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국밥 순정

안개 빛을 띤 국물에 돼지고기가 넉넉히 잠긴 까만 뚝배기 하나가 상 위로 내려졌다. 다대기(다진 양념이라 쓸 수도 있지만, 다대기는 어쩐지 다대기라 해야만 그 맛이 산다)가 3분의 2 정도 담긴 숟가락도 뚝배기에 빠져있다. 미리 요청한 양념 안 한 정구지(부추의 경상도 사투리)를 국물 안에 집어넣었다. 다대기를 국물에 푼 뒤 약간 붉어진 국물을 한 입 떠 넣는다. 미리 간을 해서 내는 집이 아니다. 숟가락으로 새우젓을 뜬다. 숟가락이 새우젓이 담긴 종지를 벗어나기 전에 약간 기울여 젓갈 국물은 따라 낸다. 숟가락에 수북한 새우가 국물 속으로 흩어진다. 다시 한번 한 입. 간이 맞다. 하지만 내 기억 속 그 돼지국밥의 맛은 아니다. 이 돼지국밥 한 그릇은, 이 글을 쓰기 위해 먹은 국밥 중 마지막에 해당하는 다섯 번째이고, 앞선 네 그릇 역시도 예전 그 맛은 아니었으니 이 식당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국물에 말린 밥과 고기만 대충 입에 밀어 넣고 식당을 나왔다. 식당 밖 부산 풍경도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그때 이 거리엔 뭐가 있었더라. 기억은 불투명하고 그마저도 흩날린다.

부산 서면의 돼지국밥 골목

아버지는 부산의 서면 시장에서 횟집을 운영했다. 부산에 오래 산 사람이 아니고서야 이름조차 생소한 서면 시장이기에 설명하려면 꼭 이 말을 덧붙여야 한다. “서면 돼지국밥 골목 옆입니다”. 이 돼지국밥 골목은 내가 돼지국밥을 처음 먹었다고 기억하는 곳이다. 아버지는 일요일엔 장사를 쉬었지만, 그럼에도 가게 내 수족관 생선 점검을 하러 일요일 아침마다 출근 아닌 출근을 했다. 오래 걸리는 작업은 아니었지만, 출근이 없는 날에 직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운 건 장사를 하는 이라 해도 마찬가지. 아마 그 무거움을 달래보려는 마음이지 않았을까. 아버지는 아직 침대에 누워 자고 있는 내 곁으로 와 달콤한 제안을 하곤 했다. “돼지국밥 사줄게, 아빠 따라가자”.

화물칸이 소금기 가득한 물에 잔뜩 녹슬어 있던 트럭을 타고 서면 시장으로 향하다 보면 차츰 잠이 깼다. 어린 마음에 남의 차보다 큰 트럭에 타고 있다는 일이 우쭐하기도 했다. 서면에 도착한 뒤, 주차를 마치고 차에서 내린 아버지를 따라 시장으로 향하면 인사할 일이 많았다. 주차 관리 할아버지, 시장 경비원, 어딘가 또 다른 장사를 하는 사람들과 아버지는 웃으며 인사를 나눴고, 옆에서 쑥쓰러운 듯 인사하는 내게 그들은 “이놈이 둘째가? 마이 컸네. 아침부터 아빠 따라 왔나?” 하곤 웃었다. 시장에 도착하면 아버지는 한 줄로 늘어선 돼지국밥집 중 한 곳에 날 앉힌 뒤, 맞은 편 닫힌 셔터를 살짝 열어 그 안으로 들어갔다. 혼자 앉아 있는 내겐 아버지가 본인의 셔터를 열기 전 주문한 돼지국밥 한 그릇이 내어졌고, 난 그때도 앞서 말한 순서대로 새우젓을 풀었다.

