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프터 썬”과 “너와 나” 나란히 보기 – 눅눅한 기억에서 물기를 짜는 법

** 본 글은 두 영화에 대한 아주 강력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음을 미리 알립니다.

길처럼 시간을 내달리는 이에겐 기억이 맺히기 마련이기에 우리는 자꾸만 과거에 천착한다. 그리고 내달리는 시간을 응축하는 영화가 과거를 다룬다는 건 당연한 일. 종종 영화는 과거를 지나치게 생생하게 그려서 우리로 하여금 과거가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현전한다고 착각하게 한다. 여기서 다시 떠올려야 하는 것은, 과거는 지나갔고 우리는 ‘기억’에 달라붙는다는 것. 시간은 구름처럼 우리를 잠시 감싸 안았다 지나가고, 남는 건 우리 머리칼에 맺힌 기억뿐. 그래서 기억은 늘 축축하고 눅눅하다.

올해 시작과 끝에서 두 영화는 기억에 달라붙어 있다. 샬롯 웰스(Charlotte Wells)의 “애프터썬(Aftersun)”과 조현철의 “너와 나”가 바로 그것. 영화 시장이 침체한다 어쩐다 하지만, 관객 수가 “애프터썬”은 거의 5만 명에 달했고 “너와 나”도 얼마 전 1만 명을 넘어섰다. 장편 데뷔작이기도 한 두 영화는 불완전하고 불안정하고 구멍이 곳곳에 난 그 기억을 재현한다. 축축하고 또 눅눅하게. 금방이라도 모든 게 뭉게뭉게 흐려질 것만 같은 안개 낀 여름밤처럼.

과거를 헤매는 법

영화가 응축한 여행 너머의 시간을 보아야 한다. 우리는 직감적으로 칼럼이 더 이상 소피 곁에, 세미가 하은 곁에 없다는 걸 안다. 없다는 것을 아는 채로 시작한 영화는 환영이다. 과거가 현재의 영혼이라고 한다면 두 영화는 영혼으로 가득한 얘기다. 더는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살아 숨쉴 때의 이야기.

과거로 밀려 남에도 불구하고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지만 그러면 서글퍼진다. 미래로 한 발짝 나아갈수록 우리는 상실로부터 한 발짝 멀어지고 마니까. 상실하면 빈자리를 채우지 않고 남겨둠으로써 함께할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역설적이지만 우리는 불완전한 기억에 뻥 뚫린 존재를 담아두어야 한다. 두 영화는 그렇게 과거 ─ 사실은 기억 ─ 를 헤맨다. 파편처럼 흐트러져 있고 군데군데가 비어있다. 상실을 목전에 두고 환영처럼 돌아다닌다.

“애프터썬”은 아빠 칼럼과 딸 소피의 여름휴가를 그린다. 다 커버린 소피가 오랜 캠코더를 재생해 불러낸 열한 살 적 여름이다. 중간중간 삽입되는 다 큰 소피의 모습은 어딘가 울적하고 멍하다. 푸른 바다 앞에서도 따뜻함이 감도는 기억의 장면과는 다르게, 영상을 바라보는 현재의 장면은 깊은 푸름에 잠겨 있다.

“너와 나”는 고등학생 세미의 수학여행 하루 전날을 그린다. 다리를 다쳐 병원에 있는 하은을 찾아가 어떻게든 수학여행에 함께 갈 방법을 궁리한다. 그러다 여느 십 대가 그렇듯 마음이 뚝 상해서 서로에게 삐치고 달래고를 반복한다. 화면에는 손으로 막으려 해도 새어 나올 만큼 빛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거의 모든 장면이 내가 너인지, 네가 나인지를 구분할 수도 없을 만큼 번지는 얕은 빛에 잠겨 있다.

칼럼과 소피는 캠코더로 서로를 찍는다. 세미와 하은도 마찬가지다. 영상은 REC 버튼의 빨간 빛이 지속되는 그 순간만큼은 진공청소기처럼 죄다 빨아들이는 힘이 있다. 다시 돌려볼지도 알 수 없는 영상을 찍기 위해 캠코더를 서로의 얼굴에 계속 들이댄다. 부녀는 수영하면서도 잠수를 해 서로를 찍고, 단짝은 한참 줌으로 당겨 서로의 몸을, 목덜미를, 눈을 잡아챈다.

