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가끔 영화나 소설 등 허구의 이야기에서 몰입을 더하기 위해 작가가 극 중 인물이 착용하는 의상에 디테일한 설정을 부여한 것을 발견하고 즐거워한다. 그러나 프레임 밖, 우리의 정체성은 타인의 한정된 상상력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나다운 모습은 한 가지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확신 없이 휘둘리기도 하고, 매 순간의 선택으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우리는 흔히 자기 자신으로 살기를 바란다. 그리고 하루에도 몇 번씩 선택의 기로에 놓이지만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나는 여전히 나일 것이라는 믿음은 비로소 우리를 ‘본인답게’ 만든다. 우리가 입고 쓰는 물건도 그 궤를 함께한다.
아래에 글을 보탠 서은해는 매번 나다운 것을 규정하는 일에 지쳤다고 말하며 패션에 얽힌 사연을 전한다. 역설적이게도 그녀의 이야기는 소유한 것을 잃을지언정, 자기 자신을 잃을 수는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함께 읽어보자.
서은해(thekillingwhistle)
인터넷에 떠도는 수많은 밈 중에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I’m tired of being myself’이란 자막이 붙은 이미지에 나는 예외 없이 저격당한다. 지겨운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패션은 유용한 도구다. 이런 시도는 매번 실패로 돌아가지만… 내가 마음에 들어서 사 입고 다니는 옷이 나 자신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을 수 있을까. 또 실패구나 하면서 매일 아침 입고 나갈 옷을 고르는 것도, 그러다가 결국 어제 입은 옷을 슬쩍 티 안 나게 돌려 입는 것도 스스로에 대한 지겨움을 배가시킨다. 이것뿐만일까. 하얀 배경에 속된 말로 ‘누끼’ 작업된 상품 사진을 보며 내 체형과 이미지를 대입해 골라 담아야 하는 온라인 쇼핑도 지치는 건 마찬가지다.
혹시나 이런 주제로 글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을까 싶어서, 그리고 30대로 접어들어 스타일 변신을 해보겠다고 올해 큰맘 먹고 르메르 스커트와 빅 백을 샀다. 이렇게 예쁘고 값진 물건들이 막상 내 것이 되고 나니 룩북의 정갈하고 완벽한 에스테틱에 금이 가버린다. 빈티지 쇼핑에서 발견하는 멋들어진 세월의 흔적과는 다르게 내가 입어서 생긴 얼룩들은 얼른 드라이클리닝을 맡겨서 벗겨내야 하는 ‘때’에 불과하다. 해외직구 사이트에서 세일 기간 동안 순식간에 재고가 사라지는 불안감은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패션의 순간은 아름답지만 이 순간을 위해 꼭 거쳐야 하는 쇼핑은 결코 우아하지 않다. 패션이 우리에게 남기는 것은 뭘까? 종종 사치적이거나 소비 지향적이라는 비난은 접어두고 “X은 가도 물건은 남는다”는 속설은 그 자체로 물건인 옷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물건을 사랑할 줄 알아야, 그리고 물건들이 스스로 내 곁을 떠나지 않음에 감사한 마음이 들 때 패션의 진가를 느끼게 된다.
