 오히려 이번 전시에서 뺐을 것이다. 그건 내가 찍은 필름 사진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이었고, 분명히 좋은 사진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크게 인화한 거다.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의도가 아니니 오해하지 마라. 하하.

 

사진을 찍으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

송: 나는 좋은 샷(Shot)이라고 생각한 것들은 전부 사진을 찍을 때 그 순간이 기억난다. 이때 아니면 못 찍겠다고 판단해서 찍은 것들이니까. 쓸데없는 샷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은 현상해도 별로더라.

 

어떤 피사체를 봤을 때, 꼭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가.

송: 특별한 느낌이 나를 스쳐 갈 때가 있다. 그 감정이 언제 찾아올지는 나도 모른다. 마치 탐지기 센서가 울리듯, 그 순간이 오면 나는 카메라를 들고 찍을 뿐이다. 몸으로 그냥 감지하는 거지. 그래서 그 센서가 울릴 때, 카메라가 없으면 굉장히 아쉽다.

000022 (2)서울 헤리티지 송대섭 전시 사진 

당신은 스케이터이자 예술가로서 조각, 페인팅 등 다양한 예술 활동을 하고 있다. 특별한 계기가 있나?

송: 자연스럽게 하는 거지. 사람은 표현하고 싶은 게 있을 때, 다양한 수단으로 그것을 표현하지 않나? 그게 말이나 글이든, 사진이 됐든, 그림이 됐든지 간에 말이다. 표현하고 싶은 감정, 하고 싶은 말을 내가 원하는 방식을 통해 전달하는 거다.

 

서울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장소는?

송: 동묘. 예전에 동묘에서 새벽일을 했는데, 그때 사진을 많이 찍었다. 아마 종로 쪽에서 일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 기분을 모를 거다. 모두가 자는 새벽에 종로는 가장 분주하다. 사람들이 땀 흘리고 정신없이 돌아다니는데, 그게 나에게는 되게 흥미로운 장면이었다.

 

생경한 경험이었을 텐데, 어떤 기분이 들었나?

: 특별히 그 사람들에게 동정심이 일지는 않았다. 그들은 굉장히 자연스러웠고, 슬퍼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일상을 사는 보통 사람들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부모님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더라. 사지 멀쩡하게 태어나서 이런 데서 땀 흘리고 일할 수 있다는 것이 새삼 기뻤다. 마치 어렸을 때, 편지 쓰는 기분 같은 것?

 

앞으로 더 찍고 싶은 사진들이 있다면?

송: 건설업자들이나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들을 찍고 싶다. 그 사람들의 포트레이트(Portrait)를 찍어주고 싶다. 아니면 자연스럽게 일하는 현장을 찍는다든지. ‘노가다’는 하찮은 직업이라는 게 일반적인 인식이잖나. 그런데 그 일은 사실 엄청 위대한 거다. 노동자는 아버지다. 나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 그들이 일하는 그 순간이 아름다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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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사건 1주기 때 찍은 사진들을 중심으로 이번 전시를 구성했다. 그 사건 이후 당신의 삶은 어떻게 변화했는가.

정충진(이하 정): 인간적으로 변화한 부분은 없다. 오히려 더 망가졌을 수도 있다. 가족들과의 관계도 더욱 안 좋아졌다. 그 당시에는 저항하려는 의지도 강했고, 나름 노력도 했지만, 전혀 바뀌지 않는 세태를 보면서 오히려 다 내려놓게 되었다. 미온적으로 변한 것 같기도 하고. 그 뒤로는 어떤 작업을 하더라도 내 자신에게 더 많은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의미를 찾고 싶었다.

 

그때 종로, 광화문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많이 찍었다.

정: 돌아다니면서 뭐라도 남기고 싶었다. 그래서 휴대가 용이한 소형 카메라가 필요했는데, 자연스럽게 자동 필름 카메라를 접한 것 같다. 특별히 필름을 고집한 것은 아니고. 필름 사진이 나에게 큰 의미로 다가오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여러 가지 배운 것들이 있다.

