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DELIGHT – 기억에 남은 페스티벌

EDITOR’S DELIGHT : 매 회 다른 즐거움, 관심에 관한 범주를 설정하고, 비즐라 매거진의 에디터 중 3명을 선정하여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아마 다들 잊지 않았겠지만, 불과 2년 전만 해도 봄, 여름, 가을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뮤직 페스티벌로 채워졌다. 기획하는 입장에선 전쟁이었을 테지만,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골라먹는 재미가 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코로나라는 일상의 소중함 알려주기 전문가는 모든 페스티벌을 강제 종료하고 일상의 소중함을 마구마구 알려줬다. 이 잡지가 나올 때쯤이면 주변의 꽤 많은 사람이 백신 접종을 마친 상태일 것이다. 슬슬 축제나 왁자지껄한 밤을 그리워해도 상처 받지 않을 수 있는 걸까…. 여하튼 비즐라 멤버들 중에도 페스티벌을 논할 때 빼먹으면 섭섭한 친구들이 좀 있는데, 그들에게 이 페스티벌의 암흑기에 어떤 축제를 그리워하고 있을지 물어봤다. 한번 들어보자.


여창욱(Contributing Writer) – 축제는 멀지 않은 곳에

전 세계적으로 백신이 보급되면서 온·오프라인을 통해 변화의 모습이 느껴지고 있다. 올해 초 미국에 있는 친구들은 인스타그램으로 백신 접종 카드를 찍어 올리면서 마스크를 벗으며 활보했고 예전의 생활을 기대하는 분위기였다. 이를 증명하듯 두 달 전에는 밴드 매드볼(Madball)이 뉴욕의 톰슨 스퀘어 공원에서 자선 공연을 열었고 약 3,500명의 관객이 지켜봤다. 다만 상당히 이른 시기에 공연을 했다는 의견에 부딪혀 팬들과 주요 방송사의 큰 뉴스거리가 되면서도 한 달 후 LA에서 본 레이즈드(Born X Raised)가 주최한 야외 게릴라 공연에서는 2,000명 이상이 찾아와 폭죽을 터뜨리고 경찰 헬리콥터의 조명을 받으며 공연을 즐겼다. 그 이후로 미국 내에서 크고 작은 오프라인 행사가 생겨나고 있다.

어느 정도 사회적 거리두기에 적응될 때쯤 이런 뉴스를 접하고 나서 공연과 축제를 즐기고 싶은 욕구가 따라오기 시작했다. 또한 음악을 많이 접하는 사람으로서 음악 페스티벌에 대해 기대가 크기 마련인데, 미국과 일본에서 여러 번 관람한 특정 페스티벌에 대한 추억 때문인지 언젠가 그 페스티벌에 다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오랜만에 만나는 지인 혹은 새롭게 만나는 친구들과 함께 밴드의 라이브를 보거나 스테이지 다이빙과 모슁(Moshing)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싸움으로 번지거나 사람이 실려 가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이 이처럼 그리웠던 적이 있을까. 아직 공연과 외국 여행은 멀게만 느껴지지만 지역 축제는 국내에서 백신 접종이 막 시작되는 시기와 맞물려 다소 완화된 상황을 맞이하는 듯하다.

필자는 자신도 이상하다고 느낄 정도로 본인의 성향과 완전히 다름은 물론, 사회적으로 낙후된 곳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이런 곳에서 축제라고 하면 뻔한 특산물이나 전통문화에서 빌려온 소재를 내세워 열리는 축제가 고작이다. 그런 축제를 성인이 되기까지 매번 접하면서 해마다 실망한 적은 한두 번이 아니지만, 그때만 맛볼 수 있는 음식과 시장통 분위기는 잊을 수 없다. 그리고 스무 살 시기의 대학교 생활을 지냈던 강릉에서 매년 6월마다 열렸던 강릉 단오제는 필자에게 한 학기를 마무리하는 연례행사이자 고향을 떠올리는 향수를 자아냈다.

폐쇄적인 성향이 강했던 고향과 마찬가지로 강릉 또한 타지인에 대한 경계심이 강했지만 나름의 노력을 거치며 강릉에 적응하기 시작했는데, 새롭게 알게 된 지인과 친구로부터 강릉에 관한 소식을 접했다. 특히 항상 5월부터는 한국전쟁 이후부터 강릉에 정착한 외국인 할아버지부터 지역에서 독립영화 제작 활동을 하는 친구까지 여러 사람이 신주미 봉투를 들고 있는 모습의 사진을 SNS에서 보고는 그제야 단오제가 오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처럼 강릉 단오제는 그 시기만 되면 자연스럽게 필자의 의식을 끌고 있었다. 

