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셔츠 게임

‘바야흐로 티셔츠의 시대다’라는 말이 꽤 철 지난 말로 느껴질 만큼, 티셔츠는 언제나 길거리 문화의 근간이었다. 비교적 만들기 쉬운 동시에 이 바닥의 옷차림에서는 빠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일까. 수많은 서브컬처 기반의 소규모 브랜드는 예나 지금이나 항상 그래픽 티셔츠로 시작했다. 길바닥 말고도 패션 전반에서 캐주얼한 무드가 득세하고, 하이패션 브랜드의 그래픽 티셔츠가 이태리 가죽으로 제작한 재킷보다 더 비싸게 팔리는 풍경에서 ‘티셔츠의 시대’가 지닌 의미가 좀 더 새로워진다. 슈프림(Supreme) 박스 로고의 무시무시한 리셀 가격조차 이제는 자연스럽게 느껴질 정도. 특히나 작년(2019년) 우리 동네의 티셔츠 게임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활발했던 것 같다. 길단(Gildan) 티셔츠에 로고를 찍어 캐딜락 에스컬레이드를 사버리는 봉이 김선달 같은 사건을 필두로, 오늘날 거의 모든 힙합 레이블과 뮤지션들이 티셔츠로 마진을 땡기기 시작했다. 아이앱(IAB)의 ‘IAB Studio’ 로고 티셔츠는 품질을 둘러싼 논란에도 불구하고 발매와 동시에 매진될 뿐 아니라 꽤 많은 현역 플레이어들의 지갑까지 열게 만들었다. 2019년 최고의 화제작인 이센스(E SENS)의 [이방인]을 둘러싼 수많은 이야기 중에는 아침 9시부터 길게 줄이 늘어 선 팝업 스토어를 빼놓을 수 없다. 동네에서 잘 나가는 티셔츠도 로고만 썰렁하게 박은 게 대부분이다. 가령 미스치프(Mischief)나 엘엠씨(LMC), 디스이즈네버댓(thisisneverthat), 비바 스튜디오(Viva Studio), 커버낫(Covernat)과 같이 이 동네를 씹어 먹는 브랜드의 최근 발매군을 보면 역시나 기본 로고티가 대세. 무신사 스토어 판매 순위 첫 페이지를 장식한 거의 모든 티셔츠가 기본 로고라는 사실을 확인한다면, 확실히 그 옛날 ‘포토그래피, 그래픽 작업, 프로파간다적 문구를 통해 디렉터의 정체성을 표현한다’라는 식의 거창한 모토가 외려 짜치는 기분마저 든다.

슈프림(Supreme)의 로고 티셔츠가 대게 하루 내에 품절되는 것과 달리, 의외로 수많은 그래픽 티셔츠와 아티스트 콜라보레이션 제품이 썩 오랫동안 팔리지 않는 것도 어쩌면 비슷한 흐름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티셔츠 게임을 비웃는 듯한 이야기 역시 더욱이 현재진행형이다. ‘로고를 떼도 살 거냐. 결국 브랜드를 소비하는 것 아니냐’와 같은 흔한 비판은 티셔츠에 적용할 때 훨씬 더 적나라해진다. 사실상 상표를 떼면 아무것도 없는 옷이다. 점퍼는 최소한 기능성이라도 지니고 있으며, 바지는 맵시의 차이라도 있으며, 가죽이라도 좀 들어가면 ‘장인정신 어쩌구’라고 야부리를 털 수 있다. 그러나 상하좌우 총 네 개의 구멍만이 존재하는 티셔츠에서는 디자인 요소라고 할 만한 게 마땅치 않다. 오버사이즈니 오프숄더니 네오프렌이니 하는 것들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티셔츠는 티셔츠일 뿐. 실제 온갖 도메스틱 브랜드가 YKK 지퍼와 3M 신슐레이트를 흡사 신이 내린 부자재처럼 포장하며 상품 소개문을 쓰지만, 도무지 티셔츠에는 쓸 말이 마땅치 않은 것도 그런 이유일지 모른다 ─ 물론 최근 모 브랜드의 무지티 소개글에서 ‘목화에서 추출한 면으로 만든’이라는 문구를 보고 무릎을 칠 수밖에 없었다 ─. 물론 이 비난에도 미묘한 경계는 있다. 거의 모든 집단이 티팔이라는 귀여운 놀림부터 시작해서 길단 티셔츠의 원가, 허술한 QC로 비롯된 비난 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지만 의외로 염따의 티셔츠는 예외였다. 그 누구도 염따의 디자인을 비난하지 않았다 ─ 동시에 칭찬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 만약 염따티를 빨았더니 기장이 절반이 된다고 해도 갑자기 그의 티를 사던 사람들이 등을 돌릴 것 같지도 않다. 심지어 새로운 디자인이라고 할 것도 별로 없었던 염따의 2차 판매분은 3일 만에 21억을 벌어다 주었다. 아니, 그보다는 정확히 그의 티셔츠를 파는 행위는 무언가 단순히 상거래도 아니요, 인터넷 상의 밈(Meme)도 아닌, 뭔가 매우 독특한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다. 지금의 이 기가 막힌 티셔츠 게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결국 실제 의복으로서 티셔츠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생각해야 할지도 모른다.

