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의 시민과 부장 와타나베 겐지(시무라 다케시)는 아무런 의욕이 없다. 하수구 처리장이 문제라는 민원인들의 아우성에도 권태에 빠진 그의 삶은 요지부동일 뿐이다. 어느 날 급작스러운 복통으로 겐지는 병원에 가고, 계속 암은 아니라고 부정하는 의사의 말이 오히려 자신의 암 투병 사실을 확인시키는 듯싶다. 겐지는 충격에 빠진 채 방탕한 삶을 오가다, 어떤 계기로 생의 의지를 불태우게 된다.
일본 영화에서 절대 잊을 수 없는 그 이름. 구로사와 아키라(Kurosawa Akira)의 명작 중 하나로 꼽히는 “이키루(生きる)”는 삶과 죽음의 태도에 대한 뛰어난 통찰을 제공하고 있다. 살아있지만 죽은 자, 그리고 죽을 운명을 앞두고 있지만 어느 때보다 살아있는 자. 생사를 구분 짓는 것은 곧 상태가 아닌 태도라는 굳센 선언은 마초적인 그의 영화 세계에서 일종의 낭만처럼 보이기도 한다.
1952년 축 처진 어깨와 펑퍼짐한 정장을 걸친 무기력한 노인 와타나베 겐지가 70년이 지나 영국에서는 조금 더 강박적이고 말끔한 신사로 다시 태어났다. 추레한 모습이 인상 깊었던 시무라 다케시(志村喬)가 이제 영국에서 가장 핏이 좋은 할아버지 빌 나이(Bill Nighy)로 변했기 때문이다. 남아공 출신의 감독 올리버 헤르마누스(Oliver Hermanus)는 2017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가즈오 이시구로(Kazuo Ishiguro)의 각색에 힘을 입어 “이키루”를 리메이크했다.
2022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이미 한 차례 공개되었던 “리빙: 어떤 인생(Living)”은 지난 3월 일본 개봉에 이어 올해 12월 국내 개봉을 확정했다. 공개된 트레일러 영상을 보면 흑백의 우중충한 삶의 무게를 짓누르던 “이키루”보다는 어딘가 프랭크 카프라(Frank Capra)의 희망찬 드라마가 떠오르기도 한다. 각색을 맡은 가즈오 이시구로 역시 일본 문학보다는 영미 문학으로 분류되는 만큼, “리빙: 어떤 인생”은 “이키루”가 지닌 전후 일본의 생사에 대한 고뇌보다는 조금 더 현지화된 가치와 태도로 삶에 접근하지 않을까? 원작의 무게를 어떤 방식으로 빌 나이와 가즈오 이시구로가 소화해 냈을지, 12월이 되면 극장에 방문하여 직접 확인해 보자.
이미지 출처│MUBI, 네이버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