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 피드의 주류가 된 자들이 있다. 이들은 주로 밈(meme) 형식의 이미지를 만들어 예술, 철학, 혹은 몇몇 마이너한 하위문화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는데, 그에 대한 꽤나 지적인 풍자와 조롱이 이루어진다. 이들을 접한 것이 필자만은 아닐 터. 국내에서는 ‘컨아밈’을 필두로 한 풍자형 밈의 소비가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는 가운데, ‘Freeze magazine’, ‘Brad Troemel’ 등 아트 관련 해외 밈 계정은 이미 영향력 있는 계정의 자리를 꿰찬 지 오래. 유사한 현상이 국내 예술 및 문화 관련 소셜 미디어 계정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이 방대한 흐름을 한데 묶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편리한 이해를 위해 필자는 그들의 밈을 ‘문화 풍자형 밈’이라는 포괄적 용어로 특정 지은 후 글을 이어 나가고자 한다.
그들의 주된 풍자 대상은 일반 대중과 스스로 거리두기를 원하거나 자연히 거리 두게 된 폐쇄적인 문화 그리고 그 속에 팽배한 아이러니다. 분야 자체의 가상성으로 일상과는 거리가 멀거나, 게이트 키퍼의 존재가 뚜렷한 그것의 진입 장벽은 견고하기만 하다(그리고 여기서부터 그들의 공격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 장벽을 넘어섰을 때, 그들의 예리한 풍자는 더욱 치명적으로 다가온다. 재밌는 점은 그 풍자의 형태가 결코 교훈적이지 않다는 것인데, 그들은 풍자 대상에 대한 당위적 판단을 바탕으로 보다 나은 방향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웃음을 자아내는 것에서 그 역할을 다한다.
새로운 문예 창작물로서 밈이 가지는 예술적 가능성에 관한 논의가 활발한 지금, 필자는 그 고상하면서도 발칙한 유머를 오늘날의 문예적 성취로 간주하고자 한다. 이어서 현대 풍자문화를 주도한 한 집단을 통해 그것이 희극 문예로서 가지는 특수성을 짐작해 보고자 한다.
개괄은 모두 밝힌바. 본격적으로 그들의 유희 정신을 빼다 닮은, 어쩌면 그 익살의 전신인 궁극의 문예창작집단, ‘신프랑크푸르트학파’를 알아보자.
신프랑크푸르트학파란
“순록의 가장 날카로운 비평가들. 자신도 한때는 순록이었다!”
– Die Neue Frankfurter Schule
신프랑크푸르트학파(Die Neue Frankfurter Schule, 이하 NFS)는 독일 기반의 풍자작가그룹으로, 20세기 후반 독일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온 문제아적 집단이다. 3명의 화가와 5명의 작가(순록)로 구성된 이 집단은 시, 소설은 물론 만화, 연극, 영화, TV프로그램 등 미디어의 제약을 두지 않고 다양한 형식의 창작물을 내보였다. 특히 정치풍자잡지 ‘파르동(Pardon)과 명실상부 NFS의 대표작 ‘티타닉(Titanic)은 현대 희극문화의 전통을 만들어 나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먼저 ‘신프랑크푸르트학파’라는 독특한 이름에 관해 말해보고자 한다. 희극과 풍자에 대한 공동의 이해를 바탕으로 형성된 느슨한 연합이었던 초기 NFS는 그들의 두 번째 잡지 ‘티타닉’이 창간된 지 2년이 되던 해, 그들 스스로를 ‘신프랑크푸르트학파’라 명명한다. 독일의 비판이론그룹 ‘프랑크푸르트학파’와의 연관성을 점쳐볼 수 있겠으나, 놀랍게도 두 집단의 직접적 연관성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내세운 유일한 이유는 자신들의 활동 근거지가 프랑크푸르트라는 것. 당시 철학-사회이론 담론의 중심이던 프랑크푸르트학파를 향한 조롱 섞인 계승으로, 신격화되던 대상을 끌어내려웃음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그 명명 과정에서 알 수 있듯 그들은 정전에 속하는 작품과 작가, 학파, 철학가들의 사상을 비틀고 패러디하길 즐기는데, 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그들의 과거 행보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파르동’의 출범
NFS의 역사는 전후 문화의 격동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68혁명 이전, 보수적이고 과거 회귀적인 문화 환경에 대한 저항적 움직임의 동태가 여러 문화권에서 발견된다. 60년대 초 NFS(당시에는 NFS란 이름 없이 활동했다)의 첫 저널 ‘파르동’의 창간은 그 움직임의 일환으로, 해당 저서는 50년대 아데나우어 정권하에 유지된 서독의 보수적 문화에 신랄한 비판을 감행한다. 좌파적 저널리즘과 희극성을 골고루 겸비한 ‘파르동’은 비판적 풍자와 유희적 텍스트를 바탕으로 당시 학생운동의 정신적 선구자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발매 때마다 뜨거운 반응을 일으키며 3호는 11만 부, 혁명운동이 정점에 다다른 1969년에는 32만 부 발간에 도달한다. 그렇게 ‘독일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보이그룹’이 탄생하게 된다.