그럼에도 나는 최근에 많은 옷들을 떠나보냈다. 패션과 무관한 삶을 살겠다는 결심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니 더욱 패셔너블해져 버리겠다는 욕심으로 읽히기도 한다. “나다운 게 뭔데?” K드라마의 열혈 시청자이기도 한 나는 옷장에 마저 삼류 드라마 속 욕망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내가 잘 어울려서 입는 옷과 내가 입고 싶은 옷으로 채워져 오랜 시간 두 마음의 끝나지 않는 전쟁터였던 내 옷장은 최근 미니멀한 삶의 열망이 개입하면서 잠정적 휴전 상태가 됐다. 원래도 옷이 많은 편이 절대 아니었지만 사계절 옷을 다 합쳐 100벌 정도밖에 남기지 않고 다 버렸다. 그 흔한 중고거래도 없이 몽땅 의류 재활용 박스에 넣었다. 가짓수를 줄이는 게 목적이다 보니 당장 의식주의 ‘의’를 해결할 수 있도록 내게 어울리는 옷들이 대거 남았다. 몇 달 전만 해도 이렇게 야위진 않았는데… 빈약한 내 옷장을 보다가 마음이 너무 가난해져서 친구네 집으로 노트북을 들고 와 이 글을 쓰고 있다. 이태원에서 효창공원까지의 거리가 생기자 내 빈곤한 옷장도 조금 애틋하게 느껴진다. 옷장을 비우던 그때의 나는 변화에 대한 열정 지수가 높았고, 거기에 많은 옷은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오늘 밤 겨울 바지 두 벌을 결제하고야 말았다. 동시에 버릴 만한 옷 두 벌이 떠올랐다.
내가 패션에 대한 열정이 넘치는 때는 새로운 사건이 일어났을 때다. 나는 매일 사건을 기다린다. 특별할 것도 없는 삶에서 나를 바꿔줄 만한 사건.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날아갈 것 같은 기분 때문에 하루 종일 에너자이저가 된다. 먹고사는 게 먼저라 잊고 있던 때와 달리 이때 무엇을 입을지는 매우 중요하다. 콧방울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힐 때까지 매일 반신욕을 하면서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나는 이런 중요한 사건이 생길 때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몇 안 되는 옷을 머릿속에 진열해두고 뭘 입고 나갈지 고민한다. 그러다가 약속 시간에 늦기도 하지만 평소만큼 과한 걱정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저 이 상황과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을 입은 채로 그 속에 있고 싶다는 마음만이 승리한다. 미장센이 완벽하게 연출된 영화처럼. 물론 이런 ‘사건’은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빔 벤더스는 “도시와 옷에 놓인 공책”(1989)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 파리에서 패션쇼를 준비하는 요지 야마모토를 따라다니며 제목 그대로 도시와 옷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 붙인다. 작년 서울 아트시네마에서 빔 벤더스 회고전이 꽤나 규모 있게 열렸다. 나는 <파리, 텍사스>를 보진 않고 들어서 아는 수준이었고, 친구와 함께 이 영화를 보러 갔다. 온몸을 덮는 검은 코트를 입은 사람들이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덕분에 서울의 구 도심 종로 한복판에서 베를린의 시네마테크에 온 것 같은 기분으로 앉아있었다. 영화가 시작되고 스타일리시한 연출 기법이 조금은 피곤하게 느껴졌지만 좋은 영화로 기억한다. 특히 빔 벤더스가 요지 야마모토의 재킷을 우연히 입어본 순간 어린 시절과 아버지를 회상하게 된 에피소드와, 요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사진책을 열어 보이며 사람과 옷에 대해 말하는 장면이 가장 좋았다. 사람 그 자체가 되어버린 옷에 대한 이야기였다.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지자 검고 큰 코트를 입은 사람들이 다시 눈에 들어왔고 그제야 그들이 요지 야마모토의 팬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영화를 보고 난 며칠간 나도 그 디자이너의 옷을 입어보고 싶었지만 오래 가진 않았다. 그 옷은 나에게 맞지 않을 것 같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입어보지 않은 옷에 대해 말하는 것은 가능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그래도 마음 한편 죄책감이 올라온다. 만약에 그의 쇼룸이나 매장을 지나치게 된다면 들어가서 꼭 그가 만든 옷을 입어보고 싶다. 그리곤 “역시 안 어울려”하고 걸어 나오고 싶다. 사실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건 디자이너가 분필로 몇 번이나 다시 고쳐 쓴 자필 간판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는 것이다.
패션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는 인물의 말을 빌려서 할 수 있는 얘기는 이것밖에 없는 것 같다. 물욕이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가진 내가 패션과 관계 맺는 법은 대체로 아래와 같이 매우 사소하고 유치하고 서투르기만 하다.
