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 속 행성에 대한 백과사전, Codex Seraphinianu

1981년 이탈리아의 예술가이자 건축가인 루이지 세라피니(Luigi Serafini)가 작성한 일종의 환상도감이자 전위예술 작품, ‘세라피니의 서(Codex Seraphinianu)’. 해독불가능한 화보서적 보이니치 문서를 패러디한 세라피니의 서는 대략 360페이지, 총 11장에 달하는 분량으로, 제1장부터 제5장까지는 주로 과학과 관련된 내용으로 상상 속 행성의 생태계 등과 기술에 관해, 제6장부터 제11장까지는 문화 등과 관련된 내용으로 예절, 스포츠, 문자, 역사, 종교 등에 관해 다루고 있다.

남녀 둘이 침대 위에서 합체하다 점점 둘의 몸이 붙어 한 마리의 악어로 변신하는 삽화라든지, 땅에서 자라나는 의자 모양 나무라든지, 그 외에 식물로 보이는 괴상한 생물체, 피 흘리는 과일 등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하기에 굉장히 힘든 삽화들이 많으며, 어찌 보면 현실 세계에 있는 것들의 초현실적 패러디라고 볼 수 있다. 모든 이미지는 밝게 채색되어 있고 세세히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모두 세라피니가 손수 직접 쓰고 그려 넣은 것이라고.

한편 세라피니의 서는 상상 속 행성의 언어체계로 저술되었기 때문에 그간 해석이 거의 불가능했고, 내용에 관한 대략적인 추정만 가능했던 상황. 이후 이탈리아의 여러 학자들이 연구 끝 해당 행성의 수 체계가 21진법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은 밝혀냈지만 언어체계에 대해서 가시적인 성과는 내지 못해 큰 고민을 안고 있었다. 그러던 중 작가 본인이 덜컥 2009년도에 “사실 이 책에 쓰인 문장은 아무 의미도 없으며, 나만 읽을 수 있는 새로운 언어와 글이다”라고 발표해 학자들에게 허탈감을 안겨주었다.

그럼에도 세라피니의 서는 큰 의미를 가진다. 19세기말 ‘아르 누보(Art Nouveau)’, 20세기 초 ‘바우하우스(Bauhaus)’ 그리고 20세기 후반 ‘멤피스(Memphis)’파 디자이너들은 모두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 노력했으나 이들 모두 본질적 한계를 하나 가지고 있었다. 바로 세상은 이미 존재한다는 사실. 이미 정해진 자연의 법칙과 문명은 창의성의 한계로 다가왔고, 진정으로 새로운 것의 창조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세라피니는 이 부조리한 모순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저자 외에는 그 아무도 읽을 수 없는 책, 하지만 읽을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기에 가장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책, 존재하지 않는 백과사전 세라피니의 서가 그 결과물로서 가지는 의의는 크다.


이미지 출처 | 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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