 

배운 것들이라면?

: 내 또래 친구들은 아날로그의 끝자락에서 성장했다. 그래서 디지털이 더 익숙하기 마련인데, 필름 카메라를 사용하면서 손쉽게 아날로그 프로세스를 체험할 수 있었다. 앞서 한 대답과도 일맥상통한 부분인데, 작업의 본질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아날로그’는 나에게 또 다른 의미를 만들어줬다.

충진서울 헤리티지 정충진 전시 사진

촛불 시위 때 사진이 인상적이다. 굉장히 흔들린 사진들이었는데, 의도한 것인가?

정: 찍을 때는 별생각 없었는데, 성능이 좋지 않은 소형 카메라여서 이런 사진이 나온 것 같다. 어쨌든 꽤 재밌는 사진이다. 촛불 시위가 한창일 때였다. 나도 그 현장에 있었고, 흥분된 상태에서 마구 셔터를 눌렀는데, 인화하고 나서 사진들을 늘어놓으니 어떤 군중의 흐름 같이 보이더라. 당시 과열된 분위기가 전달된 것 같아서 좋았다.

 

현재 다양한 영상을 만들고 있다. 취미로 사진을 찍는 것과 영상 작업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나?

: 영상을 만드는 일과는 달리 사진은 마음 편하게 대할 수 있다. 어차피 사진을 찍는 것은 나에게 있어 소비 행위이기에 카메라는 부담 없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 같은 거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사진이 더 솔직할 수도 있다. 내가 보고 느끼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반면에 영상 작업은 그렇지 못하다.

 

앞으로 서울의 어떤 모습을 담고 싶은지.

정: 재개발 지역, 다가구 주택 지역을 찍고 싶다. 이제 이런 것들은 오래 지나지 않아 전부 철거될 수밖에 없다. 내가 사는 이곳 염리동도 철망을 사이에 두고 마포 래미안이 들어서 있다. 심지어 같은 동인데 새로운 아파트나 건물이 들어서면서 얼마나 많은 입주자가 쫓겨났을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이 과정에서 나는 한쪽 입장에 설 수밖에 없다. 서민 입장에서 이러한 정부의 작태를 반길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내가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고, 사진을 통해 기억하려고 한다.

 

웹상에서도 훌륭한 화질의 사진을 감상할 수 있다. 왜 사람들이 굳이 사진전을 찾는다고 생각하는가?

: 영화 공부하는 친구들에게 왜 영화를 만들고 싶으냐고 물으면 우스갯소리로 “영화관에 걸고 싶어서”라고 답한다. 이제 각종 웹사이트, 토렌트, 유튜브를 통해서 보고 싶은 영화를 볼 수 있는 시대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영화관엘 간다. 영화관에서 집단적인 체험을 하는 것과 유튜브로 영화를 보는 행위는 천지 차이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전시회를 간다는 것은 작가의 프로필과 작품을 찾아보고, 전시장에 가기 위해 옷을 입고, 버스를 타고, 입장료를 내서 사진을 감상하는 일련의 체험이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본 사진이 감흥 없으면 비판할 수도 있고, 맘에 든다면 책자나 포스터를 구매할 수도 있고 그런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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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서 상경한 지 10년이 됐다. 자신이 서울사람이라고 생각하는지?

백윤범(이하 백): 제주에서 겪은 20년보다 서울에서 지낸 10년이 몇 배 더 강렬했다. 지금 내가 있기까지는 서울에서의 경험이 더 크게 좌우한 것 같다.

 

서울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이라면?

백: 영등포 근처에 문래동 쪽방촌이 있다. 지나가다가 호기심에 들렸는데, 옛날 드라마에서 볼 법한 시골 광장 비슷한 곳이 보이더라. 그곳에 정신지체환자, 도박하는 사람들, 그리고 어린아이들까지 한데 모여 있는 걸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처음에는 카메라를 들 엄두도 나지 않았다.

 

10년 동안 서울에서 살면서 무엇을 느꼈나.

