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극장을 지켜줘

# Intro

한동안 우리는 사람이 많은 곳을 피해야 했다. 누군가를 만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행위로부터 멀어졌다. 어느덧 여름은 등 뒤까지 쫓아왔고, 전염은 둔화하는 듯했다. 그러나 갑자기 클럽에서 바이러스가 퍼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러한 여파로 정부는 한 달간 클럽 등 유흥 시설의 운영 자제를 권고했고 클럽가에서는 그마저도 연기한 행사를 취소하고 마는 안타까운 나날이 이어지고 있다. 또다시 우리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해야 하는 걸까. 하루하루가 얼음판이다.

#1 일본의 ‘SAVE the CINEMA’ 캠페인

코로나19(COVID-19)가 훑고 지나간 모든 분야에서 유례없는 큰 피해가 속출했다. 특히 사람들이 밀집하는 극장과 영화 산업 역시 큰 타격을 입었다. 멀티플렉스 극장도 휘청이는 어려운 상황인데, 독립영화인, 예술 극장은 피해가 더 심각하다. 그야말로 존폐 여부의 갈림길에 서있는 것이다.

‘SAVE the CINEMA’ 공식 홈페이지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지난 4월 일본의 소규모 예술영화관, 즉 미니시어터를 지키기 위한 캠페인 ‘Save The Cinema’가 전개되었다. 영화와 사람, 영화관과 사람 그리고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는 미니시어터를 지키자는 취지로 크라우드 펀딩과 서명 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또한 전국의 미니시어터 지도와 관련 굿즈 제작 등 다양한 활동을 앞두고 있다. 5월 7일 기준 현재 8만 명 이상이 서명에 참여했고, 목표 인원 10만 명을 바라보고 있다.

#2 왜 미니시어터인가?

영화 “사랑과 욕망의 짐노페디” 중

2000년대 이후 일본 영화는 사실상 새로운 것이 없었다. 오직 수익의 안정성을 위해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친숙한 애니메이션, 드라마의 극장판을 제작했다. 점입가경으로 이것을 뒷받침하는 ‘제작위원회’의 입김이 감독의 연출에도 관여한 나머지 다양성과 작품성 측면에서 많이 후퇴하고야 말았다. 특히나 일본의 3대 배급사가 일본 영화의 해외 배급에 소극적이며 스트리밍 유통이 경제적 리스크가 적다는 이유로 선호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 내 극장은 점점 입지를 잃었다. 다시 말해 자국 내수를 위한 영화만을 만들고 있는 폐쇄적인 상황이 영화 수준의 저하와 극장의 감소를 야기했다.

그나마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작품과 다양한 해외 영화를 관람할 수 있는 곳은 민간이 운영하는 미니시어터다. 미니시어터는 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큰 성황을 이루며 도쿄 시부야를 비롯해 전국적으로 개관했고, 2000년대 초반 잠깐 개관 열풍이 불었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일본 역시 멀티 플렉스의 시장 잠식과 영화산업 환경 변화, 상영 방식이 디지털로 변경되면서 미니시어터들은 운영비를 조달하기 어려워졌다. 2018년 기준 일본의 미니시어터는 약 100여 개가 남아있다.

영화 “수라의 길” 속 아이카와 쇼우
영화 “사랑과 욕망의 짐노페이” 이타오 이츠지

미니시어터의 존재는 일본 영화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구로사와 아키라, 오시마 나기사, 고레에다 히로카즈, 이와이 슌지, 가와세 나오미 등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감독의 작품은 미니시어터를 거쳐 갔고 야쿠자의 폭력과 섹스가 난무하는 로망 포르노로 대표되는 ‘V 시네마’의 탄생도 미니시어터에서 이루어졌다. 또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비롯한 한국 작품의 일본 상영 결정은 미니시어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런 의미에서 미니시어터를 지키는 것은 일본 영화의 다양성을 위한 마지막 보루를 지키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3 한국의 ‘Save Our Cinema’ 캠페인

