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카노의 열정이 튀어 오르다 : Low Rider

The Low Rider is a little higher”

미국의 펑크 밴드 워(WAR)가 부른 “Low Rider의 가사. 이 역설적인 문구는 실로 그 당시 탄압과 제재의 대상이었던 로우라이더들을 위로해주며 그들의 문화적 자긍심을 한층 끌어올렸다. “Low and Slow” 아스팔트 바닥을 긁을 듯 낮은 자세로 느리게, 로우라이더는 하늘에 닿을 수도 있는 에너지를 다리에 응축하고 있다.

로우라이더는 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의 자동차 문화로 급부상한 핫로드(Hot Rod)를 거부했던 미 서부 치카노 사이에서 발원했다. 4, 50년대에 자동차라는 물질은 주류 사회의 전유물과도 같았다. 도시의 구조적 확장과 더불어 2차 대전 동안 재정 능력을 갖추게 된 치카노는 그들 또한 차를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고, 나아가 차에 그들의 정체성을 투영시키기 시작했다. 치카노는 속도 경쟁에서 벗어나 가족 또는 공동체 단위로 차를 구입하여 외관을 커스텀했다. 차고를 최대한 낮추기 위해 서스펜션의 스프링을 잘라내고 트렁크에 모래주머니를 가득 실었으며, 아즈텍 문양과 기하학적 패턴, 식구들의 모습을 페인트로 칠해 넣었다. 남부 캘리포니아 등지에서 치카노의 로우라이더 문화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1958년 전후로, 캘리포니아는 휠의 아래쪽 테두리보다 차체를 낮추는 것을 금지하는 일명 ‘Lay low law’ 법을 공표했다. LA의 메카닉들은 로우 라이딩을 계속 즐길 방안으로 2차대전에 사용되고 버려진 비행기에서 하이드롤릭(Hydraulic: 유압) 시스템을 떼어내 자동차 하체에 접목시켰다. 덕분에 로우라이더는 경찰의 단속을 피해 차 높낮이를 유동적으로 조절하며 크루징(Cruising)할 수 있었고, 이는 로우라이더 문화를 더욱 다채롭게 이끌며 지금의 합(Hop) 퍼포먼스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로우라이더를 중심으로 한 패밀리십

로우라이더는 하나의 매개체로 작용했다. 치카노는 로우라이더를 통해 민족의 정체성과 자유를 향한 갈망, 불평등에 대한 저항을 사회에 분출했다. 특히, 문화를 공유하는 커뮤니티 속에서 로우라이더는 그 유대관계를 보존해나가는 구심점 역할을 했다.

로우라이더를 향유하는 카 클럽(Car Club)과 가족구성원을 살펴보면 여타 자동차 문화와는 구분되는 특유의 자부심과 유대감을 엿볼 수 있다. 백인 자동차 문화인 핫로드의 경쟁자이자, 히스패닉 문화로서의 의의와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백인 주류사회의 억압과 차별로부터 짓눌린 탓에 이 소수민족은 더욱 끈끈하게 뭉칠 수 있었고, 6-70년대 발화한 시민 평등권 운동에서 로우라이더가 치카노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수단으로 활약하며 단순한 이동수단을 넘어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로우라이더는 긴밀하게 감정을 공유하는 문화다. 많은 이들이 가족 단위로 로우라이더를 대물림하며 차를 보존하는 특성은 이 문화가 치카노의 DNA로 스며들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오랜 세월 정성을 들여 차를 정비하고, 주기적으로 모임을 통해 차와 시간을 보낸다. 이들은 차에 각각의 이름을 지어주고 대화를 나눈다. 카 클럽의 멤버들은 경쟁하지 않고 서로를 존중한다. 경찰과 시민으로부터 문화를 지키기 위해 지역사회에 다양한 루트로 공헌한다. 이 과정에서 로우라이더 공동체는 구심점을 중심으로 이탈할 수 없는 관계로 발전했다. 보호자가 반려동물을 대할 때처럼, 치카노에게 로우라이더는 교감할 수 있는 하나의 생명 같기도 하다. 이들의 관계는 ‘사랑’으로 맺어져있다.


로우라이더의 조력자, 미디어

올디스(Oldies)는 오늘날 로우라이더의 사운드트랙을 담당한다. 올디스로 불리는 이 음악은 1930년대 이후의 알앤비와 두왑(Doo-Wop), 훵크 등의 장르를 총체적으로 아우르고 있다. 이중 하나가 2차 대전 후 LA 히스패닉 사회에서 탄생한 더 이스트사이드 사운드(the Eastside Sound). 멕시칸 전통 포크송인 코리도(Corridos)와 락(Rock), 스윙(Swing) 등이 만나면서 백인 문화에 저항하는 색깔의 음악이 탄생한 것이다. 이를 대표하는 아티스트 리치 밸런스(Ritchie Valens)는 “La Bamba”(1958), “Come On, Let’s Go”(1958) 등의 노래로 대중적 성공을 거두었다. 코리도의 이념이 로우라이더의 그것과 일치하면서 자연스레 더 이스트사이드 사운드와 로우라이딩은 상호 보완적 관계로 이어졌다.