: 극과 극을 달리는 곳. 여기 한남동도 굉장히 부촌으로 알려졌지만, 저기 보광동만 넘어가도 완전히 이야기가 달라진다. 약은 도시다.

 

이번 전시에 설치한 사진 중 대부분은 노숙자 사진이다.

: 처음에는 호기심에 찍기 시작했다. 흔하지 않은 광경이니까. 솔직히 보통 사람들과는 조금 다르지 않나. 그런데 이런 분들도 자주 찍다 보니 이제는 친해져서 같이 대화도 몇 마디 나눈다. 처음에는 그들이 먼저 말을 걸어서 얼떨결에 대답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자연스러워졌다. 그냥 노숙자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더라.

윤범백서울 헤리티지 백윤범 전시 사진

어떤 피사체에 끌리는가?

백: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장면들.

 

보편적이지 않은, 관객에게 불편함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사진에 집착하는 이유라면?

백: 누군가의 기준에는 아름답지 않은 피사체일 수도 있지만, 나는 그런 사람들이 좋다. 꼭 예쁘고 아기자기한 것들만 찍을 필요는 없지 않나. 나에게 감정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전업 포토그래퍼가 아닌데, 전시에 부담은 없었나.

백: 엄청나게 부담됐다. 전시를 찾은 관객들이 좋게 봐주신 것 같아 다행이다. 사실 내세울 게 없는데…. 고맙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하고. 일단은 더 열심히 사진을 찍어야겠다는 생각뿐이다.

 

필름 카메라를 고집하는 이유는?

백: 필름 카메라를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필름은 무한대로 찍을 수 없어서 한 장이라도 더 정성을 쏟아서 찍게 된다. 게다가 수동 카메라라 시간이 걸리고 불편하지만, 조금 더 순간을 제대로 포착하기 위해 순발력을 키우고 있다.

 

당신이 파고드는 Street Photography는 현대에 와서, 특히 한국에서 초상권 침해가 우려되는 분야다.

백: 솔직히 신경 쓰고 싶지 않다. 내가 변명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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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 카메라를 즐겨 사용하는 이유는?

김재룡(이하 김): 하나를 찍어도 신중하게 촬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 카메라로 연사하다가도 필름 카메라를 쥐게 되면 긴장감이 든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비슷한 이유에서 필름 카메라를 사용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필름 특유의 색감도 매력 있지만, 그건 디지털로도 표현할 수 있는 부분이니까.

 

색맹이라서 주로 흑백 사진을 찍는다고 들었다.

: 완전 색맹은 아니고 색약, 색각에서 더 심한 정도다. 나는 스무 살 때까지 신호등이 빨강, 하늘색으로 나뉜 줄 알았다. 고등학교 때 디자인을 전공해서 대학도 디자인 과를 지망했는데, 색맹검사에서 전부 틀렸다. 처음에는 내가 장난치는 줄 알더라. 숍에서 스태프로 일할 때도 손님이 특정 색상의 의류를 가져다 달라고 하면 자주 틀리곤 했다.

han river서울 헤리티지 김재룡 전시 사진

개인 웹사이트에 가보니 한국 댄서들을 찍은 사진이 많더라. 예전에 춤을 췄던 거로 알고 있는데, 왜 그만뒀는지?

: 강직성 척추염이 발병하고 나서부터는 더는 춤을 추지 못할 거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자연스레 댄서들을 찍게 됐다. 춤을 그만둘 때는 굉장히 마음 아팠지만, 그렇기에 새로운 삶을 얻었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매일 먹는 약도 이제는 친구처럼 느껴진다. 예전에는 공연도 많이 찾아다니면서 촬영했지만, 이제는 마음 맞는 댄서 분들과 소규모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댄서 신(Scene)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줄었다. 그런데도 꾸준히 쫓아다니면서 촬영한 이유는 무엇인가?