한편 한국에서는 늦은 감이 있지만, 독립예술영화관을 지키기 위한 ‘Save Our Cinema’라는 이름의 캠페인을 시작했다. 일본의 ‘SAVE the CINEMA’도 이 캠페인에 지지와 연대의 메시지를 보냈다. 국내 영화감독과 배우, 영화사, 영화제 등이 캠페인에 참여했고 소셜 미디어에서 영화관의 경험과 추억을 공유하는 ‘#나의독립예술영화관’, ‘#인생독립예술영화’ 챌린지와 함께 서명 운동이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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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하는 극장들이 있습니다. 저는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기획하는 에릭로메르 회고전을, 독립영화 개봉 1주년 생일파티를 열어주는 인디스페이스의 인디돌잔치를, 씨네큐브에서 만나볼 수 있는 아녜스 바르다 특별전을, 아트나인의 테라스에서 열리는 소박하고 다정한 gv를 좋아합니다. 그 밖에도 아트하우스 모모, 필름포럼, 대구 오오극장, 강릉 신영극장… 제작비가 적고 상영관도 넉넉히 확보하지 못하는 독립•예술영화들을 접할 수 있게 해주는 더없이 소중한 영화관들입니다. 코로나19로 불확실한 세계 안에서 영화산업은, 그 중에서도 수익창출과는 거리가 먼 작은 영화관들은 말 할 것도 없이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여러가지 우려들이 있지만 표면적으로 영화 자체가 우리 곁에서 사라지는 일은 없을거예요. 스트리밍과 IPTV, VOD는 이런 시기에 더 성황이니까요. 하지만 이러다간 우리가 사랑했던 극장들을 지키기 어려워질까봐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이렇게 힘든 시기에도 어떻게든, 우리가 누려왔던 문화를 지켜나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saveourcinema 캠페인에 동참합니다. 이 캠페인을 이어갈 수 있게 지목해주신 김현민 기자님(@reina_kimu) 감사합니다. 저는 제 영화동지 조현정 프로듀서(@leilaonthebeach) <밤의 문이 열린다>의 유은정 감독님(@yu_eunje0ng) 독립영화 대선배 이민지 언니(@minminji_1101) 에게 다음을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독립•예술영화관에 관한 추억이 있으신 분이라면 누구든 자신의 경험을 공유해주세요. 큰 힘이 될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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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이주영이 참여한 #saveourcinema 캠페인

현재 독립예술영화관은 민간이 운영하는 유일한 비영리 극장 서울아트시네마를 비롯해 인디스페이스, 아트나인, KU 시네마, 아트하우스 모모 등 서울에 많이 밀집해있다. 다른 지역에는 광주극장, 대구의 오오극장, 강릉의 예술극장 신영 등 독립예술영화관이 있지만, 서울에 비하면 관객 수는 다소 적은 편. 혹시 폐관된다면 그만큼 지방에서는 다양한 독립, 예술영화를 만날 기회가 줄어드는 것이다.

일본의 미니시어터와 한국의 독립예술영화관 운영의 차이점은 지원사업의 유무다. 일본의 미니시이터는 예술영화관을 만들고 싶지만, 돈이 없어서 시민출자 등으로 개관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으며 현재도 정부 차원에서 영화산업 육성을 위한 지원사업은 한국보다 미비하다.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제작한 전국 예술영화관 지도 (2018년)

한국의 경우 영화진흥위원회에 정식 상영관으로 인정되면 영화진흥위원회에 영화발전기금을 내는 의무가 주어진다. 다르게 말하면 이 발전기금을 독립예술영화관은 영화관 운영을 위한 지원금으로 받을 기회가 주어진다. 그렇다고 해서 이 돈을 그냥 받는 것은 아니다. 영화진흥위원회에서는 제작 지원과 별개로 독립예술영화관 지원 사업을 시행하고 있는데 정식 상영관으로 인정된 극장들이 이 지원사업에 합격(?)하면 영화진흥위원회로부터 극장 운영에 관련된 지원금을 받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지원사업은 1년마다 갱신되어 다음 해에 다시 지원사업 신청과 심사를 받아야 한다. 또한 해외와 국내 작품의 상영 비율을 지키지 않으면 지원금을 다시 반환해야 하기 때문에 규칙을 잘 지켜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 티켓 수익만으로 운영되는 소규모 예술 극장은 이 지원사업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다.

양국이 전개하는 독립예술영화관 지키기 운동은 단순히 ‘영화를 상영하는 곳’을 지킨다는 의미가 아닐 것이다. 극장의 존속이 영화인들에게는 자신들의 작품을 펼칠 장을 지키는 것일 테고, 관객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극장과 함께해온 시간과 커뮤니티를 지키는 것이다. 이번 캠페인을 조금 더 일찍 전개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안 그래도 어려운 극장가에 관심을 갖게 만드는 기회가 되기를.