오프 더 레코드. 두 영화에선 카메라를 끄고 나서야 진실한 순간이 벌어진다. 예컨대 “애프터썬”은 소피가 칼럼을 인터뷰하는 장난스러운 푸티지로 시작하는데, 열한 살 소피가 아빠의 열한 살 적을 묻는데, 칼럼은 견뎌내지를 못하는 사람처럼 유약하게 군다. 그리고 칼럼의 답변은 캠코더가 꺼지고 나서야 시작된다. 마치 다시는 상영되지 못할 순간이라는 듯이 꺼진 텔레비전 위로 둘의 나란히 앉은 모습이 비친다.

“너와 나”는 수학여행 자금을 마련하겠답시고 캠코더를 팔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뜻하지 않게 하은이 숨겼던 얘기가 드러난다. 세미는 자신이 몰랐던 새에 있던 남자친구에게 받았다는 캠코더의 역사를 파내려 한다. 몰랐던 과거를 캐내서 내가 너에 대하여 아는 기억으로 편입시키려 든다. 알지 못하는 영역에 대한 불안으로 둘은 싸운다. 서로로부터 달아났다가 서로에 달려가기를 반복한다. 캠코더는 집어치우고 둘이 끝에 마주 섰을 때 또 다신 재생되지 못할 얘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삶과 죽음의 징조 같은 것들

예감이 맞아떨어지는 쾌감은 미래였던 것이 순간에 과거로 확정되는 데서 온다. 시간이 워프를 통과하듯이 주욱 내 손으로 미끄러져 오는 감각이다. 사실 예감은 주로 불쾌하고 께름칙하며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과 관련해 있다. 삶이 죽음에 대한 거대한 예감이라고 하면 어떨까. 상실-죽음-을 목전에 둔 두 영화는 쾌감이라기보다는 꺼림칙한 예감을 곳곳에 흩뿌린다.

“애프터썬”에서 소피는 칼럼이 그리울 땐 같은 하늘 아래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위안을 받는다고 말한다. 그런데 언젠가 같은 하늘 아래마저도 함께 할 수 없게 되는 때가 있다. “너와 나”에서 세미는 ‘왜 죄다 죽는 걸까’ 하고 묻고, 하은은 늙고 병들어서 그렇다고 답한다. 그런데 늙지도 병들지도 않았는데 찾아오는 죽음이 있다. 두 영화에는 삶을 꼭 끌어안고 밀착한 죽음이 산재해 있다.

어느 저녁 소피는 정처 없이 바깥을 떠돈다. 누가 급습해 기어이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불안이 도사린다. 별일이 생기지 않는다. 그때 칼럼은 밖으로 급하게 뛰어나간다. 바다로 달려가 물로 빠져든다. 다시는 뭍으로 나오지 못할 것 같다. 그러나 다음날엔 아무 일도 일어나 있지 않다. 여느 때처럼 평온하다.

세미는 하은이 죽는 꿈을 꾼다. 학교에서 몰래 빠져나와 병원을 찾아간다. 멀쩡하다. 함께 노닥거리다 떠돌이 개와 하은이 사라진다. 세미는 발걸음을 바삐 하며 찾는다. 찾아낸 하은은 멀쩡하다. 그날 밤 하은이 또다시 사라진다. 연락이 닿지 않고 세미가 거리를 떠돌면서 찾아도 보이질 않는다. 다 우연히 마주한다. 별일 없다.

‘무언가가 벌어지고 말 것만 같은’ 느낌이 영화를 웃돈다. 내내 흘러나오는 노스텔지어틱한 노래와 웅웅대는 배경음도 한몫했겠지만, 곳곳에 맥거핀처럼 긴장하고 이완하기를 반복하게 하는 것들이 숨어 있어서다. 잠과 꿈의 반복도 그렇다. 다 큰 소피는 어떤 꿈을 꾸고 번뜩 일어난다. 세미는 하은이 죽는 꿈을 꾸고 번뜩 일어난다. 칼럼은 주로 소피의 부름에 잠에서 깨어나며 등장한다. 하은은 공원에서 까무룩 잠에 들었다가 세미의 인기척에 깬다. 살아 있는 사람이 가장 죽어있는 시간은 잠을 잘 때. 그러한 모습의 병치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흐린다.