김: 나는 뛰어난 댄서는 아니었다. 나름대로 굉장히 열심히 했는데…. 건강 문제로 춤을 그만두고 나서부터 무작정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댄서에 대한 인식도 안 좋았다. 그래서 댄서는 단순히 딴따라가 아니라 몸으로 표현하는 예술가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부터 화려한 공연 장면까지 많은 것들을 담았다. 올해 뉴욕 포토그래퍼, 자멜 샤바즈가 방문했을 때, 잠깐 대화를 나눌 시간이 주어졌는데 그때 굉장히 좋은 조언을 많이 들었다. 아무도 안 하는 일을 당신이 했을 때, 그 가치는 시간이 보답해 줄 것이라고. 그러나 그것을 기대하고 사진을 찍지 말라고 말이다.

 

본인이 생각할 때, 좋은 사진의 기준이라면?

김: 섣불리 말하기는 조심스럽지만, 개인적으로는 어떤 이야기가 느껴지는 사진이 좋다고 생각한다. 사진의 구도가 훌륭하다거나 촬영자의 내면이 느껴지는 사진 역시 좋은 사진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사진을 찍는 것이니까. 제목이나 말로 설명해서 이해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 자체로 생각할 수 있게끔 하는 사진이 좋다.

서울 헤리티지 인터뷰 필름, ‘서울, 각자의 시선’

텍스트/사진 ㅣ 권혁인

사진(김재룡)ㅣ 본인 제공

김윤기(Yoonkee Kim)

아티스트 김윤기는 ‘곤충스님 윤키’라는 이름으로 2000년, 데뷔 앨범 [관광수월래]를 발표하며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실험적인 음악으로 당시 언더그라운드 신(Scene)에 신선한 충격을 던진 그는 4번째 정규 앨범, [Asian Zombie]의 발매를 기점으로 그 영향력을 일본에까지 넓힌다. 이후 런던과 일본을 오가며 예술 활동을 이어온 김윤기는 한국으로 돌아온 뒤, 한동안 보이지 않았다. 음악을 그만둘 생각까지 했다는 그가 몇 년간의 공백을 깨고 지난 4월, 8집 앨범 [She’s Ready Now]를 발표했다.

 

 

아직도 많은 이들이 김윤기를 기억한다. ‘곤충소년 윤키’라는 이름은 당신의 실험적인 음악과 함께 뇌리에 깊게 남았다. 굳이 본명으로 돌아온 이유가 있다면?

예전에는 예명과 본명을 모두 쓰고 싶었다. 그래서 나온 게 ‘곤충소년 윤키’라는 이름이다. 그러나 이제는 본명으로만 활동하고 싶어서 그냥 ‘김윤기’를 사용한다. [Kim]이라고 불리던 이전 무제 앨범부터 내 이름을 적기 시작했다. 화가들이 가명을 쓰지 않는 것처럼 그림을 그리면서부터 본명을 더욱 드러낸 것 같다.

 

활동할 때마다 예명이 조금씩 바뀌는 걸 보면서 당신은 이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고 생각했다.

곤충스님 윤키라는 이름을 사용할 때, 나는 옥수동 현대아파트에 살았다. 거기에 절이 하나 있었고, 그걸 보면서 스님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절 주위에 곤충도 많아서 곤충스님 윤키가 됐다. 그런데 지금은 그곳에 살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이름을 바꿨다.

 

다른 이름은 외국인들이 부르기 어려워서 다시 본명을 쓴다는 말을 어떤 인터뷰에서 봤던 것 같다.

맞다. 외국인들에게 나를 김윤기라고 소개하는 것이 훨씬 편했다.

 

홀연 캐나다로 떠난 이유는 무엇인가?

두 장의 앨범을 내고 공익 생활을 했다. 그때 안 좋은 일들을 겪었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다. 처음에는 미국에 가고 싶었는데, 알다시피 절차가 매우 복잡했다. 나를 반기는 나라가 아니라는 생각에 결국, 캐나다로 떠났다. 캐나다에는 아는 누나가 살았고, 머물기에도 까다롭지 않은 국가였다. 가서 곡을 쓰면서 좀 쉬고 싶었다.

 

다시 영국으로 갔다.