올디스는 차와 사람을 연결해 주었다. 밴드 워(WAR)의 드러머 해럴드 브라운(Harold Brown)은 로우라이더를 트로피에 비유했다. 치카노가 차에 쏟는 비용과 정성을 고려했을 때, 그 값어치는 트로피에 버금간다는 것이다. 워의 노래 “Low rider”(1975)는 빌보드 알앤비 차트 1위에 오르며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견인했고, 올디스를 대표하는 성가로 자리매김했다. 차에서 흘러나오는 올디스는 로우라이더 문화를 더욱 입체적으로 조각하며 그 예술적 정체성을 대중에게 고취했다.

WAR의 앨범 표지를 들고 있다

로우라이더 매거진

1977년에는 소니 마드리드(Sonny Madrid)와 그의 동료들이 ‘로우라이더 매거진(Lowrider Magazine)’을 창간했다. 문화에 대한 시민들의 부정적 선입견을 타파하기 위함이었다. 창립멤버들은 각종 자동차 행사와 식료품점, 술집 등에서 잡지를 판매하며 구독자를 모으고 수익을 올렸다. 잡지는 치카노의 성실한 일상생활과 차에 대한 열정, 언론의 보도 내용 등을 다루었고 로우라이더 문화의 부상과 더불어 일각에서 고착화되어가고 있던 편견에 맞섰다. 크루징의 성지인 LA 위티어(Whittier) 거리에 사무실을 차리고, 79년부터는 LA에서 로우라이더 쇼를 개최하기 시작하면서 문화의 본질을 알리는 데 힘썼다. 로우라이더계의 바이블로 불린 잡지는 지난 2019년을 마지막으로 폐간되어 현재는 웹진으로 대체되었다.


“Cruising down the street in my 6-4”

래퍼 Easy-E의 싱글 앨범 ‘보이즈-앤-더 후드 (Boyz-N-The Hood 1987)’의 첫 소절. 이 가사는 로우라이더의 상징적 모델로, 64년식 쉐보레 임팔라(Impala)의 위상을 알렸다. 90년대 LA에는 ‘갱스터 랩(Gangsta Rap)’의 시대가 도래했다. 이지-이(Easy-E), 닥터드레, 아이스큐브, 스눕독을 필두로 한 힙합 신(Scene)에서 로우라이더는 그들의 음악과 뮤직비디오에 소비되며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특히, 닥터드레의 ‘Still D.R.E’는 세계적인 메가 히트를 기록하며 거대한 공명을 일으켰고 인종, 계급, 성별, 나이에 국한되지 않는 수요를 로우라이더 신으로 대량 유입시켰다. 하지만 그 기반이 탄탄하지 못한 범위로까지 확산됨으로써 도시 곳곳에 사건, 사고를 일으키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로우라이더 문화는 태평양을 건너 일본으로까지 그 저변을 확대했다. 80년대 미국의 각종 미디어로부터 영향을 받은 청년들 사이에서 발화한 일본의 로우라이더는 기존 자동차 커스텀 문화인 보소조쿠(Bosozoku)와 혼합되면서 새로운 특색을 갖게 되었다. 일본 특유의 장인 정신으로 개성을 표현함과 동시에 일본의 도로 환경과 문화-제도적 상황이 반영된 일본만의 로우라이더가 탄생한 것이다. 이는 오늘날 보소조쿠(Bosozoku), 비프(Bippu), 샤코탄(Shakotan) 등과 함께 일본 커스텀 문화의 일원이 되어 애프터 마켓 시장을 이끌면서 치카노 문화를 다채롭게 계승하고 있다.

이처럼 LA에서 꽃 핀 로우라이더는 그 탄성으로 지구 반대편에까지 이르렀고, 만개했다. 시공간의 구분 없이, 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로우라이더를 움직이게 하는 구동력은 ‘열정’일 것이다. 자동차 문화의 탄생과 번식, 그리고 관련 산업의 성장은 문화 선진국으로서의 이유를 증명한다. 그것을 이끄는 구성원의 올바른 인식과 태도가 뒷받침된다면 더 많은 이가 향유할 수 있다고 믿기에, 통통 튀어 오르는 그들의 탄성 영역 안에 포함되어 필자 또한 문화적 수혜를 입을 날을 고대해본다.


이미지 출처 | Lowrider magazine, Topgear,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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