7일 동안 열리는 강릉 단오제의 첫날, 해뜨기 전 새벽에 자전거를 타고 미리 단오장을 나가는 것으로 축제를 구경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우연히 행사장 경비를 서고 있던 친구를 만나 행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설치된 부스나 현수막, 포스터를 찾아 둘러보는데 매번 똑같은 폰트나 디자인을 보고는 ‘또 이 사람이구나’ 하고 지나치면서도 새로운 디자인의 포스터를 발견하면 유심히 보기도 한다. 지역 축제인 만큼 지역의 문화활동가부터 정치인들까지 그들의 이해관계를 축제 곳곳에서 볼 수 있는 건 당연했고 이 또한 필자의 관심을 끄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런 사람들과 지역민들은 샤머니즘이라는 특별한 소재를 두고 진행되는 이 축제에 모여들었고 마지막 날까지 굿이라는 의식을 통해 축제 분위기를 이어나갔다. 굿이 진행되는 무대에 바짝 가까이 앉은 나이 든 할머니들과 달리 뒤에서 필자는 멀리서 굿판을 보다가 구찌(Gucci)나 발렌시아가(Balenciaga) 같은 옷을 입고 굿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자리한 그 특이한 상황을 번갈아본다. 이후 굿판이 끝날 때쯤 단오장으로 나와 끊임없이 줄지은 부스들을 하나씩 둘러보며 구경하고 그러다 미군 제품과 구제 옷을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부스를 발견해서는 나름 재미있는 물건이나 옷을 찾기도 했는데 가끔 후부(Fubu) 같은 브랜드의 제품이 나오기도 했다. 

수도권과 대도시로부터 멀리 떨어진 장소의 생활 속에서 축제는 항상 가까이 있었고 필자에게 강릉 단오제의 7일은 그 예시이며 그리운 축제 중 하나다. 언제나 단오제의 마지막 날, 축제를 즐긴 외지인들이 닭강정을 사들고 돌아갈 때, 필자는 단오장 뒷산 정상에 있는 공원에서 행사장을 내려다보며 매번 단오장이 끝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 글을 쓰고 있는 날로부터 한 주가 지나 단오제에 가게 될 것이고 요즘 강릉은 어떻게 달라졌을지 볼 수 있을 듯하다.


황선웅(Editor) 2019년 7월 28일

공연 기획사 파트타임 스태프로 1년간 공연 티켓팅, 뮤지션 머천다이즈 판매 등의 잡일을 했었다. 평소 즐겨 듣던 뮤지션과 밴드를 백스테이지에서 직접 만나볼 수도 있었으니 운이 좋았다. 사인도 받고 사진도 찍고 친구도 사귀고 돈도 벌고 일석사조! 그렇게 공연장에서 일을 하며 짭짤한 용돈 벌이와 추억을 쌓았으면 좋았으련만, 오늘 소개할 페스티벌을 마지막으로 일하던 공연 기획사가 사라져 일을 못 하게 됐으니… 그 마지막의 회상을 지금부터 후술하려고 한다.

공연 기획사의 스태프, 아니 잡부로의 마지막 근무는 2019년의 여름. 제임스 블레이크(James Blake), H.E.R, 다니엘 시저(Daniel Caesar), 아미네(Aminé) 등 세계 내놓으라 하는 팝 뮤지션이 헤드라이너로 시작 전부터 큰 주목을 받았던 그 페스티벌에서다. 그러나 시작 전부터 우여곡절이었다. 헤드라이너였던 H.E.R이 페스티벌에 불참 선언을 하며 기획사 측과 H.E.R 또한 욕을 먹었던 기억. 개최 뒤엔 내렸던 비 탓에 질퍽거리는 잔디가 문제로 야기됐으나, 비교적 무난하게 첫날이 마무리됐다. 여기서 내가 ‘비교적’이라고 한 것은 헤드라이너 취소, 질퍽이는 잔디보다 더 큰 문제가 다음날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날. 화창했던 낮에 반하여, 새벽 꼭두부터 비바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침 일찍부터 많은 스태프가 공연장으로 동원되어 백스테이지 벚꽃 잎처럼 흩날리던 텐트를 고정했다고 들었다. 새벽부터 이어진 비에 잔디밭은 대형 물웅덩이로 변했고, 관객들이 웅덩이를 밟으며 푸른 잔디밭은 흡사 머드 축제가 연상될 정도의 진흙밭으로 변해갔다. 많은 관객이 신발을 버려야만 했으며, 피부가 약한 관객은 두드러기를 호소하기도. 또한 우천과 비바람으로 인해 세트장 위 조명들이 바람에 나부끼며 공연이 연달아서 딜레이됐고, 뮤지션 다수가 무대에 오르지 않자 많은 관객이 환불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할 스태프는 없었던 기억. 미숙한 운영 탓에 애꿎은 파트타임 스태프 대부분이 광분한 관객들에게 둘러싸여 온갖 욕을 먹었다더라.

