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신분증명서와 생업을 모두 포기한 채 상자를 뒤집어쓰고 살아가는 남자가 있다. 신분도 벌이도 없는 그에게 세계란 작은 상자가 전부다. 소설 속 남자는 독자들에게 아주 친절하게 상자로 간이식 이동주택을 만드는 법도 가르쳐 준다. 몸을 뉠 만큼 큰 골판지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부랑할 수 있는 마음만 있다면 누구나 ‘상자인간’으로 살 수 있다. 물론 독자 중 그 누구도 그 길을 택할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일본의 카프카라고 불리는 소설가 아베 코보(Abe Kobo)의 1973년 발표된 소설 “상자인간(箱男)”은 도시의 부랑자로 살길 택한 남성의 이야기를 복잡한 구조 속에서 풀어낸 흥미로운 작품이다. 특유의 난해함과 복잡한 서사 구조 가운데에서 발견하는 인간 소외의 정서 때문에 50년이 넘는 지금도 일본의 문학도들에게 여전히 사랑받는 소설 중 하나다. 심지어 코지마 히데오(Kojima Hideo)의 대표작인 메탈기어 시리즈를 상징하는 아이템 중 하나인 위장용 골판지 상자도 바로 아베 코보의 소설에서 유래되었다.
그리고 일본 펑크 필름의 전설로 알려진 이시이 가쿠류(Ishii Gakuryu a.k.a Ishii Sogo)가 드디어 신작 “더 박스 맨(The Box Man)”이란 제목으로 “상자인간”을 영화화했다. 1980년대 “역분사 가족(逆噴射家族)”, “폭렬도시(Burst City)” 등을 만들며 그야말로 펑크라는 단어를 스크린에 그대로 옮기던 젊은 시절의 에너지는 줄었지만, 여전히 자신만의 독보적인 색깔을 유지하며 작업을 이어왔기 때문에 이시이 가쿠류가 해석하는 “상자인간”을 향한 시네필들의 관심이 쏠렸다.
아사노 타다노부(Asano Tadanobu), 사토 코이치(Sato Koichi), 나가세 마사토시(Nagase Masatoshi) 등 일본을 대표하는 배우들이 참여한 이번 작품은 2024 베를린영화제 베를리날레 스페셜 부문에 초청되어 상영될 예정이다. 베를린 영화제 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는 트레일러를 보면 배경으로 깔리는 베이스 사운드와 좁은 상자 틈 사이로 빨려 들어가는 카메라워크 속에서 이시이 가쿠류의 초기작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과연 이 영화는 기대대로 펑크와 카프카의 독특한 만남이 될 수 있을까? 국내 상영 기회가 오기만을 간절히 기도해 보자.
이미지 출처 | Berlin Film Festival, Amaz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