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poiler Alert
오래간 험난한 길에 있던 브렌든 프레이저(Brendan Fraser)가 끝끝내 빛을 봤다는 이야기가 힘을 실어준 걸까. “더 웨일(The Whale)”은 아카데미 시상식을 앞두고 유독 배우의 이름이 많이 불린 영화였다. 272kg 거구의 남자가 삶의 끝자락에서 꿈틀대는 이야기는 ‘일생에 단 한 번 해낼 수 있는 연기’로 재현됐다. 그래서 괘씸하다. 신도 해줄 수 없는 구원을 무턱대고 바라는 남자, 그리고 배우의 구원을 얼떨결에 받아버린 허술한 이야기. “더 웨일”은 두 번 괘씸한 영화다.
에세이 작문을 가르치는 온라인 수업의 교수자는 얼굴을 비추는 법이 없다. 몇 주차 째 고장 난 웹캠을 수리하지 않았다며 양해를 구한다. 그리고 카메라는 학생들이 보지 못한, 마이크 뒤의 남자를 비춘다. 272kg 초고도 비만, 거중의 몸을 가진 찰리(Charlie)다. 비만으로 온갖 합병증을 달고 살던 그는 죽음을 정말 코앞에 뒀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제야 몸의 무게만큼이나 육중한 삶의 무게를 체감한다. 그리고 세 명의 인물이 그 무게를 덜어주기 위해 등장한다. 첫째는 종종 집에 들러 돌봐주던 간호사 리즈(Liz), 둘째는 갑자기 구원해주겠다며 나타난 사이비 새생명 교단의 선교사 토마스(Thomas), 그리고 셋째는 부름에 끌려 나온 딸 엘리(Ellie). 탐탁잖은 점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영화는 1.33:1이라는 비좁은 프레임에 거구의 남자를 가둠으로써 구속에서 해방의 이미지를 연상하게 했다. 세상과 화면에 이중으로 낀 찰리는 심장까지 쥐어짜인다. 그럴 때마다 낭송하듯 소리 내어 읽는 에세이 하나가 있다. 나중에 밝혀지기를, 딸 엘리가 어릴 적에 소설 ‘모비 딕(Moby Dick)’을 읽고 남긴 글이다. 이렇게 쓰여있다.
‘모비 딕’에서 고래에 관해서만 한 챕터 내내 이야기하는 순간이 슬펐다. 그것이 자기 넋두리에 지친 독자들을 배려하는 작가의 제스처임을 알기에…
아쉽게도 “더 웨일”은 자기 넋두리에 그쳤다.
‘Whale’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래이자, 한편으론 고도비만자를 칭하는 속된 말이기도 하다. 자기 파괴적인 찰리는 모비 딕 그 자체이자, 모비 딕을 죽이기 위해 악착같이 달려드는 에이허브(Ahab) 선장이다. 그러므로 “더 웨일”은 이해를 끝에 두고 시작한다. 애당초 한 인물을 조명하는 영화의 가장 끝에 있는 목표는 이해일 수밖에.
이해를 요한다면 그만큼의 통과 의례를 거쳐야 한다. 타인을 이해하는 일은 가시덤불을 건너는 것만큼이나 뾰족하고 아프다. 게다가 불완전하기까지 하다. 타인을 만나는 것부터가 귀찮은 일인데, 타인을 이해하기란 너무나도 성가신 일이다. 그리고 이야기는 이해를 위한 아주 근본적인 도구다.
영화의 뼈대 혹은 뿌리였을 ‘모비 딕’을 생각해보자. 1851년 출간된 ‘모비 딕’은 이야기의 힘을 보여준다. 고래잡이배 에이허브 선장은 과거에 구속된 망령이다. 자신의 한쪽 다리를 앗아간 난폭하고 영리한 고래 ‘모비 딕’에 복수를 꿈꾼다. 주술적이고 맹목적이다. 어렸을 적엔 물결을 수놓으며 바다와 공중을 오가는 고래의 묘사에 사로잡혔지만, 다시 읽어보면 거대한 헛꿈을 꾸는 에이허브와 그 꿈에 말려든 선원에 더 눈이 간다.
