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연화 20주년: 소나기가 오면 만나요, 기억 속 내 사랑

그는 지나간 날들을 기억한다. 먼지 낀 창틀을 통하여 과거를 볼 수 있겠지만 모든 것이 희미하게만 보였다.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가 얼마 전 개봉한 지 20주년이 됐다. 20년이 지나도 녹슬지 않는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화양연화”는 왕가위 스타일의 정점으로 불린다. 그러나 이 영화의의 장점은 왕가위 감독의 개성적인 스타일뿐만 아니라 내용과 형식의 정교한 구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기념비적인 영화의 20주년을 맞아 “화양연화”를 다시 한 번 음미해보고자 한다.

“화양연화”는 영화의 마지막 화면 자막이 시사하듯 기억에 관한 이야기이다.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간(花樣年華)에 대한 기억은 수 리첸이 창문을 열면서 시작한다. 노란 격자창이 있는 집으로 이사할까 고민하던 수 리첸에게 집주인 수엔은 “늦게 오셨네요”라고 말을 건넨다. 수 리첸이 늦게 왔다는 말은 그가 뒤늦게 기억을 회상한다는 말 같기도 하고, 언제나 사랑에 한 발 늦는 그의 성격을 설명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사가 결정되면 언제든지 오라는 말을 뒤로하고 떠나는 수 리첸의 모습은 다음 순간 계단을 오르는 차우 모완의 모습으로 전환된다. 얼핏 연결된 듯한 두 장면은 사실 시차를 두고 있다. 다음 장면에서 차우 모완과 엇갈리는 수 리첸은 이사를 결정하고 계약을 마친 상태로, 첫 장면과는 다른 날이다. 이처럼 영화는 설명을 과감히 생략하며 특징적인 흐름을 만들어낸다.

수 리첸과 마찬가지로 이사할 집을 찾던 차우 모완은 옆집이 세를 놓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곳에 살게 된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의 이삿날은 겹치고 헷갈린 짐꾼들이 짐을 잘못 옮겨 뒤섞이는 일이 생긴다. 이때 수 리첸의 남편은 부재(不在)하고 차우 모완의 아내 또한 부재한다. 각자의 배우자가 부재한 가운데 뒤섞여버린 이삿짐은 수 리첸의 남편이 차우 모완의 아내와 사랑에 빠져 자리를 비운 사이 수 리첸과 차우 모완이 사랑에 빠지는, 뒤얽혀버릴 관계를 암시한다.

수 리첸의 남편은 출장이 잦고 길며, 차우 모완의 아내는 밤 근무를 한다고 거짓말을 하고는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 배우자의 부정(不貞)을 눈치채고 고뇌하는 수 리첸과 차우 모완은 화면에서 홀로 고립되어 있다. 심지어는 여러 사람과 한 공간에 있을 때도 신문을 보거나, 등을 돌리거나, 구석으로 이동하는 등 동떨어진 모습을 보인다.

각자 고민하던 두 사람은 함께 만나 서로의 배우자가 연인 관계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들이 어떻게 관계를 시작했고 어떻게 사랑을 할지 궁금해하던 두 사람은 불륜 관계를 연기해본다. 함께 식사할 때, 차우 모완은 수 리첸의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을 주문하고 수 리첸에게 아내가 좋아하는 겨자를 덜어준다. 차우 모완의 아내와는 달리 겨자를 잘 먹지 못해 인상을 살짝 찌푸리던 수 리첸의 모습은 어느새 익숙하게 스테이크를 겨자에 찍어 먹는 모습으로 연시 전환(連視轉換, Match cut)된다.

이처럼 영화는 어떤 순간은 서슴없이 건너뛰고 또 어떤 순간은 반대로 아주 느리게 연출하며 모호한 시간성을 만들어낸다. 분절되거나 늘어진 장면들은 기억의 문법을 따른다. 연시 전환은 특정 장소를 매개로 한 기억을 연결하고, 점프 컷은 기억 사이사이 잊힌 시간을 드러낸다. 슬로우 모션은 객관적인 시간의 흐름을 지워버리는 순간의 인상을 묘사한다. 회고와 같은 연출은 사건의 정확성을 흐리고 순간의 감각을 남겨놓는다.