하지만 ‘파르동’은 68혁명의 과열되는 열기와 함께 희극성보단 비판과 계몽을 중심으로 한 훈계조의 텍스트가 주를 이루게 된다. 기존의 정체성을 잃어가던 ‘파르동’은 결국 외면받게 되고, ‘파르동’의 출판을 지휘한 출판업자 한스 A. 니켈의 독단적 운영체계에 반기를 든 NFS는 출판사를 떠나 새로운 곳에 둥지를 트게 된다.
궁극의 풍자잡지, ‘티타닉’
편집권을 확보하지 못한 채 침몰하는 ‘파르동’을 지켜봐야만 했던 NFS는 이를 침몰하는 타이타닉호의 비극적 상황으로 비유하며 새로운 잡지의 이름을 ‘티타닉’으로 명한다. 그렇게 1979년, “가장 멍청하고 무능한 자들의 총책임자가 된다”라는 초대 편집장의 선언과 함께 탄생한 해당 잡지는 ‘독일 역사상 가장 많이 금지된 잡지’라는 악명을 얻게 된다.
‘파르동’을 반면교사 삼아 외부적 압력에서 격리된 자유로운 창작 환경을 조성한 NFS는 본격적으로 그들의 유희적 가치관을 내보이기 시작한다. ‘파르동’과 달리 비판이나 계몽의 의도를 배제한 채 ‘그저 유희하는 것’으로 일관하는 ‘티타닉’은 정치계, 종교계, 경제계, 학계와 공적, 사적 인물을 가리지 않고 치기 어린 도발을 감행한다.
잡지에 기고되는 창작물은 대상에 대한 기교적 비난이라 할 수 있는데, 풍자와 희극문화를 고급문화 다루듯 창작하고 비평하는 그들의 행태는 가히 ‘비판이론의 점잖지 못한 누이’라는 별칭에 어울린다. 특히, 파격적인 표지사진과 문구는 사회적 통념과 금기의 선을 넘나들며 자주 사회적, 법적 논란거리가 되기도 했다.
또, 그들의 풍자는 그 형식과 내용에 있어 지면상의 텍스트, 시각 매체의 한계에서 벗어나있다. 공인, 기관을 상대로 발칙한 장난을 벌인 후 당시의 상황을 기록물로 공개하거나, 창당을 통해 실제 정치에 개입하여 기괴한 행동을 하는 등 하나의 해프닝적 행위로써 현실개입적 퍼포먼스를 이어나가며 풍자 문학의 범주를 확장하고 있다.
새로운 희극 개념의 출현
새로운 시대의 출현에 걸맞은 그들의 전복적 작업은 결국 ‘유희원칙(Lustprinzip)’하에 행해진다. “외설이냐, 예술이냐”하는 케케묵은 질문은 그들에게 무의미하다. 더 이상의 비판이 불가능한 시대에서 그들은 의미를 추구하지 않고 그저 즐기기를 택했다. 유토피아에 대한 갈망 대신 그것의 상실을 통한 윤리적 해방을 만끽한다. 그 자유로운 정신의 실행으로서 그들이 내세운 주요한 희극 개념은 다음과 같다.
