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번째 Comiket에서 마주한 일본의 철도 동호회

아직 작년이라는 말이 어색한 2023년의 끝자락, 12월 30일과 31일, 도쿄 빅사이트에서 세계 최대 규모의 동인 페스티벌 ‘코미케(Comiket)’가 개최됐다. 한 해의 마지막 날 찾은 곳이 오타쿠들의 축제라니, 소위 ‘머글’의 삶을 살아온 필자에게는 다소 어색한 새해맞이가 아닐 수 없다. 애니메이션이라고는 “진격의 거인”급의 메이저 작품들만 골라본 본인에게는 빅사이트에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분야가 뭐가 됐건, 그에 관해서는 놀라운 경지에 이른 이들처럼 보였다. 늦은 오후 입장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얼리 티켓으로 입장해 이미 한 차례 아니 두, 세 차례는 행사장을 돈 듯 양손 가득 굿즈를 움켜쥐고 휴식을 취하는 이들도 수두룩했다.

C103

학생 때만 해도 ‘동인’이 곧 ‘야한 만화’인 줄 알았을 만큼 마이너 애니메이션에는 문외한이었던 필자에게 펼쳐진 드넓은 행사장은 가히 범접할 수 없는 공간이었다. 귀여운 것, 수위가 센 것, 매우 센 것, BL 정도의 분류만 가능했지, 사실 해당 분야에 관한 지식이 전무했던지라 어디를 봐도 비슷해 보였다. 그런 본인에게 단비 같은 존재가 되어준 부스가 있으니 바로 일본의 ‘철덕후’들이 형성한 일련의 철도 부스들. 수많은 판매자가 코스튬을 입고 존재감을 과시하는 와중에도 열도의 ‘철덕후’들의 기운은 멀리서부터 느낄 수 있었다. 기장, 역무원의 코스튬을 한 이들이 저마다의 심지어는 아크릴 판으로 직접 역사 안의 역 사무실을 재현한 이들도 보였다. 물론, 애니메이션보다 지하철이나 기차 같은 보다 일상적 존재에 안도감을 얻은 것도 사실이나, 쉬이 지나쳐버릴 수 있는 존재에 꽂혀 이렇게까지 열과 성을 다하는 그들의 열정과 그를 통한 결과물 역시 놀라웠다. 무엇이 이들을 이곳으로 이끌었을까, 과연 일본 철도의 매력은 무엇인가. 필자가 획득한 소소한 결과물과 함께 이들의 행로를 되짚어 본다.

익히 알려진 바대로 일본의 철도 동호회 역사는 그 뿌리가 매우 깊고 굵다. 1900년대부터 철도만을 피사체로 삼았던 사진작가들이 존재했으니 그간 사진은 물론, 차량 연구, 철도 음향, 미니어처, 게임, 관련 물품 수집 등 다양한 방면에서 문화를 형성하며 일본 내 3대 오타쿠 세력 중 하나로 성장한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물론 이들이 일본 내에서 열차 지연시키거나 역 직원과 마찰을 빚는 등의 여러 차례 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지만, 이번에는 그들이 덕질로 일궈낸 결과물에 집중해 보기로 하자.

‘JR各社の ゴミ箱いろいろ’ by しいたけ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기차에 대한 관심이 지대한만큼, 일본국유철도 JR선에 대한 관심 역시 뜨겁다. 이번 코미케에서 필자의 눈길을 끌었던 진(Zine) 역시 그 결과물 중 하나로, 이름하여 ‘JR各社の ゴミ箱いろいろ’, 직역하면 ‘JR 각사의 다양한 쓰레기통’. 일본 여행을 다녀온 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발을 디뎠을 JR선이지만 쓰레기통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시선이다. 도쿄의 지하철을 경험하며 손에 쥐게 되는 종이 티켓이나 플랫폼의 역무원들 그리고 스크린 도어 없이 훤하게 관찰할 수 있는 지하철의 모습에는 분명 여러 번 눈길을 던졌지만, 확실히 쓰레기통은 기억에 없다. ‘철도 픽토리얼(鉄道ピクトリアル)’, ‘철도팬(鉄道ファン)’, ‘철도 저널(鉄道ジャーナル)’ 등 일본에는 철도 마니아들을 위한 숱한 철도 전문 잡지가 존재하지만, 역사 내 쓰레기통에 집중한 사실은 가히 엽기적이면서 동시에 경이롭다.

자신을 ‘표고버섯(しいたけ)’이라고 소개하는 점만 놓고 보더라도 이 진을 만든 작자가 얼마나 괴짜 같은 인간인지 짐작이 간다. 10년 이상 쓰레기통을 찍어오며 이제는 그 분류가 가능해졌다는 그의 쓰레기통 비교, 분석하는 방식은 더욱 놀랍다. 자폐증 환자의 치료 방법 중 하나인 ‘시각적 구조화’의 세 가지 요인을 쓰레기통의 분류에 적용한 것인데, 구체적으로는 빈 캔, 페트병을 구체적인 일러스트 등을 이용해 분별하는 ‘시각적 지시’, 쓰레기의 정보를 최소화하고 깔끔하고 알기 쉽게 정보를 제공하는 ‘시각적 정리 통합’, 투입구의 색을 달리해 명확하게 시선을 유도하는 ‘시각적 명료화’의 개념이 사용됐다.

