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부터 뉴욕 힙합의 맥박을 짚어온 디제이 미스터 씨(Mister Cee)가 오늘 5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미스터 씨는 20년 넘게 힙합 라디오의 관제탑 격인 핫 97(HOT 97)라디오를 지켜온 거물 디제이로 오늘날 기억되지만, 그의 이력서는 앞으로 갈수록 굵어진다. 어릴때 디제이 나이트(Knight)에게 디제잉을 배웠고, 고등학교 때인 80년대 중후반에는 빅 대디 케인(Big Daddy Kane)의 투어 디제이로 활동하며 80년대 올드 스쿨 힙합의 선두를 달렸다.
여기서 빅 대디 케인을 모르는 독자를 위해: 흑인도 성공해서 백인 앞에서 쩌렁쩌렁 금체인을 자랑스럽게 차고 다녀도 된다는 ‘힙합정신’을 빅 대디 케인이 선구했다.
당대 가장 핫한 래퍼의 백업 디제이로 활동했음에도 미스터 씨는 쉬지 않았다. 그가 자라온 브루클린의 베드퍼드-스타이베센트(Bedford-Stuyvesant)의 사운드를 지켜보며 계속 힙합의 논리적 연장을 찾았다. 그렇게 그는 1994년에 노토리어스 비아지(Notorious BIG)를 발굴했다. 비기의 실력을 단숨에 알아차린 미스터 씨는 곧바로 비기의 데모 테이프 녹음을 도왔고, 그의 전설적인 데뷔 앨범 [Ready to Die]의 공동 총괄 프로듀서로 참여하게 된다.
그래도 미스터 씨의 놀라운 경력 중 핫 97이 가장 유명한 이유가 있다. 이미 탁원할 선곡 실력과 음악을 향한 진심으로 그는 60분 믹스가 표준인 시대에 120분짜리 믹스 테이프로 뉴욕 거리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런 신(Scene)의 존경을 전제하에 그는 당시 뉴욕시에서 가장 많이 듣는 라디오 프로그램 중 하나였던 “Throwback at Noon”의 진행을 맡게 되었다. 이렇게 브루클린을 넘어 뉴욕을 단합하는 디제이로 자리 잡은 미스터 씨는 20년간 힙합 신이 귀를 기울이는 이로 사령탑에 섰다. 그가 90년대와 2000년대 뉴욕에 소개한 제이지(Jay-Z), 앨리샤 키스(Alicia Keys), 50센트 등 뉴욕을 대표하고 대변할 수많은 이들 중 핫 97에서 그의 선곡을 거치지 않은 이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힙합은 삶을 넘을 수 없다. 힙합도 삶의 일부분이라 그런지, 결국 죽는다. 미스터 씨가 그린 힙합도 삶을 극복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다. 지연된 과거의 오답들이 하찮은 법과 편견으로 부정된 현재를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 힙합이다. 찰나의 순간일지라도, 남들이 안된다는 것이 되는 순간 모든 것이 가능해 보이지 않나?
이런 가능성을 여는 것이 힙합이고, 이런 힙합을 개척한 거물 중 한 명이 오늘 막을 내렸다. 하지만, 바이닐을 무대 삼아 수십 년간 뉴욕이란 극단을 이끌어온 그의 열정은 앞으로도 야망을 사랑하는 이들을 힙합이란 연극으로 초대할 것이다. 왜냐하면 여전히 다르다는 이유로 입을 다물고 살아가야 하는 젊은이들은 여전히 희망과 자신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쭉, 우리는 앞날이 조금이라도 보이는 날들을 원할 것이다.
이미지 출처 | Hot 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