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빵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재료를 알고 있는가? 강력분과 우유, 이스트, 설탕, 소금, 버터 등이 들어가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한다. 자, 그 재료들을 각각 하나씩 먹는다고 몸속에서 식빵이 만들어지는가? 아마 해가 서쪽에서 떠도 그럴 일은 없다. 그렇다면 각각의 재료는 식빵의 본질을 내포하고 있는가? 먹어보면 알 수 있다. 강력분은 ‘주식으로서 무엇을 발라먹거나 얹어 먹는 식사용 빵’이란 본질을 지니지 않는다는 것을. 달리 말하자면 어떤 것을 이루는 구성요소가 그 대상의 본질을 내포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강력분과 우유 그리고 이스트를 반죽하고 그 반죽이 발효된 후 오븐에 굽는 일련의 과정과 작용들을 통해 식빵의 본질에 닿을 수 있는 것처럼, 어떤 구성 요소가 어떤 것의 본질에 도달하려면 여러 작용이 필요하다.
샤넬(Chanel)이 2022 S/S 오뜨 꾸뛰르(Haute Couture) 컬렉션을 공개하였다. 이번 컬렉션은 그간 버지니 비아르(Virginie Viard)가 보여준 경향과는 다른, 샤넬의 전통성에 무게가 쏠린 컬렉션을 선보였다. 이러한 경향은 공간과 음악까지 이어지는데, 이를 통해 정통성과 제구력을 동시에 보여주며 버지니 비아르 체제가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오뜨 꾸뛰르 쇼는 아티스틱 디렉터로서 버지니 비아르가 지휘하는 화학작용으로 샤넬의 본질을 재정의하겠다는 의지가 충만해 보인다.
우리가 주목할 점은 버지니 비아르의 페러프레이징(Paraphrasing)에 있다. 이것은 30여 년간 샤넬의 고집스러운 본질이 유지될 수 있었던 구성요소 중 하나. 그렇다면 그녀는 샤넬의 전부인가? 그건 아니다(라거펠트 또한 같은 대답을 피하지는 어려울 터). 허나 전부로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그 가능성이란 강력분이 반죽이 되고 식빵으로 구워지는 작용과 같은 것이라 해두겠다. 버지니 비아르는 오랫동안 동안 같은 화법과 어투로 이야기하고 있었으므로, 이번 컬렉션에서 보여지는 그녀의 변화들이 미묘한 정도였음을 그리고 그것이 곧 그녀가 이룩하고자 했던 본질이었음을 잊으면 안 된다. 기하학적으로 교차하는 직선들과 넘실거리며 중첩되는 곡선들 사이 긴장감에 우리를 맡기면 알아서 그 본질 앞에 어느새 도착해 있을 것. 미사여구 없이 속 시원하게 말하자면, 이번 컬렉션은 흠잡을 구석 없이 탁월하다.
한편, 우리는 공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프랑스 아티스트 저비에 베이앙(Xavier Veilhan)이 디자인한 이번 공간은 버지니 비아르와 마찬가지로, 그가 이어오던 경향과는 조금은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구축주의(Constructivism)’에서 영향받은 이 공간은 버지니 비아르의 말을 다른 구상과 차원(축)으로 페러프레이즈하고 있는데, 쇼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과 뒤섞여 기가 막힌 화학작용을 보이고 있다. 이는 구축주의 정신과 일맥상통한다는 점에서, 이번 컬렉션을 새 시대를 향한 샤넬식 선언이라 봐도 무방할 듯하다. 특히 가장 비효율적인 공간 계획과 동선 계획을 취하고 있는 점이 돋보이는데, 이는 ‘패션’쇼가 아닌 패션‘쇼’에 길들어진 파리 패션계가 런웨이의 본질에 대해 재고하게 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칼 라거펠트(Karl Lagerfeld) 20g, 버지니 비아르 500g, 샤롯 카시라기(Charlotte Casiraghi) 100g, 저비에 베이앙 100g, 세바스티앙 텔리에르(Sebastien Tellier) 100g 등 많은 요소들이 기가 막힌 화학작용을 일으키며 따끈하게 구워진 ‘샤넬 2022 S/S 오뜨 꾸뛰르’가 도달한 본질은 무척 맛있다. 아니, 맛있는 것을 넘어 감복스러울 정도. 전혀 뜨겁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고, 지금 당장 우리를 위해 빚은 페러프레이징을 맛보도록 하자.
이미지 출처 | Chan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