끝이 썩 좋지 않을 걸 알면서도 우리는 책을 놓지 못한다. 배가 난파되고 선장의 남은 다리 한쪽마저 찢겨나갈 그 순간을 향해 페이지가 넘어간다. 왠지 이야기가 좋지 않은 방향으로 끌려 들어가는 느낌에도 결말까진 읽어야겠단 충동이 드는 까닭은 그 이야기가 독자를 흡입해 세계 안으로 들어 앉혔기 때문이다. 추동력은 첨예한 인간 내면의 관찰과 투사에 있다. ‘모비 딕’은 인간이 맹목적인 신념에 목을 메게 되었을 때의 광기를 선연히 보여주면서 너무나도 단순한 감정 속 인간의 복잡다단한 면을 녹여냈다. 그리하여 독자는 어느새 선장과 같은 배에 올라타 고통스럽고도 복잡한 이해의 가시덤불 길을 항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더 웨일”은 이해를 보여주는 방식에서 아주 쉬운 길을 택했다. 신형철 평론가의 표현을 빌려 말하면,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임을 증명하기 위해 모든 타인을 ‘단순하게 (나쁜) 사람’ 혹은 ‘단순한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겠다. 모든 타인을 다 늘어붙은 페퍼로니 피자만큼이나 아주 납작하게 만들었다. 찰리를 제외하고 남은 모든 인물은 고전 영웅소설 속 탕아의 귀환을 환영해주고 마냥 사랑해주는 일회성 도구처럼 사용된다.
찰리는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다. 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 중 가장 큰 요소가 되어버린 비만은 영화에서 ‘충동 억제의 실패 결과’로 묘사된다. 그는 내킬 때 자위를 하고,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혈압을 달고 살면서 폭식하며, 예전엔 아내와 딸을 내팽개치고 동성 애인과 도망쳤다. 한 인간, 특히나 죽음과 밀착해있는 상태의 인간이 구하는 용서는 일종의 반칙과도 같아서 받아주지 않기도 어려운데, 찰리는 이걸 적극 이용한다.
영화는 완전히 찰리를 중심으로 돌기 때문에, 다른 인물의 내면을 묘사할 기회가 썩 많지 않음은 안다. 그러나 그에 더해 구원을 떼쓰는 찰리 곁의 인물이 그의 눈물 몇 방울과 호소, 죽기 직전의 움직임에 함께 슬퍼하고 연민하는 모습은 석연치 않다. 특수성에 기댄 이해마저 미흡한 상태에서 영화는 보편으로 확장하려 든다.
찰리더러 ‘새생명’ 교회로부터 신의 구원을 받으라 종용하는 토마스에 리즈는 신에게 받는 구원 따윈 없다고 화를 낸다. 새생명 교단에 있던 찰리의 연인은 자살했다. 그 과거가 밝혀지고 나서, 영화는 인류끼리의 구원 가능성을 점쳐보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신의 무의미함과 무가치함을 겪은 사람은 구원의 의미를 되짚어보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이창동의 “밀양”은 종교적 구원과 인간적 구원을 첨예하게 대비함으로써 성공적으로 인간주의에 착륙했다. 반면 “더 웨일”은 종교적 구원을 무가치하게 이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너무나도 순탄한 구원과 이해를 받으면서 반종교적 구원, 즉 인간적 구원에 불시착해버렸다. 한 죄 많은 사람이 신도 해줄 수 없는 구원을 또 다른 사람에 바란다는 게 얼마나 ‘영화 같은’ 일인지만 되새긴 것이다.
그렇지만 솔직히 말하건대 필자는 “더 웨일”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눈물 흘리게 한 영화가 꼭 좋은 영화는 아니라는 이동진 평론가의 말처럼이나 작품이 주는 감정의 파고가 작품의 가치를 입증해준다고는 할 수 없지만, 감정 동화(同化)는 작품과의 공명, 즉 이해에 바탕을 둔다는 걸 부정할 순 없다. 어떻게 걷다가도 발이 빠질 만큼 허술한 그물로 짜인 이야기 위에서 우리는 감화되고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일까?
“더 웨일”은 공간예술의 특성을 빌려와 이런 불완전한 이해 묘사-이해의 불완전성이 아니라-를 극복해냈다고 할 수 있겠다. 18세기 독일 극작가 레싱(Lessing)은 예술을 시간예술과 공간예술로 구분했다. 전자는 음악, 문예, 연극 등처럼 시간의 흐름과 관계된 예술을, 후자는 조각, 회화, 건축 등처럼 공간의 구성과 관계된 예술을 뜻한다. 여기서 각각의 책무가 파생된다고 믿는다. 시간과 공간을 잡아둔 그만큼의 값어치는 하기.
18세기라는 시대적 한계로 이후의 예술, 특히 영화를 어떻게 분류할 것인가를 잠깐 짚어 보자. 그래야 영화의 책무도 짚을 수 있다. 서사-이야기-플롯 따위는 분명한 시간예술이고, 사진은 분명한 공간예술이다. 그러므로 둘이 결합한 영화는 시간공간예술이라 해야 할까. 어찌 되었든 영화는 이야기와 이미지로써, 이중 책무를 부과받는다. 시간을 주름잡을 것, 혹은 공간을 지배할 것. 한 가지 더 뻗어가자면 레싱이 시간예술을 조금 더 우위에 두었듯, 시간의 ‘연속’에 따라 이미지가 배치되는 영화에서도 시간성, 즉 이야기의 힘이 더 중요하다고 볼 수 있겠다.