음악을 계속하기에 밴쿠버라는 도시는 움직임이 너무 적었다. 좀 심심해졌는데, 캐나다에 사는 누나가 런던에 가볼 것을 권유했다. 런던은 패션, 음악 등 활발한 교류가 발생하는 곳이라고 했다.

 

런던에 거주할 때 완성한 [I worry, too] 앨범은 기존의 음악보다 더욱 로 파이(Lo-Fi)한 사운드가 두드러진다.

녹음기의 차이인 것 같다. 그전까지는 8트랙 녹음기를 썼다가 [I worry, too]에서는 4트랙 녹음기로 바꿨다. 4트랙 녹음기는 4가지 악기를 사용할 수 있는데, 따라서 드럼, 기타, 베이스, 노래만 담았다. 8트랙은 더욱 악기를 풍부하게 쓸 수 있지만, 4트랙도 나름의 맛이 있다.

타이틀 곡 “ihealyouyouhealme”는 음악도, 뮤직비디오도 굉장히 평화롭다. 런던에서의 생활이 그만큼 만족스러웠나?

정말 즐거웠다. 영국 레코드사에서 앨범을 내지 못한 점이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좋은 경험을 했다. 스케이트보드와 음악을 통해 친구도 많이 사귀었다. 친구들과 스케이트보드를 타다가 인연이 닿아서 영국 스케이트보드 숍에서도 일한 적이 있다. 그들에게서 딱히 인종차별을 받지는 않았다.

 

당시 영국 덥(Dub) 사운드에 영향을 받았나?

오히려 한국에 있을 때, 그런 음악을 더 많이 들었고, 영국에서는 7,80년대 큐어(Cure), 프린스(Prince), 아니면 마돈나(Madonna)나 데피치 모드(Depeche Mode)와 같은 것들을 들었다. 2006년 즈음에는 70년대 사이키델릭 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런 요소들이 [I worry, too] 앨범에 들어간 것 같다.

 

영국에서 돌아온 이유는 무엇인가.

3년간의 학업 기간이 끝났다. 비자도 더 안 나올 것 같았고, 가족도 너무 그리웠다.

 

계속 머물고 싶지는 않았나?

물론 더 있고 싶었다. 영국에서 앨범을 내고 활동하면 왠지 DJ Shadow처럼 될 것 같았다. 하하. 그러나 3년간 학생 비자로 머물러서 또 공부한다고 해봤자 비자가 나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I worry, too] 앨범에서 서울은 각박하다는 표현을 했는데, 한국에서 지내는 요즘은 어떤가?

그 당시에는 자연주의자 같은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에 있다 보니까 그런 부분은 천천히 사라지고, 그냥 서울이 좋더라.

 

서울의 어떤 점이 좋은가.

일단 평화로운 것 같다. 영국에는 왕이 있지만, 한국에는 없다. 또 서울에는 가족이 있다.

 

한국 언더그라운드의 뮤지션의 앨범이 외국에서 라이센스되는 일은 흔치 않다. 일본에서 어떤 음반을 발매했나?

일본에서 내 음반은 [Old Habits], [Asian Zombie],[Han River 1994-2004] 순으로 발매되었다. 일본에는 음악을 찾아 듣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느꼈다. [Old Habits]는 한국에서 먼저 발매했지만, 일본에서는 [Asian Zombie] 다음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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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영국에서 일본을 오가며 활동한 것인가?

음반을 내고 공연, 인터뷰를 몇 번 진행했다. 일정을 마친 후, 런던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일본에 와서 투어를 하고 그랬다. 처음 갔을 때는 앨범 프로모션 형식으로 두 달 정도 머물렀다.

 

직접 만든 레이블, ‘슬로우 서울’을 통해 발매한 앨범도 몇 장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슬로우 서울 레코드에 대해서 간단히 소개하자면.

