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함을 구현하지 않는 ‘Blood Records’의 바이닐들

구시대의 유물로 치부되던 바이닐은 어느순간 부터 피지컬 음반 시장에서 오랫동안 선두를 지켜오던 시디를 밀어내고 자신의 자리를 공고히 하고 있다. 앨범 아트워크를 크게 즐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알판’이라고도 불리는 바이닐 그 자체는 전통적인 검은색에 머물지 않고 다채롭게 발매되어 수집가들에게 즐거움과 소유욕을 동시에 불러일으키고 있다. 때때로 수량을 제한하거나 구매 가능 기간을 정해두고 판매하는 탓에 과열된 시장을 조성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아티스트와 레이블에게 가장 효과적인 홍보 수단이자 수익창출원이 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블러드 레코드(Blood Records)‘는 이러한 열풍의 최전선에 서 있다. 2018년 크레이그스 블러드(Craigs Blood)가 창립한 이 브랜드는 현대 디지털 사회에서 음악의 수명이 점점 단축되고, 사라지는 데 안타까움을 느끼고, 명확하면서 지속 가능한 형태로 존재해야 한다는 명제 아래 출발했다. 아티스트의 기존 앨범 또는 신작 앨범을 대상으로 ‘리미티드 에디션’, 즉 한정으로 프레싱된 바이닐을 판매하는 데 주력하며 음반마다 손 글씨로 번호를 기재한다. 선착순으로 물량을 풀되 재발매는 없다. 선택 기준은 단순하다. 자신들이 좋아하고, 애정하고, 존경을 표할만한 아티스트들이 그 대상이다. 발매가 정해진 앨범을 인스타그램을 비롯한 소셜 미디어를 통해 발매 일자와 시간을 예고한 뒤, 판매가 시작되면 해당 앨범의 구체적인 정보와 수량이 공개되고 결제한 순서대로 줄어드는 물량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

“We Don’t Do Normal”이라는 선언처럼 블러드 레코드의 바이닐은 무엇 하나 평범하지 않다. 형형색색이 조화를 이루는 바이닐부터, 페나키스토스코프[1]의 원리로 이미지가 작동하고, 액체가 들어가 있는 바이닐까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범주를 뛰어넘는다. 아일랜드의 밴드 폰테인즈 D.C.(Fontaines D.C.)의 앨범 [Romance]는 판을 돌리면 앨범 제목에서 연상되는 하트들이 연달아 움직이게 구현했고, 에메랄드 페넬(Emerald Fennell)의 영화 “Saltburn”의 사운드트랙 앨범은 주인공 올리버가 미묘한 관계에 놓여있는 필릭스가 목욕을 끝내고 난 후 남아있는 물을 마시는 경악스러운 장면에서 착안하여 비눗물이 들어간 바이닐로 발매했다.

아티스트의 음악 자체가 이미자화 된듯한 바이닐들도 여럿 있었다. 밴드 울프 앨리스(Wolf Alice)는 그런지를 비롯한 90년대 얼터너티브 록 장르를 본격적으로 표방하기 시작하면서 앨범 [Blue Weekend]를 발매했는데, 음울함을 반영하듯 짙은 푸른색의 판으로 보여졌다. 아이들스(IDLES)의 가장 최근 앨범 [TANGK]는 하트 모양으로 제작되어 세상을 조롱하고, 개인적 트라우마를 실시간으로 표출하는 데 집중했던 밴드의 과거 모습을 잠시 내려두고, 사랑 속에서 살아가고자 하는 새로운 여정의 시작을 반영한다. 듀오 아티스트 컨피던스 맨(Confidence Man)의 음악이 90년대 영국 레이브와 퀴어 클럽신에서 주로 영감을 받아 극한의 희열을 표방한다는 점에서 세번째 앨범 [3AM (LA LA LA)]이 빨려 들어가는 ‘소용돌이’ 픽쳐 디스크로 출시된 건 자연스러운 연결이다. 또한, 맥 드마르코(Mac DeMarco)의 [Salad Days]는 다이아몬드를 연상시키는, 홀로그램이 들어간 스플래터반으로 선보여졌는데, 전체적인 앨범이 로파이 인디 록에 사이키델릭스러움이 가미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보다 적절할 수 없다.

아티스트와 협업하되 기획부터 판매까지 전 과정을 자체적으로 자금을 조달하여 운영하고 있다고 밝혔듯이, 블러드 레코드는 누군가의 인생에 큰 방점을 찍기도 하는 음악의 중요성을 경시하지 않는다. 우리로 하여금 음악과 연결되도록 신선한 관점을 제시하는 이들을 한번 지켜보면 어떨까.


[1] 회전하는 원반을 사용한 초기 애니메이션 장치 중 하나

이미지 출처 | Blood Records

강희조
서울과 런던을 베이스로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글 쓰고, 연구하고, 가끔씩 전시도 만드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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