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는 근대인의 지각을 변화시킨 발명품이다. 기차는 빠른 이동 속도로 근대의 시간과 공간을 축소했다. 기차 시간표를 중심으로 시간의 체계가 일원화되었으며 기차역을 중심으로 도시는 발달했다. 무엇보다도 기차는 마차와는 달리 빠르게 연속적으로 움직이는 창밖 풍경을 제공했다. 끊임없이 지나가는 풍경은 근대인에게는 새로운 시각 경험이었다. 근대인은 기차의 창을 통해 움직이는 이미지 연출을 서서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차창의 풍경은 움직이는 파노라마 그림(Moving Panorama)라는 유희가 되고 마침내 움직이는 이미지의 연속인 영화로 이어졌다. ‘영화(Movie)’라는 용어는 이러한 흐름을 잘 반영하고 있다. 영상 기술을 일컫는 표현, 무빙 픽처(Moving Picture)는 ‘Moving Panorama’에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Moving Picture’의 줄임말이 곧 영화, ‘Movie’다.
뤼미에르 형제의 1895년작 “기차의 도착(L’Arrivée d’un train en gare de La Ciotat)”으로 영화와 기차의 관계는 더욱 공고해진다. “기차의 도착”은 50초 남짓의 시네마토그래피로, 치오타 역에 도착하는 기차의 모습을 인위적인 원근법(Forced Perspective)으로 담고 있다. 원근법에 따라 극적으로 커지며 다가오는 기차의 모습은 영상 기술에 익숙지 않았던 관객을 충격에 빠뜨렸다. 관객 중 몇몇이 열차가 실제로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다고 착각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는 비화가 생길 정도였다. 이 영화가 큰 성공을 거두면서 이를 참고한 영화 또한 다수 생겼다. 철도 회사는 아예 영화를 광고의 수단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관객들은 점차 기차가 등장하는 영화에 익숙해졌다.
1901년 제작된 R.W. 폴의 “시골뜨기와 영화(The Countryman and Cinematograph)”에는 영화관에 처음 간 시골 사람이 달려오는 기차의 모습을 보고 놀라 달아나는 장면이 나온다. 뤼미에르 형제의 “기차의 도착”과 유사한 구도로 등장하는 기차(가 달려오는 모습을 담은 영화)는 근대 문물에 익숙지 않은 사람에게 충격을 주는 발명품이다. 영화는 기차와 마찬가지로 충격과 함께 근대인의 지각에 변화를 가져왔다. 기차와 영화는 근대를 상징하는 ‘다정한 동반자’가 되었다.
기차는 때로 영화 그 자체를 상징하기도 한다. 구로사와 아키라(Akira Kurosawa)의 “도데스카덴”에서는 전차가 영화에 대한 은유로 등장한다. 영화의 구조는 영화 상영의 과정을 따라 전차가 지닌 상징성을 강화한다.
“도데스카덴”의 시작 크레딧은 전차 내부를 부분부분 클로즈업하며 떠오른다. 전차는 ‘구로사와 아키라’라는 이름을 앞에 달고 “기차의 도착”과 비슷한 구도로 관객을 향해 다가온다. 구석구석 스태프의 손이 닿은 이 전차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 즉 “도데스카덴” 그 자체다.
장면은 지나가는 전차를 행복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소년 로쿠찬의 모습으로 전환된다. 로쿠찬이 서 있는 튀김 가게의 창에 전차가 비친다. 열렬한 기도 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곧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내부에는 전차 그림이 빽빽이 붙어 있다. 소년은 평소에도 전차를 ‘그리며’ 사는 것이다. 전차 -영화- 를 그린다는 것은 매일 전차에 대한 애정으로 전차가 운행하는 모습 -영화가 상영되는 모습- 을 상상한다는 말이다.
로쿠찬은 문을 열고 들어가 기도하는 여인의 옆에 앉는다(이 영화에서 문은 인물의 등장과 퇴장을 알리는 장치다. 문은 새로운 인물이 등장할 때, 그리고 인물이 극에서 퇴장할 때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모자(母子)는 서로를 위해 기도한다. 시계가 종을 치자 그는 전차를 운행하러 가야겠다며 가방을 챙기고는 장갑을 손에 낀다. 낡고 때가 탄 목장갑은 성실한 노동을 묘사한다. 장갑을 끼고 그가 마임을 시작한다. 장갑은 작업에 착수하기 전 착용하는 의복이다. 장갑을 낀 채로 일어나는 행위 -노동- 가 마임이라는 것은 그의 일이 허구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나타낸다. 로쿠찬은 상상의 연장을 챙기고 상상의 모자(帽子)를 바르게 쓴다. 상상의 ‘모자’를 씀으로써 그는 전차 운전사라는 가상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그는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간다.
방에 홀로 남은 로쿠찬의 어머니는 훌쩍거리며 촛불을 끈다. 아들의 망상으로 지친 듯하다. 밖에서는 빛이 들어와 창에 붙은 전차 그림이 반투명하게 비친다. 불이 꺼진 방 -극장- 에 들어오는 빛은 그림이 붙은 창 -필름- 을 통과하여 전차의 환영 -영화- 을 만들어낼 것이다.
