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전 세계의 이목을 사로잡는 충격적인 책이 출판됐다. 독일의 동물학자인 페터 아마이젠하우펜(Peter Ameisenhaufen) 박사와 조수 한스 폰 쿠베르트(Hans von Kubert)가 세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특이한 동물들을 찾아다니고 연구하는 데 역량을 집중한 가운데, 많은 신비로운 동물들을 발견, 이들에 대해 상세한 기록을 남긴 것. 책에는 날개와 뿔 하나가 달린 원숭이, 거북이 등껍질을 가진 새, 다리가 달린 뱀 등이 생생하게 실제 사진으로 찍혀서 담겨있다. 사람들이 상상만 했던 생명체들이 실제 사진으로 등장했고, 학명과 엑스선 사진, 보고서 등도 함께 기록되어 있기에 당시 학계에는 큰 논란이 일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이는 유명한 개념예술가 호안 폰트쿠베르타(Joan Fontcuberta)가 기획한 전시회이자 개념예술 작품, ‘Fauna’였다. 즉, 진짜 과학 연과 결구가 아니라 일종의 전위예술 중 하나라는 말이다. 이 전시회에 등장하는 사진은 물론 페터 아마이젠하우펜이라는 사람까지 모든 것이 폰쿠베르타와 그의 동료인 포르미게라의 순수 창작물이었다. 과학과 유사과학(pseudoscience)의 경계에서 존재가 불분명한 동물을 연구하는 분야를 신비동물학(cryptozoology)이라고 하는데, 이 전시회는 이러한 신비동물학의 개념을 예술에 끌어들이고 현대 과학의 연구방법론을 가미해 하드한 SF 작품을 탄생시켰다. 이 전시회는 전례 없는 인기를 기록하여 그 유명한 뉴욕 현대미술관에서도 전시되기에 이르렀고, 그 내용이 책으로 정리되어 출판된 것이 ‘Fauna Secreta’다.
문제는 이 책이 1993년 대한민국에 정발될 때인데, 현대과학사에서 ‘Fauna Secreta’의 일역판을 중역하며 국내에 당당히 정식 과학책으로 승인해 발매해 버린 것. 따라서 당시 과학에 관심이 많았던 어린이들은 아직까지도 이 책의 내용을 사실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으며, 한창 각 서점 어린이 과학서적 베스트셀러 분야에 진열되어 있을 정도로 등 당당한 과학 서적 취급을 받았다. 한술 더 떠 이때 유행하던 미스터리 학습만화류 중에는 이 책에 나온 소재를 그대로 만화화한 것도 있다. 재밌는 점은 정발된 책의 제일 뒷편 표지 안쪽에는 실제로 이 동물 울음소리를 들어볼 수 있다는 전화번호까지 적혀 있었는데, 그 번호로 전화해 보면 “다리 달린 뱀이 내는 소리! 크르륵! 토! 크르륵! 토! 크르륵! 토! 크르륵! 토! 다리 달린 뱀이 내는 소리!”라는 말과 마치 가래 끓다 뱉는 듯한 섬뜩한 소리가 나온 뒤 자동으로 끊겼다고.
사실 지금 봐도 이상한 동물들에 대한 상당히 충격적인 내용이 믿을 수 밖에 없는 형식으로 묘사되어 있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속을 수 밖에 없었다. 전시회에 쓰였던 엑스선 사진, 그럴듯한 학명, 그리고 보고서가 첨부되어 함께 전시되었기 때문. 거기에 확실한 낚시를 위해 오리너구리 등의 실존하는 생물 자료를 끼워넣기까지 하였다. 지금 돌아보면 단순히 허구이지만, 오히려 책의 내용이나 기획 의도는 의의가 매우 깊고 매우 흥미로우니 한 번쯤은 참고할 만하다. ‘Fauna Secreta’는 현재 AbeBooks에서 구매할 수 있으며 국내 번역본은 알라딘에서 구할 수 있을지도.
이미지 출처 | juanmagonzale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