나 말고 다른 아티스트는 없었다. 당시 캬바레 사운드를 통해 [관광수월래] 앨범을 발표하면서 나도 레이블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역학을 공부하던 때라 이런 것도 일종의 무역이 아닐까, 하고 관심이 갔었다. 홍보도 직접 했다. 당시 상아, 향, 퍼플 레코드에만 유통을 시키면 될 것 같았다. 그러다가 일본 레코드 관계자들을 만나서 슬로우 레코드를 통해 발표했던 앨범을 다시 낼 수 있었다. [Mexican Vacation], [Old Habits], [Asian Zombie]는 사업자 등록도 안 하고 레코드숍에 데모테잎처럼 두고 판매를 했다. 이런 식으로 슬로우 레코드를 통해 일본의 레코드숍과 연결됐다.

앨범 [Electro-nics]는 피지컬 음반으로 딱 5장만 발매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음반을 내고 싶어도 당시 레코드 회사가 나를 안 찾아줘서 그냥 혼자 만들었다. 그래서 가격도 터무니없게 책정했다. 주파수(Zoopasoo) 레이블을 운영하시는 분에게 5장을 드렸는데, 아마 한 장도 안 나갔을 것이다. 장당 30만 원이니까.

 

2006년에 한국에 돌아온 뒤 자취를 감췄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음악을 그만두고 싶었다. 한국에 와서 녹음기, CD, 레코드를 다 버렸다. 여자친구와 헤어지듯, 다시는 보기 싫을 정도로 음악이 싫어졌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음악 안 하고 뭐하냐고 하셔서 다시 시작한 거다. 공백기였다.

 

혹자는 당신의 음악을 두고 ‘무국적음악’이라고 부른다. 당신이 추구하는 음악의 방향성이라면?

나는 한국적인 음악을 하고 싶다. 그래서 한국적인 음악이 무엇인지 생각하다가 라디오 소리, 매미 소리 같은 것들을 녹음했더니 왠지 한국의 동요 같았다. 내가 생각한 소리에 가까웠다. 이처럼 우리가 한국에서 향유하는 경험들, 피자를 먹고 롯데월드에 가고 산에 가서 매미를 잡는 등 모든 것들을 빨주노초파남보로 나열시켜보니 그 안에서 한국적인 것들이 발견되더라. 지금 이곳도 스타벅스 아닌가? 전통적인 찻집에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한국 사람이라 뭘 해도 한국적인 것이 아닌가 싶다.

당신의 음악이 장르 파괴적이라는 말에 동의하는가.

그 말은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만들고 싶은 음악은 한국적인 것이다. 다만 순수하게 한국 문화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결국, 외국의 것을 받아들이고 다시 새롭게 창조하는 것인데, 그런 부분에서 내 음악이 어떤 사람에게는 장르를 파괴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직접 노래하는 것도 즐기는가.

좋아한다. 노래도 하고 랩도 하고 이것저것 해본다. 그러다 보면 또 무지개가 그려지지 않겠나. 2021년에 발매할 앨범까지 모두 준비해놓았다. 6, 7장의 앨범이 대기 중이다.

 

윤키의 음악이라고 하면 대충 그려지는 그림이 있지만, [Electro-nics] 라든지, 덥 사운드를 담은 [Yoonkee meets Dennis Bovell] 같은 앨범은 실제로 들어본 리스너가 많이 없다.

홍보를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공연에서 보여주거나 얼마 전, TBS 인디애프터눈에 출연하는 등 나름 노력하고 있다.

 

당신이 한국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에게 준 영향이라면?

실험적인 작곡 방식이나 소리에 대한 접근이 아닐까. 그때는 그냥 친구들이 좋아하는 내 음악, 사운드를 더 발전시키고 싶었다. 이렇게 하면 장환이(DJ Smood)가 좋아하겠구나, 이런 식으로 말이다.

 

요즘 누구에게서 음악적 영감을 받는가?

최근 나에게 영감을 준 인물이 누구인지 찾다가 내가 떠올랐다. 요새는 내가 만든 음악이 자극을 주는 것 같다. 예전에는 도어스(Doors)도 좋아했고, 어레스티드 디벨롭먼트(Arrested Development)도 좋아했다. 음악을 그만두려고 결심한 이후로는 특별히 자극을 주는 아티스트가 없다. 물론 지금도 음악을 찾아 듣기는 하지만 딱히 와 닿지는 않는다. 2006년 이후로 나를 자극하는 음악은 없는 것 같다. 그래도 닐 영(Neil Young) 같은 아티스트의 음악은 지금 들어도 좋더라.