아버지와 함께 찾던 돼지국밥집의 현재 모습

아버지가 오길 기다리며 돼지국밥을 먹는 동안 나는 식당 풍경을 구경하곤 했는데, 그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가게 입구의 솥에선 국물이 끓고 있고, 그 옆에 선 아주머니는 계속해서 국밥에 들어갈 고기를 썰고 있었다. 다른 아주머니는 물병에 보리차를 채우기도 했고, 또 다른 아주머니는 티비를 보며 잠시 쉬고 있었다. 의자 등판엔 가게의 상호와 전화번호가 초록색 잉크로 인쇄된 하얀 천이 씌워져 있었다. 이른 아침이었기에 그 의자들은 대부분 비어있었는데, 간혹 누군가 앉아 있다면 중년과 노년의 사이의 남자들이었다. 새벽 내내 술을 마신 건지, 아침부터 술을 마신 건지 알 수 없으나 그들은 대부분 취해 있었고, 혼잣말을 하거나 괜히 아주머니에게 시비를 걸기도 했지만, 내게 말을 거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린 애가 혼자 돼지국밥을 먹고 있으니 쳐다보는 경우가 간혹 있긴 했다.

돼지국밥을 절반 정도 먹었을 때쯤 아버지는 점검을 마치고 다시 식당으로 들어왔다. 아버지는 같이 국밥을 먹을 때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았다. 자주 먹어서 질린다고 했다. 나는 그때 “이게 질릴 수도 있나?”라고 생각했다. 뚝배기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하면 일하는 아주머니들이 다가와 “최 사장 아들입니까? 머시마가 잘 먹네, 좀 더 주까?” 했고, 정확히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 아마 거절한 적은 없었다.

그 이후로도 나는 이 골목을 자주 찾았다.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도, 서면에서 친구들과 놀다 배가 고프기 시작하면 발걸음은 언제나 돼지국밥 골목으로 향했고, 고등학교를 타지의 기숙사 학교로 갔을 때도 주말을 맞아 부산에 오면 가장 먼저 이 곳을 찾아서 돼지국밥을 먹었다. 대학교를 서울로 간 뒤 고향을 찾는 횟수가 더 줄었을 때도 돼지국밥 골목은 꼭 들리는 곳이었다. 군대 휴가를 나와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이때부터 뭔가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바로 돼지국밥 맛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이다. 밥 한 공기를 말았을 때 뚝배기를 넘쳐흐를 정도로 많았던 고기의 양도 줄었고, 진한 국물에 새우젓이 풀리면 그 어떤 음식 부럽지 않았던 분명한 맛도 점점 흐리멍덩해졌다. 처음엔 그날의 식당 컨디션의 문제겠거니 했지만, 이런 문제가 점점 반복되자 나는 점점 필사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 돼지국밥이 이렇게 변해선 안 된다는 사명감이었달까. 책임감을 느껴야 할 그 어떤 까닭도 없었지만 돼지국밥은 어느새 내게 너무 소중한 것이 되어 있었다.

멀리 돌아왔지만, 이 글은 그렇게 시작한다. 이 두려움을 나만 느끼는 것인가, 그러니까 내가 변해버려서 돼지국밥 맛이 예전 같지 않은 건지, 아니면 정말로 돼지국밥 맛이 예전만 못한 건지,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거란 기대보단 비슷한 경험을 한 누군가로부터 위로를 받고 싶었달까. 다시 한번 그 두려움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부산에서 방귀 좀 뀐다는 국밥집을 여럿 방문했다.

잠긴 숟가락엔 다대기가 숨어 있다.

처음으로 찾아간 곳은 역시 서면시장 돼지국밥 골목이었다. 내 기억 속엔 돼지국밥집이 바글바글 했던 그 골목엔 이제 돼지국밥집이 3~4개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솥의 뜨거움 만큼이나 끓어 넘치던 활기도 없었고, 가끔 지나가는 관광객이나 스치듯 골목을 통과하는 이들이 전부였다. ‘3대 천왕’, ‘수요 미식회’, ‘맛있는 녀석들’ 등등 방송 프로그램이 다녀간 기록을 앞 새운 홍보물은 더욱 화려해졌지만 그 골목엔 더는 돼지 누린내가 나지 않았다. 돼지국밥을 이미 먹었음에도 어쩐지 쓸쓸했던 건, 애써 날씨가 흐리기 때문이라며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두 번째로 찾아간 곳은 친구가 군 복무로 상근 근무를 했던 동네라 그 당시 친구를 보러 가면 함께 갔던 돼지국밥집이었다.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먹던 자리는 대부분이 좌식 테이블로 바뀌어 있었다. 친구들과 다 같이 농구를 하고 난 뒤라 허겁지겁 먹어 치우긴 했지만, 이곳 역시 그때 그 맛은 아니었다. 이 글을 본 친구들은 제일 맛있게 먹어 놓고 인제 와서 무슨 소리냐며 웃겠지만, 그 당시 내 표정 이면엔 이런 슬픔이 있었다는 걸 지금이라도 알아주길 바란다!

