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 THE RECORD – #3 끝이 없는 순간, 너와 나의 연결고리를 찾아서.

사적인 얘기로 시작하자면, 얼마 전 SP-1200을 구입했습니다. E-mu의 샘플러 SP-1200은 1987년 발매되어, 80년대 말 골든 에이지 힙합과 90년대 붐뱁의 전성기 사운드 정립에 큰 역할을 한 악기죠. 물론 현재는 소형차 한 대 값에 육박하는 가격으로 사실상 구매를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E-mu의 공동 설립자이자 SP-1200의 디자이너 Dave Rossum이 얼마 전 리이슈를 발표했고, 가격이나 확인하자는 맘으로 프리오더 일시를 때맞춰 기다리다 정신 못 차리고 결제를 하고 말았습니다. 어쨌든 정식 명칭이 Rossum SP-1200이니, 이것도 SP-1200이라 불러도 문제는 없는 셈이죠.

힙합을 만들려고 산 건 아닙니다. 그보다는 SP-1200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한 프로듀서들의 작업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멀리 가면 ‘가난한 자의 SP-1200’이라 불린 샘플러 내장 드럼머신 Casio RZ-1이 탄생시킨 수많은 게토 하우스 곡들, 가까이는 뉴욕의 Willie Burns가 SP-12를 능숙하게 다루는 시연 영상 혹은 동시대 여러 하우스 및 테크노 프로듀서들의 저해상도 샘플링 작법에 큰 흥미를 느꼈습니다.

80년대 후반 현지 분위기를 짐작하긴 어렵지만, 현재라면 좀 더 확실합니다. MPC나 SP-1200 계열의 샘플러는 댄스 음악보다는 힙합에 가까운 인상을 갖고 있죠. SP-1200에 녹음된 샘플에선 정말 남다른 소리가 납니다. 거칠고 바삭바삭하고 둔탁합니다. 보통 ‘12비트 크런치’라고 표현되곤 하죠. 거칠고 바삭바삭하고 둔탁한 소리는 특정 종류의 힙합에 정말 잘 어울립니다. 하지만 레이블 그 자체가 고유한 사운드의 총합인 L.I.E.S. 레코즈나 20년째 신선한 Omar-S의 전자음악 트랙(힙합을 전자음악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면)을 들을 때면, 이건 예컨대 신시사이저 신에서 각광받는 ‘아날로그적 온기’나 복잡한 모듈레이션으로 구현한 전자적 사운드 디자인과 다른 접근이 필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 L.I.E.S나 Omar-S의 트랙은 아마도 모듈러 신스를 멋지게 사용한 앰비언트나 미니멀, 테크 하우스보다 뉴욕 언더그라운드나 디트로이트 힙합과 훨씬 친밀한 관계인 듯 들립니다. 조금 더 나아가면, 90년대 영국의 정글이나 드럼 앤 베이스와도 공통점이 있겠죠. 비슷한 악기가 매개가 되었고, 서로 직접적 영향을 주고받지 않았을지언정 그렇게 연결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레코드를 다루는 즐거움 중 하나는 바로 이런 연결점을 찾는 일입니다. 유튜브나 디스콕스의 알고리즘은 상당히 훌륭합니다. 비슷한 레코드나 음악을 곧장 리스트로 정리해 알려주죠. 다만 일반적으로는 160 BPM의 정글을 열심히 듣고 있는데 갑자기 J Dilla를 추천하는 일은 드문 것 같습니다. 레코드는 내 손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아직 물리적 상태가 아니기에, 인터넷 쇼핑이라면 그런 웹상의 정보에 의존해 ‘디깅’을 하게 되죠. 다행히 요즘엔 크레딧이 꼬박꼬박 잘 정리된 터라, 능동적 소비자라면 의도나 예측에 따라 필터와 검색어 등을 이용해 원하는 방향으로 연결점의 물꼬를 틀 수 있을 것입니다.

레코드 가게에서는 이 같은 접근이 사뭇 자연스럽습니다. 손에 잡히는 물건이니 구석구석 확인할 수 있고, 한정된 구역에서 쇼핑하니 영원히 한 장르만 체크할 수도 없습니다. 참여 뮤지션을 살펴보다가 신뢰의 이름이 눈에 띈다면 혹시 그의 작업물이 더 있냐고 직원에게 물어도 좋겠죠. 또한 하우스 섹션에서 목격한 레이블이 힙합 섹션에서도 보인다면 안 듣고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 발견하게 되는 B 사이드 덥이나 인스트루멘탈의 희열은 그 연결점에 대한 호기심으로부터 온 것이겠죠.
이런 연결점이 애호가로서 맞이하는 기쁨이라면, 애초에 새로운 연결점을 제시하는 음악들이 있습니다. 그 연결의 대상이 서로 멀수록 가산점을 얻는 것도 아니고 난이도는 더 올라갈 텐데, 그런 음악을 만드는 데 몰두한 음악가들의 활약은 장르는 물론이고 세대와 지역을 뛰어넘습니다.

