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ar Are You From ? – Television2020

보풀이 일어나고 색이 바래도 마냥 버릴 수 없는 옷이 있다. 때때로 그런 옷들은 주변의 잔소리에 영향을 받거나 스스로의 변덕으로 꽤 오랜 시간 옷장 한편에 방치되곤 하는데, 그렇다고 버리자니 그건 또 좀 괜히 아쉽다.

나 같은 경우 그럴 때만은 패션 선구안을 가진양 ‘나중에 더 잘 입지 않을까?’, ‘저런 옷이 유행할지도…’ 등의 생각으로 정리를 미뤄두곤 하는데 생각해보면 단지 그 이유만으로 특정 옷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한때 자주 입어서 정이 들었거나 언제 봐도 내 취향인 옷은 곁에서 떠나보내기 힘든 법. 나와 오랜 시간 함께한 옷이 지난날의 좋은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데다 훗날 돌아봐도 미운 구석이 없다면 이 얼마나 소중한 물건인가. 이런 옷들이 하나의 스타일로 자리 잡는 경험은 필자가 ‘Wear Are You From?’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 중 하나이기도 하다.

다음 타자로 글을 보태준 페어스(PAIRS) 숍의 스태프 이승원은 독자들에게 어린 시절 형성된 소중한 추억과 좋아하는 무언가로부터 영향을 받아 오랜 시간 아끼게 된 자신의 취향을 전한다. 아래 그녀의 이야기가 독자들에게 과거 자신이 즐겨 입은 옷들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이승원(@television2020)

받아쓰기도 다 완벽해지기도 전에 호주로 떠나 그 후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을 마치고도 조금 더 호주에 머물러 있었어요. 그래서 저의 말투, 발음, 식습관은 물론이고 옷 입는 것마저 당시의 영향을 많이 받은 거 같아요. 어렸을 때는 적응할 틈이 없었던 만큼 그 분위기에 빠르게 맞춰 성장했고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소셜 미디어가 많이 발달하지 않던 때라 저에게 흥밋거리로 주어졌던 건 슈퍼마켓에서 팔던 A5 크기의 하이틴 잡지와 주말 오후의 MTV 정도였어요. 호주의 날씨가 아주 덥고 습한 만큼 청소년기엔 짧고 얇은 옷들이 대부분의 옷을 차지했고, 바다가 가깝고 태양이 뜨거운 탓에 그런 옷을 입는 게 아주 당연한 일이었고 자유롭고 편한 분위기였어요.

가족 모두가 다 같이 간 아주 긴 유학이었는데 아빠는 호주와 한국을 자주 오가셨어요. 저는 외모를 포함해 여러 면에서 아빠를 많이 닮았는데요. 그래서인지 아빠가 다녀가면 매번 항상 애틋했던 거 같아요. 그래서 아빠가 두고 간 옷들은 항상 제 것이 됐어요. 그 옷을 소유한다는 것만으로도 아빠와 함께 있는 기분과 아빠가 된 듯한 기분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어요. 그때의 습관이 남아있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도 사랑하는 사람의 옷을 입거나 갖고 있는 게 좋아요. 당시 아빠는 낚시를 좋아하셔서 일할 때를 제외하고는 낚시꾼처럼 편한 복장을 선호하셨는데요, 컬러는 항상 비슷했어요. 블루 계열과 화이트. 저도 그 영향을 많이 받은 거 같아요. 그때 옷들은 지금도 가지고 있어요. 밤에 앞바다로 낚시 갈 때 입으려고 산 플리스 풀오버, 그리고 바람막이용으로 산 리바이스 데님 셔츠. 어떻게 보면 가장 오래 입은 옷이고 추억이기도 하고 아끼는 옷이기도 해요.

자라온 배경을 떠나서 머무는 장소의 분위기에 따라 옷 입는 게 많이 바뀌는 걸 느껴요. 한국에서 지내고 있는 지금은 예전과는 다르게 맨살보다 제 몸에 두르는 천이 더 많아졌어요. 대중교통을 많이 이용하고 사람의 밀도가 높은 곳이 많아서 자연스럽게 얇고 너무 짧은 옷은 조금 멀리하게 된 거죠.

한국에 와서 조금씩 빈티지에 관심을 두다가 제가 일하고 있는 @PAIRS.SHOP에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됐어요. 실장님 두 분의 취향이 담긴 편집숍은 새롭고 다양한 빈티지 옷들을 보다 가까이에서 접할 기회를 줬어요. 예를 들면 리바이스의 다양한 숫자들, 버튼 플라이로 제작된 수많은 501 그리고 여러 색상의 포켓 탭들. 더 잘하고 싶어서 집에 와서 공부했던 것들이 지금은 저의 취향이 됐어요. 요즘 가장 자주 입는 바지는 실장님의 새로운 빈티지 숍인 @daughtervintagestore에서 구매한 리바이스 501이에요. 세상에는 501의 종류가 정말 많은데 제가 원하는 핏과 워싱의 501을 찾기 쉽지 않더라고요. 다 채우는 게 귀찮긴 해도 버튼 플라이가 있는 501이 제일 편하고, 멋스러운 것 같다고 생각해요. 춘천 여행에서 돌아온 날 오픈하시자마자 놀러 가서 입어봤는데 딱 ‘이거다!’ 싶었어요. 여름에 샀는데 겨울이 된 지금도 뭐가 묻지 않는 이상 거의 빨지 않고 매일 입어요.

이젠 날씨가 추워져서 자주 입진 못하지만 이건 후쿠오카 여행 때 샀던 티셔츠도 아끼는 옷 중 하나예요. 제가 디저트를 아주 좋아하는데요, 후쿠오카에 자리한 ‘프린스 오브 후르츠(Prince of the Fruit)’이라는 파르페 디저트 가게의 굿즈예요. 아이언 메이든(Iron Maiden) 그래픽에 파르페가 더해져 있고 뒤에는 매달 파르페에 올라가는 제철 과일들이 적혀있어요. 아직도 보면 사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도 들고 8월의 복숭아 타르트가 떠올라서 기분이 좋아요.

사실 4년 전에 한국에 오면서 제가 갖고 있던 옷의 절반 이상을 기부하고 왔어요. 그래서 뭔가 처음부터 새롭게 옷장을 채워간다는 느낌도 있는 거 같아요. 어렸을 때와는 다르게 요즘은 이 옷이 어디에서 온 건지 어떤 재질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혹은 나에게 어떤 느낌을 주는지에 대해 오래 고민하느라 쉬운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만, 차근차근 저를 나타낼 수 있는 것들로 채우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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