 

지금까지 꽤 많은 앨범을 냈다. 본인의 음악을 자평하자면?

되게 웃기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하고 그렇다. 그래도 자부심 비슷한 건 있다. 한국에서 이런 음반을 낸 것이 가치 있는 일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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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봄에 발표한 8집 앨범 [She’s Ready Now]는 컴퓨터로 녹음했지만, 지금까지는 쭉 홈 레코딩을 고집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요즘에는 컴퓨터로 작업하지만, 솔직히 지금도 예전에 버린 8트랙 녹음기가 생각난다. 다시 쓰고 싶어서 가끔 이베이를 뒤지곤 한다.

 

장비를 버린 것을 후회하는가?

그렇다. 버린 다음에 후회한 경험, 누구나 있지 않나?

 

이번 앨범이 이전의 음악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분노가 줄었다. 그리고 좀 더 차분해졌다.

 

오대리와 함께 120분짜리 “ENDLESS LIFE” 영상을 공개했다.

사실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내지 말아 달라고 했는데, 그분이 풀 버전을 유튜브에 올렸더라.

 

어떤 점이 맘에 안 드는가?

오디오는 맘에 드는데, 비디오가 그렇지 않았다. 만족할 만큼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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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백기 동안 그림도 그리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최근 드로잉 북 ‘DRY’를 선보였다. 다시 흥미가 생긴 건가?

그림을 그리고 싶은 욕구는 오히려 예전보다 덜한 편이다. 다만 놀고 싶지 않기 때문에 하루에 하나씩은 꼭 그리고 있다. 다시 그림을 그리면서 Dooonut과 함께 티셔츠도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가끔은 기분 좋게 그릴 때도 있다.

 

예전 그림들을 볼 수 없어서 아쉽다. 2006년 즈음 당신의 웹사이트 Slowseoul.com은 홈페이지 레이아웃은 물론, 윈도우즈(Windows) 사운드로 만든 BGM이라든지 신선한 요소가 많았다. 예전에 모아놓은 아카이브를 다시 공개할 생각은 없나?

파일, 원본 모두 버렸다. 뭔가를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한꺼번에 다 버리는 편이다. 나도 보고 싶은데 찾기 힘들더라.

 

그리고(GRIGO) 갤러리와의 인연은 언제부터 생긴 것인가.

전시회를 열고 싶어서 서울에 있는 갤러리 모든 곳에 이메일을 보냈다. 세 군데에서 연락이 왔는데, 그중 하나가 그리고 갤러리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야기가 잘 통해서 책과 음반 모두 그리고를 통해 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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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에서 음반을 낸 방식은 독특했다.

갤러리를 통해 음반을 내는 것도 괜찮은 방식 같다. 차분하고 안정적이다. 어떤 레이블을 통해서 앨범을 냈는데, 내 앨범을 칠푼이처럼 소개한 적이 있다. 그에 비하면 훨씬 만족한다.

 

앞으로의 계획은?

앨범을 홍보하고 인터뷰도 하는 것. 스티커도 만들고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 할 것이다.

 

상업적인 성공을 꿈꾸는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제대로 하고 싶다. 유명해져서 음반으로 돈을 더 많이 벌면 기분 좋을 것 같다. 사실 내년부터 아버지와 함께 블루베리 농사를 시작해서 부담감은 많이 없다. 욕심부리지 않고 하고 싶을 때 하는 정도로 만족할 것 같다.

 

개인적으로 더 하고 싶은 말은?

9월에 그리고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연다. 자세한 정보는 웹사이트(http://yoonkee.com)에서 확인해보길 바란다. 11월에 새 앨범이 또 나올 예정이다. 기회가 된다면 구매 부탁한다.

 

진행/텍스트/사진 ㅣ 최장민
진행 협조  ㅣ Plas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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