본인은 그 페스티벌 기간에 뮤지션 공식 머천다이즈를 판매하는 부스에서 옷과 음반을 판매했다. 다른 스태프와 달리 에어컨이 빵빵한 실내 공간에서 쾌적하게 일을 진행했고, 컴플레인도 티켓 판매, 인포메이션 부스보다 더 적었다. 또한 머천다이즈 무대 바로 옆에 자리했던 덕분에 몇몇 공연도 관람할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공지해!”를 연신 외치던 관객들의 모습과 결국 “아티스트의 요청으로 공연이 취소가 됐다!”라며 적반하장으로 나오던 주최 측의 모습 그리고 이에 광분하던 객석의 광경 역시 바로 옆에서 지켜봤다. 비록 일개의 잡부였지만, 분개하던 관객의 타깃이 바로 옆, 스태프 티셔츠를 입고 있는 내가 될 것만 같았고, 혹시 해코지라도 당할까 취소 공지가 끝남과 동시에 부스 아래로 숨었다. 상황이 잠잠해지길 기다리다가 몰래 어둠 속으로 빤스런하며 혼자 도주하는 영화 한 편을 찍었지.

한바탕 소동이 끝난 다음 날 아침은 고요했다. 기진맥진한 스태프 몇몇과 쓰레기가 나뒹구는 벌판, 그리고 철거되는 스테이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적막이 흘렀다. 지금은 시간이 지나 추억 보정이 되었으나, 당시엔 보람, 즐거움은 없었고 오직 허무함만 느꼈다. 아마 그날은 나뿐만이 아니라 함께 일했던 스태프, 뮤지션, 그리고 관객 또한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최장민(Director) – 2006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 

페스티벌은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말이다. 요즘 같은 코로나 시대에 경험할 수 없는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바로 페스티벌일 텐데, 살면서 이런저런 페스티벌에 참여해 보았고 그중 기억에 남는 페스티벌 하나를 꼽으라고 하니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역시 처음으로 경험한 음악 축제였다. 이름하여 ‘2006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

여기에 가기 전까지 나는 내가 좋아하는 뮤지션의 공연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메탈을 좋아하는 친구가 공연을 다니는 걸 주변에서 보는 정도? 10대 때 힙합만 듣던 나는 친구 문택이의 추천으로 소울, 레게, 개러지 록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알게 되고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듣는 데 많은 시간을 쓰고 있었다. 내가 21.5살이 되던 여름, 남들보다 늦게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 전 편안한 마음으로 한국에서 3개월을 지내게 되었다. 당시 지금도 내 옆에 앉아있는 혁인이네 집에서 지냈는데 그때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이제 기억이 나지 않지만 록 페스티벌이라는 것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근데 그때 마침 한국에서 해외의 록 페스티벌과 유사한 형태의 록 페스티벌, 펜타포트가 2000년대 초반, 트라이포트 페스티벌에 이어 다시 시작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이삼 년 주기로 한국에 방문했던 내가 성인이 된 뒤 첫여름에 귀국한 시기에 록 페스티벌이 열리다니. 이것은 지금 생각해도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해 주려는 하늘의 뜻이었던 것 같다. 

페스티벌 참여에 크게 관심이 있지 않던 혁인이를 설득하고, 지수라는 친구와 함께 무려 4박 5일의 일정으로 텐트를 치며 이 페스티벌을 체험하고 나의 20대는 큰 문화 충격으로 시작하게 된다. 페스티벌 가기 전부터 잘 모르는 뮤지션의 노래를 다 찾아 듣고 현장을 방문했을 때는 낮에는 큰 무대 공연이, 늦은 밤부터는 디제이 스테이지에서 새벽 4~5시까지 놀기를 무려 3일 연짱으로 이어간 그 경험은 20대 초반 나의 관심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펜타포트가 열리는 인천에서 4박을 보낸 뒤 집으로 귀가할 때 멍멍한 귀와 함께 채 여운이 가시지 않아 약 일주일간 미묘한 감정으로 보냈던 기억들. 그때의 추억은 나를 다른 공연으로 인도했고 다양한 오프라인 행사를 찾아다니면서 지금 나를 구성하는 중요한 일부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빨리 코로나가 종식되어 많은 이들이 페스티벌 그리고 공연의 즐거움을 다시 누릴 날을 기대해 본다. 그리고 나의 페스티벌 여행의 중간 지점인 일본의 후지 록 페스티벌 그리고 최종 종착지 영국의 글래스톤 베리에 방문하는 그날을 상상하여 오늘도 작은 방에서 글을 적어본다.


Editor│박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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