80년대 뉴욕의 용광로 같던 음악 신이 특히 그랬습니다. 프랑스와 영국에서 건너온 두 남자가 70년대 말 세운 ZE Records나 첼리스트 Arthur Russell의 Sleeping Bag Records의 발매작에 특정 태그를 하나만 다는 건 어렵습니다. 대신 온갖 음악이 섞였지만, L.I.E.S.처럼 그것이 이 레이블을 통해 나왔을 거라 추정 가능한 확고한 색깔이 있죠. Fab 5 Freddy가 그룹 Material의 프로듀서 Bill Laswell과 손잡고 만든 ‘Change The Beat’나 Afrika Bambaataa가 훗날 레이블 Streetwise를 설립하는 Arthur Baker와 의기투합해 낸 ‘Planet Rock’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Material의 한 프로필에는 이와 같은 표현이 있습니다. Experimental Punk-Jazz-Funk-Noise-Electro Band. 이럴 바에는 그냥 Material의 음악이라 부르는 게 더 정확하겠죠.

그 바톤을 넘겨받아 런던과 맨체스터, 브리스톨 등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터진 영국 음악의 풍성함 역시 빼놓을 수 없습니다. Andrew Weatherall이나 Gilles Peterson의 레이블 Talkin’ Loud 등의 이름이 적혀 있으면 일단 끝까지 들어봐야죠. 뭐가 나올지 모르니까요. 90년부터 2000년대 초 정도의 메인스트림 신에선 하우스와 소울이 꽤 친했던 것 같습니다. 소울 보컬리스트들이 하우스 레코드에서 심심찮게 노래를 불렀죠. 아티스트명만 보고 잘못 사는 눈물의 레코드가 속출하는 구역이지만, 우연한 계기로 완전히 낯선 연결점으로 진입할 기회이기도 합니다. 지역이나 도시 특성에 따른 연결을 추측하는 것도 즐겁습니다. Ryo Kawasaki의 1983년작 <Lucky Lady>는 애시드 하우스가 등장하기 한참도 전, TR-808과 TB-303을 사용한 걸작입니다. 재즈 기타리스트로서 그런 진보적 시도를 누구보다 빠르게 해낸 셈이죠. 두 악기의 제작사인 롤랜드가 어느 나라 회사인지 생각해보면 충분히 납득이 가는 일입니다. 약간 과장하자면 ‘로컬 악기’나 다름없는 것이죠. 요즘 아티스트로는 DJ Sotofett, DJ Overdose 같은 아티스트들이 이런 다양한 방식의 연결점을 발견하는 재미를 줍니다.

게다가 연결은 종종 음악 이상의 서브컬처 전체를 살펴보는 단서가 되기도 합니다. ZE의 대표 Michel Esteban이 안나 윈투어와 연인 관계였다는 사적 일화, 또 다른 대표 Michel Zilkha가 유력 매체 빌리지 보이스의 필자였다는 공적 활동, ZE가 영국 출신 안나 윈투어의 친구 Chris Blackwell이 이끄는 Island Records와 라이선스 딜을 맺음으로써 세계로 뻗어 나갔다는 사실, 그리고 바로 그 뉴욕을 다녀온 Malcolm McLaren의 야심작 <D’ya Like Scratchin’>이 Islands Records에서 발표됐다는 공교로움, 딱 그맘때 Malcolm McLaren과 결별한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미국 힙합과 팝 아트의 영향이 진한 컬렉션을 전개했다는 식의 정보가 연결되면 당시의 거대한 문화 지형도가 짜릿하게 그려지는 것이죠. 한 장의 음반에서 출발한 연결점이 이어졌을 때 발휘되는 강력한 힘입니다.

지금까지 거론한 종류의 음반들은 레코드 가게 주인 입장에서 은근히 난감한 재고일 것입니다. 어느 섹션에 꽂을지 정하기가 곤란하니까요. 레코드 가게 주인은 아니지만, 집에서 레코드를 추릴 때도 곤혹스럽긴 마찬가지입니다. 의외의 더미 사이에 숨어 필요할 때면 어쩐지 찾기가 어렵거든요. 플레이리스트를 위해 ZE Records의 카탈로그부터 DJ Stingray가 테크노의 태도로 완성한 일렉트로 혹은 다운템포 또는 덥, 유일무이 김수철의 익스페리멘탈 전자국악, 영국 팀임에 걸맞게 힙하우스를 너머 브레이크비트와 힙합을 화끈하게 버무린 Shades Of Rhythm의 ‘One Black One White One Brown’, 올해 가장 인상적인 협업으로 꼽을 만한 Low Tape와 DJ Mostoles의 수록곡을 비롯해 10개의 트랙을 골랐습니다. 노골적인 연결점이 드러나는 곡도, 은근히 따져봐야 보이는 연결점을 포함한 곡도 있습니다. 이 원고는 원래 이렇게 길게 쓸 생각이 없었는데, 얘기가 장황해졌습니다. 연결점을 따라가는 일이 꼭 그렇습니다. 끝이 없으니까요.


Writer │유지성(Jesse You)

*해당 에세이는 지난 VISLA 매거진 18호에 실렸습니다. VISLA 매거진은 VISLA 스토어에서 구매하거나 지정 배포처에서 무료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RECOMMENDED P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