오백 년 만에 데이트를 했다. “네가 옷 입는 스타일이 좋아”라는 소리를 들었다. 몇 해 전이었다면 칭찬으로 들렸을 그 말이 불편했다. 그래도 ‘네 말이 틀리진 않았어. 잘 보이고 싶어서 며칠 동안 고른 옷이니까. 그런데 네가 그런 코멘트를 하는 건 내 계획에 없었어.’라고 차마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패션의 묘미는 과정에 들인 공과 노력을 굳이 모르는 척해주는 거 아닌가… 파리에 갈 때마다 베레모를 챙긴다. 친구들과 만나기로 한 골목을 돌기 직전 베레모를 꺼내 써서 전형적인 관광객 룩으로 그들을 골탕 먹이는 게 내 취미다. 그리고는 한국 담배를 한 개비씩 나눠 피고 조용히 베레모를 가방 속에 구겨 넣는다. 플리마켓에서 산 페이크 버버리 체크 원피스를 입을 때마다 영국 래퍼 지모시 라코스테의 ‘Burberry Socks’를 들으며 가사를 음미한다. “Rocking Burberry socks, now I’m feeling hella English” 그런 날은 커피 말고 티를 마셔야 할 것 같다. 디자이너 친구에게 생일날 바지를 선물 받았다. 나에겐 긴 편이라 몸에 대보며 수선을 해야 하나 물어보니 수선을 하면 핏이 망가지니 높은 신발에 밑단 부분을 걸쳐서 입고 다니면 된다는 팁을 들었다. 신박했다.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러는 것 같았다. 밑단이 너덜너덜해진 그 바지를 자랑스럽게도 입고 다닌다. 만든 사람이자 전문가의 말을 잘 듣는 편… 행사장에서 브랜드를 맞춰 입어야 하는지 정말 몰랐다. 협찬 아님을 강조하는 것까지 홍보의 일부로 기능하는 이 사회에서 혼자 너무 순진하게 살았나 보다. 주최 측에서 갈아신으라고 새 신발을 줬지만 내 무지가 창피해서 오랫동안 그 신발을 신지 않고 모셔 놓았다. 올해부터 그 신발을 신고 다닐 수 있게 됐다. 시간이 약이다.. 이런 자질구레한 에피소드들을 끝도 없이 말할 수 있지만 I’m tired of being myself now…
이 에세이를 준비하면서 패션이 너무 싫다고 말하는 쉬운 방법보다 그럼에도 패션과 멀어지고 싶지 않은 욕구에 대해 말하고 싶었는데 쓸데없는 걸 너무 많이 나열해버렸다. 나는 오랫동안 음악과 파티 신에 몸담았다. 스스로 드러내고 싶은 욕구가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는 20대 시기를 화려한 외양과 쿨한 애티튜드로 무장한 파티 속에서 보냈다. 화려한 물질의 세계에서 비물질의 음악에 가치를 부여하고 하나의 주제—혹은 주체로 만드는 것에 미쳐있었던 날들이었다. 쿨한 음악과 패션은 솔메이트의 상성을 가지고 있어서 음악 일을 오래 하다 보니 패션과 관련된 일도 이것저것 많이 하게 됐다. 세상엔 트렌디한 음악도 있고 트렌디한 옷도 있어서 그걸 보여줘야 하는 일에 지쳐버린 게 지금 나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 음악도 패션도 딱히 좋아하지 않았던 무책임한 커리어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언제나 부끄럽다. 계속 살아남고 있다는 것도 이런 글을 부탁받은 것도.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는 오래전 수업에 나왔던 지문 하나가 있다. “IS FOOD FUEL OR PLEASURE?” 수업 밖으로 꺼내오기엔 참으로 단순 무식한 질문이 아닌가. 그게 음식이든 음악이든 패션이든, 올려치기와 내려치기 사이에서 오르락내리락하며 그렇다 할 신조 없이도 삶은 어떻게든 굴러가니까. 내일은 월요일이다. PLEASURE까지는 못 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