‘낙차’와 ‘난센스’
NFS의 대표이론가 로베르트 게른하르트(Robert Gernhardt)는 NFS의 풍자 작가이기 이전, 자신의 희극 작품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을 만들며 비평활동을 병행했다. NFS의 고유한 개념 정의를 이해하기 위해선 그의 희극 이론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낙차(Fallhöhe)
‘낙차’ 개념은 게른하르트의 희극성 이론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요소다. 전통적인 문학용어인 낙차는 비극 장르에서 주인공의 신분이 높을수록 그 몰락으로 인한 낙차가 커 비극적 효과가 극대화된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게른하르트는 이를 희극이론으로 끌고 온 것이다. 다만, 조금 더 광범위한 의미로 이를 사용하는데, 낙차가 신분의 차이뿐만 아니라 가능한 모든 영역에서의 변화나 의미이동에서 발생할 수 있다고 보았다. 기존에 존중되고 보전되는 가치나 규범을 무너뜨리는 것은 그가 즐겨 사용하던 풍자 방식이다. 유명 학자의 사상과 실생활의 괴리를 폭로하고, 형이상학적 개념의 비현실성을 일차원적으로 비난하며, 독일의 정치계 혹은 독일 문화 자체를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등 영역의 한계 없이 마구 조롱한다. 때때로 전통적인 시의 형식을 차용, 패러디하여 ‘고상한 언어로부터 일상의 언어 속으로 나자빠지는’, ‘동체 착륙’의 경험을 제공하기도 한다. 여기서 독특한 점은 그의 텍스트는 독자의 기대를 예견하고 이에 부응, 대립하면서 작가-독자 간 공동의 대화적 유희경험을 유도한다는 것. 이러한 낙차 개념은 전통적 희극이론에서 사용되는 ‘불일치(Inkongruenz)’나 ‘대조(Kontrast)’개념으로 이해되기도 하는데, 텍스트 간 구조에 초점을 두기보단 독자-작가 간의 관계를 강조하는 대화적 텍스트의 구성 전략이라는 점에서 그와 차별되는 고유성을 지니고 있다.
난센스(Nonsense)
‘난센스’는 가장 큰 낙차를 발생시키는 NFS의 고유 장르이다. 난센스 작가이자 연구자 피터 쾰러는 NFS의 풍자는 엄밀히 난센스로 불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난센스는 희극적이고, 경향성을 띠지 않으며, 텍스트 내적인 구성을 이루고 있고, 경험적 사실, 논리적 법칙(혹은 규범) 또는 언어 규칙을 벗어난다.”
난센스는 그림, 텍스트 간 연결고리를 해체하고 명확한 비판 대상 없이 작품 내적인 맥락마저 무효화한다. 단적인 예로 게른하르트의 대표작 ‘에발트기’를 보면, 성경의 언어가 현대에 옮겨지면서 본래의 의미가 사라져버려 하나의 언어유희적 대상으로 전락하게되는 장면이 존재한다. 게른하르트의 4컷 만화 “슈누피의 모험” 역시 난센스적 특성이 강한데, 초반 3컷에서 주인공 슈누피가 겪는 문제들은 점점 고조되는 듯 하지만 마지막 4컷에서 상대역은 한결같이 그저 “Oh!”를 외치며 모든 기대와 의미부여를 무마시킨다(사실 초반 3컷에서의 대화 역시 별 맥락이 없다). 결국 유희성이 유일한 목표인 것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그들의 행동 강령인 유희원칙이 탄생한다. 60년대의 계몽적 풍자에서 벗어나 오로지 희극성만을 추구한다는 이 원칙은 그렇게 난센스문학의 기틀이자 원동력이 된다.
사실 이 새로운 유형의 유희적 작업에 대한 회의적 시선 역시 존재한다. 전통적인 풍자와는 달리 세계와의 연관 없이 발생하는 무의미한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것. 하지만 NFS는 난센스를 “체계적으로 행해지는 의미의 거부”라 표현한다.
