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치기같이 우리의 삶에 침입해서 행복하게 보내도 아쉬울 한정적인 이 살아있는 시간을 온전히 보내지 못하게 괴롭힌 2020년이 간다. 그 ‘괴로움’의 바통을 2021년에 넘겨줄 거 같지만, 어쨌든 2020년은 이제 끝나간다. 월간 영감도 이번이 마지막 화다. 아마 2022년 즈음에 시즌3으로 다시 돌아온다고 추측할 뿐이다. 다사다난이라는 형식적인 수식어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2020년을 보내는 친구들의 영감을 확인해보자.
이번 월간 영감에는 옷을 만들고 스타일링을 하는 윤지현, 해피퍼피하우스의 이선이 도움을 줬다. VISLA에서는 그래픽 디자이너 박진우와 컨트리뷰팅 에디터 윤태영이 함께했다.
이선 – 사소한 것에서 행복 찾기
사소한 것에서 행복을 찾는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꽤나 오랫동안. 세상에 노력 없이 얻어지는 것이 있을까요. 행복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노력 없이 얻어지는 행복은 로또처럼 찾아오는 행운이죠. 그 또한 자체로 즐기세요. 얼마 전 누군가에게 넌 행복에 중독된 것 같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잠시 고민에 빠졌어요. 중독이라는 것은 보통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많으니까. 고민은 꽤 길게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행복에 중독된다는 게 나쁘기만 한 것일까? 나를 상하게 하는 것들이 아닌 행복에 중독이 되었다는 말이 어쩐지 싫지 않았습니다.
오늘의 나는 조금 일찍 일어나 좋아하는 길로 돌아 돌아 출근합니다. 아무도 없는 놀이터에 찾아든 반짝이는 볕, 뺨에 닿는 시원한 바람, 가을이 주는 선물을 온몸과 마음으로 느끼며 오늘도 살아있길 잘했다고 나에게 말합니다. 행복을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곁에 있는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행복을 찾는 습관을 길러주세요. 길가에 피어난 이름 모를 꽃, 맛있던 점심 메뉴, 사랑하는 친구와의 대화. 어쩌면 행복은 생각보다 더 가깝게 있을지 모르니까요.
내가 무의미하게 보낸 하루가 누군가에게는 간절한 하루일지도 모른다는 글이 떠오릅니다. 우리 모두가 어쩌다 태어난 삶이지만 다들 잘 살아내어 주세요. 이왕이면 행복하게. 그리고 잘♫
윤태영 – 간판 구경하기
간판 많기로 알아주는 대한민국, 각 업장 사장님의 다양한 취향만큼이나 각기 각색의 폰트와 높은 자유도를 자랑하는 디자인의 간판은 누군가에겐 흉물처럼 보이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트집거리 중 하나일 수 있겠다. 물론 여기저기서 시행되는 간판 정비 사업이라는 것 역시 주민과 업주의 동의 하에 진행되는 것이라지만 획일화된(깨끗해진) 골목의 모습을 봤을 때 어딘가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몇몇 맛집 유튜버들의 맛집 리뷰 영상을 시청한 후 가지게 된 요상한 믿음이 있는데, 가게 간판이 다소 촌스럽거나 뜬금없는 단어의 조합으로 만들어졌을 경우, 진짜 맛집일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 그렇기에 처음 가보는 동네의 골목을 구경할 때면 이전보다는 한층 더 주의 깊게 구석구석을 살피게 되는데 이게 보기보다 재미있다. 또한 가게 안팎 손님들의 모습과 함께 관찰한다면 그 재미는 배가 되고 더 나아가선 그 자리를 거쳐 갔을 이들의 이야기까지 상상하게 만들어준다.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평일 오후 세시 호프집 ‘토크쇼’에서는 우리가 상상하는 토크쇼 대신 고성과 욕설이 오고 갔다. 험한 분위기 속에서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기에 추후 한 번쯤 들러보려던 계획은 보류되었으나 반대로 무슨 일이 벌어지는 중일지 호기심과 제멋대로인 혼자만의 추측은 늘어났다. 동네 거주민의 성향과 분위기를 요약해 놓은, 마치 일종의 요약본 같은 생각이 든다면 그건 과한 해석인 걸까. 특정 프랜차이즈의 간판으로 가득한 골목이 아닌 오랜 시간 자리를 지켜온 터줏대감의 포스를 풍기는 그런 간판이 존재하는 골목은 계속해서 궁금증을 자아낸다. 무시하지 못할 내공을 지닌 사장님들의 간판 선정 센스가 오히려 실소를 전해주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앞으로 펼쳐질 간판 맛집 탐사를 기대해본다. 그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캐릭터와 재미난 이야기들은 덤으로 만나볼 수 있기를…
박진우 – 키르아의 머리에 박힌 침
난 게임을 좋아하지만 승부는 좋아하지 않는다. 승패보다는 내가 즐길 수 있는 특정한 목적이 우선시되고 게임 자체의 창조적인 시스템을 즐기는 편이다. 축구 게임을 해도 난 승패보다는 멋있는 골을 넣을 수 있느냐에 집착한다. 롤토체스를 하더라도 비주류 덱으로 4등 안에 드는 걸 목표로 하는 경우가 많다. 오버워치를 할 때도 팀의 승리보다는 필살기로 여러 명을 한 번에 멋있게 죽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당구를 칠 때도 어려운 기술을 성공시킬 때 희열을 느꼈다. 격투 게임을 할 때도 특정 기술 콤보가 들어가면 패배해도 상관없다는 식. 승리가 목적이 되면 스트레스를 받는다.
