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터미널(The Terminal)”의 실제 주인공, 메흐란 카리미 나세리(Mehran Karimi Nasseri)가 지난 12일 그의 고향과도 같은 파리 샤를 드골 공항에서 마지막 순간을 맞았다. 사인은 심장 마비로, 공항 당국은 정오경 터미널 2층에서 쓰러진 나세리를 살리기 위해 경찰과 의료진이 투입되었지만 끝내 숨을 거뒀다고 밝혔다.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 감독의 “터미널”은 한순간에 무국적자가 된 톰 행크스(Tom Hanks)가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에 장시간 체류하며 겪게 되는 일을 그린 영화로, 이야기의 모티브가 된 나세리 역시 샤를 드골 공항 터미널 1에서 1988년 8월부터 2006년 7월까지 무려 18년의 세월을 공항 터미널 라운지에서 보냈다. 그리고 올해 9월, 노숙자 생활을 이어가던 이란 난민 나세리는 다시 공항으로 돌아왔고 그렇게 마지막을 맞았다.
“터미널”에서는 톰 행크스가 크라코지아라는 가상의 동유럽 소국에서 급작스레 일어난 쿠데타로 인해 무국적자가 된다는 다소 과한 영화적 설정이 필요했지만, 나세리의 사연은 영화라고 하기엔 너무 뻔하고 그래서 더 실제적이다. 1977년 이란을 떠난 뒤(반박하는 이들도 있지만 추방당했다는 게 정설) 벨기에로부터 발급받은 난민 확인 서류와 그의 신분증이 든 가방을 잃어버린 것. 나세리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 프랑스에서 런던으로 향하는 페리에서 누군가 그의 가방을 훔쳐 갔으며, 런던 도착해 신분을 확인하지 못하자 다시 프랑스로 돌려보내졌다 한다.
한 가지 특기할 사실은 그 누구도 아닌 이의 삶 그리고 실재하지만 세상 어디에도 없는 이를 위한 공간, ‘공항’을 나세리 스스로 선택했다는 한 점이다. 공항에서의 체류가 장기화되자 프랑스와 벨기에 당국은 나세리에게 난민 지위를 부여하고 레지던시를 제공하려 했지만, 그는 서류상 자신을 ‘이란인’이라고 표기하지 않은 점과 자신의 이름을 ‘Sir Alfred Mehran’라고 표기하지 않은 점을 들어 이를 거부했다.
고집스러운 그의 성격만큼이나 한정된 영역에서의 생활 역시 한결같은 모습을 보였는데, 터미널 1 출발 라운지에 위치한 빨간색 소파가 그의 보금자리였다. 세월이 갈수록 쌓여가는 수화물 가방과 생필품이 그가 오랜 기간 그곳에 머물고 있음을 보여줬을 뿐. 20년에 가까운 세월을 한곳에서 지냈으니 공항 직원들이 그의 친구였고 지나는 이들 역시 그를 알아보았다. 플라스틱 소파에서 잠을 청하고 샤워는 직원 시설을 이용했으며 식사는 공항 직원이 건넨 식권이나 낯선 이가 베푼 호의로 이어갔다. 메뉴는 언제나 맥도날드(Mcdonald’s)의 필레오피쉬 버거. 매일 아침 공항이 붐비기 전 화장실에서 면도를 하고 사람들이 북적일 시간이면 어디선가 얻은 신문을 읽으며 식사를 하는 나름의 루틴도 있었다. 과연 ‘Sir Alfred’다운 모습이다.
그가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한 일이 있다면 무언가를 적는 것이었다. 지나는 이들, 바 언저리에서 들리는 뉴스, 사람들의 잡담 그리고 그의 일기. 공항 의사가 제공한 A4 용지에 적은 일기만 해도 거의 2만 페이지에 달한다고 하니 과연 어마어마한 집념이다. 뿐만 아니라 배우는 것을 멈추지 않았던 그는 “터미널”에서 톰 행크스가 그랬던 것처럼 프랑스어와 독일어 사전을 구매해 스스로 터득했고, 특히 세계 정치에 집중적으로 관심을 기울였다.
2006년 7월, 건강이 악화된 나세리는 프랑스의 한 의료 시설로 보내졌다. 그리고 16년이 지난 지난달 다시 그의 보금자리였던 샤를 드골 공항으로 돌아왔다. 공항에 지낼 당시 나세리는 한 인터뷰를 통해 “떠나는 것이 가능했지만 오랜 시간 머문 자리를 떠나 새로운 곳으로 향한 다는 불안감이 컸다.”라며 터미널 1에서의 18년을 설명했다.
공항은 수많은 사람이 ‘거쳐’가는 곳이다. 수없이 많은 출발과 도착이 교차되는 공간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이들을 바라보며 장장 18년의 세월을 보낸 이란 난민 메흐란 카리미 나세리. 그가 마지막 눈을 감은 곳이 감옥이 아닌 집이었길 바라볼 뿐이다. 2004년에는 나세리의 자서전 ‘The Terminal Man’도 출간됐으니 내밀한 그의 심리가 궁금하다면 한번 읽어봐도 좋을 것.
이미지 출처│Guardi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