해당 진은 홋카이도 JR 역사의 쓰레기통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투명판을 쓰레기통 전면에 부착하고 파란색 일러스트로 분리수거를 유도하고 있지만 해당 구조가 시인성이 떨어질뿐더러, 역사 조명을 반사하는 스테인리스와의 궁합도 좋지 않다는 비판의 내용이 첫 페이지부터 등장한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동일본으로 넘어가면 다채로운 쓰레기통이 등장하는데, 표고버섯 군(?)이 쓰레기통 사진 아카이빙을 시작하게 만든 2007년 센다이 역의 간단명료한 쓰레기통이 처음으로 모습을 보인다. 둥근 투입구에 색을 칠해 강조한 점과 한눈에 알기 쉬운 분리수거 표지가 진 제작자의 마음을 동하게 한 것. 그다음으로 등장하는 속 보이는 쓰레기통과 이에 일러스트 표지가 더해진 쓰레기통 등 다양한 변주도 눈여겨 볼만하다. 표고버섯 군은 뒤이어 동해, 서일본을 거쳐 시코쿠로 여행을 이어간다. “호빵맨”의 원작자 야나세 다카시(Yanase Takashi)가 태어난 시코쿠에는 쓰레기통도 그 테마를 함께한다. 초록, 주황 컬러와 매치되는 호빵맨과 세균맨이 역의 생동감을 더하는 모습.

표고버섯 군은 책을 마치며 해당 프로젝트는 단순 기록용 사진을 모아둔 것이기에 본격적인 쓰레기통 사진이 없음을 아쉬워했다. 또한 향후 다양한 앵글에서 사진을 찍을 것과 더 나아가 쓰레기통 제조 업체에 대한 공부 역시 약속했다. 편의점에서 프린트해 엮어 만들었기에 편집 등의 기술 역시 보완할 것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 진을 펼쳐본 이라면 그 무엇이 어찌 됐건 표고버섯 군의 뜨거운 열정만은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을 테다. 무언가를 좋아할 수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귀한 일이다.

国電101系 MT46 SOUND

부끄럽지만 이 CD를 집어 들게 된 건 순전히 디자인 덕이었다. 옛 기차의 이미지가 올드한 폰트와 함께 CD 위로 새겨졌고 옅은 컬러감의 투명 케이스가 이를 감쌌다. 실은 파란색이 아닌 노란색 케이스를 가지려 했지만 일본어가 짧은 탓에 소통 실패로 파란 케이스를 얻게 됐다. 본인은 철덕후가 아닌지라 순전히 시각의 노예로 전락했지만, 도쿄에서 돌아와 플레이어에 이 CD를 넣고서야 비로소 그 진가를 느낄 수 있었다.

옛 기차의 출발 직전의 분주한 잡음, 나직이 들려오는 일본어 안내 방송, 마침내 출발을 알리는 경적 소리, 이윽고 반복적이고 안정적으로 찾아온 철길을 지나는 바퀴 소리. 필자의 손에 들어온 CD에는 ‘国電101系 MT46 SOUND’ 그러니까 ‘MT46’이라는 모터(전동기)를 사용하는 일본국유철도 101계 전동차의 소리가 담겼다. CD 표기를 살펴보면 도쿄에서 나카노로 향하는 중앙쾌속선의 기차음을 포함해 총 6개의 운행 구간 음향이 담긴 걸 파악할 수 있다.

가만히 열차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심장박동 같은 반복의 힘을 느낄 수 있다. 물론 이는 ‘기차’라는 단어에 함축된 여행, 출발 같은 노스탤지어틱한 이미지의 결합 탓일 수도 있다. 어찌 됐건 여기서 되짚어 봐야 할 사실은 철도 마니아들이 이 소리에 집중하는 데에는 충분히 합리적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마니아가 대중을 설득할 수 있는 바람직한 방법이 있다면 이 또한 그중 꽤나 설득력 있는 편일 것. 이른 새벽 기차역으로 몸을 이끌고 간 그들의 노고 덕에 방 안에서 편히 M101의 잡음을 감상할 수 있게 됐으니 말이다.

좀 전에 언급했듯 무언가를 순수히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귀하고 숭고하기까지 하다. 물론, 열도 내에서 ‘철덕’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만은 않은 것은 사실이나, 코미케에서 마주한 이들의 얼굴에서 만큼은 순수한 즐거움이 한껏 느껴졌다. 그렇기에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깊고 깊은 애니메이션 마니아가 아닐지라도 코미케에 방문할 이유 혹은 철도에 관심을 가질 이유는 충분한 듯싶다. 새해의 첫차를 카메라에 담기 위해 뛰는 그들처럼 지금 이맘때 뜨거운 열정에 불을 지피기 아주 좋은 본보기가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이미지 출처 | Kyodo News, JR Times, All About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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