티셔츠의 기능을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일단 그 옛날, 물 건너 도착한 스투시의 티셔츠가 집에 도착하자마자 모가지의 재봉선을 뜯어 고무링부터 넣던 그 시절에는 ‘목이 늘어나지 않는’ 메리트가 티셔츠의 퀄리티를 정하는 꽤 중요한 기준이던 것 같다. 빨고 난 뒤의 사이즈 수축 정도 역시 하나의 기준이었다. 그러나 수백 번을 빨아도 줄지 않을 것 같은 칼하트(Carhartt)나 디키즈(Dickies)의 단단한 티셔츠가 이미 초장부터 모가지가 늘어질 대로 늘어져버린 생로랑(Saint Laurent)의 티셔츠보다 좋은 옷이라고 하기엔 꽤나 거시기하다. 하물며 꽤나 고심한 그래픽 아트와 그놈의 ‘동양인의 체형에 맞게 수정한’ 패턴을 개발한다고 해도, XS부터 3XL까지 제공하면서 각종 동네 유행하는 그래픽 아트는 싹 다 베껴 넣은 7천 원대의 스파(SPA) 브랜드를 ‘가격대 성능비’라는 관점에서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이 기능을 이야기하기 위해선 ‘패션은 나를 표현하는 수단이에요’ 따위의 수식을 쓸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다만 여기에서 표현이라는 것이 앞서 말한 것처럼 과거의 무슨 굉장한 스트리트 아트라던가 혹은 “I AM FEMINIST” 같은 문구를 통한 프로파간다적 메시지를 담아내는 게시판의 역할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별 것 없는 로고가 찍힌 티셔츠임에도 이것은 나란 사람이 어떤 문화, 어떤 뮤지션, 어떤 집단을 좋아하는지 가장 단숨에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인 것이다.

가령 비견한 예로 비즐라(VISLA)의 머천다이즈를 입고 있는 누군가를 길에서 만났다고 생각해 보자. 우리는 이 사람이 최소한 멜론 TOP 100는 그다지 즐기지 않을 것이고 ─ 듣더라도 몰래 들을 것이고 ─, 크룩스 앤 캐슬(Crooks & Castle)보다는 반스(Vans)를 좋아할 것이고, ‘영스베베’보다는 ‘디제이 소울스케이프’를 좋아할 것이고, 사실 마음은 밤과 음악 사이에 가고 싶겠지만 그래도 토요일 밤에 일단은 콤팍트 레코드바나 케이크샵, 헨즈를 두리번거리는 스트리트 신 후보생이라 짐작할 수 있다. 서교동의 유명 레코드 스토어 티셔츠를 입은 누군가, 이방인 티셔츠를 입은 누군가, 소규모 진(Zine) 페스티벌에서 파는 머천다이즈를 입은 누군가, 레코드바의 티셔츠를 입은 누군가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동네의 어떠한 티셔츠란 거의 뮤지션 콘서트의 머천다이즈, 아니 단체티와도 같다. 옆 반 단체티가 아무리 예쁘고 튼튼하고 가격이 저렴하다 하더라도 구성원이 아닌 이상 사는 일은 흔치 않다. 반대로 그 단체에 구성원이라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아도 구매할 수밖에 없다. 소규모 브랜드에서 나온 옷을 지인들이 사고 보는 것과 마찬가지. 반대로, 이 티셔츠를 지인 집단 너머의 누군가가 산다는 건 어떠한 ‘서포트’ 혹은 ‘가입(?)’에 준하는 의미를 포함할 수 있다. 아무리 힙합 악수로 형제자매를 외치는 좁디좁은 길바닥 신이라지만 지갑 여는 것만큼은 누구보다 인색하다는 걸 그대들이 가장 잘 알지 않는가.