게른하르트는 희극적 표현수단 및 방식에 미치는 시대적인 영향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이를 “희극성 각인(Komikprägung)”이라 칭하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시대의 변화에 따라 기존 희극 장치의 기능이 무효화되어 더 이상 웃음을 가져다주지 못하게 되곤 하는데, 결국 시대에 따라 요구되는 희극적 형식이 필요하게 된다. 이때 게른하르트는 이 시대에 어울리는 희극적 형식으로 난센스를 택한 것이다. 난센스, 그리고 유희원칙의 탄생과 실행은 결국 교정해야 할 단 하나의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탈근대적 시대의식의 체계적 반영이자 세계에 대한 여러 해석중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이전의 계몽적 풍자와 비교했을 때 난센스적 풍자는 오히려 더욱 성숙하고 지적인 독자층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 독특하다. 티타닉 초기,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텍스트는 자주 조롱의 대상으로 활용되었는데, 그들의 텍스트에 대한 이해를 전제한 불친절한 유머에서 이러한 성향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대상에 대한 배경지식 없이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것이 난센스지만, NFS가 의도한 낙차의 크기엔 미치지 못할 것이다. 이처럼 NFS는 은연중에 자신의 유희적 풍자가 일종의 고상한 놀이가 되도록 하는데, 그 풍자의 행태나 내용이 결코 고상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에서 또다시 낙차가 발생하게 된다. 더하여, 그들은 독자를 계몽과 교정의 대상으로 삼거나, 독자가 원하는 단편적 진실을 제공하지 않는다. 되려 유희적 경험을 통한 자기 성찰의 여지를 제공한다. 이처럼 해체주의적이고 허무적 코드가 기저에 깔림과 동시에 계몽적 가능성을 내포하는 양가적 성격은 현대 문화 텍스트의 특징적 양상을 여실히 보여준다.
“뒤늦게 알게된 친자관계”
앞서 소개한 개념들을 읽다 보면 자연히 묘한 기시감이 들 텐데, 아마도 그들이 제시한 희극성이 이미 우리 주변 곳곳에 녹아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NFS와 오늘날의 풍자형 창작물이 갖는 친자관계는 의심할 바가 없다. 필자는 그중 ‘문화 풍자형 밈’에 초점을 두어, 그것의 희극성이 가지는 특징을 밝혀보고자 한다.
문화 풍자형 밈의 주된 풍자 대상은 고유의 지식 체계와 사회-문화적 권위로 형성된 문화 일반, 그리고 그 속의 여러 현상, 개념 따위라 할 수 있겠다. 정통적 고급문화를 떠올릴 수 있겠으나 예술, 정치, 철학, 스포츠 등등 그 영역을 막론하고 일반 대중의 접근을 꺼리는 폐쇄적 성향을 지닌 문화는 모두 풍자의 대상이 된다. 문화풍자형 밈은 그것들 속에 숨어있는 모순, 혹은 그 폐쇄적 성향 자체를 이미지와 텍스트 속 메세지, 혹은 그 형식 자체로 드러냄으로써 조롱한다.
이 과정에서 그들의 신비성은 급격히 세속화된다. 취향과 문화적 자본력이 계급의 지표로서 평가받고 있는 요즘, 이와 같은 낙차는 굉장한 해방적 즐거움을 제공한다. 다가가기 힘든 대상의 신비감을 지우고 격하시켰을 때의 통쾌함과 소소한 우월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더하여 밈의 생산자는 팔로워의 피드백을 바탕으로 보다 강력한 낙차를 만들어내는 대상과 그 조롱 방식을 고안해 낼 것이다. 소셜 미디어가 지닌 상호소통적 특성은 대화적 작업 방식에 커다란 이점을 가져다준다.