한편 로쿠찬이 문을 열고 나온 세계는 폐허다. 소년이 폐허의 공터에서 마임을 시작한다. 사방은 고요하다. 그는 허공에서 상상의 전차를 보고 또 만진다. 그가 상상의 장비로 허공을 두드리면 정적을 깨고 ‘소리’가 들린다. 쇠가 쇠를 두드리는 실제적인 소리다. 상상은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물리적인 소리를 얻고 현실과 반응하는 존재가 된다. 로쿠찬이 전차를 정비하고 운행할 준비를 하는 동안 가상의 전차는 기계음을 내며 그의 움직임을 충실히 반영한다.
“자, 발차하자구(さあ, 發車しようぜ)”. 로쿠찬이 때 묻은 운동화를 신은 발을 들었다가 내리누르면 폐허에 경적이 길게 울려 퍼진다. 그는 도데스카덴(칙칙폭폭)을 반복하며 점차 속도를 낸다. 매일같이 전차를 그리기에 폐허에서도 그가 나아갈 길은 곧게 앞을 향해있다. 서정적인 음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로쿠찬이 달린다. 멀리서 아이들이 그를 전차 바보라 놀리며 돌을 던진다. 그러나 로쿠찬은 아랑곳하지 않고 상상 속 전차와 나아간다. 자신의 꿈에 열중하는 소년의 모습은 그 꿈이 허황됐음에도 불구하고 아름답다. 로쿠찬은 하얀 문 -스크린- 이 달린 집에 이르러 멈춘다. 그와 함께 음악도 멈춘다. 이윽고 영화 속 영화, 빈민가 주민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빈민가 주민들의 이야기는 옴니버스 형식으로 중심 서사를 따라가기보다는 인물 하나하나의 이야기를 교차적으로 다루며 진행된다. 영화라는 매체에는 수많은 인물의 삶이 존재한다. “도데스카덴”은 그러한 영화의 속성을 담아내기라도 하려는 듯 특정 인물에 치우치지 않고 다양한 인물을 고르게 비춘다. 이때 인물들은 문을 통해 ‘등장’하고 ‘퇴장’하면서 영화가 가진 극(劇)의 성질을 부각한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로쿠찬은 계속해서 달린다. 해가 지고 달이 바뀌어도 그는 쉬지 않고 발을 놀린다. 영화가 진행되기 위해서는 필름이 쉼 없이 돌아가야만 한다. 릴에 감기는 필름의 단순 반복 움직임은 이미지의 빠른 교체를 이루어낸다. 필름이라는 기차는 한 칸에 하나의 순간을 태우고 빠르게 움직이면서 연속적인 장면을 만들어낸다. 기차가 반복 움직임을 통해 멀리 앞으로 나아갔듯 영화도 필름의 반복 움직임을 통해 무한한 가능성을 향해 달려간다. 가상의 선로를 오가는 로쿠찬의 반복 운동은 영화가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필름의 반복 운동과 같다.
움직임은 달리던 로쿠찬이 화가와 부딪칠 뻔한 사건을 통해 한 번 더 강조된다. 화가는 이젤 앞에 앉아 마을을 그린다. 로쿠찬은 화가를 향해 달려오다가 급히 전차를 세우고는 선로에 앉아 있는 것은 위험하다며 화를 낸다. 로쿠찬과 화가의 충돌은 움직이는 이미지와 정지된 이미지의 충돌이다. 로쿠찬과 화가는 빈민가 마을이라는 같은 대상을 바라보고 있지만, 운동성이라는 차이로 다른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이 장면은 영화가 정지된 이미지가 아닌 운동성을 지닌 이미지임을 상기시킨다.
영화는 가게로 돌아오는 로쿠찬의 모습으로 끝이 난다. 그가 돌아오기 전 어머니는 촛불을 켜서 어둠을 밝힌다(극장에도 곧 조명이 켜질 것이다). 전차가 가게를 향해 달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그와 함께 로쿠찬도 귀가한다. 창으로 전차의 밝은 빛이 새어 들어온다. 전차 그림이 가득한 방에 오색찬란한 빛이 어른거린다. 그는 기차가 그려진 문을 닫고 들어가 깍듯이 인사를 한다. 영화에 운동을 부여하는 인물, 즉 로쿠찬의 퇴장은 가장 마지막이다. 그가 마임으로 모자를 벗고, 환상을 실현하는 역할을 마친다. 영화가 끝난다.
“도데스카덴”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첫 컬러 영화이자 흥행 참패작이었다. 이미 미국에서 촬영하기로 했던 “폭주 기관차” 제작이 무산되고, “도라! 도라! 도라!”의 감독직에서 물러나야 하는 굴욕을 맛보았던 감독은 비관에 빠진 나머지 자살을 시도한다. 그러나 그는 살아났고, 오랜 기간에 걸쳐 다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영화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은 흐려졌지만, 여전히 영화가 개인에게 미칠 무한한 가능성을 믿었다. 처참하고 혼란스러운 세상에서도 영화를 사랑하고 꿈꾸는 그의 모습은 전차를 꿈꾸는 로쿠찬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사람들의 몰이해와 조롱 속에서도 구로사와 아키라, 즉 로쿠찬은 자신이 바라보는 환상의 세계를 실현하기 위해 움직였다. 꿈꾸는 이가 창작이라는 움직임을 만들어냈기에 필름은 돌아가고 이미지는 생동감을 얻는다. 운동성을 가진 이미지는 영화라는 기차가 되어 가능성의 세계로 뻗어간다. 움직임의 연쇄 작용은 관객의 내면에 변화를 불러일으키고, 언젠가는 감독이 꿈꾸었듯 세상을 변화시킬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을 실현하는 힘은 영화에 대한 애정과 그것을 실현하려는 움직임, 바로 앞으로 나아가는 행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