너들과 나들

너와 나는 절대 우리가 될 수 없다. 평생 이해할 수 없다. 왜 칼럼이 정신 수련 체조를 해댔는지, 왜 하은은 자꾸만 걸려 오는 전화를 숨겼는지. 작고도 사소한 것들마저 이유를 댈 수가 없다. 그래서 카메라는 가까이 있으면서도 붙잡지 못할 것처럼 인물들의 뒷모습을 잡는다. 이르자면 “애프터썬”의 바닷가에 나란히 앉은 칼럼과 소피의 등. “너와 나”의 머리를 올려 묶어 드러난 세미의 목. 혹은 너무 가까워서 아득하게 느껴지는 클로즈업을 연신 찍어낸다. 흔들리면서 잡히는 눈-코-입-… 신체 그 어딘가. 하나로 모이지를 못하는 몸의 파편. 나에게 전체로서의 너는 너무나 거대하고 큰 덩어리기 때문에 한 움큼씩 떼어 천천히 곱씹을 수밖에 없다.

너와 나의 문제 앞에는, 늘 나의 문제가 있다. 대아적으로 이해하는 것. 세계에 노출되면 될수록 나 자신은 유약해지고 흐려진다. 나도 나를 모르겠고, 그래서 짜증나고 울분이 치민다. 아니면 너무나 울적해진다.

두 영화에서 거울은 심심찮게 등장하는 오브제다. 인물을 포착하는 건 당연한 기능이겠고, 중요한 건 때로 공백으로 비어 있다는 점이다. 소피가 무기력과 나른함에 대해 말할 때 비스듬한 거울이 아이를 비춘다. 그 얘기를 듣는 칼럼은 세면대 앞 거울에 거의 맞닿아 있다시피 반사된다. 거울은 내면을 천착한다. 한편으로 세미와 하은이 자주 가는 공원 정자에서는 세미의 시선이 거울면에 반사돼 하은을 향한다. 세미의 마음은 늘 거울-캠코더-메시지 따위의 매개체를 경유해 보내진다. 이해는 언제까지나 직접적일 수 없다. 거울은 내면으로부터 쏘아진 빛을 외면으로 튕겨낸다.

맞닿을 수 없는 타자의 경계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두 쌍의 사이에는 벽이 있다. 칼럼이 한 쪽 팔의 깁스를 자를 때 카메라는 한가운데서 방에 우두커니 앉아 말하는 소피와 화장실에서 그걸 듣는 칼럼을 한 번에 비춘다. 부녀는 벽을 두고 서로를 보지 못한 채 대화한다. 하은의 집에서 세미는 하은의 휴대전화를 들고 도망하는 장난을 친다. 하은은 방안에서 세미는 거실에서 떠든다. 서로를 보지 않은 채 말장난이 이어진다. 세미가 베란다 창문을 통해 다시 하은을 마주했을 때, 금세 기분이 토라져 자리를 뜬다. 마음의 창을 들여다보면 서로 쉽게 다치니까 그렇다. 너와 나에게는 언제나 넘어갈 벽이, 느슨히 열린 창문이, 덜 잠긴 문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기억과 이해의 불가능성

우리는 지나쳐 간 과거를 다시 기억으로 꺼내오는데, 그것은 대체로 뭉툭하고 물기가 가득하기 때문에 적확하지 않다. 너와 내가 그랬었나 싶을 정도로 흐릿하기도 하다. 더불어 우리는 사실 너와 나이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이해는 늘 불안정하고 부정확하다. 추측으로 가득하다. ‘너는 슬플 거야, 너는 아팠을 거야’가 최선이다. 더 이상의 확언은 불가하다.