공간예술의 특성이자 매력은 절제 없는 과잉에 있다. 대표적인 예로 늘 ‘라오콘 군상(Laocoon Group)’이 언급되곤 하는데, 신의 응징으로 두 아들과 함께 죽어가는 ‘순간’에 놓인 라오콘의 표정은 아주 처절하다. 바다뱀은 뼈를 으스러뜨릴 힘으로 조여오고 아들들은 희망을 잃고 늘어져 간다. 조각을 비롯한 공간예술은 오로지 한순간을 포착해 절제 없이 성큼 다가와 우리 감성의 문을 두드려야 하는 책무를 갖는다.
이와 반대로 시간예술은 절제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한다. 아주 웅장하고 몰아치던 클래식 곡에도 잠잠한 태풍의 눈 같은 순간들이 분명 있다. 잠잠하고 차분하게, 그러나 단단하게 쌓아진 토대 위에서 클라이맥스는 더욱이 힘을 얻는다. 전개와 마찬가지로 감정에도 완급이 있어야만 한다. ‘모비 딕’에서 에이허브 선장이 항상 광기에 휩싸여 있지만은 않았기 때문에 후반부에 이르러 몰아치는 폭풍이 더 세차게 느껴졌듯이.
종종 영화를 볼 때 화면에 압도되는 순간이 있는데, 그것은 시간성에 기반을 두고 흘러가다 어느 순간 공간성이 비집고 나와 마치 라오콘 군상처럼 순간을 사로잡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더 웨일”은 빙의라도 한 듯 연기를 퍼붓는 브렌든 프레이저의 힘에 빌어 모든 순간을 과잉하고 만다. 물론 거의 2시간에 달하는 상영시간과 인물영화 특유의 고요함으로 인해 절제한 듯 보이지만, 착시다. 절제라곤 없다. 언제라도 터질 것처럼 높은 혈압을 가진 인간 옆에서 우린 터질 것 같은 감정으로 있다. 죽음 앞에서 내내 신음하고 펄떡이는 남자 앞에서 우린 압도될 따름이지만 진실한 이해로 가닿지는 않는다.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찰리는 숨통 틔러 물밑서부터 수면 위로 날아오르는 고래처럼 땅을 짚고 선다. 고래가 수면 위로 떠오르면 우리는 어쩔 도리 없이 숭고미에 휩싸인다. 구원받은 듯 그의 몸이 하늘로 서서히 뜨며 화이트 아웃되는 끝에서는 허탈한 웃음이 난다. 모든 이야기가 윤리적 규율을 따라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결말을 향해 가야 한단 것이 아니라, 종연에는 타인의 삶과 마음을 밀착하여 바라보게 하고 마는 이야기가 그 과정에 있어 얼마나 책임을 다했나를 따져 물어야만 한다고 믿는다(이런 맥락에서 돌아온 탕아를 용서하고 도망 나온 탕아를 집으로 돌려보내는 게 언제까지 여성의 몫으로 남을지에 대한 문제도 남았다. 찰리는 버려진 아내와 딸에게 용서받고 리즈의 양해를 마음껏 받았으며, 토마스조차 엘리의 의도치 않은 구원으로 마음 편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됐다). 어떤 책임도 없이 삶의 무게를 남은 사람에 떠밀고 도망하는 모습마저 비상(飛上)의 이미지로 미화하고 말았다.
맹랑하게 구원을 바라는 찰리를 우리가 납득하고 이해했다 착각할 수 있는 이유는 고대 그리스 조각이 되기를 자처한 브렌든 프레이저 덕분이다. 그는 거구의 분장을 하고서 푸른 눈 속에 몰아치는 파도를 담아냈다. 파멸로 이르는 ‘모비 딕’처럼 자멸로 이를 수밖에 없는 것 같은 찰리의 삶에서 살아내야 할 이유와 당위를 배우 스스로 힘으로 만들어냈다. 그밖에도 물론 애증의 곡선이 표정에 드러나는 엘리, 맑지만 어딘가 고뇌하는 시선의 토마스, 돌봄으로 자기 위안을 얻는 듯한 리즈의 모습도 납작함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배우의 연기가 깃들었다는 증표였다.
“더 웨일”의 한 인물을 담기에도 비좁은 프레임과 인물 클로즈업 샷은 타인과의 물리적 공존부터가 얼마나 운 벅찬 일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영화는 가능한지조차 알 수 없는 타인으로부터의 구원이 아주 손쉽다는 듯이 절제 없이 요동치는 감정으로 속여냈다. 이런 식으로, 느슨한 영화는 종종 배우로부터 구원받고 마는 것이다. 극장을 나설 때 남은 여운이 찝찝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미지 출처 | IMDb,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