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를 풍미하던 TV 시리즈 “왈가닥 루시(I Love Lucy)”, 주인공인 가정부 루시와 음악인 남편 리키의 일상을 담은 시트콤으로 역대 최고의 TV 쇼 중 하나로 꼽힌다. 허나, 지난 11월 5일 파라마운트(Paramount)를 통해 블루레이 박스 세트가 발매된 직후 최악의 복원 사례로 놀림거리가 됐다. 2013년 “왈가닥 루시”의 첫 번째 시즌의 고화질 복원을 공개한 이래로 6번째 시즌까지 총 180편의 에피소드를 모두 복원한 이번 블루레이 세트는 발매 직전까지 미국 내에서 큰 기대를 모았던 소식이었다. 1950년 방영 이후부터 전미 68%의 시청률을 기록했던 시트콤 “왈가닥 루시”는 텔레비전에서 최초로 앙상블 캐스트를 출연시킨 프로그램이자 관객들이 보는 앞에서 35mm 필름으로 촬영한 최초의 TV 프로그램이라는 역사적 의의도 가질 만큼, 현대 방송사의 이정표와 같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레딧(Reddit)에서 한 장의 스틸컷이 공유되기 시작하면서 이번 고화질 블루레이 버전에 대한 비판이 시작되었다. 문제가 된 장면은 6시즌의 시트콤 종영 이후 제작되었던 특별판인 “The Lucy-Desi Comedy Hour”의 1화 “Lucy Takes a Cruise to Havana”의 한 장면이다. 루시 역의 루실 볼(Lucille Ball)과 리키 역의 데시 아너즈(Desi Arnaz)가 카페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도중, 흐릿하게 포커스 아웃된 뒷 좌석의 커플을 유심히 바라보자. 분명 여성의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과도한 복원으로 인해 남미계 중동 남성의 얼굴이 덧대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찰나의 짧은 순간이지만 이런 오류를 검수조차 하지 않았던 파라마운트사에 대한 거센 비판이 이어졌다.
파라마운트는 해당 오류에 대하여 ’35mm 촬영본 외에 스튜디오로 보내졌던 16mm 필름과 유실 장면의 일부를 비디오테이프 본으로 겹쳐 제작하는 과정에서 일관성을 상실한 채 복원이 이뤄졌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한편, 일각에서는 복원 과정에서 생성형 AI를 활용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생성형 AI는 흐릿한 이미지를 점진적으로 선명하게 하여 초점을 맞추려고 시도하기 때문이다. 파라마운트는 공식적으로 이를 부인하고 있다. 이와 같은 논란은 사실 영상 산업계에 만연한 문제기도 하다. 유튜브를 검색하다 보면 과도하게 AI로 보정된 기괴한 고전 복원 영상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영상이 지닌 색감과 심도를 무시한 채 그저 선명하게만 복원하여 불쾌한 골짜기를 형성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유실된 일부를 복원하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 특히 스페인에서 연속적으로 발생하는 아마추어 복원 실패 사례만 보아도, 형편없는 복원이 얼마나 많은 조소를 야기하는지 알 수 있다. 해마다 국제영화제와 영화연구소에서는 필름 아카이브를 디지털화하는 작업에 오랜 공을 들인다. 방송사의 이정표와 같은 “왈가닥 루시”의 오류 역시 그저 해프닝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AI를 통한 손쉬운 복원의 폐해로 지적될 것인가. 답은 정해지지 않았지만, 이번 사건을 통해 반대급부로 장인 주의에 입각한 복원에 대한 경이만큼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미지 출처ㅣIndiewire, Paramount, Europa 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