돼지국밥을 내기 전 고기를 데우는 작업

세 번째와 네 번째는 영도에 위치한 남항시장 돼지국밥 골목이었다. 세 번째 집은 마지막으로 돼지국밥을 맛있게 먹은 곳이었고, 네 번째 집은 나름 입맛이 까다로운 후배의 추천을 받은 곳이었기에 기대가 컸다. 그러나 역시 실패. 계속된 실패와 유난히 밍밍했던 국물에 화가 날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식당엔 손님이 많았고, 말씨를 듣자 하니 다들 관광객처럼 보였는데 “오! 이게 돼지국밥이야? 너무 맛있다!” 하는 그들의 대화에 껴들어 “아닙니다!! 그건 돼지국밥이 아닙니다! 돼지국밥은 분명 훨씬 더 맛있는 음식입니다!”라고 소리칠 뻔했다. 하지만 이미 나는 그럴 열정을 잃은 상태였다. 이쯤 했으면 됐다고, 이제 그만하자고, 예매한 기차 시간도 다 되어가니 부산역으로 가자고 생각하며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부산역으로 가는 버스를 탔을 때 나는 분명한 사실을 하나 깨달았다. 이대로 돌아가면 앞으로 더는 돼지국밥을 마주할 수 없을 거란 사실 말이다. 몇 번의 질척거림을 끝내고 나면 그 관계에 대한 에너지도 소진되고, 감정이 말라버려 상대를 보고 싶은 생각조차 더는 들지 않듯이, 돼지국밥과 나의 관계가 이렇게 끝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시계를 보니 서두르면 한 곳 정도는 더 갈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나는 서둘러 중앙동으로 향했다. 이곳은 부산과 서울을 오가며 노래하는 한 가수와 함께 갔던 곳이다. 그는 미슐랭 빕구르밍이니, 블루리본 서베이니 하며 맛집 인증을 받은 식당들을 얘기하며 “진짜 훌륭한 식당은 이런 곳 아닌가예?” 했었다. 그 당시에도 크게 감동하진 못했지만, 부산 토박이로 40년을 산 그의 판단이었으니 한 번 기대를 걸어보자 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들어간 좁은 식당 내부엔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녀가 아주 맛있게 돼지국밥을 먹고 있었다. 난 더욱 기대에 찬 표정으로 조심스레 손을 들며 사장님을 향해 몸을 돌렸고, 입을 열었다. “사장님, 국밥 하나 하구요, 정구지 양념 안 한 거 있으면 같이 좀 주세요.”

그리고 10분 뒤 나는 마지막 실패를 맛봤다. 가게 문을 닫고 나오니 사장님이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난 그래도 기록은 해야 하겠단 생각에 사진을 좀 찍어도 될까 여쭈었고, 사장님은 가게가 낡아서 부끄럽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 순간 나는 “맛만 있으면 됐죠, 뭐 안 그렇습니까?” 했다. 사장님은 “맞지, 맛은 좋지. 몇 장 찍어 가이소.” 하고 웃었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검지가 뻐근했다. 서둘러 부산역으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부산에 며칠 머물다 서울로 향하는 기차는 늘 그렇지만, 그날은 유난히 더 적적했다. 목이 자꾸 타 생수를 연거푸 마셨다. 기차가 대구를 통과할 때쯤, 영화 “봄날은 간다”가 생각난 건 우연이었을까.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사랑은 변하지 않아, 단지 사람의 마음이 변했을 뿐이지” 등과 같은 명대사를 남긴 “봄날은 간다”를 곱씹으며 나는 돼지국밥과 이별했다. 동시에 평소 눈길조차 안 주던 어떤 시인의 구절에 공감했다. 그 구절을 빌어 이 글을 마칠까 한다. 그리운 건 국밥일까, 그때일까.


이 글을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께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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