또 그 풍자의 양상이 난센스의 기틀이 되는 유희원칙에 부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밈의 제작자들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계몽적 목적 없이 그저 웃기기 위한 조롱과 말장난으로 일관하는 태도는 마치 유희원칙을 그대로 계승하는 듯하다. 때때로 학술적 용어와 비일상적 개념을 과도하게 사용하여 현학적인 뉘앙스를 형성하고, 스스로를 풍자의 대상과 동일시하기도 하는데, 이 역시 당위적 비판을 통해 더 나은 방향을 제시하기보다는 그저 유희적 놀잇감을 제공하겠다는 유희정신이 구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마구잡이로 풍자하는 자신의 행태마저 조롱거리로 삼으며 메타-코믹적 영역까지 진입하는 몇몇 밈에서는 찰나의 난센스적 섬광이 발견되기도 한다.
밈을 즐기며 얻게 되는 묘한 고양감은 또 어떠한가. NFS의 유머는 어느 정도의 배경지식을 필요로 하며, 이를 충족하는 독자들은 단순한 즐거움 이상의 무언가를 느꼈을 것이다. 풍자 대상의 낙차가 발생할 때, 독자의 상대적인 위치 상승 역시 함께 이뤄진다. 문화 풍자형 밈 역시 마찬가지이다. 일정 수준의 배경지식을 필요로 하는 그들의 밈은 독자들의 수준을 테스트하는 듯하다. 그리고 그 테스트를 통과한 후 느끼게 되는 감정은 낙차에서의 통쾌함과는 다른 상승감을 선사한다. 같은 문제를 함께 공유하고 반응하는 듯한 동질감과 그것을 자신의 일상적 영역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잠시나마 그 문화적 영역에 속하게 되는 듯한 일말의 소속감은 문화 풍자형 밈의 또 다른 백미이다. 이러한 감정 역시 거부감 없이 향유할 줄 알아야 NFS가 바라던 지성을 겸비한 유희적 독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문화풍자형 밈과 NFS의 난센스적 풍자는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지만, 완전한 유희원칙의 구현으로서 문화풍자형 밈이 지니는 한계 또한 뚜렷하다. 풍자의 기관이자 생산자로서 밈 제작자는 자연스레 사회적 명성과 인지도를 얻게 되는데, 그 결과 고유의 유희정신이 퇴색되곤 한다. 팔로워 수가 많은 계정은 결국 계몽과 교정의 장으로 기능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 우려의 목소리는 NFS 주변에서도 나오고 있다. 자기비판과 패러디가 가능한 독자적 풍자기관으로 자리 잡은 ‘티타닉’은 결국 스스로 절대적 기관의 자리에 오르면서 본래의 순수성을 잃었다는 것. 물론, 주관적 판단이 개입된 훈계조의 풍자 역시 하나의 문화적 산물로서 가치 있고 흥미롭지만, 생산과 제공의 기관이 사회적 영향력을 지니게 되는 순간 그 특유의 자유로움과 유쾌함은 조금씩 상실되기 마련이다. 실제로 많은 밈 제작가들이 SNS에서의 유명세를 바탕으로 자신이 추구하는 문화적 이상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이 얼마나 타당한 대안이든, 웃음의 밀도가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설명이 필요한 농담은 재미가 떨어진다는 암묵적 원칙에서 알 수 있듯, 이성적 판단 너머 본능의 영역인 웃음에 대한 설명적 접근 자체에 반감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NFS가 말한 바, 희극은 결국 해체와 조립의 과정으로 새롭게 재개될 수 있는 하나의 기술적 장치로, 그것이 완성된 이후에 행해지는 소급적 해석은 희극의 결과(웃음의 여부)를 변화시키지 않는다. 스스로에 대한 학술적 분석을 자처한 NFS와 같이 분석의 두려움은 잠시 내려두고 그 웃음의 심층을 한번 들여다보자. 이 역시 새로운 유희의 방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더하여, NFS는 오늘날까지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필자의 능력 부족으로 그들의 세부적인 작업에 대한 소개는 생략하였기에, 구체적인 활동이 궁금한 이들은 ‘Titanic Magazin’ 웹사이트를 방문해 보는 것을 추천한다.
이미지 출처 | weltbild, KOMM-Bildungsbereich, @freeze_magazine, @bradtroemel, @virgin_olgiati, @contemporary_arts_meme, @gaepagnepapi, @carl.dickins