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현지시각), 런던 소더비(Sotheby) 경매에서 현대 예술사에 남을 사건이 벌어졌다. 사건의 주인공은 영국의 그래피티 아티스트이자 각종 제도비판 예술로 악명 높은 뱅크시(Banksy). 당일의 경매는 그의 가장 상징적인 작품 중 하나인 ‘풍선과 소녀 (Girl With Balloon)’가 판매된다는 소식으로 컬렉터들의 큰 관심을 모았다.
이날 경매에 나온 ‘풍선과 소녀’는 뱅크시의 2006년 작으로, 캔버스 천 위에 스프레이 캔과 아크릴 물감으로 풍선을 날리는 소녀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2002년에 그래피티의 형식으로 처음 완성되었고, 뱅크시는 2014년에 시리아 난민들을 지지하는 캠페인을 통해 이 이미지를 변형해 사용한 바 있다.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 무라카미 타카시(Takashi Murakami) 등 슈퍼스타들의 작품이 연이어 등장한 이 날의 경매에서 뱅크시는 그의 인기를 증명했다 ‘풍선과 소녀’가 예상 낙찰액이었던 20만~30만 파운드(한화 약 2억 7천만~ 4억 4천만 원)를 훌쩍 넘긴 104만 2천 파운드(약 15억 4천만 원, 경매 수수료 포함)에 낙찰된 것. 하지만 뱅크시의 ‘진짜’ 예술은 작품의 낙찰과 함께 시작됐다. 경매사가 낙찰을 알리는 망치를 내려치는 순간, ‘풍선과 소녀’가 액자 안에 숨겨져 있던 장치에 의해 파쇄되면서 액자 밑으로 흘러나왔다.
수십억을 호가하는 작품이 낙찰과 동시에 손상되었다는 소식은 인터넷을 통해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이 같은 반응을 예상한 듯 뱅크시는 이후 인스타그램에 액자 속 파쇄기를 직접 설치하는 자신의 모습이 담긴 영상을 게시했다. 영상을 통해 “몇 년 전 이 작품이 경매에 나갈 것을 대비해 비밀스럽게 파쇄기를 설치했다”고 밝힌 그는 “파괴하고자 하는 충동 역시 창조적인 욕구(The urge to destroy is also a creative urge)”라는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의 발언을 인용하며 팬들을 열광케 했다.
경매 이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소더비의 시니어 디렉터이자 유럽 현대미술 책임자인 알렉스 브랜식(Alex Branczik)은 자신들이 ‘뱅크시 당했다(Banksy-ed)’며 “작품이 신기록을 달성하는 동시에 가늘게 잘리는 경험은 처음”이라고 전했다. 또한 소더비 측은 낙찰자가 현재 매우 놀란 상태라 다음 조치를 함께 논의 중이라고 밝혔다.
뱅크시의 작품을 리셀하는 마이 아트 브로커 닷컴(MyArtBroker.com)의 설립자 조이 사이어(Joey Syer)에 따르면 해당 작품은 이번 사건을 통해 예술사의 한 조각이 되었기에 오히려 그 가치가 상승할 것으로 보인다고. 기상천외한 헤프닝으로 세간의 이목을 단숨에 사로잡은 뱅크시. 그가 앞으로 어떤 짓궂은 장난으로 자신의 메시지를 세상에 전달할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