그럼 우리는 영영 이렇게 너와 나로 뿔뿔이 흩어져 있어야만 하는 걸까. 너와 나는 여전히 서로의 손을 부여잡는다. 조금의 파편이라도 이해하려는 듯이.

두 영화에서 인물들이 부르고 춤추는 노래들이 보여준다. 소피가 부른 R.E.M의 “Losing My Religion”는 짝사랑에 대한 노래지만, 너는 내가 아니고, 당신 눈 안에는 거리감이 있고. 나는 그 거리를 가려고 한다는 가사는 아빠 칼럼에 대한 이해 가능성과 맞닿는다. 세미가 부른 빅마마의 ‘체념’은 깨져버린 우정 ─ 그리고 사랑 ─ 과 딱 맞아떨어진다.

너의 마음을 얼핏 이해했다면 이젠 나의 마음을 떼어다 건네야 한다. 칼럼이 산 튀르키예식 카펫은 어른이 된 소피의 침실에 깔려 있다. 세미는 몰래 앵무새 인형 고리를 하은의 가방에 걸어둔다. 서로 주고받은 것들은 마음의 편린이고 또 기억의 산물이다. 각자의 집에 묶여두었을 캠코더는 언젠가 케케묵은 먼지와 함께 꺼내어지는 낡은 감정의 실타래다.

끝내 서로 포옹한다. 포옹은 우리가 닿을 수 있는 최대로 서로를 이해하는 일이다. 비록 뒤를 감싼 손이 등 전체를 가리진 못하더라도 모래를 움켜쥐듯 꽉 껴안는 것.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의 “Under Pressure”가 흘러나오는 동안 칼럼과 소피가 서로 감싸 안고 춤추는 장면은 어느 때보다 색온도가 높다. 열병을 앓을 것만큼이나 높다. 세미와 하은이 끝에서 끌어안는 장면은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느껴진다. 빛이 발산하는 낮이 아니라 수렴하는 밤에 만나서 서로의 선명한 테두리를 매만진다. 너와 내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려면 해가 서쪽에서 떠야겠지만, 최소한 해가 동쪽에서 뜨는 매일 아침 서로를 껴안을 수 있다.

상실을 주제로 얘기할 때면 기타노 다케시의 말이 진부하리만큼 끌려 나온다. 2만 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2만 번 일어난 것이라는 말. 하나의 상실은 거대한 공동을 뚫는 일. 깊이도 알 수 없을 만큼 뚫린 구멍은 아무리 그 안에 흙을 집어넣어도 차오르지 않는다. 모른 체 그 위에 천을 덮으면 건너다가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말 테다.

‘너’로 상정되는 수많은 것을 잃은 ‘나’가 있다. 잃어진 너들과 잃은 나들이 있다. 잔디밭에 누워 나른히 누운 시체의 발은 너의 것이자 나의 것이고, 흐리멍덩한 시체의 얼굴은 너의 것일 수도 나의 것일 수도 있다. 죽음은 도처에 도사리는데 누구는 살고 누구는 사라진다. 그럼 슬픔이 남는다. 그러니 기억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그나마 너와 내가 스쳤던 시간을 꺼내 들어 쥐어짜야 한다. 과거가 남긴 이슬 같은 기억을 꼭 쥐어짜면 두 눈에 물기가 어리겠지만 바싹 마른 목을 축일 수 있다.

시간으로 나아가는 영화는 만들어지는 즉시 기억이 재생되기 마련이지만, 상실을 목전에 두고 기억을 기억하는 영화는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눅눅하고 축축한 기억을 담은 영화들. 완전하지를 못하고 조각조각 난 장면들이 이어질 때마다, 혹은 현실의 어느 아픈 지점과 맞닿을 때마다 우리는 과거가 아니라 기억이라는 제3의 세계로 여행한다. 과거-현재-미래의 시간과 기억이라는 외딴 세계의 접합인 셈이다. 이런 영화들을 만나고서야 이해할 수 없음을 이해하고 기억할 수 없음을 기억하게 된다.

“Aftersun” 공식 트레일러
“너와 나” 공식 트레일러


이미지 출처|다음영화, 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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