나이를 먹다 보니 주변에 뭔가 이루어내는 타입을 가만 보면, 미칠 듯한 승부욕이 있더라. 소년 만화의 주인공이 말도 안 되게 강한 적을 분노의 포텐셜로 각성해서 이기는 장면 같은 느낌. 능력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승부욕에서 나온 열정과 에너지로 안 되면 되게 하는 그런 순간들을 몇 번 목격한 거 같다. 되지 않을 것 같더라도, 잘 해낼 수 있을 확률이 3~40퍼센트 이하로 느껴지더라도, 도전하는 그런 마인드.
만화 헌터x헌터에 키르아라는 주인공이 있다. 킬러 가문의 기대주로 어린 나이에 살인 실무를 맡을 정도로 재능 있는 아이. 키르아는 더 어린 시절부터 그의 형인 이르미에게 살인 훈련을 받았다. 형 이르미의 능력은 상대방 머리에 침을 꼽아 정신을 조종하는 것이다.
키르아는 형의 손에서 벗어나서 집을 떠나 여행을 하고 이런저런 전투를 하며 차차 깨닫는다. 전투 시 자꾸만 상대방의 전투력을 측정하려 하고, 100% 이길 확률이 있을 때만 싸우고 아닐 때는 도망간다는 사실을. 한마디로 자신의 포텐셜은 ‘0’으로 판단하고, 상대방이 자신보다 아주 조금이라도 강할 확률이 있을 때조차도 회피하는 것. 그 이유는 어린 시절 키르아를 확실한 킬러로 키우기 위해 이르미가 키르아의 머릿속 깊은 곳에 침을 꼽아 조종했던 것(이후 머리의 침을 제거하고 각성한다). 그 침을 통해 도전의식을 제거했던 것이다.
종종 나도 그런 생각을 한다. 내 머릿속에 그런 어떤 도전정신을 억제하고 안정을 추구하는 키르아의 머릿속에 꽂힌 침 같은 게 있는 건 아닐까. 매번 나는 일할 때든 뭐든 본능적으로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수준을 추구하니까. 이미 자라온 환경 때문이겠지만, 컨트롤할 수 있는 범위는 ‘키르아가 핀을 뽑는 순간’처럼 단번에 해방,각성되지는 않겠구나. 만화가 아닌 현실이니까. 주변에 피해 안 끼치고 1인분은 하려면 불편하더라도 그 컨트롤의 범위를 조금씩 조금씩 넓혀나가야겠구나. 이런 기특한 생각을 해본다.
윤지현 – 록다운, 데이비드 린치, TM
지난 3월부터 영국에서 시작된 록다운 때였다. 플랏 메이트가 여자 친구를 만나러 일본에 갔다가 영국의 록다운이 시작되어 돌아오지 못하고 있던지라 철저히 타인으로부터 고립된 록다운 생활이 시작되었다. 몇 주간은 휴식을 취하면서 나름의 생산적인 작업도 즐겼다. 혼자가 되어 보내는 시간이 한 달이 넘어가면서부터는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의지를 많이 잃었다. 비어 있는 하루의 시간을 몇 주간은 영화로 메꾸었다. 목적 없이 무언가를 바라보는 행위였다. 하루에 세 편씩, 필름 페스티벌에 준하는 스케줄을 달렸다. 바스를 하고 차를 우려 마시고 영화를 보고 요리를 하고 영화를 보고 운동을 하고 또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꿈꾸는 삶처럼 들릴 수 있지만 일터에 가지 않고 사회에서 철저히 고립되어 보는 경험은 실제적으로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입 밖으로 소리를 내고 싶어 혼잣말만 늘어갔다. 이때 데이비드 린치의 “로스트 하이웨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그의 영화에 몰입되어 몇 개의 인터뷰를 찾아봤다.
데이비드는 요즘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날씨 리포트라든지 오늘의 숫자라든지 영상을 매일같이 꾸준하게 유튜브에 업로드하고 있다. 그의 기괴함은 늘 흥미롭다. 데이비드 린치의 관련 검색어에서 빠지지 않는 단어가 있다. ‘Transcendental Meditation’. 한국어로 초월 명상이라고. 그는 TM을 가르치는 파운데이션을 설립하기도 해서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이 명상법을 알리고 있다. “로스트 하이웨이”를 관람 후, TM이 그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는지에 관한 영상을 봤다. 이전에 잠깐 데이트하던 음악가 친구가 TM을 언급한 이야기가 같이 떠올랐다. 한 번 시도해봐서 나쁠 건 없다. 적당히 쉽게 읊을 수 있는 만트라를 정했고, 일어나 20분, 자기 전 20분씩의 시간을 명상으로 보냈다. 삼일 째까지는 그 20분에 다양한 종류의 잡스러운 생각을 했다. 나흘 째였나. 잠들기 직전 명상을 시작했고 잠이 들어 꿈을 꾼 건지, 최고조의 집중력에 달했던 건지, 어딘 가에 다녀온 듯한 경험을 한다. 그 후로 쭉 명상을 해오고 있다. 어떤 경험을 했고 어떤 생각에 잠겼었는지 여기에 굳이 적고 싶지 않지만, 영국의 첫 번째 록다운 때 경험했던 TM이 지극히 개인적인 큰 전환점 하나를 가져다주었다고는 말할 수 있다.
에디터 │ 박진우
*이번 화를 마지막으로 2020년 진행된, 불행하게도 2, 3개를 제외한 모든 글에서 코로나가 언급될 수 밖에 없었던 안타까운 월간영감 시즌 2는 마감합니다. 2021년에 에디터스 딜라이트 시즌 2가 새롭게 찾아옵니다. 힘겨웠던 올 한해 월간 영감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