따라서 관객은 먼 거리에서 사건을 관조하거나 도덕적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 이러한 연출은 가까운 거리에서 인물에 감정을 이입하는 일 또한 방해하는데, 불규칙한 시간성이 인물의 체험을 따라가지 못 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결국, 관객은 인물의 체험과는 다른 시간의 흐름, 즉 기억을 경험하게 되고,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인물의 상태를 지켜보게 된다. 

몇 번의 교류를 나누던 수 리첸과 차우 모완은 차우 모완이 무협 소설을 쓰는 일을 계기로 가까워진다. 그러나 주변의 시선으로 만남은 어렵기만 하다. 조금이라도 자유롭게 만나기 위해 차우 모완은 호텔 방을 얻어 수 리첸에게 글을 쓰는 것을 도와달라고 한다. 두 사람의 관계는 조금씩 변화한다. 그러나 인물은 여전히 폐쇄적인 공간에 갇혀 있다. 이는 불륜 혹은 결혼이라는 틀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상태이자, 과거가 되어 변할 수 없는 기억의 모습이다.

남몰래 만나는 수 리첸과 차우 모완의 모습은 반복적으로 거울상(–像)으로 나타난다. 거울 속에는 솔직하게 웃고 우는 모습이 있고, 서로를 바라보지만 엇갈리는 시선이 있다. 거울은 숨기고 있는 감정을 비추어낸다. 반사된 상은 서로의 배우자를 흉내 내다 정말로 사랑에 빠져버린 아이러니를 표현한다.

불안정한 관계에 놓인 두 사람은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지 못한다. 서로를 그리워하면서도 만나지 못하고 거리를 둔다. 하지만 소나기가 내리는 날, 두 사람은 마주친다. 사랑에 빠지기 전부터 비는 두 사람을 이어주는 장치였다. 소나기 때문에 국숫집에 발이 묶여 함께 귀가했고, 소나기를 맞고 감기에 걸린 차우 모완을 위해 수 리첸은 참깨죽을 잔뜩 만들었다. 갑자기 쏟아내려 흠뻑 젖고 마는 소나기는 뜻하지 않게 빠져버린 사랑에 대한 은유다. 마지막으로 소나기가 내릴 때, 두 사람은 함께 비가 그치기를 기다린다. 차우 모완은 싱가포르로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며 이별을 연습하자고 제안한다. 비가 그치고 그들은 마지막 연극을 한다. 마치 앞으로는 소나기에 젖지 않도록 대비라도 하겠다는 듯.

떠나기로 한 차우 모완은 수 리첸에게 함께 싱가포르로 가지 않겠냐고 제안하지만, 수 리첸은 한발 늦는다. 두사람은 거울속 시선처럼 계속해서 엇갈린다. 수 리첸이 차우 모완을 찾아 싱가폴로 갔을 때도, 차우 모완이 구씨를 방문했을 때도.

사랑이 기억이 될 만큼의 시간이 지난 후, 두 사람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옛 기억을 마주한다. 수 리첸은 추억의 공간으로 돌아와 도입부에서 열었던 노란 격자창 앞에 다시 선다. 예전과는 달라져도 너무 달라졌다는 집주인 수엔의 말을 들으며 그는 눈물을 삼킨다. 얼마 후 그는 옛집으로 돌아와 차우 모완처럼 차려입은 어린 아들과 함께 산다. 아마 그는 이따금 창을 열고 옛 기억을 들여다볼 것이다.

반면 차우 모완은 추억으로부터 멀리 떠난다. 나무를 하나 찾아 구멍을 파고 감추고 싶은 비밀을 속삭인 뒤 진흙으로 봉했다던 옛사람들처럼 차우 모완은 앙코르와트의 벽에 난 구멍에 자신의 비밀을 속삭인다. 진흙과 풀로 비밀을 가둔 차우 모완은 여러 겹의 문을 통과해 유적을 떠난다. 영화는 앙코르와트의 풍경을 비추며 끝이 난다. 이때 보이는 수많은 문은 비밀과 아름다움을 간직한 시절로 향하는 입구 같고, 세월이 느껴지는 외관은 석화된 기억 같다. 아마 분명 오늘도 누군가는 거대한 기억의 유적에서, 혹은 과거로 향하는 창문 앞에서 깊이 감추어둔 기억을 꺼내 볼 것이다.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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