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DELIGHT – 강력 추천 만화

EDITOR’S DELIGHT : 매 회 다른 즐거움, 관심에 관한 범주를 설정하고, 비즐라 매거진의 에디터 중 3명을 선정하여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책을 본다고 해서 씹덕 소리를 듣는 시대는 진작 지났다. 우리는 다양한 장르의 콘텐츠를 취향에 맞게 선택적으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행여 주변에 그렇게 디스하는 친구가 있다면 엄청 촌스럽지만 자각하고 있지 못한 녀석일 가능성이 크다. 여하튼, 80년대생에 큰 영향을 끼쳤던 일본 만화부터, 최근 개봉한 “소울”로 여전한 저력을 과시한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이라든가, 거대한 시장이 된 한국의 웹툰까지, 우리는 다양한 만화를 즐기고 있다. 비즐라 멤버들은 어떤 만화가 기억에 남았을까. 그들에게 신중한 추천을 부탁했다.


오욱석(Editor)드래곤헤드

판타지보다는 현실감 있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잘 짜인 완전한 허구, 가상의 이야기도 재미있지만, 그만큼 몰입도는 떨어진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 인물이 처한 상황 속, 특히 클라이맥스에 나라면 어떤 생각, 행동을 했을지 대입하는 걸 즐긴다. 만화책 역시 그렇다. 어린 시절부터 죽 만화책을 읽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의 생활을 바탕으로 옮겨낸 만화라면, ‘짱구는 못말려’나 ‘괴짜가족’ 같은 명랑 개그 만화 정도였을까. 아무튼, 당시에는 웹이 활성화하지 않았던 터라 위와 같은 만화책을 통해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의 생활을 막연히 떠올려보곤 했다.

그렇게 유년기를 지나 막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만났던 만화가 ‘드래곤헤드’다. 강렬한 폰트의 제목부터 시퍼런 색으로 그려진 사람까지, 그 표지가 꽤나 섬뜩했는데, 슬쩍 빼들어 페이지를 살피는 순간의 충격은 이전까지의 판타지, 명랑 만화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즐겁게 수학여행을 떠나는 도중 알 수 없는 재난에 처한 청소년들’ 이게 드래곤헤드의 주된 내용이다. 사실, 엄청나게 치밀한 스토리 구성은 아니기에─뭔가 어설픈 열린 결말에 불만을 토로하는 독자도 많았다─, 이에 관한 언급은 여기서 줄여도 될 것 같다. ‘드래곤헤드’를 소개하는 주된 목적은 다른 데 있으니까. 이전까지 만화 속에서 보이는 패션이라면, 캐릭터를 살리기 위한 조금은 과장된 스타일링, 더 나아가 실생활에서는 도저히 입을 수 없을 것 같은 옷가지를 입히는 경우가 잦았다. 그나마 조금 정제된 이미지라면, ‘슬램덩크’나 ‘세일러문’의 주인공들의 패션이려나. 과거 애니메이션에서 촌스럽다고 느껴졌던 세일러문 속 패션이 지금에 와 다시금 이슈 되는 게 재밌다.

‘드래곤헤드’는 여기서 훨씬 나아가 작중 인물에게 브랜드 의류를 발라 버린다. 나이키(Nike)는 물론이고 아디다스(adidas)나 리복(Reebok)의 명작 스니커가 줄줄이 얼굴을 비추는데, 얼핏 뉴발란스(New Balance) 스니커가 등장했을 때에는 미처 브랜드를 모르는 터라 ‘일본 나이키에서는 저런 신발도 파는구나’라고 놀라워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지샥(G-Shock)이라든지 엑스라지(X-Large) 등 의류, 액세서리 또한 종종 등장, 스토리와는 관계없이 계속해 흥미로운 볼거리를 제공한다. 만화 내 시간이 흐를수록 주인공의 패션도 시시각각 바뀐다. 특히, 옷가지를 구하러 백화점을 뒤지는 장면은 작가가 주인공에게 새로운 옷을 입히고 싶어 일부러 집어넣은 설정 같기도…