즉 티셔츠의 판매 실적은 단순히 돈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이 브랜드, 집단, 뮤지션이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지 가늠하는 중요한 바로미터가 된다. 5천 원만 있으면 썩 입을만한 티셔츠를 구할 수 있고, 2만 원만 있으면 길단 무지티에 내가 원하는 실크 스크린을 박을 수 있는 이 시점에, 굳이 똑같은 시판 무지티에 대충 전사 때린 걸 4만 9천 원에 팔려면 단순히 간지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다. 좆되는 소재나 굉장한 그래픽, 혹은 졸라 멋진 로고 이전에 그저 근사한 존재나 브랜드가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염따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티셔츠를 사는 현상을 보며 “이게 곧 내 앨범을 사는 행위”라고 밝혔다. CD를 돈 주고 사지만 음악은 애플 뮤직으로 듣는 것처럼, 티셔츠 역시 입기 위해 사는 게 아닐 수도 있다. 뭐 수집일 수도 있고 서포트일 수도 있다. 미술관에서 굿즈를 구매하는 행위와 같은 느낌일 수도 있다. 아니면 이 가격대 성능비라는 이야기로부터 한참 벗어난 티셔츠 게임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즐거운 경험일 수 있다. 여하튼 내가 사는 이 티셔츠가 스파 브랜드의 티셔츠보다 4.9배 튼튼하다든가 소재가 탁월해서가 아니란 것은 분명하다. 물론 내 눈에 안 예쁜 티셔츠를 단지 서포트의 차원에서만 산다는 의미는 아니다. 당연히 구매자는 그것이 제 눈에 멋져 보이니까 사는 것이고, 몇 가지의 반론이 있을지라도 어쨌든 동네에서 성공한 티셔츠의 디자인은 기본적으로 무척 쿨했다. 그들의 티셔츠가 오픈마켓에 흔히 보이는 짜치는 디자인이었으면 뭔가 양상은 달랐을 수도 있다. 다만 훨씬 값도 싸고 튼튼한 다른 티셔츠가 아닌 이 로고만 딸랑 있는 옷이 누군가의 눈에 근사해 보이고 심지어 지갑까지 열 수 있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그래서 우린 이제 아무리 옷에 관심이 많고 수많은 스트리트 브랜드나 고급 명품 의류의 가격표를 줄줄 외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떤 부분에서는 타인이 구매하는 티셔츠를 이해할 수 없다. 아이앱 스튜디오가 그저 실력도 없는데 빈지노 이름으로 먹고사는 앙투라지라 생각하는 아저씨의 시각으로는 결코 그들의 티셔츠가 품절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 대학교 때 힙합 동아리에서 랩 좀 하던 경력으로 “쇼미더머니” 볼 때마다 저게 힙합이냐며 혀를 차고, 꽤 괜찮은 앨범을 들으면 요새 음악은 소울이 없다든가 믹싱이 구리다는 식의 야지를 놓는 퇴역 래퍼의 눈에는 현역의 티셔츠 대박 소식이 도무지 허용되지 않는다.

사실 티셔츠뿐 아니다. 인터넷의 발달과 기업 간 지옥의 경쟁 체계 속에서 모든 생활에서의 기본적인 소비 형태가 ‘가격대 성능비’의 영역으로 수렴해가고, 사실상 모든 정보를 구글을 통해 무전취식할 수 있으며, 모든 제품을 인터넷을 통해 클릭 한 번이면 최저가로 살 수 있는 이 시점. 오프라인 매장이라든가 종이 잡지가 내포한 의미 또한 어떻게 보면 티셔츠 게임과 일맥상통할 수 있다. 결국은 ‘이미지를 소비하고픈 욕구’가 지갑을 열고 몸을 움직이는 주요한 동인이 된다. 굳이 오프라인에 가서 돈을 쓰게 만든다는 것은, 어찌 됐든 그곳이 꽤나 근사한 곳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이 발전할수록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유형의 것이 더욱 중요해질 것입니다’와 같은 뜬구름 잡는 말보다는, 결국은 ‘이런 근사한 무언가를 내가 알고 있으며, 이것을 소비할 정도의 교양을 가지고 있다’라는 인식을 충분히 즐길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그게 귀찮음을 이겨내고 지갑을 열게 만드는 힘이다. 그러니, ‘슈프림 로고 떼도 이거 이 돈 주고 살 거냐’라든가 ‘같은 디자인에 스베누(Sbenu)라도 그 돈 주고 샀을 거냐’ 같은 질문은 이제 접어두는 게 어떨까. 그 로고가, 목에 달린 택이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