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영화는 1초에 24장의 연이은 스틸 이미지를 빠르게 재생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어, 또 다른 세상이 진짜로 존재하는 듯 관객을 매료시킨다. 그런데 여기 영상이 아닌 스틸 이미지로만 이루어진 영화가 있다. 바로 크리스 마르케(Chris Marker)가 1962년에 만든 영화 “방파제(La Jetée)”다. 30분이 채 되지 않는 단편 흑백영화로, 세계 종말 이후를 배경으로 하는 포스트 아포갈립스 소재의 SF 장르라고 할 수 있다.
줄거리를 살펴 보면, 우선 시대적으로 ‘제3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라고 가정한다. 주인공은 전쟁 이후 종말한 세상에서 살아남은 생존자 중 한 명인데, 이전까지는 프랑스 파리에서 수감 중인 죄수일 뿐이었다. 한편, 과학자들은 지구의 종말을 번복하기 위해 ‘시간 여행’ 개발에 힘을 쏟는데, 시간 여행 임무를 완수해 낼 적임자로 주인공이 선택받아 직접 과거로 돌아가게 된다(그가 사회에서 별 쓸모없는 죄수라는 점이 한몫 했다). 인물은 시간 여행에서 만난 여자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극의 전개와 별개로 문득 떠오르는 그의 낯선 기억을 번갈아 보여줌으로써 이야기는 결말을 향해 치닫는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를 오직 사진을 이용해서 전개한다는 것이다. 물론 시점을 계속해서 이동시키고 내레이션을 통해 텍스트를 전달하기도 하지만, 분명히 사진을 활용한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사진이라는 매체는 오늘날 영화의 관점으로 보게 되면 그 존재감이 아주 미미해진다. 이것은 영화(또는 영상 매체)가 사진보다 우월한 매체라기보다는 앞서 말했듯이 한 편의 영화는 몇만 장에서 몇십만 장의 이미지와 함께 여러 가지 다른 매체의 싱크를 동시에 맞추기에 작금의 시대가 추구하는 종합예술(Gesamtkunstwerk)에 더 가깝다.
영화가 김밥을 마는 과정이라면, 사진은 김밥의 단면이다. 영화란 언어, 이미지, 소리 등의 속 재료를 잘 준비해서 한 줄의 김밥을 마는 과정이며, 완성된 김밥 자체로 볼 수 있다. 반면 사진은 마치 썰어 놓은 김밥의 단면처럼 ’일상 또는 인생의 단면(Slice of Life)’이다. ‘Tranche de vie(트랑쉬 드 비)’라는 불어에서 온 이 단어는 사진의 단면성을 잘 설명해준다.
오늘날 영상 매체가 대중에게 훨씬 더 종합적으로 다가간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와중에 모든 쇼츠(Shorts)가 사진으로 이루어진 영화를 보고 있자니, 발전된 버전의 스토리보드를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요란할 정도의 연출과 화질에 익숙해진 세대가 과연 지겨워하지 않고 다 볼 수 있을까 걱정한 것이 무색할 만큼, 영화의 본질적인 요소는 모두 들어가 있으니 즐기기에 충분하다.
이 영화의 미니멀하면서도 자극적인 맛에 대해 더 설명하려면, 역시나 감독에 대한 소개를 빼놓을 수 없다. 크리스 마르케는 “방파제”가 아니더라도 “붉은 대기(A Grin Without a Cat)”, “태양 없이(Sans Soleil)” 등 실험적인 여러 수작을 남기며 누벨바그(Nouvelle Vague) 경향이 영화계에 영향을 주는 데 크게 기여했다.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이 회화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면 누벨바그는 영화 역사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크리스 마르케 역시 이 경향에 대표적으로 포함되는 필름 메이커답게, 영화마다 독특한 창의성을 뽐낸다. 같이 일한 사람 중 한 명은 그를 “21세기 인간의 전형(The Prototype of The Twenty-first-Century man)”이라고 표현할 정도였으니. 20세기에 이와 같은 수식어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드물 테다.
영화 속 세상은 아무리 진짜처럼 만들더라도 가상이다(아무리 다큐멘터리 영화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편집되었다’). “방파제”는 완전히 가상 세계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진이라는 언어를 최대한 원형 그대로 빌려 와서 화려한 눈속임 없이도 ‘진짜 같은 가상의(Virtual)’ 세계를 보여준다. 50살이 넘은 영화인 만큼 유튜브에서 바로 찾아볼 수 있으니 직접 감상해 보자.
이미지 출처|The Criterion Channel, The Criterion Collection, Wikipedia, IMDb, Film Affin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