이렇다 보니 ‘드래곤헤드’의 작가 모치즈키 미네타로(Minetaro Mochizuki)의 패션 센스 역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데, 실제 웹에 떠도는 그의 몇몇 사진을 보면 스스로의 패션에도 상당히 신경을 쓰는 사람인 듯. 이와 비슷한 예로 ‘이나중 탁구부’가 있는데, 작가 후루야 미노루(Minoru Furuya) 또한 모치즈키 미네타로의 작풍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하니 관심이 있다면 함께 찾아봐도 좋겠다. 종종 패션에 관련한 여러 옛(?)사람을 인터뷰하다 보면, 인터넷 이전 일본 패션 잡지를 통해 일본의 스트리트 패션, 아이템에 관한 정보를 모았다던데, 나에게는 ‘드래곤헤드’가 좋은 참고서가 되었던 셈이다. 최근에는 작품이 나오지 않아 아쉽지만, 이외에도 그의 패션 감각을 살필 수 있는 작품이 여럿 있으니 밀레니엄 시대 일본의 스트리트 패션을 엿보고 싶다면, ‘드래곤헤드’를 탐독해보길 권한다.


한지은(Editor)홍차왕자

최근 서울에 와 부쩍 친하게 지낸 친구가 골수팬과 힙스터 너 나 할 것 없이 최고라 칭한다며 ‘진격의 거인’을 추천하더라. 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귀멸의 칼날’이 국내뿐 아니라 일본 찐 타쿠들에게도 엄청난 인기를 끌 정도의 제대로(?)란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스스로가 촘촘히 짜인 세계관을 잘 견디지 못한다는 것을… 이미 ‘진격의 거인’은 고등학생 시절 한 친구의 강력 추천으로 한차례 정주행을 시작했지만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이는 잔혹함에 괴로워하며 관둔 바 있으며, ‘귀멸의 칼날’은 모르되 ‘물에 빠진 나이프’라면 잘 안다. 그렇다, 물론 나 역시 200원에 한 권을 쥐여주던 만화방을 들락날락하며 어린 시절을 보낸 초등학생이었지만 그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내 만화 취향은 가볍게 읽을 만한 옴니버스형 코믹 만화와 순정 만화라는 협소한 영역에 국한되어 있었다. ‘슈퍼갤즈’를 보며 날라리의 철칙을 외우고, ‘슈가 슈가 룬’에서 두 친구의 엇갈린 우정에 눈물을 훔치던 시절을 지나 공부 빼고 다 재미있을 무렵 PMP에 ‘너에게 닿기를’ 애니를 담아 수업 시간에 몰래 보던 고3 때를 끝으로 성인이 되었고 이후 ‘모래시계’, ‘해피 하우스’, ‘옆자리 괴물군’, ‘오늘은 회사 쉬겠습니다’나 ‘아이 야자와’의 만화들처럼 그래도 인기리에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된 만화나 힙스터 사이에서 평이 좋아 보이는 만화를 간헐적으로 챙겨본 정도다. 그마저도 사랑의 ‘사’자도 모르면서 몰입했던 어린 시절에 비해 자라고 나서보니 순정 만화라는 것이 뭐든 좀 과하고 부담스럽게 느껴져 만화와의 짧은 연결고리였던 순정 만화에 대한 애정도 시들해졌으니, 추천 글을 쓰면서 전문성이나 작품에 대한 열정이 떨어진다는 게 슬슬 미안해지는 실정이다. 자고로 추천을 받는 이는 대부분 뜻밖의 것이나 전문가의 픽을 기대하기 마련이지 않나.