#4 절대 놓칠 수 없어 : 독립예술영화관의 추억

“같은 공간에서 작품을 보고 함께 대화를 나누는 경험은 대체될 수 없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독립예술영화관의 매력은 멀티 플렉스보다 작은 스크린과 적은 객석이지만 나름의 운치와 아늑한 분위기가 있다. 가장 좋은 점은 사람이 별로 없어서일까. 온전히 방해받지 않고 내 시간을 확보한 기분이 든다. 심지어 정해진 자리를 벗어나 더 좋은 자리를 취하기도 했다. 그리고 극장과 시즌에 따라 극장 프로그래머들이 기획하는 독창적인 기획전과 평소 보기 어려운 독립영화를 볼 수 있다.

인디스페이스 트레일러

인디스페이스

처음 명동에 자리한 극장 인디스페이스는 내가 독립영화를 가장 많이 본 곳이다. 그리고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 (重慶森林: Chungking Express)”을 극장에서 관람할 수 있었던 것도 이곳 덕분이었다. 인디스페이스는 광화문에서 시작해 종로로 자리를 옮겼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많은 영화인과 관객들이 이 극장을 지키기 위해 후원해왔는데 많은 영화 단체와 배우들이 나눔 자리 후원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인디스페이스에서 영화를 볼 때면 의자 뒤편에 새겨진 후원인이 어떤 배우일지 궁금해서 항상 보곤 한다.

영화 “무서운 집” 구윤희 배우

양병간 감독의 “무서운 집”이 일으킨 문화현상

2015년 지금은 사라진 미로스페이스라는 예술영화관에 양병간 감독의 “무서운 집”을 관람하러 갔다. 이미 1회 차 관람했음에도 나는 이 작품이 2015년을 대표하는 작품이리라 생각했기에 재관람하러 간 것이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극장에서 아주 독특한 체험을 경험했다. 상영 시간 내내 관객들의 웃음은 끊이지 않았고, 박수갈채와 호응이 이어졌다. 금세 극장은 뜨거운 열기로 휩싸였고 나는 입고 있던 겉옷을 벗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집단 황홀경 같은 느낌을 극장에서 맛보다니! 짜릿하고 새로웠다. 마치 어떤 스포츠나 록 공연을 보는 것과 같은 느낌과 비슷했지만, 확실히 달랐다. 마침 그날 “극한직업”의 이병헌 감독도 혼자 영화를 보러 왔는데 GV가 끝날 때까지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병헌 감독

극장에서 만나자

시간은 흘러 나는 극장을 점점 멀리하게 됐다. 코로나19 때문에 가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요즘은 넷플릭스(Netflix)의 작품과 편리함을 선호한다. 그러고 보니 나는 영화제에 가면 하루 종일 영화를 관람하거나 주말에 예술영화관에서 시간을 보내던 고독한 오타쿠였는데, 어느새 극장을 멀리하고 독립예술영화의 관심도 그만큼 줄었다. 오히려 마틴 스코세이지(Martin Scorsese)가 놀이공원에 비유했던 마블(MCU)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에 갔다.

구교환 감독 “왜 독립영화 감독들은 DVD를 주지 않는가?”

최근 집에 있으면서 예전에 봤던 독립예술영화들을 다시 꺼냈다. 기분 좋은 충격이었던 자비에 돌란(Xavier Dolan) 감독의 “마미 (Mommy)”, 지금은 배우로 활동의 영역을 넓힌 구교환 감독의 “왜 독립영화 감독들은 DVD를 주지 않는가?”, 군 제대 후 나에게 큰 위안이 되었던 우문기 감독의 “족구왕”,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던 시기에 봤던 엄태화 감독의 “잉투기” 등등 독립예술영화관의 추억이 담긴 작품들을 보다 보니 극장에 다시 가고 싶어졌다.

영화 “족구왕”

# Outro

조명이 어두워지고 출입구에 암막 커튼이 쳐진다. 곧이어 스크린이 밝아지며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극장에 처음 간 뒤로 지금까지 나는 이 짧은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나는 오직 이 순간을 위해 극장에 가는 걸지도 모른다. 일단 주말에 볼 영화부터 예매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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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이주영 인스타그램 계정


이미지 출처 | Naver 영화, 영화공간주안 공식 웹사이트, SAVE the CINEMA 공식 웹 사이트, 공식 트위터 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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