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바논 북부 트리폴리에 위치한 ‘라시드 카라미 국제 박람회(Rachid Karami International Fair)’는 건축가 오스카 니에메예르(Oscar Niemeyer)가 설계한 현대 건축의 걸작 중 하나다. 1960년대 초반, 레바논은 중동의 문화, 경제적 중심지로 도약하려 했고, 이를 상징할 대규모 박람회 단지를 조성하기로 했다. 니에메예르는 미래적인 곡선 구조와 개방적인 공간을 활용해 돔형 실험 극장, 거대한 전시관, 박물관, 원형 경기장, 전망 타워 등을 설계했다. 그러나 1975년 레바논 내전이 발발하면서 모든 공사가 중단되었고, 이후 수십 년 동안 이곳은 미완성 상태로 방치되었다. 현재도 이 건축물들은 거의 사용되지 않고 심각하게 훼손된 채 남아 있다. 그중 돔형 실험 극장은 여전히 독특한 음향적 특성을 지니고 있는데, 내부에서 속삭이면 건물의 반대편에서도 또렷하게 들리는 ‘속삭임 효과(whispering effect)’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초현실적인 사운드 경험 덕분에 예술가들과 사운드 디자이너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중.

베를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이탈리아 출신 사운드 아티스트 사라 페르시코(Sara Persico)는 이 미완의 건축물에서 영감을 받아 새 앨범[Sphaîra]를 제작했다. 2022년 처음 이 돔을 방문한 그는 공간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음향에 매료되었고, 1년 뒤 다시 레바논을 찾았을 때 녹음 장비를 챙겨 비공식적인 필드 레코딩을 진행했다.
페르시코는 보안 검문을 어렵게 통과한 후, 돔 내부에서 즉흥적으로 노래하고 속삭이며 금속판을 두드렸다. 공간 자체가 하나의 악기가 되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특히 돔의 개방된 구조를 통해 외부의 트리폴리 소음이 스며드는 것을 활용하여 경찰 사이렌, 새소리, 거리의 웅성거림 등 건축물과 생활 소음이 상호작용하는 방식도 담아냈다. 녹음은 벨기에의 사운드 디자이너 쾨엔라드 에커(Koenraad Ecker)와 함께 정제되었으며, 실험적인 보컬, 필드 레코딩, 디지털 노이즈가 결합된 초현실적인 사운드스케이프를 일구었다.
따라서 [Sphaîra]는 장소와 소리, 역사와 기억이 얽힌 실험적 탐구인 것이다. 트랙 “Brutal Threshold”에서는 돔 내부의 잔향과 경찰 사이렌이 어우러지며 공간 자체가 살아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Rashid Karami”에서는 인더스트리얼한 소음과 불규칙한 리듬을 결합해 이 건축물이 지닌 시대적 단절과 긴장감을 표현한다.
레바논은 과거 ‘중동의 파리’라고 불릴 정도로 경제적 번영과 문화적 다양성을 자랑하는 국가였다. 앨범 [Sphaîra]은 1975년 내전 발발로부터 단절된 시간과 더불어 메아리처럼 반복되는 현재 중동의 안타까운 정세를 고스란히 담은 것 같아 그 첫 인상이 매우 서늘했다. 이번 프로젝트에 관해 페르시코는 “이 공간이 오랜 시간 동안 품어온 역사와 감정이 소리에 스며들어 있었다”고 언급하기도. 또한 “공간의 음향을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 자체가 음악이 되는 과정이었다”고 밝혔다. 이제 앨범을 직접 감상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