그래서 추천할 만한 게 뭐가 있을까 긴 시간 고민했고, 끝내 선정하게 된 것이 바로 ‘홍차왕자’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판타지’ 학원물답게 조금 유치하다는 것이지만 본 작은 당시 홍차에 무지했던 ─ 만화를 보고 나는 홍차의 맛이 달콤할 것 같다는 환상에 빠지기도 했다 ─ 내게 어렴풋한 연애 감정보다는 지적 허영이란 감각을 안겨주었다. 만화 곳곳에 등장하는 차의 종류와 우림 법, 각 페이지를 장식했던 디저트와 꽤 디테일하게 표현되어 있던 일본의 교내 동아리 문화를 보고 있노라면 뭔가 커피 맛도 잘 모르던 시절 어른들의 전유물을 알게 된 것만 같은 뽕이 차올랐다. 아삼, 얼그레이, 다즐링이란 서구식의 낯선 이름을 통해 따라오던 사대주의적인 생각은 덤이었다. 사실 꽤나 긴 분량에 갈수록 등장인물이 많아져서 후반부엔 조금 물리는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순조롭고 평화로운 나날들 속에서 만화가 전하는 홍차에 관한 알짜 정보와 차 문화를 대하는 태도 및 교훈(?)은 그럼에도 이 만화를 끝까지 읽게 만드는 매력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덧붙여 에피소드가 끝날 때마다 보너스로 보태는 작가의 말은 차에 대한 정보를 더 깊게 알 수 있는 하나의 지침서가 되었으며 나아가 차라는 주제처럼 왠지 모를 온화한 인상을 주어서 글을 읽어나가는 내내 작가에 대한 호기심을 품게 했다. 필자처럼 치밀한 세계관과 차곡차곡 쌓아 올린 서사에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편이거나 지독한 순정 만화에서 한 발치 멀어져 일상의 여유와 교양을 느끼고 싶은 정도라면 ‘홍차왕자’는 꽤 괜찮은 선택지일지도 모른다. 자세한 내용은 직접 읽어보길 바라며 만약 도전해볼 마음이 들었다면 보름달 뜨는 밤 자신만의 방법으로 잘 우린 홍차와 함께 만화를 맞이해보라는 한 가지 팁을 전한다.


윤태영릴로와 스티치

만화책, TV 방영 만화영화, 애니메이션 등의 다양한 형태 중에서도 가장 익숙하게 다가오는 만화에 대한 기억은 유년 시절 심야 시간대 만화 채널에서 틀어주던 몇몇 TV 애니메이션 시리즈가 고작인 듯하다.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늦은 새벽 방영하던 만화 특유의 야리꾸리한 분위기를 즐기곤 했던 것 같은데 그마저도 이제 만화 제목은 고사하고 내용마저 가물하다.

막상 볼 때는 좋다고 열심히 보는데 그렇다고 따로 찾아볼 정도는 아닌, 애매한 애정의 관계를 유지해왔던 이유는 사춘기 시절, 만화를 찾아보는 걸 유치하다 치부하며 스스로를 속인 솔직하지 못한 나의 태도가 한몫했을 거라 생각한다. 이후에 ‘어른을 위한 애니메이션’ 같은 제목으로 한데 묶여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곤 하던, 말 그대로 수작이라 불리는 애니메이션들을 접하고서야 익숙해진 그런 기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만화가 몇 편 있는데, 그중 하나를 꼽자면 ‘릴로와 스티치’가 있다. 메이저 제작사에서 선보인, 그것도 너무나 유명한 고전 명작 느낌의 애니메이션이라 이걸 주제로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 식상할 수 있겠지만…. 작품 속 외계 종족이 등장하거나, 나름의 가정사를 안고 있는 주인공이 ‘성장해 나아가는 이야기’처럼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애니메이션이라면 하나씩은 갖추고 있을 법한 필수적인 요소들이 나름대로 알차게 구성되어있으며 혈연이나 종족에 국한되지 않는 가족의 의미와 사랑에 대한 단순, 간단명료한 전달이 마음에 든다.

각종 이슈로 팍팍해진 분위기는 세상만사를 날 선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들고, 그런 일상에 지쳐가는 현실이다. 그래도 어디 재미난 일이 없을까 싶은 아쉬움에 서성거리기만 하던 요즘이었는데, 만화 이야기를 적다가 가족과 사랑의 의미에 관하여 괜스레 한번 더 생각해본다. 대놓고 기분 좋아지라고 만든 애니메이션 같지만 나에겐 매번 통하는 것 같다. 스티치는 귀여웠고 하와이를 배경 삼아 유유자적하는 인생을 상상하며 일단은 만족하는 걸로.


에디터│박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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